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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약화, 혹은 새로운 지배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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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약화, 혹은 새로운 지배구조?

이강국의 '세계화의 정치경제학' <15> 세계화 vs. 국민국가

***3. 국가의 약화, 혹은 새로운 지배구조?**

***세계화 vs. 국민국가**

1992년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소련과 동유럽 등 기존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고 이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가 영원히 약속된 번영의 땅을 열어줄 것이라고 장담했다.(Fukuyama, 1992) 그의 주장은 시장의 한계와 미국, 유럽, 일본 등 자본주의 내의 다양성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린 것이지만, 이미 80년대 이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물결과 함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시장에 무릎을 꿇은 듯 했고 그의 대담한 허풍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맥킨지서 일했던 오마에 겐이치는 1995년 ‘국민국가의 종말’이라는 저서에서, 이제 투자, 기술, 산업, 소비자 등의 국제적 이동을 배경으로 세계화의 높은 파도에 국민국가는 쇠퇴해 가고 있고 결국에는 모든 나라들이 자본에 대한 완전한 개방에 기초하여 국가가 필연적으로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까지 큰소리를 쳤다.(Kenichi, 1995) 그는 더 이상 국민국가 단위의 경제정책은 효과가 없으며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지역 국가(regional state)가 등장할 것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주로 일본인들이 이런 대담한 주장을 내놓는 것은 신기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좁은 섬나라의 폐쇄적 민족주의에 대한 역편향일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도 국민국가도 끝났다는 이러한 주장들은 극단적으로 오른쪽에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세계화와 국민국가의 변화, 특히 세계화의 진전을 배경으로 국민국가의 역할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학계에서 오랫동안 열띤 관심이 되어왔고 지금도 중요한 논쟁의 지점이다. 가장 오른쪽에서는 보수파들이 오마에처럼 세계화로 인해 국민국가의 경제적 관리능력은 점점 약화되고, 자본의 유치를 위해 더욱더 국가개입은 축소되어 종국에는 국가라는 정치적 제도형태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분석은 기존의 국민국가 대신, 지역 국가나, EU와 같은 지역정부, 나아가 어떻게든 전세계를 포괄하는 정치적 기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전망으로도 이어진다.

이런 주장은 우파만의 것은 아니며 진보적인 이들이나 좌파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한때 민주당의 호프이자 클린턴 정부의 노동부장관이었던 로버트 라이시는 ‘국가의 일’이라는 저서에서 역시 세계화의 진전으로 구식의 국민경제 개념은 약화되고 있고 국민의 소유보다는 어떤 식으로 부가가치를 늘이는 것이 국가의 부를 결정하게 된다는 주장을 폈다.(Reich, 1991) 따라서 가치창출에 도움이 되는 상징분석가(symbolic analyst)라 불리는 고숙련 노동자들을 많이 길러내는 것이 국제경쟁 속에서 진보적으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세계화라는 현실적 변화 속에서 뭔가 국가의 할 일을 찾아야만 하는 라이시의 고민은 이해할 만 하지만 이쯤 되면 무엇이 진보적인지 상당히 헷갈릴 만도 하다.

국가의 종말을 필연적이거나 시장의 승리라는 관점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파악하는 우파와 비교할 때, 비판적인 이들은 주로 국가개입과 국가의 경제관리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며 국가에 대한 향수와 국가의 약화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명한다는 점에서 이들 사이에는 여전히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져 있다. 하지만 좌우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논의들은 주로 세계화가 어떻게 국민국가의 거시경제정책이나 경제개입을 심각하게 제한하는가를 강조하는 듯 하다.(Crotty, 1989) 좌우를 넘어서 ‘제 3의 길’을 찾겠다는 좌파의 노력도 기존 사민주의의 한계와 함께 세계화라는 변화를 중요한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이 이렇게 변했으니 옛날식의 국가개입과 사회복지는 이제 설 땅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변했는가? 자 잠시 그 내용을 들여다보자.

