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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없이 서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유경의 '문화산책'] <21>서촌 4 - 옥인동 송석원의 윤덕영 한옥

옥인동 47번지 송석원 구역에는 프랑스식 건축 벽수산장 말고 여러 채의 한옥이 있었다. 1921년 이래 지형도에 그 위치가 나오는 99칸 한옥들 및 현재 윤덕영 한옥(윤씨 한옥)으로 알려진 집 한 채는 송석원에 포함된 건물군이다.

그중 '윤덕영 한옥'은 아주 장식적인 건평 77평의 ㅁ자 한옥으로, 폭 2-3m의 넓은 돌계단 36개가 ㄱ자로 꺾여 올라간 진입로부터 시작해 162평 터에 동북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송석원의 정문인 돌문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고 벽수산장과도 가까운 거리이다.

▲ 옥인동 송석원 터에 남은 건축 윤덕영 한옥의 돌계단 진입로와 건물 전면의 일부. 집은 많이 퇴락했지만 사진에 보이는 부분만으로도 보통 집이 아니었음을 알게 한다. ⓒ 이순희

계단 입구와 중간 계단 참에는 송석원 정문의 돌기둥과 비슷한 장식돌 2개가 어그러진 채 서 있다. 벽면의 돌을 쓴 장식이 화사하고 지붕 및 처마장식, 고급 돌자재 등으로 미루어 궁궐건축이라고 보기도 한다. 무엇에 쓰던 것이었는지 팔각 돌받침 같은 육중한 돌이 주변에 나뒹군다. 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아름다운 한옥일 것이다.

주변에는 돌벼랑이었다가 근래에 깎여나간 자리들이 보이고 무성하던 소나무들은 사라졌다. 계단 앞쪽으로 인왕산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을 건너는 다리가 나 있었는데 돌다리 부재만이 동네 여기저기 남고 물길은 모두 아스팔트로 덮였다.

▲ 윤평섭의 논문 '송석원에 대한 연구'에 발표된 1940년경의 송석원 배치도. 한옥(지금의 윤덕영 한옥), 99간 한옥, 2층 양옥(지금의 박노수 미술관), 과원 댁과 다리, 냇물 등이 나와 있다. ⓒ윤평섭
이 한옥은 그동안 '윤 황후 집'이란 이름으로 1977년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1997년 '민원제기가 계속되고 붕괴위험이 있다'하여 지정해제 되었다. 하지만 지금껏 15년이 지나도록 주민들이 거주 중인 집을 '붕괴위험' 만 내세워 문화재 지정해제를 한 서울시의 처사는 문화재보존 측면을 더 고려했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윤덕영 한옥 위쪽으로는 역시 고급하게 다듬은 돌계단 너머로 99칸 한옥군의 일부인 듯한 기와집의 잔해들이 허름해진 양식 주택들의 부속품처럼 혼합된 채 골목골목 흩어져있다. 날렵하게 솟은 누각 지붕의 선, 돌계단의 소맷돌, 연이어진 기와지붕과 길게 다듬은 장대석 주초 등은 민가 살림집이 쓰는 것 이상의 최고급 자재들이다. 높은 데서 보면 이 일대 이끼 낀 지붕이 함께 모여 있다.

6.25 이후 윤덕영 한옥이 있는 송석원 구역 전체가 피난민의 무허가 건축으로 뒤덮였다가 시간이 지나며 불하 등의 방법으로 양성화되었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 간신히 통과할만한 이 집 주변의 좁은 골목길은 전란으로 어지럽던 시절에 형성된 동네의 흔적이다. 도시행정은 산위까지 들어선 수많은 판잣집들을 걷어버리고도, 동네를 이렇다 하게 정비하지는 못했다.

5년 경력의 한 택배원은 '이곳 47번지 택배는 집 찾느라고 시간이 걸린다'고 말한다. 돌산 위에 들어선 집들은 현대적인 주거구조를 갖추기 어려워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게 사실이다.

