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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正義)' 운운은 '희망의 미로(迷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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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正義)' 운운은 '희망의 미로(迷路)'

[남재희 칼럼] 우리 주변의 불의(不義)에 먼저 관심을 갖자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 독서계에 선풍을 일으켰던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책을 한국어 번역판으로 내고 다시 서울에 온다고 한다. 정의 문제가 그렇게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은 그것이 시대적 명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불의란 무엇인가>라는 책도 나왔다.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와이즈베리 펴냄);. ⓒ와이즈베리
운이 매우 좋아, 나는 1980년대 중반에 미국 콜로라도주의 로키산맥 중허리에 있는 마을 아스펜에서 열리는 아스펜 세미나 "정의와 사회"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아스펜은 미국에서 알아주는 하계 휴양지. 시원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이 참 아름다운데 그 가운데서도 자작나무의 일종인 아스펜의 작은 잎들이 바람에 한들거리는 것이 참 귀엽다. 계곡에는 비버가 나무토막으로 집을 짓기도 하고. 워싱턴에 있는 아스펜 인문연구소에는 현재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이 대표로 있는데 그는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쓴 저명 언론인이다.

그 세미나에 미국의 교수들, 판사들, 교도관들-주로 율사(律師)들이 20명쯤 왔는데 거기에 아주 젊었던 마이클 샌델 교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州) 대법원의 원장인 여성이 사회를 보고.

우리나라 경제 단체가 아스펜 인문연구소에 헌금을 많이 해서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던 신병현 씨가 나를 추천해주었다. 나는 국회 예결위 정책질의에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기자에게 들은 유머를 소개하면서 그를 추궁하였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대치하던 때, 수에즈 운하 둑 뒤에 이집트 군이 포진하였다. 헬리콥터에서 새털을 떨어뜨리고 그 새털이 땅에 닿는 것을 신호로 일제 공격을 개시한다는 지시. 그런데 새털을 떨어뜨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공격을 개시하지 않는다. 가서 보았더니, 이집트 군인들이 모두 하늘을 향해 누워 새털을 훅 훅 불어 올리고 있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아보았더니 그 <타임> 기자는 유대인이었다.)

그때 처음 거론되기 시작한 민간주도 경제 운운이 혹시나 그 유머처럼 정부의 책임회피책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꼬는 질의인데, 그것이 미국에 오래 체류했던 신병현 씨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아스펜 세미나에 가기에 앞서 미리 읽어야 할 것으로 많은 서적·자료들이 우송되어 왔다. 셰익스피어 희곡 <Measure for Measure(자에는 자로)>가 있고, <Moby Dick(모비 딕)> 작가 허만 멜빌(Herman Melville)의 중편 <Billy Bud, Sailor (水兵 빌리 버드)>가 있으며, 그밖에 다수의 논문들이 포함되어 있어 모두 읽는 데 꼬박 몇 주가 걸렸다.

미국 경험이 짧은 나에게 그 세미나는 얼마나 어려웠던지. 프랑스에서 온 법률가나, 이스라엘에서 온 교수는 같은 서양권으로 활발했으나 유일한 동양인인 나는 힘겹기만 했다. 영어도 영어지만, 지적 정교함에 있어 둔하여 따라잡기가 구름 잡는 것만 같았다. 한국인들이 서양인에 비해 논리구사의 정교함에 있어서 뒤처지는 것 같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영어권에서는 sophistication(교양, 세련)의 차원으로 보기도 한다.

나는 어렵게 용기를 내어 한국에서의 정의의 문제로는 토지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의견을 말했다. 한정된 토지가 투기의 대상이 되어 그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것이 한국에 있어서의 사회 정의 문제의 주요 쟁점이라는 설명을 하며 토지의 공공성을 강조하였다. 아마 그들은 오래된 헨리 조지의 이론을 이야가하고 있구나 했을 것이다.

2주간의 세미나에서 많은 것을 깨우쳤다. <Billy Bud, Sailor>의 영화를 상영하고, 베르톨루치 감독의 <1900년>이란 영화도 보면서 토론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세대 간 정의란 개념도 그때 처음 알았다. 요즘은 당대에 부채를 많이 지는 것 등이 후대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라고 세대 간 정의를 말하지만 그때 나는 미처 몰랐다.

마이클 샌델보다 먼저 존 롤즈의 <정의론>이 소개되었고, 샌델의 책으로 '정의론'의 논의가 활발해졌는데, '정의론'만 논의하고 거기에 맴도는 것은 '사랑의 미로'라는 대중가요처럼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사랑의 미로여"에 빠지는 것 같다. '사랑의 미로'보다 '희망의 미로'가 더 적절할 듯도 하다. 거기에 빠지면 여간해서는 뚜렷한 결론도 얻지 못한 채 헤어나지 못하고 헤맬 것 같다. '정의론'의 미로에 빠지게 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사태를 애매하게 하기 위해 신비화(애매화) 한다는 비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정의가 아니고 불의(不義, injustice=부정·불공평·불공정)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실제적·현실적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아마르티아 센 하바드대 교수(Amartya Sen, 1933~ : 인도의 경제학자. 사회적 선택이론(공리)과 후생 및 빈곤 지표, 기아문제에 대한 실증분석 연구 등을 통해 기아와 빈곤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경제학의 틀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여 199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편집자)는 한국에서의 강연에서 "완전한 정의를 모색하기보다는 확실한 부정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했는데 옳은 이야기다. 불의의 문제는 구체적이다. 따라서 구름을 잡는 듯 추상적이지 않고 행동의 가이드라인이 비교적 쉽게 나온다.