***세계화라는 족쇄, 거시경제정책에 대한 제한**

세계화는 기존의 국민국가의 경제정책에 여러 가지 제한을 가하고 있다. 우선 거시정책의 측면에서 볼 때, 변동환율제와 자본이동의 증대는 환율을 유지하고 국민경제를 관리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능력을 훼손시켰다. 이미 트리핀은 트리핀의 딜레마(trillemma)라는 이름 하에서 국제통화체제에서는, 고정환율의 유지와 자유로운 자본이동, 그리고 정부의 독립적인 통화정책 모두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중 오직 둘 만이 가능함을 역설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도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고정환율제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통화정책은 자본이동에 대한 상당한 통제에 기초하고 있었고, 이후 자본이동의 증대와 함께 변동환율제가 등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이동이 더욱 늘어나고 국제금융시장의 힘이 커짐에 따라 정부의 독립적인 통화정책이 이전에 비해서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국내경기를 진작하기 위한 저금리 정책은 자본유출을 부르고, 때로는 통화의 급속한 평가절하와 경제의 불안정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결국, 세계화로 인해 국내의 통화관리와 환율의 안정성 유지, 두 목표 모두를 동시에 추구하기가 힘들어지며, 특히 팽창적인 통화정책이 더욱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위기를 맞은 경우에는 언제나 국제적 자본을 다시 유혹하기 위해 국내경제에는 악영향을 미침을 알면서도 극단적인 고금리정책이 나타나곤 한다.

통화정책과 함께 재정정책도 마찬가지로 상당한 제한에 직면한다. 특히 개도국의 경우 재정적자는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기 쉬운데 이는 평가절하의 우려를 낳아 자본이동이 자유로운 경우 인플레이션은 심각한 자본유출과 환율상승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IMF는 모든 개도국에게 구조조정을 위해서 긴축적인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요구했으며 이는 민영화, 시장개방 등과 함께 언제나 패키지로 IMF의 자금지원의 조건이 되고 있다.

과도한 재정적자와 심각한 인플레이션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보여주듯 경제에 결코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아르헨티나 등 1000% 이상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만연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한국 등에서도 나타났듯이 2-30%의 마일드한 인플레이션은 경제성장에 별로 악영향을 미치지 않음이 실증적으로도 확인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도한 재정긴축과 인플레이션의 억제만을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적극적인 경기진작을 위한 확장적 거시경제정책을 가로막으며 특히 개도국에게 무척 중요한 교육, 의료나 인프라스트럭처 등에 대한 생산적인 공적인 투자도 위축시키게 된다.

결국 세계화는 이렇게 국민국가가 경제를 관리하기 위한 적극적 거시경제정책을 쓰기 힘들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케인즈주의를 포함한 좌파 학자들은 세계화가 총수요를 창출하고 완전고용을 유지하기 위한 케인즈주의적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제한하여 황금기 호황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주장한다.(Baker et al., 1998) 브레튼우즈와 고정환율제도의 붕괴 그리고 자본통제의 철폐가 황금기 포드주의 자본주의의 위기와 동시에 나타났으며, 현재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는 성장이 정체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국제적 자본통제와 국가의 적극적 역할의 회복을 외치는 것도 이해할 만 하다.

일찍이 아이켄그린은 대공황이 심화된 주요한 이유가 금본위제를 고수하기 위해서 미국 등 선진국 정부들이 확장적인 통화정책을 쓰지 못했던 현실과 큰 관련이 있으며 이를 ‘황금족쇄(golden fetters)’라 부른 바 있다. 금본위제의 붕괴와 함께 황금족쇄는 깨져나갔지만, 지금은 미친 듯이 요동치는 세계화된 자본시장 자체가 ‘세계화 족쇄(globalization fetters)’가 되어 각국 정부의 목을 옥죄고 있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세계화, 경제발전, 국가의 역할**

한편 세계화를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는 발전경제학자들은 세계화와 경제개방이 거시경제정책에 대한 제한 외에도, 정부가 경제발전을 위해 수행할 수 있는 여러 개입수단들을 점점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역설한다.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은 국내외 자본흐름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수출촉진과 함께 수행된 수입제한을 수행하였고 국내적으로는 정부의 강력한 신용할당과 특정산업과 기업에 대한 산업정책적 지원을 대대적으로 도입하였다. 다른 개도국과 달리 상대적으로 제도적 역량이 뛰어난 정부와 특수한 정치경제적 조건 덕에 이러한 국가개입은 성공적이었고 국내산업의 비약적 발전과 고도성장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세계화와 경제개방의 압력은 이러한 ‘발전국가’ 스타일의 발전지향적 경제정책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든다. 실제로 새로이 등장한 WTO 체제는 국내산업의 보조금 지원에 대해서 강력한 제한을 가하고 있고 무역관련 투자협정(TRIMS)의 규정이나 쌍무적 혹은 다자적 투자협정의 진전은 외국자본에 대한 규제나 차별을 점점 더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즉 수입제한과 다양한 수단에 기초한 산업정책에 기초한 국내산업의 보호와 지원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제개입이 비효율성과 경제의 왜곡을 낳는다고 주장하는 우파 학자들에게는 당연히 바람직한 변화일 것이다. 비록 정부의 전략적 노력 없이 개방과 자유화만으로 경제발전에 성공한 케이스는 역사상 찾아보기 어렵지만 말이다.