'윤덕영 한옥'도 이때 이후 현재까지 7가구가 대지를 공동소유, 건물은 26평, 12평, 7평, 5평 등으로 분할해 소유하고 있다. 집주변을 돌아가면서 난 각 집의 출입구로 뚫리고 천막으로 뒤덮인 지붕 등을 보면 생존의 모습만이 부각될 뿐이다.

하지만 이 집은 1875년 건물로 추정되는 오래된 집이자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고급 한옥 건축이다. 윤덕영은 송석원 내 한옥에서도 거처했다는데 지금의 윤씨 한옥 내력에 대해선 이렇다 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그의 서자(庶子)가 살던 집 '과원 댁'은 송석원 구역 내 능금나무 밭 안에 따로 있었다.

▲ 윤덕영 한옥 층계참의 돌장식과 전면의 구조. 전문가들이 문화재로서 복원 1순위로 꼽는 이유를 말해주는 구조이다. ⓒ 이순희

▲ 처마 밑의 장식과 이층 높이에 있는 격자문 창 ⓒ 이순희

▲ 처마 밑 장식의 세부 ⓒ 이순희

▲ 지붕 아래에도 여간해 못 보는 구조물이 있다. ⓒ 이순희

가스보관창고며, 에어컨 실외기에 살림 그릇 등 온갖 시설에 가려져 있긴 해도 윤씨 한옥의 앞면만은 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궁궐 말고는 서울 어디서도 이만큼 섬세하고 당당한 한옥은 보지 못했다. 화려하고 사치한 거처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 문물의 중심이 되는 서울에서 세련된 손으로 만들어낸 집이라는 증표 같았다.

윤평섭 논문의 송석원 배치도에는 흩어진 건물들을 넓은 영역의 숲이 에워싸고 있다. 느티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버드나무, 그리고 개나리가 무척 많다. 다리가 세 개 놓여 있고 200평의 네모난 연못도 있다. 윤덕영은 벽수산장을 짓고 그 인문적 역사를 기록한 '벽수산장 일람'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재개발의 난문제가 해결된다면, 이 집은 대표적인 한옥 건축의 하나가 될 것이다.

서울시 중구 필동 남산한옥마을에 이 집을 그대로 복원한 건물이 있지만, 진입로의 인상적인 돌계단도 제대로 없고 생경한 집과 이웃하여 달랑 들어선 기와집 한 채만으로는 셋트장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집은 옥인동 47번지에 36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간 자리, 김정희의 송석원 바위글씨를 어딘가에 지닌 채 인왕산 가까이 있을 때 역사에서 오는 중후함과 진짜 사람이 살았다는 공기를 느껴볼 수 있다.

1984년 송석원 연구 논문을 낸 삼육대 윤평섭 교수도 "이 오래된 집은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라는 의견을 냈다. 건축가 조정구 씨는 이 집의 전면과 위에서 본 모습을 그리고 답사기를 올렸다. 그 도면을 보면 윤씨 한옥은 단순한 ㅁ자가 아니라 돌출된 부분이 있고 지붕 모양은 조각처럼 솟아올라 있다.

건축가 김원 씨도 "이 집은 지금 전체적으로 보존이 결정된 서촌 전체의 수백 동 한옥들보다도 가장 우선적으로 보존해야 할 한옥 제1호라고 봅니다. 한때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재개발을 위해 문화재 지위에서 해제되어 지금은 철거 및 퇴출위기에 있습니다. 이 집을 아는 모든 문화재 관련인사들은 찬탄을 아끼지 않는 수작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생명이 경각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 도와주세요" 라는 글을 올렸다.

서울대 로버트 파우저 교수가 이끄는 서촌주거공간연구회는 송석원 일대가 서촌 문화유산의 보고인 만큼 그 일부인 윤씨 한옥도 보존해야 된다는 주장을 편다. 1950년대까지도 남아 있던 김정희의 송석원 바위글씨는 이 한옥 주변에 있었으리라고 한다.

"이인문 그림이나 벽수산장 사진으로 보건대 송석원 글씨가 새겨진 4-5미터 높이의 동향한 바위 절벽은 옥인동 통틀어 세 군데 있다. 그중 윤씨 한옥 좌우의 바위벽에는 오래전의 송석원 글자와 소나무들을 기억하는 주민도 있다"고 김한울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사무국장은 썼다.

