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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똥이요 똥이 곧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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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똥이요 똥이 곧 밥이다

김지하 달마展-가을에서 봄까지 <9>

가을에서 봄까지(題字 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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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시인들이 생태시, 환경시, 생명시를 쓴다. 그들의 시에 대한 이론이나 생각은 대체로 불교쪽이다.
불교의 어떤 내용들이 그들의 관심사인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어렵다.
쉽게 말하면 ‘밥이 똥이요 똥이 곧 밥이다’가 된다.
이것도 어려운가?
당연히 어렵다.
왜냐하면 밥이 똥일 리 없고 똥이 밥일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 불교 신자는 천만명이 넘고 아메리카는 백칠십만명이 넘을까? 또 수천명이나 되는 젊은 시인들은 모조리 불교쪽으로 기우는 것일까?
요컨대 생명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은 마음, 즉 뇌활동과 똑같이 이중성이거나 이진법이다.
‘밥이 똥이요 똥이 곧 밥이다’라고 하면 ‘어렵다’고 반응하고 ‘색즉시공 공즉시색’ 하면 ‘더 어렵다’ 대답하는 젊은이들도 바로 그 생명, 그 뇌활동의 모방인 컴퓨터나 디지털 코드가 맨날 ‘온’ 아니면 ‘오프’요 ‘오프’ 아니면 ‘온’이며 ‘노오’ 아니면 ‘예스’요 ‘예스’ 아니면 ‘노오’인 데에는 ‘어렵다’ 소리를 안 한다.
생명을 ‘에코’라고 부른다.
에코와 디지털의 결합이 ‘유비쿼터스 시대의 콘텐츠’라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간단해졌다.
‘너희는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슬기로워라!’ 예수의 말씀이다.
‘색(色)은 공(空)이요 공(空)은 색(色)이다.’ 부처님 말씀이다.
‘밥은 똥이요 똥은 곧 밥이다.’ 내 말씀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나 부처의 말은 쉽고 또 디지털이니 에코니 하는 말들도 어렵지 않은데 김지하가 떠들면 순식간에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도덕적 후광(後光)이 없어서다.
그리고 기계적 엄밀성을 가진 과학이 아니어서다.
그러니 디지털이고 에코고간에 다 집어치우고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한다.
‘밥을 먹은 지 오래 되면 똥이 되고 똥을 논밭에 뿌려야 쌀과 채소가 생겨난다.’
이것도 어려운가?
그렇다면 달마 전시를 집어치워야겠다.
밥상을 순식간에 엎어버리고 그것을 순식간에 책상으로 변경시키는 일이 시인의 일이요 문인화나 달마 그림이니 그 과정을 주욱 설명하는 일이야 다른 사람에게, 이론가, 학자에게 맡겨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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