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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억 매출 기업 CEO가 된 철(鐵)의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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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3천억 매출 기업 CEO가 된 철(鐵)의 노조위원장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김선현 대표 "노조를 품으면 우리 안에 있다"

김선현 (주)오토 대표를 만나고 왔다. 30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자동자 부품 회사를 경영하는 여성 CEO라고 소개하기엔 그가 가진 이야기들이 남다르다.

"'옛날 내가 은행에서 일할 때 우리 노조가 왜 강성 노조가 됐었는지, 왜 그렇게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는가?' 생각해 보았다. 반대로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조합을 만든 직원들은 우리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심으로 노조를 만들었다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라. 절대 노조를 깨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적으로 간주하면 적이 되고 우리가 품으면 우리 안에 있다, 품으라. 그리고 나가서 노조의 'ㄴ'자도 직원들에게 꺼내지 마라"라고 했다. 노조에서 탈퇴를 하라느니, 왜 노조에 가입했느냐느니 묻고 다니는 사람은 문책하겠다고 강경하게 입장을 밝혔다."

그래서 만났다. 젊은 시절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노조운동을 했던 한 청년이 지금은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경영자가 되었다. 그의 과거가 그의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싶었고, 그의 현재가 그의 과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여간해서는 잘 떨지 않는 성격인데 집행부를 만나니 처음 서보는 그 자리가 굉장히 떨렸다. 그런데 그 순간, 노조위원장의 볼펜을 든 손이 떨리는 게 딱 보였다. '그렇지, 그때 나도 떨었듯이 이 사람들도 지금 굉장히 떨리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깊은 연민이 생겼다."

그는 인터뷰 내내 많이 울었다. 노조 위원장 시절 노조원들에게 받았던 신뢰를 떠올리며, 회사에 처음 노조가 만들어져 노조위원장과 마주했을 때를, 그리고 회사가 어려워졌을 때 월급과 보너스를 반납해주었던 직원들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가 그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인지 몰랐다.

그리고 그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후손이다. 그의 증조부는 임정 고문을 지낸 애국지사 김가진 선생이시고, 특히, 할머니이신 수당 정정화 선생은 '임정의 맏며느리, 조선의 잔다르크'라고 불릴 정도로 여성으로서 독립운동에 끼치신 영향이 크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우리나라 80, 90년대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번역하고,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으로 활동하고 계신 김자동 선생이시다.

"일생에서 가장 큰 몇 가지 행운이 있다면 그 첫 번째가 우리 집에서 태어난 것이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는데 6~7살 때 어느 날 할머니께 "할머니, 배고픈 게 뭐야?" 하고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시면서(이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할머니의 행동인데) "아이고, 요것아. 이 세상에 배고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말을 하니"라고 하셨다. 어렸지만 그 이야기를 알아들었던 것 같다."

할머니의 말귀를 알아들었던 어린 김선현이 자라, 경영자인 자신과 마주한 노조위원장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께서 그 모습을 보셨으면 아마도 활짝 웃으시며 "아이고, 요것아"라며 그의 양 볼을 감싸주셨을 것 같다.


▲ 김선현 (주)오토 대표 ⓒ프레시안(최형락)

지금의 자동차 부품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웨스트팩(Westpac Banking, 호주계 은행) 은행에서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셨다. 노조 활동을 하게 된 계기와 그때의 마음은 어떠셨는지 이야기해 달라.

성신여대에서 화학을 전공했는데 졸업 후에 임용고시를 봐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과학교사 자리도 없고 여건상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취업을 해야 했다. 그 당시에 여성들이 좀 더 동등하게 다닐 수 있는 직장이었던 외국계 기업 100곳에 영문 이력서를 써서 보냈다. 미국계 은행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일하면서도 선생님이 되고 싶어 계속 임용고시 공부했다 하지만 졸업하는 해도, 그다음 해도 교사 자리가 없어서 계속 은행에서 일하게 되었다. 4년 반 정도 근무한 후에 다니던 은행이 철수하게 되어 호주계 은행으로 옮기게 되었다.

1987~88년은 한창 노동조합이 많이 생기던 시기였는데 우리 회사에도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 노조가 만들어졌다. 당시 나는 야간에 경영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내가 빠진 저녁 회식자리에서 우발적으로 노조가 결성되었다. 노조위원장은 우리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언니였다. 다음날 회사에 가니 노조가 결성됐다고 가입하라는 것이었다. 준비가 너무 미흡한 것 같아 당시 타사 노조위원장이었던 언니와 형부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노조활동에 좀 더 중심이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노조위원장이 되었다.