한 주민의 말은 "그 바위 위에 집을 지으면서 소나무 여러 그루는 다 없애고 바위도 가려졌거나 손상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옥인동의 절반가량 집들이 재개발을 추진하면서 윤덕영 한옥과 99칸 한옥의 부분들이 한중간에 놓였다는 점이다. 관계자는 "윤씨 한옥은 남산 한옥마을에 복제하여 지어놨다. 서울시는 왜 그럴 능력이 없는 주민더러만 보존을 책임지라는 것인가. 그토록 보존가치가 높은 집은 서울시가 사들여 관리하는 것도 방법 아니겠나"고 했다. 서촌에는 이항복 대감 집 등 서울시가 소유한 몇 채의 한옥이 이미 있다.

하지만 서촌과 옥인동이 사랑받는 이유는 인왕산과 일체가 된 데서 만들어진 동네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품격을 위해, 아마 어떤 값을 치러도 잃어서는 안 될 서울의 오래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네, 윤씨 한옥 앞 어느 집 마당에는 김정희가 살았던 동네 통의동 백송의 후손나무가 한그루 와서 50년째 자라고 있기도 하다. 김정희가 200년 전 송석원 시사를 찾아 이곳에 온 것처럼, 통의동 백송도 따라온 것인가?

▲ 벽수산장과 구름다리로 연결됐던 박길룡 건축의 3층 양옥. 현재 박노수 미술관이 되었다. 집뜰 언덕 위로 송석원 터를 향해 난 문이 있었다. ⓒ이순희

옥인동에는 윤덕영의 딸과 사위가 살던 양옥집 한 채도 남았다. 어떠면 대지가 줄어든 듯 보이기도 하는 이 집은 냇물 건너 구름다리로 송석원 벽수산장과 연결되었다. 1938년 양식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반지하 포함 3층 건물이다. 주인이 바뀌면서 1972년부터 동양화가 박노수 씨가 살다가 2011년 종로구에 박노수 미술관으로 기증됐다.

이 주택과 송석원을 연결하는 무슨 고리가 없는지 들여다보다가, 벽수산장 화재 이후 가져온 난간석과 둥근 돌 테이블을 확인한 것은 수확이기도 했다. 송석원의 문기둥 몇 개와 다리 기둥, 붉은 벽돌 아치문도 옥인동 한 골목에 흩어져 남아 있다. 돌기둥 문으로는 차가 드나들고 아치문은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었다는데, 문 안쪽 끝에 벽수산장이 헐린 이래 새로 들어선 네 채의 주택들 지붕이 조금 보인다.

▲ 옥인동 옛날의 냇물이 흐르던 곳 근처에 돌다리를 형성한 기둥 두기와 담 밑으로 두 개의 난간석이 남아 있다. ⓒ 이순희

돌문 근처 또 다른 주택 주차장에도 난간석과 다리의 돌기둥 2기가 서 있었다. 99칸 한옥을 구성했던 돌석재들도 해체되어 이웃한 여러 집의 건축자재로 쓰인 게 보인다. 둥글게 다듬은 소맷돌 있는 돌계단 위로 베니어판(합판) 가림막이 쳐진 풍경 등 송석원의 잔해는 만신창이가 된 윤씨 한옥과 이들 돌자재 뿐이지만 '옥인동만이 가진 역사'임에 틀림없다. 그 안에는 송석원의 유산만이 아니라 함께 국가의 운명이 바뀌던 즈음의 시대사도 깃들어 있는 것이다.

박노수 가옥을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다. 부인 장신애 여사가 회상했다.

"이 집에서 사는 동안 집 뒤의 동산으로 올라가 쪽문을 통해 나가면 언덕 위 송석원 터까지 산책할 수 있었습니다. 송석원이라는 암각글자가 뒤뜰 너머에 있다고 해서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여기선 종래 못 찾았구요. 1970년대 초만 해도 이 동네서는 우리 집이 제일 끝 집이고 주변은 전부 산등성에 집도 거의 없었지요. 지금은 없던 길도 많이 생기고 지형이 너무 변해서 옛날에 어땠다고 말하기도 어려워요.