한편, 최근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주장은 전세계적 자본이동의 확대가 자본에 대한 국가의 상대적인 지위를 약화시킨다는 주장이다. 이른바 ‘발없는(footless)’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확대되면 자본이 도망가는 것을 막고 초국적 자본을 자국에 더욱 많이 유치하기 위해 각국의 정부는 세금 감면이라든가 규제완화라든가 다양한 인센티브를 점점 더 많이 제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위협효과나 바닥으로의 경주 등에서 보이듯 세계화가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것만큼이나 자본에 대한 국가의 지위도 세계화와 함께 약화된다는 것이다.

물론 비슷한 현실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함의와 대응은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시장만세를 주장하는 우파는 국가의 축소와 자유로운 자본이동이 성장을 촉진할 것이라며, 법인세 인하와 노동시장 유연화 등 자본에 대한 더 많은 인센티브를 주장한다. 반면, 좌파는 세계화는 노동자간, 국가간의 경쟁을 심화시켜 노동자의 처지를 악화시킬 뿐 아니라 정부의 세금징수와 다양한 경제개입을 힘들게 만들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한다. 즉 비판적인 이들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개도국 정부의 손발을 묶어서 국민적인 경제발전을 가로막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세계화가 아직 꽃피지 않았던 이전 시기에 비해 198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 등 많은 개도국들의 경제가 더욱 정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서 국제적 자본통제 등에 기초한 국가의 적극적 역할의 복원을 외치는 좌파들은 어찌 보면 동아시아식의 경제발전에 대해 향수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노동자와 민주주의를 탄압하며 이루어진, 국가와 국내산업자본가와의 결탁에 기초한 국가주도적 발전이 얼마나 진보적이었을까? 더욱 중요하게는 과연 세계화의 파도 속에서 국민국가가 정말로 약화되고 있는가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먼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과연 정말로 그럴까?

***세금인하 경쟁**

세계화의 파고에 직면한 국가의 약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이른바 “세금인하 경쟁(tax competition)”으로 이는 바닥을 향한 경주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흔히 이야기된다.(Wilson, 1999; Deperez, 2003) 경제학에서는 이미 자신의 영토를 경제활동에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한 세금경쟁에 관한 모델이 오래전부터 발전되어 왔으며, 너무 심한 세금경쟁은 세금을 너무 낮게 만들어 중요한 공공재의 공급을 부족하게 만들 것이라는 걱정스런 결과도 예측되어 왔다.

세계화와 관련하여 특히 관심을 끌고 있는 쟁점은 국제적 자본이동으로 인해서 이동성이 높은 자본에 대해 매기는 세금, 즉 법인세와 같은 이윤세(profit tax)가 상대적으로 더 낮아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현실은 어땠을까? 국내적 계급관계의 변화와 더 관련이 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세계화가 진전된 1980년대 이후 선진국에서 이윤세의 세율은 하락하고 동시에 노동에 매기는 세금의 세율은 상승했다. 많은 이들은 FDI의 유입은 법인세율에 영향을 받으며 따라서 FDI를 유치하기 위해 각국이 세금인하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걱정스레 보고한다.(Hines, 1999) 나아가 이러한 세금경쟁은 필요한 인프라스트럭쳐와 사회보장을 제공하지 못하는 재정위기로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Avi-Yonah, 2000).

이러한 현상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미국 내의 각 주들의 경쟁 “주간의 경쟁(war between the states)”와도 유사한데 미국의 주 정부들은 법인세 인하로 세금수입을 크게 잃게 되었고, 미니애폴리스 연방은행 등은 이러한 파괴적 경쟁을 막기 위해 세금 인센티브를 금지하는 연방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이는 선진국 뿐 아니라, 후진국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실제로 많은 후진국들이 FDI를 유치하기 위해 법인세를 감면하고 세금감면기간(tax holiday)을 부여하는 등 세금인하 경쟁을 벌이고 있다.(UNCTAD, 1999)

***논란과 다른 현실**

그러나 정말로 세계화가 자본에 매기는 세금의 인하와 큰 연관이 있을까. 몇몇 이들은 이를 지지하는 실증적 증거는 취약하며 최근의 변화는 흔히 이야기되는 것과는 다르다고 비판한다.(Hobson, 2003)

