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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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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70>

전격전(Blitzkrieg) (2) - 음양오행으로 살펴본 전쟁사

1940년 5월 10일 계축(癸丑)일에 개시된 독일의 공세는 5일이 지난 무오(戊午)일에 세당을 돌파함으로써 결정적인 승기를 마련한 후, 독일의 기갑사단들은 5월 20일 계해(癸亥)일에 이르러 사실상의 골인 지점이자 솜므 강이 바다로 흘러나가는 프랑스 북부 해안의 아브빌을 점령함으로써 대세를 결정지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공세 개시일로부터 당초의 목표까지 도달하는 데 정확하게 열흘 걸렸다는 사실이다. 전쟁이란 상대가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음양오행이 움직이는 기본 시간 단위인 열흘 즉 1 순(旬)만에 대세가 결정나버린 것이니 실로 신기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의 아브빌 점령으로 영불 연합군의 주력은 독안에 든 쥐가 되고 말았다.

이에 영국의 신임 수상 처칠은 모든 장비를 다 포기하고 신속하게 영불 연합군을 됭케르크 항구로 집결시킨 후 지연전을 펼치면서 영국 공군의 엄호 하에 동원가능한 모든 선박을 통해 5월 27일, 경오(庚午)일부터 6월 4일, 무인(戊寅)일까지 34만 명의 병력을 영국 해안으로 실어 나르는 필사의 탈출 작전을 성공리에 마무리한 것은 훗날을 위해 커다란 행운이었다. 사실상 그 숫자는 실질적인 영국 육군의 정예였기 때문이다.

됭케르크에서 영국군 주력을 놓친 히틀러의 군대는 다시 6월 5일에 가서 칼끝을 돌려 드디어 솜므 강을 도하하여 수도 파리를 향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미 결판은 나 있었지만, 여전히 영불 연합군은 150만에 65개 사단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독일의 124개 사단을 막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었다.

6월 9일 계미(癸未)일, 전쟁 개시일인 계축(癸丑)으로부터 30일이 되는 날, 독일은 프랑스 쎄느 강의 하구에 위치한 ‘루앙’을 점령하면서 실질적으로 전투는 종결되었다.

급기야 프랑스군과 일부 영국 원정군은 12일에 가서 포위된 채 백기를 내걸었고, 내친 김에 독일군대는 파리로 향해 몰려들었다.

결국 6월 14일 무자(戊子)일에 프랑스 수도 파리가 점령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옮겨갔지만 사실상 이 시점이 전쟁의 종결점이었다. 이 날은 독일군의 기갑사단들이 세당을 돌파함으로써 프랑스 레이노 수상이 처칠에게 ‘우리는 패배했다’고 말한 결정적인 날, 즉 무오일로부터 충(衝)이 되는 날이었으며, 전쟁 개시일로부터 36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면 이제 1940년의 프랑스 전역을 음양오행으로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1. 5월 10일 계축(癸丑)부터 6월 9일 계미(癸未) 사이는 전투 개시로부터 전투 종결까지의 30일간이었다.

2. 5월 15일 무오(戊午)부터 6월 14 일 무자(戊子) 사이는 세당에서의 결정적 돌파가 있었던 날로부터 수도 파리의 함락까지 30일간이었다. 다시 말해 세당은 파리의 명줄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3. 그리고 전쟁 개시일인 5월 10일 계축(癸丑)일로부터 20 일이 지난 계유(癸酉)일을 전후해서 영국 원정대는 바다를 통해 영국으로 구사일생의 대탈출을 감행하여 성공했는데, 히틀러로서는 일이 너무 순조롭다 보니 훗날 영국이 살아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이는 영국이 전번 글에서 밝혔듯이 물의 나라이기에 수운(水運)에 요행히도 화를 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4. 전체 전쟁 기간은 사실상 30일이었고 36일차에 가서 프랑스 파리가 함락됨으로 프랑스는 패망하고 말았다. 이렇듯 36이라는 숫자는 30이란 숫자에서 생겨난 결과가 눈앞에 가시화되는 날이기도 하다.

