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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와 칭기스칸: 진정한 영웅들의 대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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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와 칭기스칸: 진정한 영웅들의 대야망

CEO출신 역술인 김남용이 본 '역사의 라이벌' <19>

" veni, vi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주사위는 던져졌다." "부르터스, 너마저도..." 등 많은 명언을 남긴, 서양사상 최대의 영웅 카이사르, 인심 파악의 귀재이며 민중과의 친밀성은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그만의 천성, 뛰어난 웅변술과 전략 전술의 천재요 돈을 빌리는데도 천재라고 일컬어진, 정적에게도 ‘인자한 사람’인 그도 가장 믿었던 부하 부르터스에게 암살 당하는 비극의 영웅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나는 몽골의 푸른 늑대요, 너희는 신의 군대다.” “나를 따르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니 너희에겐 패배란 있을 수 없다”고 갈파하며 대몽골과 유럽과 중국대륙을 석권한 칭기스칸. 그는 왜 영웅인가. 그토록 주변국가를 완전파괴하며 초토화하는 거대 기병군대를 이끌었던 그는 파괴 뒤에 철저한 국가기율에 의한 문명혜택을 그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영웅이요, 또한 처참한 불행기에 그가 보여준 진정한 용기와 통치의 건전성 그리고 인재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한 국가 경영 철학이 그를 진정한 영웅으로 받들게 된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그를 ‘야만인 알렉산더’라 부른답니다.

요즘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와 칭기스칸을 CEO로 비유한 책들이 많이 서점가에 나와 있으니 이 가을 그들의 웅대한 야망과 대 스펙타클을 한번 접해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카이사르(Caesar, Gaius Julius)**

로마 출생. 시저라고도 한다. 서양사상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사람의 하나이다. 유서 깊은 귀족 집안 출신이었으나, 그 조상에는 유명한 정치가는 없다. BC 69년 재무관, BC 65년 안찰관(按察官), BC 63년 법무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인심 파악의 수완이 능하여 민중과 친근한 입장에 서서 로마와 기타 속주(屬州)에서 군무에, 그리고 실제의 정책 운영면에서 착실하게 성과를 거두어 명성을 획득하고 대정치가로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BC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1회 3두동맹(三頭同盟 : 제2회 3두동맹이 공식적인 것에 반해 이것은 사적인 것)을 맺고,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BC 59년에는 공화정부 로마의 최고 관직인 콘술(執政官)에 취임하였다.

콘술로서 국유지 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여 크게 민중의 인기를 얻었다. BC 58년부터는 속주 갈리아의 지방장관이 되어 BC 50년까지 재임 중 이른바 갈리아전쟁을 수행하였다. 오랜 갈리아전쟁은 그의 경제적 실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BC 53년 크라수스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쓰러지자 제1회 3두정치는 붕괴되고 원로원 보수파의 지지를 받은 폼페이우스와도 관계가 악화되어 마침내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의 결의가 나오자 BC 49년 1월,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우선 폼페이우스의 거점인 에스파냐를 제압한 다음 동쪽으로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BC 48년 8월 그리스의 파르살로스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그후 패주하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향했으나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기 전에 폼페이우스는 암살을 당했고, 카이사르는 그 곳 왕위계승 싸움에 휘말려 알렉산드리아전쟁이 발발하였다(BC 48년 10월∼BC 47년 3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클레오파트라 7세를 왕위에 오르게 하여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을 낳았다.

1인 지배자가 된 그는 각종 사회정책(식민·간척·항만·도로건설·구제사업 등), 역서의 개정(율리우스력) 등의 개혁사업을 추진하였다. 종신 독재관을 비롯한 각종 특권과 특전이 그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권력이 한 몸에 집중된 결과, 왕위를 탐내는 자로 의심을 받게 되어 부르터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주모자로 하는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에게 원로원 회의장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BC 44년 3월 15일).