홉슨은 최근 세계화가 바닥으로의 경주와 국가의 약화로 이어진다는 좌우파 모두의 주장을, 우파를 ‘무력함의 정치학(politics of helplessness)', 좌파를 ‘절망의 정치학(politics of despair)’으로 부르며 동시에 비판한다. 그는 국가의 세금징수능력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국가와 국제적 자본 간의 타협에 의해 바닥으로의 경주가 억제되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많은 비관적인 논자들은 세계화로 1) 정부의 세수가 줄어들어 재정지출이 축소될 것이고, 2) 이동성이 높은 자본에 대한 세율이 노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질 것이며, 3) 각국간의 세금경쟁으로 세율이 수렴되고 재정위기도 나타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OECD국가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세금/GDP로 측정된 세금부담과 재정지출은 90년대 후반 약간 줄어들었지만 80년대 이후에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으며, 80년대 후반 이후에는 자본에 대한 세금의 비중이 오히려 노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늘어나고 있다. 각국에 따라 큰 차이가 있지만 OECD 전체 평균으로 보면 세금부담이 1970년 29%에서 1980년 33%, 1990년 36%, 그리고 1998년에는 37.2%였다.(OECD, 2001) 한편 개인소득세는 감소하고 있는 반면 부가가치세 등 소비세가 늘어나고 있다.

재미있게도 세율(tax rate)은 개인소득세와 법인세와 같은 직접세의 세율 모두가 줄어들고 있지만 정작 세금부담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세금이 포괄하는 베이스(base)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법인세(corporate income tax)의 세율은 OECD 평균 1986년 41%, 1990년 36% 그리고 1997년 31%로 세계화와 함께 하락했지만, 세금 베이스를 늘여서(투자촉진을 위한 세금감면 축소 등을 통해) 오히려 법인세의 액수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늘어났다는 것이다.(Hobson, 2003) 다른 연구의 계산도 자본세의 세금부담은 80년대 중반까지 크게 상승했다가 90년대에 와서야 점진적으로 하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는 자본세를 중심으로 각국의 세율이 수렴하고 있다는 증거도 미약하고 재정위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고 일축한다. 즉 많은 선진국들은 세금과 관련해서는 바닥으로의 경주가 아니라 중간으로의 경주(race to middle)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가 더욱 진전될수록 노동자 등 피해를 보는 약자를 위해서 역설적이게도 재정지출의 필요는 오히려 더욱 커지며 이를 위해서는 세수의 확보가 필수적임은 이미 여러 연구자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세금인하경쟁의 한계**

세계화와 자본에 대한 세금의 인하경쟁이라는 이 흥미로운 주제를 사회과학자들이 놓칠 리는 없으며 90년대 이후 정치학자들을 중심으로 많은 실증연구들이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세율을 결정하는 여러 결정요인들을 함께 고려하는 보다 엄밀한 계량연구들은 모호한 결과를 보여준다.

이미 많은 연구들은 자본세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변수로 사용하면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자본세의 비중이 높아진다는 결과를 보고하여 세금인하경쟁의 주장과는 반대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한편 브레취거와 헤티치 등 몇몇 연구는 자본세의 부담 대신 세율을 사용하여 OECD 국가들에게 세계화가 자본세율을 낮추고 노동에 대한 세율을 높이는 중요한 요인임을 강조한다.(Bretchger and Hettich, 2002) 하지만 스튜어트와 웹은 바닥으로의 경주의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Stewart and Webb, 2003) 드레어는 여전히 세계화가 자본세율을 낮추는 증거는 없다고 보고한다.(Dreher, 2003)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널리 퍼진 우려만큼 파괴적인 세금인하 경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배경으로, 보수적 관점을 대변하는 이코노미스트지조차 세계화로 인해 국민국가의 세금징수가 축소되며 전세계를 주름잡는 초국적기업의 권력이 국민국가보다도 커지고 있다는 주장은 상당히 과장된 것이라 지적한다.(Economist, 2001. 9. 26) 즉 흔히 거대 초국적기업의 매출액이 몇몇 국민국가의 GDP보다 더 크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매출액과 부가가치인 GDP를 비교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여전히 기업은 국가만큼의 법적 권력을 전혀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1980년대 이후 선진국의 GDP에서 재정지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별로 줄어들지 않았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늘어났음을 보고하고 있다.

최근에는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하여 각국 정부들도 새로운 대응을 보여주고 있다. 세금인하와 관련해서 OECD나 지역적 차원에서 각국간의 세금협력(tax cooperation)의 논의가 활발히 전개 중이다.(Deperez, 2003) 1996년 OECD의 재무부 장관들은 파괴적인 세금경쟁을 막기 위한 노력을 촉구하였고 이후 다국적기업의 세금회피를 막기 위해 OECD 차원의 노력이 나타나고 있고 EU를 중심으로 이 노력들이 현실화되고 있다. OECD는 OECD 국가들 내의 47개의 특혜적 세금제도를 지목하고 이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2000년 6월에는 U.S. 버진 아일랜드 등 조세도피처(tax haven) 35개국을 지정하고 이들이 OECD 기준에 따라 해로운 조세관행을 2005년 말까지 시정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OECD, 2000)