예전에 봤던 <사이공의 흰옷>(응웬반봉 지음, 동녘 펴냄. 1986년 <사이공의 흰옷>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첫 소개됐다. 이후 20년 만에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은 베트남어 완역본이 <하얀 아오자이>란 제목으로 출판됐다. 원제 <하얀 옷(Ao Trang, 1973)>)이란 책에서 주인공으로 아주 평범한 여학생이 나온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사람들과 만나는 일상의 과정에서 그녀가 처한 사회적 환경과 현실에 대해 차마 양심을 저버리지 못하고 점점 운동의 한 가운데로 가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보면서 많은 공감이 있었다. 누구나 처음부터 운동가가 되고 혁명가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자신의 역할을 끊임없이 찾으며 매 순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다 보면 시대가 요구하는 삶의 방향으로 가게 되고 그러다 보면 시대가 열사와 투사, 영웅을 만들게 되는 것 같다.

나 역시 내가 주도하고 결단해서 노조를 만들고 노조위원장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나의 양심에 따라 가다 보니 점점 노동운동에 더 많이 관여하게 되고 내 삶에 큰 의미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조합을 결성할 때는 회사와 대화 창구를 만들겠다는 소박한 생각이었지만 이후 회사 측의 과도한 태도는 우리 노조를 강성으로 키웠다. 그러는 동안 나의 생각도 많이 바뀌고 생활도 바뀌었다.

노조를 하면서 두려웠을 때가 있었나?

한 번도 없었다고는 얘기할 수는 없는데 두려움이 많지는 않았다. 이것은 대학교 때 산악부 활동을 하면서 훈련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암벽등반을 좋아하고 열심히 했던 것에 늘 감사한다. 암벽을 선등으로 올라갈 때 가끔 어느 순간 굉장한 공포가 엄습할 때가 있다. 만약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떨어지는 것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 공포를 이겨내야만 마저 올라갈 수 있다. 그런 훈련을 했던 것은 늘 나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원래 두려움이 없는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산에 다니면서 더욱 훈련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노조활동을 하면서 구속 시키겠다거나 백골단이 들어온다고 하는 것 때문에 내가 어떻게 될까 두려워하진 않았다. 상대적으로 두려움이 적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어려운 상황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몰두할 수 있었다.

가장 두려웠던 때는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함께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노조를 탈퇴하면서 깨어져 나갈 때였다. 하지만 이 두려움 속에서도 '노조가 와해되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은 거의 없었다. 어떻게 우리가 계속 단결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더 집중했었다.

본사와 직접 담판을 짓기 위해 호주까지 가셨다. 본사 앞에서 단식농성을 할 때 어떤 심경이었나?

ⓒ프레시안(최형락)
호주 원정은 6년 아래인 조합 간부와 둘이 갔다. 하지만 나는 위원장이고 후배는 한참 나이가 어리다 보니 심적 부담이 많았다. 본사 앞 길거리에서 7일간 단식을 했는데 굉장히 힘든 환경이었다. 온도가 40도까지 올라가는 데다 건조한 날씨 탓에 단시간에 많은 수분이 빠져나갔다. 소금을 먹으면서 물을 마셔야 하는 것조차 몰라서 물을 마셔도 계속 탈수가 됐다.

우리 교민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의사였던 한 교민이 매일 건강을 체크해주셨다. 그중에 소수 진보적인 교민 학생들이 있었는데 실제 운동을 하는 정말 진보적인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너무나 원칙적이어서 우리에게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웃음) 몸이 너무 힘드니까 심지어는 밤에 '주스라도 좀 갖다 주지'라는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단식하는 당사자가 '우리 주스 한 잔만 사다 주세요' 할 수는 없지 않나.(웃음) 정말 힘들었다. 그 학생들은 우리를 성심껏 돌봐주었지만 다들 어렸고 우리 또한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책임감까지 있었기에 후배와 나 둘 밖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교민들을 비롯한 호주 사람들에게까지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호주에서 노동당이 집권당으로 자리 잡기까지 당시 노조간부들의 상당한 투쟁이 있었는데 그들 앞에 우리가 나타나자 젊은 시절의 자신들을 보는 것 같았는지 우리를 진심으로 도와주었다. 지원 방문도 많이 오고 마음으로부터 사랑해주었다. 국영 방송에서 매일 헤드라인 뉴스로 우리의 단식농성을 내주고 인터뷰도 해갔다. 그런데 7일째 되는 날에 최저혈압이 잡히지 않고 최고혈압은 겨우 50으로 의사가 오늘 단식 그만두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다. 원래 저혈압이 있어서 가족들과 노조원들이 단식을 중단하라고 계속 전화를 해왔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고 그 상태로 단식을 끝낼 명분도 없었다. 그 때 본사에서 내 상태를 알고는 '요구조건 100퍼센트 수용, 무조건 끝내라' 라고 해서 7일째 되는 날 단식을 끝낼 수 있었다. 그때 건강이 정말 많이 나빠졌다.

