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절 야학운동을 했을 때 어떤 마음으로 그 운동들을 했는지 궁금했다. "1971년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에 다닐 때 수유리 캠퍼스에 지역사회학교를 만들어 84번 동아운수 버스 안내양들을 가르쳤는데, 이때 파울로 프레이리가 경험했던 제도교육의 모순을 실제로 경험했다. 어느 날 그 회사의 전무가 야학 선생들에게 저녁을 사준다고 했다. 그때 갈비라는 걸 처음 먹었는데, 대화를 하던 중에 "선생님들이 잘 가르쳐주니 우리 아이들이 참 착해져서 삥땅도 안 하고 말도 잘 듣고 세차도 잘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속에서 무언가 확 올라와서 얼른 뛰쳐나와 먹었던 걸 다 토했다. 내가 저들을 위해 가르친 것이 결국은 기업주에 길드는 교육을 했구나 하는 생각에 몹시 괴로웠다."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은 이후 경제 세력의 공세에 속수무책이었던 이유, 그로 인해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에 무능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민주세력은 권력을 잡기는 잡았는데 그것을 수행할 사람이 없었다. 국민의 정부도 그 부분이 안타까웠다. 민주세력이 집권 경험이 없으니까 민주화운동에서는 챔피언들이었지만 국가, 사회, 경제는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의 경우 삼성의 국정운영보고서에 의존했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이 노무현 정부의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노무현 정부 정책이 좌우로 갈팡질팡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 멍에가 되고 있는 한미FTA, 제주 해군항기지 건설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더불어 민주진보진영의 정치인들이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유훈 정치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란 질문에 "훌륭한 정치인들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개인 우상화나 하나의 정치적 정파가 되는 것은 극복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두 분은 국민과 함께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을 신뢰했고, 현장 중심의 행정과 국민보다 반걸음 앞서 가는 정책을 추진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탈권위적으로 국민과 소통했다. 이런 정신과 자세를 이어가야 한다. 두 분의 민주평화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국민을 위한 헌신의 정치를 하지 않으면서 두 분의 이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거명하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라고 이야기한다.
그에게 자유란 무엇이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신앙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것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웃을 사랑할 자유이며, 또한 그들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투쟁할 사회정의적 자유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님은 '형제를 위해서 네가 목숨을 버리면 형제도 살고 너도 살지만, 네가 살기 위해 형제를 버리면 너도 죽는다'고 했다. 나 개인의 자유만을 생각해서 형제자매를 버리면 자유인이 아닌 노예가 된다. 형제자매의 자유를 위해 살면 너도나도 진정으로 자유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자신이 가르친 버스 안내양들이 배움을 통해 사회구조적 문제를 깨고 일어나는 자유인이 되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착취하는 기업주의 충실한 노예가 되어가는 모습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환멸을 느끼며, 그 속의 열정을 게워내었던, 그래서 그들이 진정 자유인이 되게 하기 위해 기업주 앞에 거룩한 분노를 토해내었던 이유가 말이다. 자유란 참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다.
다리에 장애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장애가 관장님의 삶에 장애가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자칫 장애에 마음과 생각이 갇힐 수 있는데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동기가 있다면?
6.25 전쟁통인 5살 때 피난을 가다가 다리를 다쳤다. 엉치뼈에 금이 가고 탈골된 것인데, 군 야전병원에서 허리를 다쳤다고 오진하는 바람에 몸 전체를 깁스해서 탈골된 다리가 굳어버렸다. 잘못 굳어진 다리로 걸으려니 무척 아팠는데, 똑바로 걷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해서 억지로 걷다 보니 뼈끼리 부딪쳐서 염증이 생겨 곪아 터졌다. 다리가 악화되자 부모님과 포항에서 서울로 이사 와서 세브란스병원과 서울대병원에 1년 정도 입원했는데 몇 번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결국 완치할 수 없었고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되었다.
▲ 김성재 김대중도서관장 ⓒ프레시안(최형락) |
처음에는 앉은뱅이처럼 지내서 학교도 9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다녔다. 힘들었지만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았고 긍정적 성격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 다리를 절면서도 친구들과 축구도 하고 야구도 하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생활을 활발히 했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물론 장애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많이 받았다. 가까운 친구들이 농담 삼아 한 말이 상처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장애인으로 가장 차별당했던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에 시험 보려고 했는데 군사정부가 불구자는 안 된다고 해서 시험조차 못 본 것이다. 1994년 특수교육진흥법이 개정되어 장애인이 의무교육을 받을 권리를 갖기 전까지 장애인은 의무교육에서조차 제외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1990년부터 특수교육법 개정운동을 해서 지금은 장애인도 의무교육, 통합교육을 받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어서 빈민지역에 들어가 어려운 사람들과 생활하며 학교를 다녔다. 빈민운동 차원이 아니라 그냥 가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을 인정하고,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사람은 인정받으면 기적과도 같은 힘이 솟고 희망으로 자기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삶을 경험했다. 내가 빈민들과 장애인들을 위해 산 것은 어머니가 일깨워주신 내가 한 기도 때문이었다. 내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맬 때 '나를 살려주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려운 사람들과 더불어 살겠다'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나는 이 기도의 약속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했다.