“인사(人事)를 다하고 운명의 여신의 도움을 바라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카이사르였다. 그는 또 자신의 정적(政敵)을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는 ‘인자한 사람’으로도 알려졌다. 카이사르가 인정이 많은 것은 그의 본성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정책적 의도에 의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어떻든 간에 융화적인 자세는 자신의 세력권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돈을 빌리는 천재라고 일컬어진 그는 또한 인간적 매력도 풍부하여 뛰어난 웅변술과 함께 인심을 모으기에 충분하였다. 실전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군략을 짜내는 장군으로도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인심의 향방을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아는 민중파 정치가로서 사회개혁의 실효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제1급의 문인으로도 알려졌다.

***칭기스칸(成吉思汗, Chingiz Khan )**

묘호(廟號) 태조(太祖). 아명 테무친[鐵木眞]. 바이칼호 근처 출생.

어렸을 때 아버지가 타타르 부족에게 독살되어 부족이 흩어졌기 때문에 빈곤 속에서 성장하였고, 당시 강세를 자랑하던 케레이트 부족의 완칸 아래서 점차 세력을 키워, 1189년경 몽골씨족연합의 맹주(盟主)에 추대되어 칭기스칸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1201년 자다란 부족의 자무카를 격파하고, 타타르·케레이트를 토벌하여 동부 몽골을 평정하였으며(1203), 군제(軍制)를 개혁한 후 서방의 알타이 방면을 근거지로 하는 나이만 부족을 격멸하고(1204) 몽골 초원을 통일하였다.

1206년 오논 강변 평원에서 집회를 열고, 몽골제국의 칸에 오르면서 씨족적 공동체를 해체, 군사조직에 바탕을 둔 천호(千戶)라고 하는 유목민집단을 95개 편성하였다. 천호 및 그 하부조직인 백호는 동시에 행정단위이며, 천호장·백호장에는 공신들을 임명하여, 이들을 좌익(左翼)·중군(中軍)·우익의 만호장 지휘하에 두었다.

즉위한 이듬해 서하(西夏)를 점령하고, 금(金)나라에 침입하여 그 수도인 중도(中都:지금의 베이징)에 입성하였다(1215). 또 서아시아 이슬람 세계의 패자(覇者) 호레즘국과 교역하려고 파견한 사절단이 살해되자, 이것을 계기로 서정(西征)에 올랐다(1219).

결국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를 카스피해상의 작은 섬으로 내몰아 굶어 죽게 하였고(1220) 다시 카프카스산맥을 넘어 남러시아로 출동, 러시아 제공(諸公)의 연합군을 하르하 강변에서 격파하였다(1223). 본군은 그에 앞서 발흐를 점령하고 인더스 강변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1221).

그러나 뜨거운 열기에 견딜 수 없어 철군하기로 결정하고, 차가타이·오고타이군과 합세하여 귀국하였다(1225). 이때 이슬람교도의 공예가와 장인(匠人)의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을 포로로 데리고 왔다. 정복한 땅은 아들들에게 각각 분할해주어 나중에 한국(汗國)을 이룩하게 하였으나, 몽골 본토는 막내아들 툴루이에게 주기로 하였다.

이어 1226년 가을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한 서하를 응징하려고 서하의 수도 닝샤[寧夏]를 포위하였으나 간쑤성 칭수이현[淸水縣] 시장[西江] 강변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샤머니즘 신자였으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하였고 외래문화의 흡수에 노력하였다.

특히 위구르 문화를 사랑하여 나이만 정벌 당시 포로로 데리고 온 위구르인 타타동가에게 여러 아들들로 하여금 위구르 문자를 배우게 하였고, 그것을 국자(國字)로 채용하였다. 이 위구르 문자로부터 몽골문자와 만주문자가 만들어졌다. 또 요(遼)나라 유신(遺臣) 야율초재(耶律楚材)와 위구르인 진해(鎭海)를 중용하고 그 교양과 정치적 능력을 이용하여 정복지 통치에 힘을 기울였다.