호주에서 돌아오니 직원들 모두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모두가 회사로 복귀한 상태였다. 하지만 언론에 타결문은 아직 배포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것이 문제였다. 호주 국영방송에서 '파업은 끝났고 승리했다'는 기자회견도 하고 왔는데 말이다. 호주 본사는 현지에서 우리를 돌아오게 하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지점장이 말하기를 '모든 것은 0이라며 하나도 합의된 것이 없다'고 했다.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하라'고 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다시 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이탈자도 많아지고 너무 어려워졌다. 우리 노조원들이 더 이상 고생하지 말고 그냥 해산하고 회사로 들어가자고 했다. 나더러 '노조 깨는 조건으로 회사하고 교섭해서 네 것 챙기라'고 했다. 오죽하면 그런 얘기를 했겠는가. 그렇게 되면 회사에 들어가 봤자 차례차례 해고당하는 것밖에 없다고 했지만, 노조원들은 괜찮다고 했다. 파업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내가 더 이상 고통 받는 것을 못 보겠다는 거였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동지들로부터 이토록 신뢰를 받은 것만으로 모든 보상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해고당하는 것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는데 더 바랄 게 뭐가 있었겠는가.(울음) 신분보장을 조건으로 단체협약의 복지조항을 대폭 양보하고 파업을 마무리하고 회사로 돌아왔다.

노조가 웨스트팩 은행이 한국에서 철수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인가?

사실 호주 본사에서 한국 지점을 철수한 것은 우리 노조의 파업 때문만이 아니다. 당시 웨스트팩 은행은 호주의 가장 큰 은행이었는데 심각한 본사의 부실 때문에 가장 수익성이 좋은 자본금을 회수할 수 있는 10개 지점을 폐쇄해야 했다. 우리 노조는 철수에 약간의 영향을 주었을 수 있겠지만, 결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파업이 끝난 후 1년 반 만에 은행이 자진 철수를 한 것이다. 우리 노조 덕분에 철수할 때 남아 있던 직원들은 비노조원들까지 다 좋은 보상을 받았다. 그렇게 우리의 노동운동은 자의도 아니고 타의도 아닌 채로 끝났다.

철의 노조위원장에서 지금은 기업을 운영하는 CEO가 되어 있다. 지금의 사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1994년 노조위원장으로 은행에서 퇴직한 뒤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노조 운동을 했던 것은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일터를 만들어보겠다는 뜻으로 했던 것인데, 과연 그것이 노동 운동으로 가능할까, 노동조합이 그 대안인가 하는 깊은 회의가 들었다. 다른 길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1년간 여행을 다니면서 생각도 많이 하고 준비도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1995년도에 한국에서 중국과 일본으로 섬유기계를 수출하는 무역회사를 차렸는데, 1998년에 IMF가 터지면서 많은 것을 배울 기회를 얻었다. 여기서 배울 기회라는 것은 다 실패다.(웃음) 당시 경제위기로 우리나라에서도 회사들의 상황이 어려워지고 특히 자동차 협력사들이 부도가 많이 났는데, 현대자동차에서 이 부도난 회사들을 관리했었다. 부도는 났지만 직원들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임금을 지급하고 한시적으로 관리하면서 새로운 주인이 생기면 찾아주는 역할을 했다. 그때 어떻게 연결이 되어서 지금의 자동차 부품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빚만 가지고 최악의 경제 여건에서 시작한 터라 다 같이 살기 위해 나와 직원들은 노동조합 동지들보다 어쩌면 더 끈끈한 동지 같은 마음으로 일했다. 그래서 내가 사용자라는 생각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지금은 회사가 꽤 성장해서 남들이 보기에 자본가이고,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과거에는 노조위원장으로 현재는 CEO로 서로 상충되는 자리에 있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고민을 누구보다 잘 아실 것 같다. 직원들과의 소통을 위해 어떤 것을 하고 있나?