대학 시절에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야학을 하면서 전태일을 만났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의 분신 사건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들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당시 청계천 바로 옆 동대문 평화시장에 있는 동부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거기서 1970년부터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을 했다. 당시 동부교회 야학은 운동권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하루는 전태일이라는 노동자가 와서 인사하고는 다시 들르겠다고 하고는 갔다. 하지만 그 뒤로 만나지 못했다. 인연이 그리 깊지는 않았다. 1960년대에 대학생들은 정치민주화에 대한 운동은 많이 했으나 빈민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분신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생활은 정말 열악했는데 언론의 통제로 국민들은 이런 현실을 잘 알지 못했다. 전태일 열사는 자기 몸을 희생해서 이런 비참한 노동자들의 현실을 사회에 알린 것이다. 이 사건 이후 학생운동이 빈민과 노동자, 농민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지식인들과 언론인들도 정치민주화와 함께 사회정의, 인권, 민중생존권에 대해 관심 갖기 시작했다. 민중이란 말이 이때부터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군사정권은 민중이라는 말이 북한의 인민과 같은 말이라고 뒤집어씌워 민중운동을 반공법으로 탄압했다. 많은 대학생들이 대학을 포기하고 빈민지역과 노동현장에 들어갔고 진보적인 성직자들도 빈민, 노동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 씨와 전순옥 씨와 함께 계속 야학을 하면서 동고동락했다. 특히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를 어머니처럼 따랐다. 이소선 여사는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가족들과 함께 늘 앞장서서 사회적 약자들을 챙기고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활동을 계속하셨다. 현장에 들어가 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가르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떤 마음으로 야학을 하실 수 있었나?
ⓒ프레시안(최형락) |
그런데 빈민들이 교육을 받기 전에는 불의한 현실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도 했지만 교육받은 후에는 교과서를 통한 군사독재체제 논리에 세뇌되고 적응하는 것을 보고 '이런 교육은 잘못된 것이구나'를 깨달았다. 그래서 파울로 프레이리는 자기 자신과 사회를 올바로 읽고 쓸 줄 알고 스스로 의식을 깨우는 교육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그는 의식화(conscientization) 교육이라고 했다. '피압박자의 교육학'은 이런 교육과정을 담은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중심으로 대학원 논문을 쓰고 비밀리에 원서를 번역했다. 당시 이런 종류의 책은 출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름종이에다가 철필로 긁고 등사기에 밀어서 쓰는 소위 '가리방(줄판)' 출판을 했다. 이것으로 한국신학대학(한신)에서 강의를 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에 우리 사회 운동권에서 '의식화'라는 말과 민중교육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졌는데, 어떻게 보면 이 말들은 내가 처음 사용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시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을 한 사람들은 거의 다 이 책을 보았고, 최근에도 여러 사람들이 내게 1970년대 내가 번역한 책을 보고 운동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71년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에 다닐 때 수유리 캠퍼스에 지역사회학교를 만들어 84번 동아운수 버스 안내양들을 가르쳤는데, 이때 파울로 프레이리가 경험했던 제도교육의 모순을 실제로 경험했다. 어느 날 그 회사의 전무가 야학 선생들에게 저녁을 사준다고 했다. 그 때 갈비라는 걸 처음 먹었는데, 대화를 하던 중에 "선생님들이 잘 가르쳐주니 우리 아이들이 참 착해져서 삥땅도 안 하고 말도 잘 듣고 세차도 잘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속에서 무언가 확 올라와서 얼른 뛰쳐나와 먹었던 걸 다 토했다. 내가 저들을 위해 가르친 것이 결국은 기업주에 길드는 교육을 했구나 하는 생각에 몹시 괴로웠다.
