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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에 된장을 바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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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에 된장을 바를까

한국역사연구회와 함께 하는 '역사시평' <4>

2004년 9월 12일, 주차관리원 김씨는“개에 된장을 바르자”고 몇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개를 잡아 동료와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얼핏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이야기를 얼마 전 신문과 방송에서 크게 다루었던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김씨와 동료들이 잡아먹은 개는 남의 개였고, 그것도 8천만원이나 한다는 ‘순수혈통’ 진돗개였기 때문이었다. “개 한 마리가 비싸봤자, 얼마나 하겠느냐” 면서, ‘족보 있는 개’에 된장을 발라 뱃속으로 넣어버린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들보다 조금 일찍 엇비슷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생각난다. 강원도 강릉으로 피서를 간 어떤 사람은 민박집 주인이 심어 보관하고 있던 150년 된 산삼을 장뇌삼으로 알고 캐먹었는데, 2천5백만원을 주고서야 절도혐의에서 풀려났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죽은 사람도 살려 낸다”는 산삼이야 그렇다 치고, 도대체 개고기가 무어라고 남의 것에 손을 댈 만큼 먹고 싶었을까.

이순신 장군이 지은 「난중일기」(송찬섭 옮김)에도 개고기 때문에 벌어진 한 사건이 실려 있다. 1592년 1월 16일, 날씨는 맑았지만 이순신 장군은 몹시 기분이 언짢은 하루였다. 그날 장군께서는 “제 한몸 살찌울 일만 하고 병선은 돌보지 않는” 군관들에게 곤장을 때렸다. 뒤이어 병졸이자 석수장이인 박몽세가 돌 뜨는 데 가서 동네 개를 잡아먹어 민폐를 끼친 것을 알고는 곤장 80대를 때렸다. 석수장이 박몽세는 또 얼마나 개고기가 먹고 싶었으면, 그 혹독한 곤장의 위험을 무릅썼을까.

인류가 맨 처음 길들인 가축이 개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모든 종족이 다 개를 먹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민족과 개의 질긴 인연을 훑어보려고 나는 주강현이 쓴 <개고기와 문화제국주의>를 보았다. 그에 따르면 선사시대 조상들은 숱하게 퍼져있는 야생개는 말할 것 없고, 길들여진 개도 먹으면서 가죽을 벗겨 옷도 해 입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도 모두 개를 키웠으며 개고기를 즐겼다. 고려시대에도 가난한 백성은 개고기에서 단백질을 얻었다. 조선 시대에 소 돼지를 자주 먹을 수 없었던 처지에서 많이 먹었던 것이 개고기였다. 주강현은 조선시대 많은 그림 속에 개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웬만한 집에서는 으레 개 한 두 마리는 키웠고, 개고기 없으면 못사는 ‘개당파’도 있었다는 증거도 댔다. 혼자서 먹으면 맛이 덜한 것이 개고기라고 했다. 주강현은 조상들이 개장국으로 밥상 공동체와 나눔의 공동체를 일구어 왔다면서, 개고기 식용문화를 높게 평가했다.

88서울 올림픽 때 그리고 2002년 월드컵 때 개고기 논쟁이 뜨거웠었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트 바르도가 “인간의 친구인 개를 먹는 것은 야만”이라고 공격해온 것에 반격이 이어졌다. 개고기 방어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격했다. 첫째 “왜 동네북처럼 우리만 문제삼는가”. 중국 동남아 일대도 개고기를 먹고 프랑스 너희도 먹었고, 스위스에서는 개고기 소시지도 있다는 것이다. 고양이나 비둘기를 먹으면서 개고기를 먹는 사람을 나무라는 것은 터무니 없다고 했다. 둘째, 개고기 문화를 공격하는 것은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욕하는 꼴이라는”는 주장이다. 질 낮은 공산품 만들 듯, 온갖 학대 속에서 소나 닭을 ‘생산’해대는 그들이 개고기 문화를 탓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다. 셋째, 제국주의 텃밭인 서구 세계 그들이야말로 야만이라는 주장이다. 인종차별주의자, 문화제국주의자들이 ‘야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개를 개답게 키우지 않은 채, 그리고 개 권리를 모두 없애버리고 ‘애완견’으로 만든 그들이 오히려 더 야만스럽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반격에 다시 반론이 뒤를 이었다. 개고기를 먹는 것은 지난날 먹을 것이 없었던 때에서 비롯된 인습일 따름이다. 우리가 진정 지켜야 할 전통은 자비와 어진 마음을 가지고 생명을 대하는 생명문화라는 주장이다. 개고기뿐만 아니라 모든 고기를 멀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고기를 생산한 뒤에 그 고기를 숭배하도록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인류의 앞날은 어둡다는 것이다.

이런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고기를 꼭 먹어야 한다고 드세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섰다. 그들은 한국의 특성은 김치와 개고기에 있기 때문에, 이참에 독도에 개고기 집을 열어 독도를 우리 땅으로 확실하게 해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개고기를 먹기 편하게 인스턴트 식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도 했다. ‘개고기 버거’를 만들어 서구에 개고기 맛을 알려야 하며, 개기름으로 화장품도 만들자는 주장도 했다. 또 실제로 그런 실험도 했다.

나는 개를 이중으로 사랑한다. 개를 키우면서 또 맛나게 먹기도 하는 내가 이 글에서 개고기 논쟁에 깊게 끼어들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국가 이미지 개선위원회’에 얽힌 이야기는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2002년 월드컵을 대비하여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국가이미지 개선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강성노조’와 개고기가 한국 이미지를 나쁘게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강성노조원’이 개고기를 먹고 있다면 한국 이미지는 그야말로 최악이 될 것이다.

정말 ‘강성노조’는 ‘국가 이미지 개선’을 위해 사라져야 하는가. 나는 생각을 달리한다. 식민지시대 ‘강성노조’야말로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축이 되었으며, 일제의 엄청난 탄압 앞에서도 줄기차게 발전을 거듭했다. 1945년 11월에 만든 ‘강성노조’ 전평은 50만 노동자 대중을 포괄하며, 한국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디 그뿐인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하는 노동운동은 새롭게 ‘강성노조’를 만들며 세계 자본주의가 퍼붓는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싸웠다. 이런 한국노동운동의 힘찬 모습이 세계 자본진영에는 나쁜 이미지로 남아 있을 것이지만, 세계 노동진영에는 또 하나의 희망으로 비칠 것이다. 나는 이 땅 ‘강성노조’의 역사에서 뿌듯한 자부심을 느낀다.

여름에는 복날이 세 번 들어있다. 복(伏)이란 꺾는다는 뜻으로 복날에 더위를 피하기보다는 적극 맞서 싸운다는 뜻이 더 강하다. 복날에 개를 잡아먹는 풍습은 고려 때에 처음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이이화, <놀이와 풍속의 사회사>) 그러고 보니 신자유주의의 드센 공격을 꺾어버리자는 ‘강성노조원’과 더위를 꺾어버리자고 먹었던 개고기는 서로 닮은 데가 있긴 있다. ‘복날 개고기’의 깊은 뜻을 헤아리며 강성노조원과 함께 개에 된장 한번 발라보고 싶다. 입에 침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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