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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졸레 누보’, 프랑스인의 문화적인 구별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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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졸레 누보’, 프랑스인의 문화적인 구별짓기

최연구의 '생활속 프랑스어로 문화읽기' <24>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등 외국의 풍습에서 유래한 기념일들이 요즘 젊은이들간의 새로운 풍속도가 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11월 11일은 그래도 토종 한국산인 ‘빼빼로 데이’였다. 이런 날이 되면 연인들은 가슴 설레고 즐겁겠지만, 아마도 더 즐거운 것은 초콜렛,사탕,빼빼로 생산업체와 가게주인들일 것이다.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는 날인데도, 팔아먹으려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한 고도의 상술이라는 비판들이 난무하지만 그래도 연인들 당사자들은 즐겁기만 하다. 어쨌건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는 게 좋은 건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날들은 절대 만국공통의 기념일들이 아니다. 발렌타인 데이도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만 요란스럽게 행해지고 있을 뿐이고, 토종 빼빼로데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먹고 마시는 음식 가지고 만국공통으로 치러지는 날이 있으니 그게 바로 ‘보졸레 누보 출시일’이다.

해마다 11월 셋째 주 목요일 자정을 기해 전세계적으로 프랑스산 대표 와인 보졸레 누보가 출시되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날은 전세계의 와인애호가들이 한결같이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 돼 버렸다. 본고장 프랑스에서도 보졸레누보 출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은 간절하기만 하다. 11월 셋째주 목요일이 되면 프랑스 전국의 가게나 수퍼에서는 일제히 ‘보졸레 누보 에 따리베(Beaujolais Nouveau est arrivé : 보졸레 누보 도착)’이라는 안내간판을 걸어놓고 일제히 판매를 시작한다. 올해는 11월 18일이 출시일이다.

포도주 하면 프랑스라는 것은 이제 삼척동자도 다 인정하는 공식이 돼버렸다. 보통의 와인은 오래 묵혀둘수록 맛이 깊어지고 숙성이 잘 된 와인은 몇 십만원, 몇 백만원을 호가하는 고급술이 되지만 보졸레 누보만은 그렇지 않다. 보졸레지방에서 그해 수확된 포도로 빚어진 보졸레 누보는 그해 첫 출시되는 햇포도주이다. 그래서 그렇게 요란스럽게 의미를 부여하고 특정한 날을 정해 전세계에서 같은 날 동시에 출시가 되고 있다.

보졸레(Beaujolais)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남쪽의 지역이름이고, 누보(Nouveau)는 New에 해당하는 프랑스어이다. 그러니까 '햇보졸레'란 뜻이다. 주지하다시피 프랑스산 포도주의 이름은 예외없이 수확지방의 이름을 달고 있다. 부르고뉴 지방의 포도주는 부르고뉴(영어로는 버건디), 샹빠뉴 지방의 포도주는 샹뺘뉴, 보르도 생떼밀리옹 지방의 포도주는 생떼밀리옹이다.

‘보졸레 누보’의 유래는 2차대전 직후 와인에 굶주린 보졸레 지방 사람들이 그해 수확된 포도로 즉석에서 만들어 마신 데서 시작되었다는데, 어쨌거나 오늘날 프랑스 포도주의 대표적인 상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보통 포도주는 4-10개월 이상 숙성시킨 후 코르크로 막은 병에 담아 팔지만 보졸레 누보는 탄소를 넣고 2-3개월만 숙성시키기에 비록 깊은 맛은 없지만 꽃과 과일향기가 풋풋하면서도 신선한 맛이 두드러진다. 그러니 보졸레 누보는 구입한 후 오래두지 않고 신선할 때 마셔야 제 맛이다. 보졸레 누보는 보졸레 지역과 보졸레 빌라쥬(Beaujolais village)지역에서 수확된 포도로만 만드는데 3분의 2는 보졸레 지역에서, 3분의 1은 보졸레 빌라쥬에서 생산된다.

몇 년전 작고한 현대 프랑스 사회학의 거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구별짓기(distinction)’라는 자신의 대표적 저서에서 문화적 취향과 기호의 중요성을 역설했는데, 이렇게 와인 종류 하나에도 출시일을 정하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해 놓고 세계적인 풍습을 만들어낸 프랑스인들은 역시 ‘문화적인 구별짓기’를 훌륭히 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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