지금 경주, 예산, 베트남에 공장이 있는데 세 개 다 성격이 다르다. 경주는 동고동락하면서 같이 만든 직원들이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는 폭이 깊고 좋아하고 존중과 존경의 마음이 있다. 예산은 2007년부터 만들어서 2008년에 가동되었기 때문에 그런 끈끈함이 조금 부족하다. 경주에서 자본을 어느 정도 축적해서 예산으로 갔기 때문에 동지라기보다 자신들은 직원이고 나는 사장이라는 개념이 더 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베트남에 가면 더 그렇다. 그곳 사람들에게 우리 회사는 외국 회사이고 나는 외국 회사의 사용자이자 투자자인 것이다. 마치 옛날 호주 은행의 상황과 같은 것이다.

사실은 우리 회사에도 경주에 노동조합이 생겼던 적이 있다. 정확히 2002년 5월 8일 어버이날이었다. 이날 울산에서 현대자동차랑 미팅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로부터 노조가 만들어졌다는 전화가 왔다. '내가 돌아갈 때까지 어떠한 액션도 하지 말고 무조건 기다리라'고 말하고 나서 경주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옛날 내가 은행에서 일할 때 우리 노조가 왜 강성 노조가 됐었는지, 왜 그렇게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는가?' 생각해 보았다. 반대로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와서 처음 한 일은 간부직원을 다 모아놓고 "노동조합을 만든 직원들은 우리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심으로 노조를 만들었다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라"고 말했다. 다들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하면 노조를 깰 수 있을까하는 이야기를 할 줄 알았던 거다. 놀란 그들에게 호주 은행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절대 노조를 깨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적으로 간주하면 적이 되고 우리가 품으면 우리 안에 있다, 품으라. 그리고 나가서 노조의 'ㄴ'자도 직원들에게 꺼내지 마라"라고 했다. 노조에서 탈퇴를 하라느니, 왜 노조에 가입했냐느니 묻고 다니는 사람은 문책하겠다고 강경하게 입장을 밝혔다.

그 후에 노조 집행부를 만났다. 여간해서는 잘 떨지 않는 성격인데 집행부를 만나니 처음 서보는 그 자리가 굉장히 떨렸다. 그런데 그 순간, 노조위원장의 볼펜을 든 손이 떨리는 게 딱 보였다. '그렇지, 그때 나도 떨었듯이 이 사람들도 지금 굉장히 떨리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깊은 연민이 생겼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진심으로 내가 호주 은행에서 일한 이야기부터 사업을 시작한 이유까지 설명했다. "하고 싶었던 것은 딱 하나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주인이며 행복한, 같이 무엇인가를 만들어가는 회사 말이다." 그리고 "지금 회사가 그렇지 못해서 노조를 만든 것인가? 이슈가 무엇이었나?"라고 물어봤다. 돌아오는 대답은 단지 노조가 있으면 대화의 창구가 더 될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그 말은 인정하지만, 현대자동차와의 관계에서 우리 내부에 노조라는 조직이 생겼을 때 우리가 힘들어질 수 있으니 발전협의회를 만들어 소통하자고 했다. 처음에 만들려 했던 회사에 다가갈 수 있는지 함께 시험해보자고 했다. 그게 안 되면 언제라도 노조를 만들어도 막지 않겠다고 했는데 노조 측이 싫다고 했다. 집행부 중 몇 명이 민주노총에 가서 교육도 받고 직접적으로 활동을 하는 등 마음을 쏟으며 준비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노조 가입률도 거의 100퍼센트였다.