당시 안내양들의 하루 일당을 300원 받았는데 실제로는 적어도 500원은 받아야 했다. 이전에 내가 임금을 좀 올려줘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회사 측에서는 그들이 삥땅을 하기 때문에 300원을 줘도 된다고 했었다. 이렇게 회사는 안내양들이 삥땅을 할 것을 전제로 300원을 주는 건데, 우리가 삥땅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은 아니지만 결국 이들이 더 이상 삥땅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들은 실제 자기가 받을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 다음 날 학생들에게 가서 내가 지금까지 잘못 가르쳐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 너희들이 걸리지 않고 삥땅 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회사에서 난리가 났다. 전무가 달려와서 "선생님,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삥땅하는 걸 가르치다니요?" 하길래 내가 "전무님이 분명히 이들이 삥땅을 하니 300원 주는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것을 안 하게 되면 500원을 주십시오"라고 했다. 처음에는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일당을 450원으로 올려주기로 타협을 봤다. 회사에서 임금을 올려주니 안내양들도 일을 더 잘하게 되고 그 덕분에 동아운수는 모범운수가 되었다. 이후 상황은 더 개선되어 안내양들이 더 이상 '오라이~'하면서 차 문을 두들기지 않고 마이크로 안내를 하게 되었고 제복도 입고 세차장도 만들어졌다.
자기의 존재다움이 무엇인지, 사회 문제가 무엇인지, 가난이 왜 발생하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 권리를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인지 스스로 묻고 깨우치며 인식해 나가도록 하는 교육과정이 의식화 교육이다. 그리고 의식화 교육은 피압박자만이 아니라 압박자도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야학에서 시작한 운동이 빈민운동, 노동운동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사실 대학원을 진학하지 않고 빈민지역에서 계속 살려고 했는데 당시 한국신학대학교 대학원장이셨던 안병무 박사님이 친구를 통해 나를 찾아내어 사회를 민주적이고 정의롭게 변화시키려면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하시면서 거의 강제로 대학원에 입학시켰다. 당시 한신대에서는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과 '성서는 역사다'라는 명제가 신학교육의 중심이었다. 이것은 곧 신을 바로 알려면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의 신 연구,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 쳐다보는 신앙이 아니라 신이 창조하고 계속해서 섭리하고 역사 하는 인간과 세계를 바로 알고,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런 맥락에서 선교도 신이 이 세계와 우리 사회에서 하시려고 하는 일, 그것은 곧 신의 사랑과 정의인데 이 일에 동참해서 함께 일하는 것을 선교라고 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고 불렀다. 이런 신학과 선교를 중심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빈민지역, 농촌지역, 노동현장에 가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일하도록 훈련시켰다. 이런 교육과 현장에서의 경험이 후에 청와대 민정수석, 정책기획수석, 그리고 문화관광부 장관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73년 12월, 몹시 추운 겨울에 학생들과 함께 구로동에 있는 공단에 들어가서 노동자생활을 했다. 회사에서 처음에 우리가 중학교 중퇴, 고등학교 중퇴라고 했더니 안 써주길래 전부 국졸이라고 했더니 써주었다. 그곳에서 한 달가량 생활하던 중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었다. 장준하 선생의 유신반대 백만인 개헌서명 운동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청년 책임자 중 한 사람으로 서명운동에 참여했는데 이것을 알고 정보부 요원 둘이 나를 잡으러 와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가서 보니 그곳에는 이미 함석헌 선생, 장준하 선생을 포함한 여러 사람이 와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맞으면서도 서명받은 명단을 끝끝내 숨기며 모르쇠로 버텼는데, 다른 선생님들보다 나이가 어려서 같이 엮을 수가 없었는지 3일 만에 나오게 되었다. 그 후 얼마 안 돼서 몇몇 교회전도사, 빈민, 산업선교 하는 사람들이 '긴급조치 1호는 무효다'라는 선언문을 종로5가 기독교 회관에서 발표했다. 이 일로 그들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 정도의 형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긴급조치 역사에 내 이름은 없다.(웃음)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을 하면서 어느 조직에 들어가거나 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을 그렇게 원하지는 않았다. 조직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조직의 논리와 소(小)영웅적 자기과시에 빠져서 본래적 목적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신대 학생대표로 서울대, 고대, 이대 등 일반대학 학생대표들과 연대운동을 했지만 그 조직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대신 운동을 하면서 많은 동지들을 만났다. 빈민운동을 하면서 제정구, 김근태, 손학규 등을 다 만났다. 돌아가신 제정구 전 의원,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와는 빈민운동을 했고 김근태 전 의원과는 1971년 대통령 부정선거 참관인 운동도 함께했다.
그리고 노동운동을 하면서는 장명국 내일신문 발행인과 만났다. 당시 노조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는데 장명국은 노조를 만들어 노동자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근본이라고 강조하면서 노동법 책도 출판하고 적극적으로 노조 결성을 통한 노동운동을 했다.