5. 독일은 경금(庚金)이라 했고 프랑스는 신금(辛金)이며 영국은 임수(壬水)라고 저번에 얘기했는데, 이 해의 전쟁은 경진(庚辰)년 신사(辛巳)월에 났고, 독일이 승리했으니 연(年)의 힘이 월(月)의 힘을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렇듯 이처럼 짧은 시간에 처참한 패배를 당했던 것일까? 병력과 장비 면에서는 양측이 사실상 대등했었다. 독일의 136개 사단에 비해 프랑스의 94개 사단을 중심으로 영국과 네델란드, 벨기에 합쳐서 137개 사단이었다. 탱크와 항공기도 차이가 없었다.

특히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대육군(Grand Army)이라는 전통이 있는 나라이며, 1차 대전에서도 대단한 용맹성을 떨쳤던 역전의 육군 강국이었다. 그런 나라가 어떻게 하여 한 달 만에 제대로 된 반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독일군 앞에서 무기를 내팽개치다시피 무기력하고도 유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일까?

이 전쟁의 결과를 놓고 수많은 전사가들과 군사 평론가들은 독일이 기갑사단을 집중 운용함으로써 돌파구를 열었다는 점, 천험(天險)의 아르덴느 숲과 뮤즈 강을 공병을 통해 길을 열은 독일의 기발한 기습 전략의 치밀성, 급강하 폭격기와 탱크가 조를 이룬 결과 보여준 막강한 타격력 등등 무수한 칭찬이 쏟아졌다. 급기야는 전격전(電擊戰), 즉 번갯불에 콩 튀겨먹듯이 신속한 승리를 가져온 새로운 군사교리를 독일이 개발했다고 말이 무성했다.

당시 이 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의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조국의 어처구니가 없는 이 패배를 나름대로 분석한 “이상한 패배”라는 제명의 책을 남기고 있다. (최근 출판사 ‘까치’에서 번역본을 출간했다.)

그 책에서 블로크는 프랑스의 패배 원인에 대해 신랄한 반성과 비판적인 진단을 내리고 있다.

인상적인 것으로서, 독일은 기계화된 부대를 통해 하루에 수십 마일을 갈 수 있는 기동력 있는 전쟁을 펼치고 있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19세기의 한가하고 느린 템포로서 맞섰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프랑스군이 후퇴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보다 독일의 침공 속도가 더 빨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리듬과 템포에 대한 감각이 전혀 달랐다는 애기이다.

또 하나 1938년 쇼비노 장군이 출판한 “침략이 아직도 가능한가?”라는 책에 대한 지적이다. 당시 프랑스 군대는 기술의 발전으로 20세기 들어 방어가 공격보다 훨씬 유리한 전쟁 수행방식이라는 사상에 물들어 있었는데, 이 책은 바로 그런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지난 1차 대전 당시 기관총과 강력한 화포, 콘크리트 참호의 등장으로 공세를 취하는 쪽이 더 힘겨웠고 피해가 컸었다는 점, 그리고 장차의 기술 발전은 그런 추세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는 것이기에 앞으로 더 이상 타국을 침공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같다는 것이 그 책의 주된 논조였다. 이는 당시 프랑스가 방어에 기울어져있던 풍조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블로크는 방어가 유리하다는 상황 논리 뒤에 숨어있는 유약한 정신을 통렬히 공박하고 있다.

그러나 왜 프랑스가 방어에 치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었다.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 두 제국은 지난 1차 대전 당시의 엄청난 인명 피해로 인해 전쟁만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심리가 지배적이었고, 프랑스의 경우 블로크의 말처럼 좌와 우의 대립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던 것이 그대로 국방 정책에 투영된 것이 바로 방어적 군사교리였던 것이며 그 상징적 존재가 바로 마지노 국방장관의 이름을 따 붙여진 마지노 방어선이었다.

따라서 마지노 방어선이 이번 전쟁에서 하등의 소용도 없었다는 사실은 당시 프랑스를 풍미하고 있던 시대정신이 얼마나 허구에 가득 차 있었는가를 말해주는 교훈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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