비록 내 제안은 거부되었지만, 3일간 우리는 정말 많은 대화를 하였고 이를 계기로 서로에 대해 많은 이해가 생겼다. 다음날 노조 창립기념식이 있었다. 그런데 이 행사에 경주 금속 노조 간부들이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꽹과리를 치며 트럭을 타고 왔다. 이것을 본 우리 직원들이 약간의 당혹감을 느꼈던 것 같다. 사실 우리 직원들 중에 빨간 띠 두르고, 조끼 입은 노조들을 처음 본 사람들도 많았고, 그런 정서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노조 창립 기념식 때 직원들이 오히려 발전협의회를 해보자며 마음을 바꾸었다. 창립식이 해산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2~3일 후에 발전협의회를 발족하기로 하고 창립기념식에 직원들이 모두 앉았는데 노조 간부였던 다섯 명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서 예전의 내 얼굴이 보였다. 노조를 시작하려 했는데 해산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그래서 발전협의회 창립식이 끝난 후 간부 직원들을 다시 모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누가 노조를 가입했는지 누가 노조위원장이고 부위원장이었는지 다 잊어라. 우리가 잊으면 직원들도 잊고. 우리가 잊지 못하면 직원들도 똑같이 잊지 못한다"고 했다. 발전협의회를 창립하긴 했지만 모두 두려웠을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발전협의회를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다. 노조와 발전협의회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하다가 나를 한번 믿어 보자고 해본 것이었지만, 그 다음 날 동료들이 해고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왜 안 했겠는가.

ⓒ프레시안(최형락)

발전협의회를 만들고 나서 지금까지 매달 한 번씩 만나서 임금인상이나 승진 제도와 같은 중요한 이야기부터 "우리 자리에 햇빛이 너무 많이 들어온다, 가림막을 설치해 달라" 같은 사소한 이야기까지 다 한다. 그 자리에서 대답해 줄 수 있는 것들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답해주고 불가능하면 이유도 확인하고 말해준다. 논의하고 검토해야 하는 것들은 언제까지 답변해주겠다고 시한을 정한다. 그리고 매번 발전협의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다 기록하고 정리해서 게시한다. 그러니 문제 있는 이슈들은 없어지고 반대로 회사 발전과 관련된 이슈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 회사 발전의 원동력이다. 어렵게 시작한 당시의 매출이 30억 원이었는데 지금은 3000억 원이다. 매출 규모로만 보면 100배이다. 그것도 10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이뤄낸 것이다. 사원주식도 언젠가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회사의 기업 공개가 더 확실해지면 하려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직원들도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노동조합의 경험이 나한테 없었다면 절대 지금과 같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영자와 노조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풀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필요한가?

갈등의 이유는 양쪽이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 두려움을 깨고 나면 의외로 좋은 반응이나 결과가 나오게 된다. 내가 노조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이유는 양쪽을 다를 잘 알기 때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 두려움을 깨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상대방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만나서 대화하고 이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경영자와 노조 사이에도 여러 가지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젊은 사람들에게도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용기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용감하게!'하고 되된다. 내 좌우명이기도 하다.(웃음) 용감하게 싸우고 돌진하자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일 중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앞으로 한걸음이라도 나갈 때는 바로 앞의 하나를 깨지 않으면 한 발을 내디딜 수 없기에 용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아기들이 걸음마를 배울 때도 그렇고 처음 기어 다닐 때도, 한 번 뒤집을 때도 그 노력은 정말 눈물겹다. 때가 되니까 그냥 하는 것이 아니다. 애들이 얼마나 힘들게 뒤집는지 아는가. 조카들을 보면서 참 경이롭다고 느꼈다. '저렇게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힘겹게,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며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한 번 하고 나면 그전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돌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이가 한 발을 뗄 때까지는 무서워하지만 한 걸음을 떼고 나면 다시는 기지 않는다. 한 번 하고 나면 '이건 할 수 있구나' 하고 스스로 아는 것이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은 혼자서 사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동조합도 그랬고 산악부에서도 뼈저리게 배웠다. 산이란 곳은 극한 상태의 항상 위험하고 죽을 수도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서로 돕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 경영자와 노조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인 것을 알면 신뢰를 가지고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CEO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있다면?