청년 시절, 야학운동, 민주화운동 등을 하며 사실 독재정권의 압박을 많이 받았을 텐데, 이렇게 운동을 하다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낀 적은 없었나. 공포와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1967년 대학에 입학해서 그 해 6.8부정선거 규탄 데모에 참가해 처음으로 경찰서에 잡혀갔다. 이후 월남 파병 반대, 3선 개헌 반대 등 계속 학생운동을 했다. 매번 소위 닭장차에 끌려가고 경찰서에 잡혀가서 매도 맞고 며칠씩 철장에 갇혀 있기도 했다. 1971년 대선 때는 부정선거를 막기 위해 '표 지키기' 참관인 운동도 했다.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 때도 잡혀갔고, 그해 11월에는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서빙고 호텔이라는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중앙정보부에도 여러 번 잡혀갔는데 중앙정보부나 보안사에서 '너 같은 놈 교통사고로 위장하거나 익사 사건으로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고 위협을 받기도 했다. 당시 수사 당국은 사람들을 몰래 잡아갔기 때문에 가족들과 동료들은 경찰서, 정보부, 보안사를 헤매며 찾아다녔다. 정말 그냥 사라지는 의문사, 행방불명자들도 많았다. 그러기에 잡혀가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고 공포였다. 그러나 신념과 신앙으로 두려움과 공포, 매 맞는 고통과 비인간적 멸시를 극복할 수 있었다. 교수 해직 압력과 협박도 여러 번 받았지만 그것이 두려워 신념을 굽히지는 않았다.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가난한 민중들이 주인 대접 받고 차별받는 장애인들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신념과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은 하나님과 민중들로부터 온 것이었다. 나는 민중들이 내민 손, 그들의 눈빛,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내게 사랑의 힘을 주셨고 민중들의 사랑도 큰 힘이 되었다. 민중운동을 하면서 이것을 분노와 증오심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운동의 원동력이 사랑이 아니면 결과는 투쟁의 악순환이 되고 파괴적이 된다. 당시 우리는 이런 노래를 즐겨 불렀다. '우리들은 뿌리파다 훌라훌라, 같이 죽고 같이 살자 훌라훌라,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하노라. 우리들은 자유파다, 정의파다, 훌라훌라.' 이 노래는 남미 해방운동 노래로서 내가 한신대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었는데, 이 노래가 운동권 노래가 되었다.
청년 김성재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무엇이었나?
ⓒ프레시안(최형락) |
고은 선생님이 쓰신 <만인보>에 내 이름이 있다. 나에 대해 짧게 두 줄인가 쓰여 있다. 내가 다리를 저니까 '한쪽 다리는 짤록, 그러나 그의 날 선 눈은 하늘을 꿰뚫고 있다'는 내용이다. 민중과 살면서 해직교수, 해직 언론인, 제적학생들과 함께 민중신학, 민중교육학, 민중사학, 민중경제학, 민중사회학, 민중문학 등의 새로운 배움을 씨름하고 있던 나를 보고 쓰셨으니 아마도 당시의 내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기독 신앙이 관장님의 삶을 추동하는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되었던 것 같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매우 큰 세력이지만, 이른바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친미, 반북, 반복지, 반평화뿐 아니라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적이익 집단으로 인식된 경우가 많다. 단적인 예가 지난 총선에 기독당이 나왔는데, 주 공약이 교회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것이 핵심 공약이었다. 이들이 믿는 기독교와 관장님이 믿는 기독교는 다른 것이 있나? 관장님께 기독교란 혹은 예수란 어떤 존재인가?
부모님이 기독교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성서와 씨름하다 보니 내가 성서에서 만난 예수는 교회의 예수와는 다르다고 느꼈다. 그러면서 종교도 교회도 모두 인간의 사회적 제도이고 인간이 모이는 곳이기에 사람들 간에 정치가 있게 마련이고 갈등과 부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역사를 보면 교회 정치가 세속 정치보다 한 수 위이다.(웃음) 그래서 어떻게든 교회에 연연하기보다 예수를 닮고 그분을 따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절실했다.
내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와 한신대는 진보적인 신앙과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복음화와 인간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둘이 아니라 하나로 여겼다. 또한 선교도 단지 기독교로의 개종과 교회 성장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곧 사랑과 정의를 이 땅에 이루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한신과 기장은 신의 뜻으로 민주화와 민중운동, 인권과 평화통일 운동을 가장 앞장서서 했다. 반면 보수교회들은 독재, 착취, 빈곤 등 사회의 불의를 외면하고 위복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개인구원과 교세 확장에만 몰두했다. 사회참여는 이단이고 죄악이라고 했다. 솔직히 이런 부자교회들은 예수를 팔아 장사하는 종교적 기업과도 같은 것이지 가난하고 불의한 사회에 참된 교회가 아니다.
