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각(味覺)은 사람의 감각 중에서 가장 종합적인 감각이다. 맛을 본다는 것은 그저 맛이 있으면 먹고 맛이 없으면 먹지 않는 그런 성질의 일이 아니라, 보다 더 근원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다.
인류가 수 백 만년을 진화해오는 동안 굶주림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실은 이 시간에도 지구상의 많은 인간들이 굶주림으로 시달리고 있다. 맛을 본다는 것은 굶주림을 모면하기 위해 어떤 대상이 먹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먹어도 큰 탈이 없겠는가를 판별하는 것이 바로 맛을 보는 것이고 바로 미각이다.
앞서 미각은 종합적인 것이라 했는데, 이는 미각이 단순히 혀로만 느끼는 감각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먼저 모양과 색을 보고 구미(口味)가 끌리는지를 파악하며, 손으로 만지면서-오늘날에는 대신에 수저나 포크, 나이프를 사용하지만- 그 음식의 느낌을 파악한다.
그리고 모든 음식은 입에 들어오기 직전에 이미 코를 통해 그 음식이 풍기는 냄새를 느낀다. 대부분의 맛있는 음식은 사실 맛보다는 이전에 냄새가 좋은 법이다. 감기로 인해 코가 막힌 사람은 음식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입으로 들어오기 전에 먼저 입술을 통해 다시 한번 그 음식의 촉감을 느끼며, 혀로 맛보기 이전에 이빨로 씹으면서 다시 한번 그 음식의 씹히는 맛을 즐기게 된다.
그런 연후에야 혀로 음식의 맛을 보는 것이니 맛보기는 최종적으로 작용하는 우리의 감각 작용인 것이다. 그런 연후에도 미각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음식이 목을 넘어갈 때의 촉감 역시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목 넘김’이 좋은 음식 역시 맛있는 음식이다.
그리고 가령 아삭아삭한 맛이 좋다고 할 때, 이는 혀를 통한 미각이 아니라 사실은 이빨을 통한 촉각, 그리고 귀에 들리는 소리이니 청각에 해당된다. 또 커피 맛을 볼 때는 그 자체의 맛보다는 그 냄새가 뛰어나기 때문에 커피를 즐기게 되며, 와인 역시 혀에 감도는 맛 이전에 그 향취가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미각은 우리가 지닌 모든 감관의 종합적인 활동이며, 다만 그 주된 부위는 입안의 혀인 것이다. 혀는 오행 상 불에 해당된다. 그리고 불의 적극적 의식 활동이면서 종합적 작용인 것이다. 음양오행에서 종합은 토(土)에 해당되기에 미각 역시 토(土)가 된다.
미각은 그리고 사람의 식욕과 건강 상태에 따라 언제나 달라지며 같은 맛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같은 음식이라도 시장한 정도에 따라 맛은 천양지차가 나며, 건강 상태에 따라서도 맛을 느끼는 것은 엄청나게 달라진다.
우리 체내의 염분이 모자랄 경우, 짠 음식을 먹어도 그다지 짜게 느껴지지 않는 법이며, 배고픈 정도에 따라서 참고 먹을 만한 경우도 있고 때로는 짜서 도저히 먹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시장기가 반찬인 것이다.
먹는다는 행위, 그것은 우리가 개체를 유지보존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활동이며, 그를 위한 감각활동이기에 미각은 다른 인체 감각과는 그 성질이 많이 다른 것이다.
배고프다고 해서 또 몸이 다소 불편하다고 해서 시각이나 청각, 촉각 등이 크게 달라지는 법은 없지만, 후각만이 배가 고프면 민감해지는데, 이는 미각과 관련이 크기 때문이다. 반면 미각은 우리 몸의 상태를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일종의 바로미터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에 몸 상태에 따라 미각은 크게 달라지는 특이성을 보여준다.
인간이 가장 즐기는 맛은 뭐니 해도 역시 단맛이다. 단맛을 느끼게 당분은 사람이 필요로하는 열량을 가장 빠른 시간에 공급해주는 영양소이기 때문이다. 최근 단맛을 싫어하는 아주머니들이 많은데 이는 사실 열량 공급의 과다로 인해 비만해질까봐서 그런 것이다.
아울러 쓴맛과 단맛은 그 자체적으로 좋은 조화를 이루는데 바로 커피에 설탕을 넣어 먹는 맛이 그것이다. 쓴 것은 오행이 불이고 단맛은 오행이 토(土)이니 화생토의 상생 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물론 미식가들은 커피 그 자체를 즐겨서 설탕을 넣지 않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설탕이 들어간 커피를 즐긴다.