한편 세금인하가 실제로 FDI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많은 연구들은 특히 개도국에 대한 직접투자에는 개방 자체나 세금인하와 같은 각종 인센티브보다 성장잠재력이나 시장이 더욱 중요함을 지적한다. 생산적인 FDI의 유치를 위해서도 교육이나 인프라스트럭쳐가 좋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국가의 재정이 더욱 확충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UN의 세계투자보고서(World Investment Report, 1999)에 따르면 세금감면 기간은 개도국의 FDI 유입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설사 그 덕에 FDI가 늘어난다고 해도 자유화로 정부의 규제능력이 사라진다면 국민경제에 주는 이득이 미미할 것이라 주장한다.

세금인하 경쟁은 물론 세계화와 국민국가의 갈등을 보여주는 일례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둘러싼 논쟁들은 국민국가가 약화되고 있다는 주장이 꽤나 과장되어 있으며, 세계화의 영향에 영향을 미치는 각국의 제도적인 차이나 새로이 등장하는 여러 노력들을 간과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국가의 역할 축소 vs. 역할의 변모**

최근에는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의 역할은 여전하며 자본에 대한 협상력도 단순히 약화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주장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논의들은 세계화와 함께 국민국가가 일방적으로 축소 혹은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그 역할이 변모하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몇몇 부문에서는 국가의 약화가 실제로 나타나고 있지만, 다른 부문에서든 새로운 국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존에는 거시경제의 관리가 국가의 중요한 역할이었고 이는 확실히 상당한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최근에는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보다 미시적인 정책들, 즉 교육이나 기술혁신을 촉진하는 경제정책들이 이제 더욱 중요한 국가의 역할로 강조되고 있다. 이는 기술발전과 국제경쟁의 격화에 따라 경제성장에서도 역시 혁신과 생산성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정부조차 이제 ‘혁신주도형 성장’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변화를 관찰하며 국가론의 전문가 제솝은 황금기 선진국 국가의 성격은 포디즘 시대에 들어맞는 케인지언 복지국가(Keynesian Welfare State)였지만 70년대 경제위기 이후 포스트포디즘 시기에는 국가도 슘페터리안 근로국가(Schumpeterian Workfare State)로 변모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즉, 총수요의 관리라는 케인지언적 역할에 비해서 경제의 혁신을 강조하는 슘페터리안적인 역할이 강화되고 사회복지의 제공보다는 국민들의 근로의욕을 고취하는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류는 영미와 유럽 그리고 개도국 등 각국마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국가형태를 과도하게 일반화한 감도 없지 않지만 세계화와 함께 변모하고 있는 국가의 역할을 잘 지적한다.(Jessop, 1993)

또한 1980년대 이후 전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국가의 전반적인 경제개입이 약화되고 있다고 해도, 노동자에 대해서는 노조의 탄압과 파업의 분쇄 등 정부가 더욱 강경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대처나 레이건 등의 이러한 반노동정책은 작지만 ‘강한’ 정부라는 이름 하에서 때로는 폭력적으로 나타나 영국의 광산노동자 그리고 미국의 항공관제사 노조 등의 파업은 철저하게 진압되었던 것이다. 이는 물론 당시 경제위기에 대응하여 자본을 상대적으로 지지하는 전략적인 정책이었고, 당시 심각했던 불황과 함께 노동자에 대한 규율을 강화하고 고분고분하게 굴도록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아무튼 이는 국가가 전반적으로 약화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증이 되고 있다.

결국 세계화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함께 국가의 역할 혹은 경제개입의 규모는 축소되고 있다고 해도, 그 개입 자체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며, 국가의 경제개입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관찰일 것이다.

***국가의 역할의 재고**

국가의 역할 변화를 논의하는 데에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자본의 이윤추구 활동과 시장의 작동 자체가 언제나 국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원시적 축적 이래 국가의 경제개입에 기초해서 발전해왔고 시장은 국가와 같은 다른 제도가 없이는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시장의 거래는 재산권의 확립과 보호 없이는 불가능하며 시장경제의 발전은 시장의 확대와 국민적 시장의 확립을 위한 국가의 노력에 기초한 것이었다. 따라서 시장경제도 각국의 역사적 제도적 환경에 따라 상이하게 발전해 왔고 시장 자체가 제도에 배태되어(embedded) 있다고 지적되어 왔다.