사실 성경만이 아니라 사서오경은 물론 불교와 이슬람교의 경전들도 심취해서 읽었다. 내가 다닌 한신대 바로 위에 화계사가 있고, 거기에는 동국대 불교학과 기숙사가 있어서 젊은 스님들과도 어울리며 여러 불경들을 읽었다. 또한 당시 한신대에서는 불교와 유교를 한 학기 이상 공부하게 했기 때문에 청담스님, 법정스님께 배우고, 대학원 때는 해인사 백련암 성철 큰스님께 가서 일주일 지내며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당시 성철 큰스님을 만나려면 소나무나 돌에 천 번 이상 절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안병무 선생님 서찰을 가지고 가서 절하지 않고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정계 은퇴 후에 재산 관리를 맡기신 것과 이후 김대중 정부 시절 파격적인 민정수석 발탁, 이후 김대중 도서관 관장에 이르기까지 DJ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신 것으로 유명하다.
1992년 12월 김대중 대통령께서 대선에 패배한 후 정계 은퇴와 함께 동교동 집 외의 재산을 사회에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이듬해 초에 동교동 자택으로 부르시더니 사회 환원 재산 사용과 관리를 내게 맡긴다고 했다. 깜짝 놀랐지만, 대통령께서 웃으시면서 김 교수가 잘할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에 맡기는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께서 이렇게 나를 신뢰하고 계신 줄은 몰랐기에 나도 무척 놀랐다.
그리고 대통령께서 1999년 6월 민정수석직을 신설하고 내게 그 일을 맡겼을 때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언론도 "김성재가 누구냐?"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을 1969년 3선 개헌 반대운동 때 만났고, 이후 40년간 가까이 있으면서 정책자문 역할 등을 했지만 정치 일선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1988년 평민당 창당 때부터 1996년까지 세 번이나 전국구 공천을 제안했지만 모두 사양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에 대해 몰랐을 것이다. 처음 청와대에 민정수석으로 부임했을 때 모든 공무원들은 신학과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이 어떻게 그 직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얼마 못 가서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직원들이 놀랄 정도로 민정수석직을 전문적으로 수행했다.
기자들이 내 방에 자주 들렸는데 어느 날 한 기자가 수석님 별명이 '부시맨'에서 '메기 수석'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왜 '메기 수석'이냐고 했더니 미꾸라지를 기를 때 메기를 넣으면 미꾸라지들이 메기에게 안 잡혀먹히려고 부지런히 움직여 미꾸라지가 빨리 크는데, 그동안 조용하던 청와대 비서실이 김 수석님이 오고 나서 아주 바빠져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메기라는 이름은 별로였지만 그 의미는 싫지 않았다. 민정수석 이후 정부의 정책, 예산, 인사를 총괄하는 정책기획수석을 맡았다. 다양한 삶의 현장을 경험한 것이 이 직책들을 잘 수행해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통령 민정수석을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나 뿌듯했던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당시는 IMF 외환위기 때였기 때문에 개혁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러나 나는 축소하고 내쫓는 구조조정이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 인력을 재배치하는 생산적 개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 금융, 공공, 노사 4대 개혁 추진과 의료, 연금, 고용, 산재 4대 사회보험 실시, 민주화 관련법, 인권법, 부패방지법 제정 등 인권과 사회권에 근거해서 기초생활보장과 중3까지 무상의무교육 확대 등을 포함한 복지국가 정책, 디지털초고속통신망 구축, 전자정부 실현, 유비쿼터스와 SNS 시스템 구축, 지식산업 발전과 지식정보 인적자원 개발, 'IT, BT, NT, CT, ET, ST' 등의 과학기술 발전 정책,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 문화정책', 문화관광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는 정책 등 정말 불철주야로 일했다. 어느 공무원이 이렇게 말했다. '공무원 생활 20여 년에 이렇게 코피 터지며 보람있게 일해 본 것이 처음이라고'. 매일 아침 일을 하기 전 하나님께 기도했다. 국민과 국가를 위해 올바르게 국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을 주시라고. 언제나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말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업무를 시작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몇 달 전에 OECD에서 제3세계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전자정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데, 한국이 가장 앞선 전자정부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자정부 추진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담당자가 나를 찾아 왔다. 이 담당자는 어떻게 한국이 이렇게 일찍이 전자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는지 감탄하기도 했다.
정보화 정책 추진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19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앨빈 토플러의 <제3의물결>이란 책을 읽고 지식정보사회가 도래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신 후 정보화 정책을 강조했는데 청와대 수석과 관련 부처 장관들이 정보화 정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내가 민정수석에 임명되고 난 후 대통령께서 정보화 정책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했는데, 나도 1980년에 앨빈 토플러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곧 정보화 정책의 요지를 말씀드렸더니 내게 그 책임을 맡겼다. 본래 정보화정책은 민정수석 임무가 아니었다.