ⓒ프레시안(최형락)
구성원 모두가 서로 존중하고 믿고 함께 행복한 일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제조업 현장에서 현실적으로 다 함께 행복한 일터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 안에서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 보면 늘 더 깨끗하게 더 따뜻하게 더 시원하게 해주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과 늘 부딪힌다. 그야말로 재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회사의 확장과 직원의 복지는 그것을 어디에 쓰는가의 문제이다. 균형을 잘 잡는 것이 그야말로 경영인 것 같다.(웃음)

직원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좋은 대우 이전에 오는 인간적인 존중이다. 그 존중의 증거로 좋은 대우를 바라는 것이다. 진심으로 존중하면서 현실 상황을 설명하면 직원들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노동조합은 '우리가 바라는 건 인간적인 존중이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것이고, 사장이나 경영진은 '난 너희를 정말 존중하고 아낀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이거밖에 안 되니 같이 노력해보자'라는 말은 못하고 '아니, 이것들이 정말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하나' 하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분명 접점이 있다. 이 접점을 찾아가는 데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직원들과 공감의 깊이가 깊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겪었던 일을 지금 겪고 있는 다음 세대를 보고 있는 것과 같아서 그들에게 연민을 많이 느낀다. 노조 간부들과 만났을 때 회사의 앞날과 관련된 중요한 자리니 나도 떨렸지만, 한편으로는 나하고 교섭을 하러 온 상대자라는 느낌보다 마치 인생의 후배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연민이 생기고 '그래, 아직도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싶었다. 노조운동에 그렇게까지 치열하지 않았더라면 많이 잊었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너무나도 치열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았을 때의 두려움과 떨림, 앞으로 해나가야 할 부담감과 자기 앞날에 대한 생각 등을 다 알 것 같았다. 특히 우리 회사는 남자직원으로 가정의 가장들인데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지 짐작이 갔다. 노동조합은 하나의 예일 뿐이고 항상 직원들을 보면서 나의 젊은 날을 보게 된다. 막연한 자신감과 막연한 불안감과 조급함 같은 모순된 요소들을 가지고 살았던 때를 기억하게 된다. 그래서 좀 더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가장 어려웠을 시기가 언제였고, 그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

아까 말한 회사에 노동조합이 생겼을 때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위기였으나 서로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기회이자 내부 단결의 계기였다. 우리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2008년 금융위기 때였다. 2007년부터 준비해서 2008년에 예산 공장과 베트남 공장을 동시에 오픈한 것이었는데 그것만 가지고도 큰 리스크를 갖고 있는 상태였는데 하필 시기가 금융위기 때와 맞물린 것이다. 베트남 공장은 오픈한 지 3개월 만에 한 달 동안 문을 닫아야 했다. 아주 어려웠다. 그러나 그때 우리 직원들이 큰 용기를 줬다. 경주 공장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임금을 동결하고 보너스도 반납한 것이다.(울먹임) 물론 회사가 회복되었을 때 더 많은 보너스를 줄 수 있었고 임금도 많이 올려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힘이 되었다.

기업의 사회참여도 중요한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다. 혹시 관련하여 회사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

이번 4월 15일 날 직원들과 '예산 벚꽃 마라톤대회'에 참석한다. 마라톤을 완주하면 회사에서 1Km당 1만 원의 상금을 지급한다. 10Km를 뛰면 10만 원을, 하프를 뛰면 21만 원을 상금으로 직원들이 받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상금의 반을 기부해서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에 동화책을 사주거나 결식아동을 돕는 데 쓴다. 2003년부터 시작해서 매년 봄·가을에 마라톤을 해서 기부하는 행사를 해왔다. 직원들도 좋아하고 건강에도 좋고 결속도 다지게 되어 여러 가지로 좋다. 그 외에도 지역에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는 회사를 설립한 이래 해마다 50명의 이공계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보육원이나 양로원에 직원들이 직접 가서 봉사하는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모든 기부나 봉사를 직원들이 함께 참여해서 한다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업을 하면서 여성이라 유리한 것이 있는가? 여성 CEO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작년까지 2년간 '경북 여성기업인 모임'의 부회장이었고 경주 지역 회장이었다. 거기에서 이야기하다 보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기업인들도 전반적으로 노사문제를 겪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있다 해도 극히 드물다. 여성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다들 아이를 키워본 엄마들이어서 기본적으로 포용력이 있고 남성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엄마가 되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엄마가 되기 위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것 같다.(웃음)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다.(웃음)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여성 기업인들을 보면 마음 쓰는 것이 굉장히 따뜻하고 섬세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사문제가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 여성들의 이러한 포용의 리더십이 사회의 구석구석에 퍼지게 되면 양극단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의 많은 대립들을 많이 완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은 경영인으로서 남성들이랑 이야기하다 보면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 있다. 여성들이 중요하게 보는 것 중에는 남성들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여성 경영자는 어떤 사람이 회의 중에 불만을 토로한다면, 그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남성들은 그게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서 종종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소한 차이가 문제를 발생시키는 요인이 된다. 옛날에 어려워진 회사를 받아서 시작하게 되었을 때 굉장히 놀랐던 것 중 하나는 현장에 있는 직원들의 불만이었다. 그전에 경영하던 사람들이 1년, 열두 달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한미 FTA와 자동차 산업을 떼어낼 수 없는 사안이다. 한미 FTA에 대한 견해를 말씀해 달라. 무엇이 긍정적인 부분이고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프레시안(최형락)
FTA를 통해 수혜를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나의 이해만 가지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또한 정치적으로 논란이 있는 이슈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이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조심스럽다. FTA를 보면 어느 쪽은 혜택을 본다고 무조건 찬성하고, 반대쪽에서는 자신들이 어려워진다고 극단적으로 반대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수혜를 보는 사람과 피해를 보는 사람 모두가 우리나라를 구성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협상 전에 우리나라 내부에서 이 양쪽을 조정하기 위한 절차와 대안이 충분히 마련되어야 한다.