자, 이제 운명 요소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1) 카이사르 (씨저)

경진년 계미월 임인일 병오시 (庚辰年 癸未月 壬寅日 丙午時)

2) 칭기스칸 (성길사한)

을해년 경진월 무진일 무오시 (乙亥年 庚辰月 戊辰日 戊午時)

***1. 소질 검색**

1) 카이사르 (庚<-癸-<壬<->丙)

첫 번째는 임과 경(壬,庚)의 관계입니다. 이 둘의 관계는 창조성으로도 작용하고 반짝 아이디어로도 작용하는 아주 탁월한 소질입니다. ‘역사의 라이벌 13, 천재 경영과 천재감별법’에도 나와 있는 ② 예술, 창조 개발형과 ③ 기발 반짝 아이디어형의 A급 천재에 속하는데 온화하며 상대 입장 고려하고 고객 확보에 비상한 재주가 있으며 언어전달 능력과 사교력에도 탁월하고 예술적 감수성, 감정적 정서, 문필력도 뛰어나다고 설명했었죠. 기억하십니까. 또한 독자적 성향과 자기 추종 세력을 잘 만들고 이해력 영오력이 뛰어나고 두뇌 운용 능력이 매우 높다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임<->병 (壬<->丙)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천재적 영업 능력으로서 특 A급으로 추앙 받는 대단한 소질입니다. 어떠한 인간관계, 교유관계도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유지하므로 민심 파악과 인간 관계가 최고인 소질입니다. 세 번째는 임<-계 (壬<-癸)의 관계입니다. 남의 도움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며 인자한 성품인 ‘천재 감별법’의 ④ 자료 수집 아이디어형에 걸맞는 우수한 소질입니다.

한마디로 카이사르는 재능, 재주에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난 ‘운명의 총아’ 사주, 항상 운명의 여신이 도와주는 사주라고 해야 옳겠습니다.

2) 칭기스칸 (乙<-庚<-戊∙戊)

여기서도 먼저 무->경 (戊->庚)의 관계가 대단합니다. ‘천재 감별법’에서 A급으로 분류된 창조 능력의 천재입니다. 예술, 창조 개발형으로서 카이사르의 임<->경과 거의 같은 수준의 소질입니다만 카이사르가 통박, 맥을 잘 짚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요령이 대단한 반면 칭기스칸의 창조형은 대기만성을 각오한 꾸준한 노력형이라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투파십간사주에서는 같은 식신사주(사주용어임, 둘다 식신사주)라도 그 속뜻은 매우 차이가 난다는 것에 탁월한 변별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무와 을 (戊,乙)의 관계입니다. 먼저 무->을 (戊->乙)은 윗 사람을 공경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그러나 법에 어긋나면 절대 마음 속으로는 경복을 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소질입니다. 또한 을<-무 (乙<-戊)의 관계는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꼼꼼하게 간섭하는 타산성, 계산성이 돋보이는 성질입니다.

세 번째는 무무 (戊∙戊)의 관계입니다. 철저한 자기 독립성, 주체성이 강한 소질입니다.

3) 성격 종합 판단

카이사르가 우수한 창의력, 웅변력, 깜짝 아이디어와 교유능력, 민심파악능력이 탁월하나, 칭기스칸의 자기 것 챙기는 타산성, 계산성, 꼼꼼성의 소질이 결여되어 결국 왕국을 다른 자들에게 넘겨 주었다고 보여집니다.

***소질표**

***2. 욕망검색**

1) 카이사르(壬日에 未月)

리더가 되고 싶은 욕망, 인기인이 되고 싶은 욕망, 그리고 계산적 교유욕망(천간에 투출되어 큰 동기부여가 되었음)이 있습니다. 리더가 되고 싶고 인기인이 되고 싶은 것은 소질로 투출되지 못하고 잠재의식 속에 파묻혀 끝모를 욕망의 늪속에 빠진 것입니다.

2) 칭기스칸 (戊日에 辰月)

자기주체성, 자기확인 욕망, 나르시즘의 욕망이 꽤 깊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한 리더가 되고 싶은 욕망과 자기 것으로 꼭 챙기고야 마는 타산성이 들어가 있습니다.

3) 욕망 종합 판단

카이사르가 더 큰 욕망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이 소질로서 표출되지 않는 통에 그리된 것입니다.

***3. 본능 검색**

***본능표**

***4. 개성 검색**

***개성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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