이러한 관점은 ‘태초에 시장이 있었다’고 믿는 경제학자의 편협한 사고를 비판해 온 경제사회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는데, 최근의 제도경제학은 국가의 핵심적인 역할에 뒤늦게 주목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 폴라니와 같은 경제사가도 시장경제가 발전할수록, 시장화될 수 없는 노동시장과 같은 부분은 국가의 개입이 필연적이며 시장경제의 발전이 국가로부터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통찰을 보여주었다.

물론 언제나 극단적 주장이 있기 마련인데, 한편에선 단순한 맑스주의자들은 국가가 이른바 허수아비같은 자본의 집행위원회라고까지 주장한 반면, 정반대에서는 국가주의자들이 국가가 자본에 대해서 자율적으로 사회를 리드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Scochpol,1991) 하지만 국가의 자율성을 과대평가하는 대신 국가 자체도 언제나 사회전반의 역사제도적 정치적 권력관계에 기초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할 것이다. 세련된 논의를 보여주는 드 브뤼노프에 따르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재산권의 확립과 보호 외에도 노동시장과 화폐 등 시장에만 맡겨서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측면을 안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분야의 국가개입은 필연적이다.(Brunoff, 1990)

아무튼, 시장과 국가는 자본주의라는 체제 하에서 서로 의존하며 굴러가는 한데 얽혀있는 존재이지, 국가가 시장의 외부에서 개입을 하거나 말거나 하는 존재로 보기 어렵다. 이는 시장실패든 정보문제든 무슨 이유든 경제의 외부에서 개입하는 국가를 가정하고 그 개입의 정도만을 강조하는 주류경제학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렇게 국가개입이 필연적이라 해도 그 형태는 사회의 역관계와 정치경제적 상황 그리고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노조의 힘에 따라 선진국 사이에서도 노동정책은 상당히 다르며, 따라서 최근의 국가론의 논의는 권력관계의 장으로서의 관계적 국가의 특징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결국 세계화를 배경으로 한 신자유주의도 그리고 새로운 국가 역할의 등장도 변화한 상황에 대응한 국가의 개입방식의 특정한 변화로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물론 이는 국내외적인 계급 역관계에도 영향을 받을 것이며 세계화와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개방과 세계화는 상대적으로 자본이 강한 나라에서 더 쉽게 추진될 것인데 이는 다시 자본의 힘을 더 강화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백가쟁명의 논의들**

2002년 미국에서 출판된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은 서구에서는 꺼져버린 듯한 맑스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비관주의적인 기존의 맑스주의와는 달리 이들은 노동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강조하는 소위 ‘자율주의적’ 입장에서 낙관에 가득찬 현재의 체제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며 세계화와 관련된 국가의 변화에 대해서도 독특한 입장을 보여주었다.

네그리와 하트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몰락과 초국적자본의 세계화 그리고 정보기술혁명 등으로 대변되는 현시기의 자본주의는 식민지를 착취하고 제국주의국가들이 경쟁하던 기존의 제국주의와는 다른, ‘제국’이라 불리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제국에는 중심과 주변 혹은 권력의 중심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의 시대는 이제 권력이 전세계적으로 분산되어 있고 이 권력을 이어주는 네트웍의 확립과 함께 영토적 경계조차 사라진 단계이다. 이제 국민국가라는 단위는 제국의 하위부문으로 제국의 권력을 전세계적으로 재생산하는 기능을 담당할 뿐이다.

자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들은 정보통신기술에 기초한 생산방식의 변화로 인해 핵심적인 주체로 떠오른 비물질적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 계층의 역할을 강조하며, 이들의 주체성과 자생적인 네트워크의 형성 그리고 그에 기초한 투쟁이 제국의 극복을 위한 핵심이라 주장한다. 이들 주체적인 ‘다중’이 자율적으로 연대하고 투쟁하여 제국의 권력을 전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국민국가 내부나 국가권력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벌어져야 하며 따라서 이들은 세계적 시민권의 회복 등을 역설한다.

다소 스케일이 장대한 이러한 선언은 약화된 국민국가 혹은 자급자족적인 지역 중심성(localities)을 회복하자는 많은 비판가들의 주장과는 뚜렷이 대비되는 듯 하다. 이들은 “제국의 건설이 이전의 권력구조에 대한 향수를 접고 세계적 자본에 대항하여 국민국가를 부활시키려는 것과 같은 낡은 정치전략을 거부하게 만든 점에서는 한 단계 전진한 것으로 생각한다”라고까지 말한다. 제국의 단계에는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의 회복이나 국민국가를 둘러싼 투쟁은 이미 별 의미가 없어져 버렸으며 국가를 초월해서 전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광대한 네트웍으로 연결된 자율적인 노동의 세계적 차원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국’은 분산된 권력, 전세계의 사람들을 연결하는 네트웍의 가능성 그리고 국민국가나 지역에 대한 향수에 대한 거부 등 신선한 통찰과 자유로운 사고를 보여준다. 이들이 말하듯 노동의 잠재력은 권력의 원천일 수 있고 국민국가 자체도 위계에 기초하고 있으며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역시 세계화와 정보기술혁명 그리고 생산의 탈물질화에 대한 과장된 믿음을 비판없이 받아들이며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위 그리고 선후진국간의 갈등을 무시하는 듯하다.