FTA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면 칠레와 먼저 FTA를 체결했듯이 남미, 아시아, 유럽 등에 위치해있는 많은 국가들 중 우리가 좀 더 좋은 조건에서 교섭할 수 있는 국가들과 먼저 FTA을 한 후에 미국과 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였다고 생각한다. 그랬더라면 이미 관례화된 것들을 토대로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발효된 FTA라 하더라도 일부 사람들이 지나치게 희생되어야 한다면 반드시 재협상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이득을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주는 일들은 이 밖에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라는 같은 토대 위에 함께 살아가는 만큼 서로 입장이 다르더라도 항상 조율하고 조정할 수 있는 마음을 모두가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국가와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가족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남다른 가족사를 가지고 있다. 증조부께서 임정 고문을 지낸 애국지사 김가진 선생이시고, 특히, 할머니이신 수당 정정화 선생께서는 '임정의 맏며느리, 조선의 잔다르크'라고 불릴 정도로 여성으로서 독립운동에 끼치신 영향이 컸다. 어떤 분이셨나?

일생에서 가장 큰 몇 가지 행운이 있다면, 그 첫 번째가 우리 집에서 태어난 것이다. 나는 할머니 생각을 하면 너무 그립기 때문에 항상 눈물이 난다. 지금도 늘 꿈에서 할머니를 만나길 바라면서 잠자리에 든다. 1991년에 돌아가셨을 때가 내가 33살이었는데 그때까지 할머니와 같은 방을 썼었다. 4살 때 남동생이 태어난 이후로 할머니가 우리를 키워 주셨는데, 옛날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는데 6~7살 때 어느 날 할머니께 "할머니, 배고픈 게 뭐야?" 하고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시면서(이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할머니의 행동인데) "아이고, 요것아. 이 세상에 배고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말을 하니"라고 하셨다. 어렸지만 그 이야기를 알아들었던 것 같다. 대학교 때 데모를 하거나 노조활동을 해도 네 앞날 생각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최선을 다해라, 힘내라, 용기를 내라 하셨다.(울음) 대단한 분이셨다. 할머니와 같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정말 가장 큰 행운이었다.

자료들을 읽어보니 할머니께서 20대 때 본인 몸에 돈을 가지고 몇 번이나 국경을 넘나들며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하셨더라. 보통 담력이 세지 않으면 못하셨을 것 같은데 젊은 여성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을 하신 것이 아닌가?

맞다. 할머니가 평상심을 잃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담대하시다. 하루는 내가 자전거를 타다가 다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집에 들어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난리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게 놀랐을 텐데, 할머니께서는 '어디 보자. 지혈부터 해야겠구나' 하면서 차분히 응급 치료를 해주셨다. 지혈이 되고난 후에 '꿰매러 가자' 라며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할머니께서 20살 때 증조부님과 할아버지가 중국으로 망명하셨다. 할머니는 몇 개월 후 혼자 중국으로 찾아가셨다. 그 후로 여섯 번이나 비밀 루트를 따라 국내에 잠입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서 조달하셨다. 참 놀라운 용기를 가진 분이셨다. 나중에도 별일 아닌 듯 무심하게 그때 얘기를 해주곤 하셨다. 살면서 남녀를 불문하고 할머니보다 더 그릇이 크다고 느낀 사람은 없었다. 그 그늘에서 자랐으니 정말로 행운이다.