정보화 정책의 핵심은 전자정부인데, 전자정부 슬로건은 "정부가 당신의 손안에"(government in your palm)였다. 전자정부는 국민들이 언제 어디서나 컴퓨터 마우스를 통해 정부 행정을 알고 행정서비스를 받는 서비스정부, 국민에게 열린, 국민과 소통하는 정부이다. 국민이 정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국민에게 먼저 찾아가는 정부이다. 전자정부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바꾸고, 전국적으로 초고속통신망을 구축해야 한다. 정부부처는 행정 칸막이를 없애고 전자민원서비스(G4C)가 가능하게 하고 기업도 전자상거래(B2B)를 도입해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 전 국민이 인터넷을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학교 정보화를 통한 학생들의 인터넷 교육은 물론 가정주부와 노인들까지 마을회관에서 인터넷 교육을 무료로 받게 했고, 군인들과 재소자까지 인터넷교육을 시켰다. 이 결과 1년 만에 인터넷 이용자가 3000만 명을 넘었다. 인구비례 세계 최선두 인터넷 이용 국민이 되었다. 이런 전자정부사업을 2년 만에 완성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10월에 전자정부 선포식을 했다. 당시 나는 지식정보사회는 하늘이 우리나라에 주는 축복이라고 말했다. 지식정보사회는 우리 민족 기질에 잘 맞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전환하는 정보화를 빨리 추진하면 일본의 전자산업을 몇 년 안에 앞설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에 정부 각료나 기업들이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일본보다 앞서 있고 세계 최고가 되었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절차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이 두 정권을 거치며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더 심화되었고, 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더 심화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복지정책들을 계속 연구해왔던 연구자이자 실천가로서, 한편으론 김대중 정부의 국정 운영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민정수석으로서 이런 평가와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심화시켰다고 하는 비판은 잘못된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김영삼 정부가 준비 없이 도입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 때문에 발생한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민주적 시장경제, 경제민주화 정책을 추진했다. 특별히 경제민주화 원칙에서 4대개혁, 곧 기업, 금융, 공공, 노사 개혁과 5+3 재벌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만약 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으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기업, 금융, 노사개혁과 재벌개혁을 할 수 없었다. 또한 4대 사회보험, 의료, 연금, 고용, 산재보험도 실시 할 수 없었다.
현행 헌법 제119조 ①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현행 헌법 제23조 ①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 ②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 |
우리나라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의 법치국가적 성격과 사회민주주의의 사회국가적 성격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 1948년에 헌법을 제정할 때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 즉, 사회국가 헌법의 사회권 요소를 국민 기본권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는 1987년 민주화 이후 개정된 헌법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현행 헌법의 제119조 1항은 경제활동을 시민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법치국가의 시민권으로 보장한다. 그러나 2항은 경제활동에서 개인의 자유가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할 때, 사회적 평등을 위한 경제민주화와 이를 위한 국가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그리고 제23조는 공공복리에 부적합한 소유권에 대해서는 국가가 조정할 권리가 있음을 명시했다. 이런 헌법에 따라 외환위기를 경제민주화로 극복하려 했지 신자유주의적 처방을 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5+3 재벌개혁'으로 출자총액제한제도, 선단식 문어발식 기업 확장 개혁 등의 조치로 많은 재벌들이 해체되고 축소되었다. 이는 헌법에 근거한 것이라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비정규직과 파견 근로자가 늘어난 문제는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불가피한 것이었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해결했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노무현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뚜렷하게 인식하지 못해 재벌개혁정책들을 완화시켰고, 이명박 정부는 친 대기업정책으로 이를 아예 폐지해버렸다. 그 결과 재벌대기업들이 문어발식으로 기업을 확장해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업종을 모두 잡아먹고 있다. 지금 정부가 '동반성장' 구호를 외치고 있는데, 그것은 권력으로 재벌과 대기업을 압박하거나 그들의 도덕성에 호소해서 될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적으로만 해석한 헌법을 사회민주주의 사회국가적으로 재해석함이 필요하고, 헌법에 근거한 경제민주화 정책으로 해결해야 한다.