한 논평가는 제국에 대해 언급하며 미국에는 컴퓨터 전문가에 비해 트럭 운전사가 더 많으며 또한 지구상 인구 중 30억 명이 제 3세계의 농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월가의 금융자본에 기초한 전세계를 누비는 금융권력과 압도적인 군사력을 지닌 세계경찰 미군은 제국주의가 과연 아닐까. 무엇보다도 이들의 주장은 정작 현실의 투쟁에는 실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선언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

한편, 현실에 보다 천착하는 정치학자들은 세계화에 대응한 국가의 변화와 관련해서도 국내적인 역관계나 제도적인 특성의 차이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것이며, 일반적으로 약화 내지 강화의 경향을 속단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강조한다. 제도주의적 분석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학자들은 제도적인 구성의 차이가 세계화에 대응하는 국가전략의 차이를 낳으며, 세계화의 영향도 각국에 따라 다르게 굴절되어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국가주의자들의 유명한 저작, “국가를 다시 끌어들이기(Bringing the state back in)”을 패러디한 “제도를 다시 끌어들이기(Bringing institutions back in)”라는 흥미로운 부제를 지닌 책의 논문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 구체적인 정책의 변화를 분석하고 있다.(Weiss, 2003) 이들은 세계화의 결과가 일방적으로 국가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국의 제도 그리고 특정한 대응에 따라 그 결과도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차이와 다양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관점은 세계화로 인한 국가의 후퇴와 약화가 필연적이라는 비관주의와는 다르게 노력 여하에 따라 다른 변화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는 점을 함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보았듯, 세계화 자체도 기술의 발전 등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와 이에 대한 대응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등장 등 복잡한 역관계와 정책변화에 기초하고 있지 않았던가. 어떻든 세계화의 진전에 대응하여 변모해가고 있는 국가의 역할과 성격 그리고 경제정책 등 개입방식의 변화에 대해서는 보다 열띤 논의가 지속될 전망이다.

***초국적 지배계급의 등장 혹은 새로운 국제적 가버넌스?**

어찌 되었건 국민국가 지배능력이 좀은 약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다른 형태의 지배구조가 나타나고 있을까. 이미 학자들은 IMF 등을 포함한 국제기구의 재편과 강화를 통한 전세계적 경제관리의 중요성을 역설해 왔다. 그러나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을 고려하면 국제기구의 개혁을 통한 새로운 지배구조의 형성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WTO 등 국제무역기구의 협상과정도 언제나 미국을 필두로 한 4자 중심의 Quad 그룹이 비밀스럽게 먼저 협상의 의제를 설정하고 협의한 다음, 때로는 압력 속에서 다른 국가들의 동의를 얻는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일각에서는 1원 1표가 아니라 1국 1표에 따라 각국을 대표하는 UN의 힘을 강화하여 국제정치구조도 민주적으로 개혁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UN도 안전보장이사회 등 여전히 중요결정은 주요 선진국에 의해 결정되며 특히 미국의 입김은 각국과의 막후협상에서 압도적이다. 당연히 미국은 쪽수로 밀어붙일 지도 모르는 개도국의 힘에 탐탁치 않아 할 것이며 몇 년 전까지 미국이 UN 분담금조차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제의 세계화는 고삐풀린 말처럼 진전되는 반면 전세계적 차원의 정치체제의 형성은 요원한 일일까. 오히려 유럽연합의 경우에서 보듯 경제통합에 기초한 지역적인 정치질서의 통합이 더욱 현실적으로 보이며, 이런 점에서 아메리카 자유무역지대나 동아시아 경제협력의 과정에서 정치적 협조가 어떻게 진전될 것인지 흥미롭게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한편 몇몇 비판적인 학자들은 세계화의 진전 그리고 초국적기업의 성장과 금융자본 이동의 확대를 배경으로 이미 전세계적 차원에서 초국적인 지배계급이 등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로빈슨(William Robinson)이나 해리스(Jerry Harris)와 같은 이들은 지난 몇십 년 동안의 국제적 투자의 증가로 인해 초국적기업(transnational corporations: TNC)을 운영하는 이들로 구성된 초국적 자본가계급(transnational capitalist class: TCC)이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생산의 초국적화의 발전으로 인해서 이제 자본가계급이 국민국가를 뛰어넘고 있고 국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초국적 자본가계급은 기업 뿐 아니라 NAFTA와 같은 지역협력이라든가 IMF 그리고 WTO 등 다양한 국제기구를 법적 기구들을 통해 그 권력을 행사한다. 이들은 특히 회합을 통해 스스로 교류를 강화하고 조직하며 전세계적 지배를 위해 손을 잡는다고 주장된다. 1971년 스위스의 경영학 교수 클라우스 슈왑(Klaus Schwab)에 의해 설립된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WEF)이 그 예인데, 이는 처음에는 조용하고 유럽 중심적인 모임이었지만 1990년대에는 전세계의 기업가, 정부 그리고 언론의 엘리트들의 회합으로 성장했고 회의가 열리는 다보스는 이제 전세계 지배계급의 사교장으로 발전했다.

