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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이, 인당수 그리고 희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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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이, 인당수 그리고 희생자들

김민웅의 세상읽기 <31>

심청이가 맹인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을 마련하기 위해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지는 이야기는 흔히들 “효(孝)”를 강조하는 유교적 설화로 파악되곤 합니다. 부모를 위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희생시키는 행동에 대한 더할 나위없는 찬사가 그 효의 개념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희생은 허무하게 끝나지 않고 심청이의 회생(回生)과 예기치 않은 신분상승, 그리고 아버지의 눈뜸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니 이보다 더 괜찮은 손익계산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심청이의 횡재는 어디까지나 현실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소설적 환상에 불과한 것이고, 민중들에게 보다 실감 있게 다가온 것은 아마도 심청이에게 희생을 요구한 상황 그 자체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우선, 다리에서 실족(失足)한 아버지 심 봉사를 건져준 개법당의 화주승이 넌지시 말한 공양미 삼백 석은 상대의 처지가 뻔한데도 불구하고 갈취의 의도가 은근히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심 봉사가 가장 절박하게 바라고 있는 눈을 뜨는 일을 미끼로 내걸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형편을 보아 만류하기보다는 일단 시주하기로 했으면 천하에 없어도 지켜야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도록 내버려 둔 것은 속세를 벗어난 수도자(修道者)의 자세로서는 고약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벌어들일 젯밥에 더 눈이 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아버지 심 봉사는 딸 심청이의 고난은 헤아리지도 않고 덜컥 공양미 삼백 석을 장담한 것만이 아니라, 천하고 비열한 뺑덕어멈과 잡스럽게 놀아납니다. 심청이의 아버지는 효를 받을 만한 권위나 품격과는 거리가 멀고 자신의 이기적 욕망에 더 몰두하고 있는 인간형임을 심청전의 원판본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작 그는 자신의 탐욕에 눈뜨지 못한 것입니다.

처녀 심청이를 인당수에 제물로 바쳐야만 뱃길이 순탄해질 것이라고 여긴 자들 역시 자신들의 진로를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구조를 유지하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당수의 급물살”은 현실의 위기를 말하고 그 위기 돌파용 희생양을 찾는 정치사회적 요구가 여기에 드러납니다.

빈곤과 신분적 제약, 희생적 효를 강조하는 봉건적 습속과 종교적 굴레, 그에 더하여 성차별과 때로 위기돌파용 희생제물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심청이는 몇 개인지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종류의 고난에 시달린 이 땅의 서민들, 민중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그 고난의 사슬을 푸는 것은 용왕의 배려에 의한 것으로 정리되지만, 현실에서 용왕이란 없는 법이므로 그 숙제는 고스란히 우리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2004년이 지나가면서 돌아보면 이 사회는 적지 않은 희생자를 낳았고, 또 그 희생의 구조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바가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을 위한 정권으로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어쩐지 자꾸만 서민의 자리와는 거리가 멀어져만 가는 듯 합니다.

그렇다고 그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배제하라는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고난을 가중시키고 이들을 희생시키는 여러 가지 현실적 조건들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한 목소리는 잦아들고 있습니다. 이라크 파병 문제와 직결되었던 김선일씨의 희생도 망각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노숙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도 이 나라 지도층에게는 그다지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봅니다.

이 시대의 심청이는 공양미 삼백석이 아니라 제 입에 들어갈 쌀 한 석이 아예 없어서 절망 끝에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심청이를 삼킨 바다는 잔잔해지기는커녕, 더욱 거센 파도로 용틀임하고 있다면 이 수수께기를 누가 풀어야할까요?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김민웅 박사가 강의하는 ☞ 투기자본경제교실 "투기자본에 저항하라"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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