그런가 하면 매운 맛과 단맛 역시 좋은 조화를 만드는데, 그 맛이 바로 매운 음식이 주는 매콤 달콤한 맛이고 바로 고추장 맛이다.
맛은 이런 식으로 오행의 상생관계를 따라 좋은 조화를 이룬다.
그러면 이제 그동안 얘기해 온 다섯 가지 감각들의 관계에 대해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시청각 교육이란 것이 있다. 기존의 전통적인 교육 방식보다 그 학습효과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인간에게 있어 시각과 청각이 여타 감각에 비해 더 발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멀티미디어 시대라고 하지만 여전히 그 주 내용은 오디오와 비디오인 것이다.
청각은 목(木)이고, 시각은 화(火)에 해당되니 시청각이란 오행 중에서 목화에 해당된다. 우리가 사물을 파악할 때, 가장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과 정보를 공유하기 쉬운 것이 바로 시청각 정보라는 점이다.
소리는 사람의 감정에 직접 호소하고 모습이나 모양은 가장 이지(理智)적인 정보를 전달한다.
반면 냄새는 대단히 추상적이다. 사실 냄새를 표현하는 어휘는 없다. 싫은 냄새에 대해서는 ‘구리다’ 또는 ‘역하다’는 표현이 있지만 이는 악취의 성격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고 그저 싫다는 감정의 표현일 뿐이다. 또 좋은 냄새에 대한 표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달콤한 냄새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미각적 표현일 뿐이고, 향긋하다는 말은 향기가 좋다는 말이니 그 또한 냄새의 개성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들은 냄새를 맡을 수는 있지만, 표현하는 어휘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냄새라는 것은 소리처럼 귀에 들리는 것도 아니요,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뿐이니 냄새는 추상(抽象)이고 따라서 오행이 수(水)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시각 정보가 구상(具象)이라면 냄새는 추상(抽象)이기에 이는 불과 물의 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금(金)에 해당되는 촉각은 대단히 구체적이지만 그 역시 모양이나 모습과 같은 시각의 명증(明證)한 면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라는 표현처럼 촉각은 원천적이고 구체적이면서도 애매모호한 면을 지니고 있다.
이는 촉각이 구체적이면서도 제한적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렇기에 촉각을 표현하는 어휘 또한 많지 않다. 엄마와 아기가 서로 껴안고 살을 맞대고 있을 때 두 사람 간에는 남들이 알 수 없는 내밀(內密)한 애정이 오가고 있는 것이다. 즉, 촉각은 확실하면서도 타인과는 공유하기 어려운 내밀성을 지녔다.
시각은 불이고 촉각은 금이니 그 또한 반대되는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얘기하지만, 미각(味覺)은 이 모든 것의 종합이고 그렇기에 그것은 토(土)의 성질을 지닌다.
이처럼 오관(五官)과 오감(五感)은 상호간에 상생상극 관계를 이루면서 우리가 외부 세계를 파악해나가는 도구이자 매체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리고 생명체들은 오랜 진화 기간을 통해 이 다섯 가지 감각을 발전시켜 왔으니 그 긴 세월로 볼 때, 생명체가 외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 더 이상 필요한 감각적 대상은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은 이성(理性) 또는 로고스라는 것을 의제하고 그것으로서 만물의 영장인 근거를 찾아왔다. 하지만 이는 인간 스스로의 편견일 수도 있다.
이성이란 의식의 종합적인 활동일 뿐, 실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모두 감각기관의 발전과 진화를 통해 지구상에서 지금껏 생존해왔다는 점에서 우열의 차이를 인정하기는 어렵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인간이 긴 진화 과정에 있어 인류가 이루어낸 능력과 성취를 따질 때, 인간의 이성이란 추상적 의제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미미한 것이며, 그 성과물의 99.99 %가 바로 이 감각기관이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말함으로써 서구 이성주의 철학의 기초를 다졌지만, 실은 그것이야말로 착각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느낌으로써 존재의 근거를 찾아야하는 것이며, 인간진화의 끊임없는 발전 과정에서 이루어낸 이 다섯 가지 감각의 총화를 볼 때 실로 그것을 감각의 제국이라 칭해도 그 경이를 다 표현하기는 어렵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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