김대중 정권 때는 신자유주의가 확산되었고, 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라고 토로할 만큼 재벌 등을 중심으로 한 경제세력의 힘이 강해졌다. 이로 인해 양극화가 심화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으로 이명박 정부를 선택한 측면도 있다.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은 이후 재벌을 비롯한 경제 세력의 공세에 속수무책이었던 이유와 그로 인해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에 무능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민주 진보세력들은 자꾸 정책만 강조하는데 정책과 함께 그 정책을 제대로 수행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을 잡았으면 그 정책을 수행할 적임자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민주세력은 권력을 잡기는 잡았는데 그것을 수행할 사람이 없었다. 국민의 정부도 그 부분이 안타까웠다. 민주세력이 집권 경험이 없으니까 민주화운동에서는 챔피언들이었지만 국가, 사회, 경제는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의 경우 삼성의 국정운영보고서에 의존했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이 노무현 정부의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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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정책이 좌우로 갈팡질팡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 멍에가 되고 있는 한미FTA, 제주 해군항기지 건설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결국 노무현 정부는 서민정부를 표방했지만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부자들과 재벌들을 더 배를 불리고 서민들을 고통 받게 하는 정부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대학교수들은 이론에 충실한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비판은 잘하지만 행정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자기 학문적 권위 때문에 과거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정부와 정치에 참여하려는 교수들은 변화하는 세계와 현실에 대해 인식하고 국민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실사구시적인 정책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즉 올바른 정책을 적절히 수행할 전문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민주진보진영의 정치인들이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유훈 정치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훌륭한 정치인들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개인 우상화나 하나의 정치적 정파가 되는 것은 극복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두 분은 국민과 함께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을 신뢰했고, 현장 중심의 행정과 국민보다 반걸음 앞서 가는 정책을 추진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탈권위적으로 국민과 소통했다. 이런 정신과 자세를 이어가야 한다. 두 분의 민주평화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국민을 위한 헌신의 정치를 하지 않으면서 두 분의 이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거명하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두 분이 잘한 것은 계승해야 하지만, 못한 것은 왜 그럴 수밖엔 없었는지 원인을 분석해서 이를 적극적으로 극복해갈 노력을 해야 하는데, 이 두 대통령이 신화화됨으로써 그런 비판이 금기시되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있다.
그런 부분이 있다. 진보도 스스로 겸허히 비판을 해야 자기 발전이 된다. 한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하지 못한다. 일정 부분 공을 세웠으면 또 잘못한 부분도 있다. 당시 시행착오가 있었으면 그 뜻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자꾸 민주통합당 안에서 편을 갈라서 누구는 김대중 세력, 누구는 노무현 세력이라고 하는데 정말 안타깝다. 지금 민주통합당 안에서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 없었던 사람이 어디 있는가. 486은 아닌가? 486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젊은 피 수혈하겠다고 해서 선택된 사람들이고 노무현 대통령 때는 열린우리당에 있었는데 누가 노무현 파고 누가 김대중 파인가. 사람들이 '유인태 의원은 친노파다' 라고 하는데 유인태 의원은 '난 아니다'고 한다. 한명숙 대표도 사람들이 '한명숙은 친노파다' 라고 하는 것에 '나는 친노파 아니라 김대중 파다'하고 말하지 않았나.
정치세력 내에서 이렇게 패를 구분하는 것은 국민은 안중에 없고 자기 정치적 목적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 분의 정신을 이어받는 가치로 간다면 하나지 어떻게 둘인가. 특히 정치권 안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인다 해도 진보적 학자들과 시민사회 인사들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정파적 편 가르기가 아니라 국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총선에서 국민에게 많은 실망을 준 민주통합당과 야권 진보진영이 대선을 앞두고도 여전히 가치 지향적인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진보진영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진보진영은 이 시점에서 진보라는 가치에 대한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이 시대의 진보는 무엇인가? 1980년대의 진보와 이 시대의 진보는 다르다. 세계는 변화해서 이미 자본주의도 과거의 그것이 아닌, 따뜻한 얼굴의 시장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4.0으로 자기 변화를 하고 있다.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의 위상 또한 엄청나게 달라졌다. 이런 흐름을 가장 먼저 파악하고 호흡하면서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게 진보세력이다. 안됐지만 우리의 진보진영은 이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의 좁은 이데올로기에만 충실한 것 같다. 이런 식으로는 국민으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없다. 특히 2040세대는 스마트폰, SNS 등을 통해 전 세계와 호흡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진보세력이 2040세대를 말하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2040세대와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40세대가 안철수를 왜 좋아하는가? 안철수의 정치력이 이렇다저렇다 말이 많아도 그에게 기대를 거는 이유가 무엇인가? 거기에는 정치권에는 없는 도덕성과 그의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진보는 미래를 향한 진보, 국민에게 행복과 희망을 주는 진보여야 한다.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도 있으니 이번 위기를 새로운 진보의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절대로 권력을 사유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언제나 정치싸움은 권력을 사유화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제 계파정치를 넘어서야 한다. 이것을 넘기 위해 야권단일화를 했는데 거기서 다시 나눠 먹기로 들어가면 안 된다. 권력을 공유화하려면 소위 국민을 위해 정치에 입문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뢰와 믿음이 필요하다. 국민과 동지를 믿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나보다 나은 너를 위해 내가 희생한다'여야 한다. 그게 우리 민주화의 정신 아닌가. 그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 헌신한 많은 학생, 민주인사, 노동자, 농민, 빈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민주주의를 누리고 사는 것 아닌가. 그들이 밑거름이 되어준 터전 위에 국민들이 그 가치를 인정해줬기 때문에 우리가 있는 것이다. 자기가 운동했고 잘났기 때문에 국회의원 배지 달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들의 희생에 미안함과 고마움, 빚진 마음을 가지고 겸허한 자세로 정치를 해야 한다. 국민의 열망에 의해 권력을 잡았으면 그것을 다시 국민과 사회에 환원시키고 공유해야 한다. 지금 진보진영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들도 다 순수하게 자기희생을 하며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시 그 순수한 모습으로 일깨워지길 기대한다.