마이클 샌델은 선진 미국에서 성장한 학자이고, 아마르티아 센은 후진인 인도의 벵골(오늘날의 방글라데시) 출신이라는, 체험 배경이 중요한 것 같다. 한 쪽은 풍요롭고 비교적 합리적인 사회에서 성장했으며, 다른 한 쪽은 홍수·한발·기근·빈곤·착취의 가혹한 현상을 보며 자란 사람이다.

불의의 문제는 도덕적 분노에서 발화한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가까이는 4.19혁명부터 시작하여 6월항쟁까지의 경과를 살피건대 그렇다. 마이클 샌델의 나라에서는 흑백문제, 베트남전 반대 문제로 큰 진통을 겪었다. 오늘날에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로 고민을 해야 할 것인데 아직도 미미하다. 유대인의 로비가 너무나도 강력해서 그럴 것이다. 그들은 moral outrage, moral indignation(도덕적 분노)이란 표현을 항용 쓴다. 정의·불의의 문제는 역시 분노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 <Injustice : The Social Bases of Obedience and Revolt> (Barrington Moore, Jr. 지음, Random House Inc (T) 펴냄) @www.amazon.com
그렇게 하여 '불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우연하게 손 가까이에 배링턴 무어 (Barrington Moore, Jr.)의 <Injustice : The Social Bases of Obedience and Revolt(불의, 복종과 저항의 사회적 기반)>라는 책이 있어 읽어 보았다. 그는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진보적 성향의 학자인데 그 책을 저술할 때(1978년) 하버드 대학에 있었다. 내가 기대했던 만큼의 내용을 발견하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한 곳에서는 마음에 들어오는 구절을 읽었다.

"결론적으로, '좌(左)냐, 우(右)냐'하는 선택은 '정부 권력이 더 합리적이냐, 덜 합리적이냐' 하는 것보다는 의미가 덜 하다 할 것이다."

쉽게 말하여, 상표(商標)가 아닌 상품(商品) 자체가 중요하다는 이야기. 많은 역사적 사례들을 연구한 후의 결론인 것 같다.

▲ 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대표단 회의에 참석한 조준호, 심상정, 이정희, 유시민 공동대표(왼쪽부터). ⓒ뉴시스

우리 정당들을 예로 들어 말해보면, 새누리당은 보수, 민주통합당은 개혁, 통합진보당은 진보라는 상표를 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상표만 보고 단정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지금 통합진보당은 비례대표 후보의 선거에서 중대한 범죄라 할 엄청난 부정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져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보수정당보다 더욱 도덕성이 강조되는 진보정당에서 대규모의 부정 투표란 일대 타격을 입었으니 사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민주통합당은 지도부 선출에서 '단합'이 아닌 '담합'을 해서 '공작정치'·'기획정치'의 꼼수를 부려 국민의 혐오를 사고 있다. 민주정치의 역동성이 꺾였다. 구식 표현으로 "교(巧)가 승(勝)하다"는 게 있다. 그렇게 교가 앞서는 정치를 하여서는 국민들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

새누리당은 당명을 바꾸고, 당의 색깔을 기습적으로 대담하게 빨간색으로 하며, 경제민주화 운운의 정책을 내걸어 MB의 늪은 얼마간 벗어난 듯도 한데, '1인 체제'란 안팎의 비난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민주통합당이나 통합진보당은 국민의 지지가 증대하여 방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국민의 지지는 이미 주머니 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지.

선거에서 국민 몰이를 하며 마치 그물 속으로 몰려 들어온 멸치 떼처럼 되어 버린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 국민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그물 속에 갇힌 게 아니다. 언제고 다시 그 당을 버릴 수가 있다.

제일 심각한 게 통합진보당. 문자 그대로 뼈를 깎는 반성을 해야 한다. 바닥에서 다시 일어나는 각오가 필요하다. 지금 세상에 비밀을 오래 지킬 수는 없는 일이다. 경기동부연합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진 일이다. 당원들 사이에는 더욱 그랬다. 불법단체가 아니라면 떳떳이 당내의 당당한 그룹으로 표면화 할 일이다. 그러는 것이 당내 분위기를 오히려 명랑화할 것이라고 본다. 통합진보당은 당내의 그룹을 공식화하고 있는 정당이 아닌가.

민주통합당은 '기획정치'란 말을 듣는 구태정치를 털어버리고 생동감 있는 정치를 해야 한다. 신선한 세력들의 분출이 중간에 있는 낡은 껍질들에 의해 차단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새누리당은 벌써부터 '1인 체제'가 운위되었는데 만약에 집권에 성공한다면 어찌 될 것인지 우려가 된다. 당내 민주화를 확실히 진행하여 국민들이 보기에도 그만하면 민주화가 만족스럽게 되었다고 느끼게 하여야만 한다. 그러한 진지한 노력이 없을 경우는 걱정이다. 말하기는 안 되었지만 '독단체제'로 우선 가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모든 정당들에 나름대로 문제가 있지만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는 없는 일이고…" (특히 진보당의 경우) 여하간 그러한 일들이 우리 사회의 정의의 문제, 불의의 문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보다는 우리 주변의 '불의'를 먼저 거론해 보자. 상표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미시적(微視的) 구석까지 주의 깊게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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