캐롤과 카슨은 세계경제포럼을 포함해서 국제상업회의소(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3자 위원회(The Trilateral Commission), 빌더버그 미팅(Bilderberg Meetings)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세계기업가 연합(World Business Council for Sustaintable Development) 등 5가지의 정책그룹을 새로운 초국적인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형성되는 공간으로 파악한다.(Carroll and Carson, 2004)

그들에 따르면 실제로 여러 초국적기업에 동시에 이사직을 지닌 글로벌 엘리트들이 이러한 정책그룹에서도 동시에 참여하며 서로간의 연대를 강화하며 각국과 국제기구의 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15명의 세계경제포럼 이사회 멤버 중 4명은 빌더버그 회의와 세계기업가 연합의 이사이며 3명은 3자 위원회 그리고 1명은 국제상업회의소의 이사로 참여한다. 또한 이들은 동시에 주요한 세계적 초국적기업의 이사를 동시에 겸하고 있다. 아래 그림은 이들 기구들과 세계적인 초국적기업의 이사들 사이의 인적인 네트웍의 정도를 보여준다.

<그림> 초국적기업과 세계적 정책그룹간의 인적인 유대

WEF: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TC: 3자 위원회(The Trilateral Commission)
BLDBC: 빌더버그 미팅(Bilderberg Meetings)
ICC: 국제상업회의소(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WBCSD: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세계기업가 연합(World Business Council for Sustaintable Development)

하지만 이런 모임을 통해 선진국 자본가들과 정치가들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고 해서 정말로 세계의 지배계급이라 불릴 만큼 이해가 일치할 것인가는 뚜렷하지 않다. 선진국 간에도 경제정책의 갈등은 존재하며 당장 나프타나 유럽통합의 경우에도 그 지배계급이 국가의 단위를 넘어서서 지배하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지역적으로 가장 통합된 유럽의 경우에도, 오랜 정치경제적 연관 그리고 국경을 없애기 위한 수십 년의 노력과 공동 통화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상당히 국민적인 상태로 남아 있으며, 유럽의 엘리트들도 아직 정책과 관료의 임명에 관해 갈등을 보여준다.

몇몇 낙관적인 학자들이 글로벌 가버넌스가 확립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이제 탈냉전의 진전과 세계화의 발전을 배경으로 이미 국내적인 이해 혹은 미국과 같은 강한 국가의 협소한 이해마저도 극복되는 전세계적 지배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Held, 1999) 이들은 G8과 같은 선진국의 협의체 등을 비롯한 다양한 조정기구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들은 비록 정치적 입장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미 제국주의의 시대는 가고 ‘제국’이 등장했다는 네그리의 주장과도 묘한 유사점을 보여주는 듯 하다.

아무튼 이른바 새로운 국제적 지배구조 혹은 가버넌스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빈발하는 금융위기의 사례에서 보이듯 뭔가 전세계적 차원에서 경제의 관리를 책임지고 관할하는 정치적 구조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내부적 갈등으로 비틀대고 있지만 새로운 국제금융 시스템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들이 발전하고 있으며, 기존의 브레튼우즈 체제를 극복하고 UN을 개혁하는 것을 포함한 진보적인 가버넌스를 만들어내자는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Hayes, 2002)

이 과정에서 선진국 자본이나 정치가 뿐 아니라 과연 개도국을 포함한 많은 세계시민들의 목소리가 어떻게 반영될 수 있을 것인가가 앞으로 전개될 전세계적 차원의 정치경제적 발전에 커다란 쟁점이 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런 변화는 시작되었다, 1999년 시애틀의 투쟁 이후 전세계 시민들이 세계화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때로는 거리에서 반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스스로 조직화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반세계화 운동과 그 전개에 대해 다음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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