네 번이나 전국구(비례대표 후보) 제의를 거절하는 등 정치와 멀리 있었던 것 같지만 사실상 정치를 해왔다.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가장 핵심적인 자질이 무엇인 것 같나? 또 정치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정치의 근본 목적은 민주주의 실현, 곧 주권재민에 의한 모든 국민의 평등한 행복과 국가 발전에 있어야 한다. 특히 사회적 약자의 행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래야 모든 국민이 행복하게 된다. 그리고 민주주의, 인권, 정의, 공동체, 평화, 환경 등에 대한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 특히 권력은 특권, 군림이 아니라 봉사라는 의식을 철저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치인은 역사의식을 가지고 현실의 변화를 바로 인식하고 국가의 미래를 멀리 내다보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 학자들은 자기 이론에 충실하면 되지만 정치인은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과 함께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또한 오늘의 세계는 내치와 외치가 구분이 없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정치인은 전 지구적 사고와 정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동시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비전 및 그것을 실현할 능력과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지식정보사회이기 때문에 SNS, 패거리와 갈등의 SNS가 아니라 상생하는 사회통합적 SNS 능력이 있는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
타인의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해 때론 스스로의 자유를 제약했어야 할 때도 있었을 것 같은데, 인간적으로 고민이 되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런 선택의 순간들이 올 때마다 결정의 기준은 무엇이었나?
약자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를 위해 일하려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성서는 우리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한다. 타인을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강제된 압박이 아니라 사랑의 결과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에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원하지만 책임지기 싫어하기 때문에 자유로부터 도피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만 비판해서는 안 되고 자유로부터 도피해서 독재자를 간접적으로 인정해주는 현실 도피적 개인 안락주의까지 비판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지나친 경쟁의식과 개인 및 집단이기주의가 극에 달해 있어서 자유에 대한 가치가 왜곡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적 자유의 가치, 약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자유의 사회적 가치가 국민과 사회 속에 공유되어야 한다.
김성재에게 자유란?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신앙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것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웃을 사랑할 자유이며, 또한 그들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투쟁할 사회정의적 자유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님은 '형제를 위해서 네가 목숨을 버리면 형제도 살고 너도 살지만, 네가 살기 위해 형제를 버리면 너도 죽는다'고 했다. 나 개인의 자유만을 생각해서 형제자매를 버리면 자유인이 아닌 노예가 된다. 형제자매의 자유를 위해 살면 너도나도 진정으로 자유인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보다 우리 젊은이들이 '이태백'이라는 절망 속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 방식에 매여 절망하지 말고 시대의 변화를 바로 읽고 용기와 꿈을 가져야 한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지식정보와 문화의 시대는 하늘이 우리에게 주는 큰 축복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세계 민족들의 능력 자료를 보면 우리 민족은 지적, 창의적 능력이 세계 최고수준이다. 과거 산업사회는 물적 힘, 곧 자본, 토지, 노동력 등이 모든 힘의 근원이고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었지만 지식정보사회는 지적 능력과 창의력이 모든 힘의 근원이 된다. 그러기에 돈이 없다고 좌절해선 안 된다. 그리고 인터넷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식과 정보를 무료, 또는 아주 값싸게 습득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학력에 매여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누가 더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느냐의 경쟁은 아무 의미가 없다.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사람이 더 중요하다. 지금 하버드 대학교, 스탠포드 대학교 등 세계 유명대학교의 강의를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학습할 수 있다. 또 수강하면 수료증서도 받는다. 그런데 뭣 하러 SKY 등 소위 명문대 못 가서 애태우고 자살하는가. 오늘의 시대는 집단지성의 시대이고 지식공유의 시대이다. 권력도 사유화하면 안 되지만 이제는 지식도 사유화하면 안 되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과거 지식, 과거 대학의 노예가 되지 말고 세계와 호흡하고 경쟁하고 협력하는 새로운 시대의 창조적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5000년 역사의 문화적 유전자를 갖고 있는 민족으로써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이 무의식 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유리천장(glass ceiling)과 유리장벽(glass wall)을 깨고 세계를 향해 마음껏 자기를 실현할 나래를 펴기 바란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장지선 연구원)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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