이 집 마당의 돌은 박 선생이 워낙 돌을 좋아해 강남 신사동이 허허벌판일 때 그곳 돌 가게에 가서 사들여 기중기로 날라다 며칠씩 걸려 배치해 놓은 것들입니다. 원래는 마당에 돌이 없었습니다."


이 집은 박 화백이 집과 함께 기증한 그림 500점, 수석 369점을 포함한 박노수 미술관으로 꾸며져 올 가을부터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집 현관에는 여의륜(如意輪, '뜻대로 된다'는 뜻)이라는 추사 글씨를 전각한 현판도 걸렸다. 추사 김정희의 흔적이 이렇게나마 과시 되는 것도 옥인동다운 일이다.

▲ 동양화가 이상범, 누하동 한옥 마당과 담 처리. 장독대와 화분이 있지만 화가 생존 시의 유품은 아니다.

전통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인가 싶게 이 동네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산다. 누하동 골목에는 이상범의 한옥화실도 남았다. 그가 1945년 '해방된 산하' 6폭 병풍을 그린 것은 이 집에서였을 것이다. 화가는 1972년 작고하고 이 집은 수리를 거쳐 말끔해졌지만 화가의 그림 하나, 사진 하나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얌전한 한옥의 이중 미닫이문 달린 몇 개의 방과 다락, 부엌, 마당이 한눈에 보이는 구조에서 화가가 어떻게 움직였을 지가 조금 짐작됐다.

마루 앞에 경계를 이루는 이웃집 담 벽면은 그대로 두고 마주 보기 무미건조하니, 여러 문양을 넣어 회벽을 친 것 이 반쯤 떨어져 나간 것 같다. 이상범 화백의 그림이 아니라 집 짓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인 듯한데, 아무 설명이 없어 언제 적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이 집은 서울시가 관리한다.

화가 이중섭도 서촌에 살았고, 가고파의 작곡가 김동진의 집터는 누상동 연립주택 밀집지역의 한 빌라로 바뀌었다. 시인 이상의 집도 통인동 길가에 지붕만이 남은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상이 바라본 지붕 위 하늘, 그가 이 집을 오가며 생각하며 다닌 길 등이 있는 그대로가 더 좋아 이 집을 헐고 현대건축을 짓는 안에 반대했다.

사람들이 모이는 방 이름은 이상이 경영한 다방 이름을 따서 '제비 다방'이다. 이 집 주변에선 어떤 숨결 같은 게 느껴진다. 집주변은 모두 자그마한 개인 가게들이지만 성황을 이룬다면, 곧 자본이 와서 점령해 버릴만한 매력적인 골목길이다.

▲ 지붕만 남은 시인 이상의 통인동 집. 이 집과 주변의 작은 가게들로부터 서촌의 분위기가 배어 나오는 골목에 있다. 현대식 건물을 새로 짓느니 많은 이들은 이상 시인의 숨결이 어느 한구석이라도 남아 있는 현재 그대로의 모습을 더 원한다. ⓒ이순희

서촌이 그리 좋았는지 이상범은 한옥 현판에 '누하동천'이라고 휘호를 써서 걸었다. '뜻대로 이뤄지는 집(여의륜, 如意輪)'이라고 현판을 걸은 박노수는 그의 제자이다. 쌀쌀한 2월 화가 이영복 씨가 인왕산 들어가는 길 안쪽 바위산을 지날 때 말했다.

"2월 말 바위틈에 잔설이 아직 남아 있고, 그 사이로 마른 나뭇가지들이 삐죽삐죽 솟아있는 풍경이 좋아요. 깨끗한 바위와 양명한 자리가 아주 좋은 기를 주는 것 같아요. 광화문 한복판에서 1km도 안 떨어진 곳에 이런 환경이 있다니. 아침마다 여기로 산보 나오고 조깅합니다. 추울 때도 비 올 때도."

조선조 내내 인왕산 풍광에 반해 글과 그림과 건축을 남긴 수많은 이들의 정서는 2012년 지금도 이어지고 있음이 자연스럽게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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