다른 가족들은 어떤가?

할머니와 오랜 기간을 산 영향인지 생물학적 유전자와 관련 없는 엄마도 마찬가지로 남다르시다. 대학교 다닐 때 80년도에 '한국 여성산악회'에서 미국 요세미티에 암벽등반 원정 등반을 갈 기회가 있었다. 보통의 부모님이라면 반대했을 것이다. 집안 형편도 어려웠는데 항공료는 자비로 내야 했다. 나 역시 당시 내 또래 사람들은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 가고 죽고 하는 상황에서 미안해서라도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먼저 엄마가 '가고 싶니?' 하고 물으셨다.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안 갈 거라 말하니 그날 밤에 엄마가 아버지와 의논을 하고는 다음날 가라고 하셨다.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으니 보고 오라'는 거였다. 그래서 가게 된 해외 원정은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우리나라 말고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고, 영어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후에 외국계 은행에 들어가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나에게 딸이 있었다면 우리 엄마가 나에게 하셨던 것처럼 많은 기회를 주지 못했을 것 같다.

가족 모두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이신 김자동 선생께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으로 여전히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가족 환경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쳐온 부분이 있는가?

어렸을 적부터 집안 분위기 때문에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 속에 노출되어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학습의 기회가 있었던 것에 감사하다. 아버지께서 주로 보시던 것이 AFKN 뉴스였는데 중간 중간에 정치와 사회에 관해 이야기해주셨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때는 박정희 독재치하에서 언론이 제구실을 못할 때였다.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다 보니 그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형제들도 다들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항상 형제간 우애를 강조하셨는데 그래서인지 무슨 일을 하면 서로 적극적으로 돕게 된다. 그건 그 일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라는 강한 믿음들이 서로에게 있기 때문인 것도 같다.

지금 아버지께서 85살이신데 무척 건강하시고 임시정부 기념 사업회와 같은 사회활동을 계속하고 계시다. 그것을 보며 우리는 늘 '아버지는 아직도 청년'이라고 이야기한다. 청년과 같이 사회적인 일에 대해 무엇인가를 더 하려는 끊임없는 욕구와 지적 호기심이 계속 있으시기 때문이다. 늘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나는 항상 그에 못 미치니까 열등감이 생기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게 된다. 가끔 아버지의 지식을 하드에 다 다운받아 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식, 철학, 역사 등 지식과 지혜가 정말 많으시고 능력도 많으신 분이다. 저 능력이 정말 우리나라를 위해 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러 가지 다른 방향으로 NGO 활동을 하면서 열심히 살고 계신 모습이 보기 좋다.

아버지께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번역하셨다. 80, 90년대 운동권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책인데, 본인도 그 책을 읽었나? 청년 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당시 집안이 어려워서 아버지가 번역 일을 하셨는데 금서였던 책도 몇 권 번역하셨다. 아버지가 영어를 정말 잘하시는데 어느 정도냐면 영어책을 눈으로 읽으시면서 한글로 해석을 불러 주셨는데, 너무 빨라서 우리가 받아 적지를 못할 정도였다. 브루스 커밍스 책도 아버지가 직독직해로 불러주시면 내가 받아쓰다가 팔이 너무 아프면 동생이 했다.(웃음) 번역서 전 권이 거의 다 그렇게 나왔다. 책 한 권 읽는 속도와 비슷하게 번역이 나오니 출판사에서도 주로 급한 번역을 맡겼다. 팔 빠지는 줄 알았다.(웃음)

아버지는 평소 얘기하실 때 항상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말해주셔서 어릴 적에는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그렇게 물어보면 다 대답해주는 존재인 줄 알았다. 나이를 들고 보니 그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더 나이 들고 보니 모두가 우리 아버지처럼, 할머니처럼, 증조부님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대에 대해 큰 자긍심을 갖고 있다. 나는 아버지처럼 천재이거나, 할머니와 같은 그릇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끊임없이 노력해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져야겠다는 최소한의 생각을 하면서 산다.

청년 시절 노조활동을 하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회문제와 싸웠던 한 사람으로서 지금 사회운동을 하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청년들이 사회운동을 하더라도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했으면 좋겠다. 이것이 꼭 자신이 돈을 벌어서 해야 한다든가 펀딩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기본적인 경제적 토대는 가지고 사회 운동을 해야지 전부 누군가의 기부만 받아서 한다고 하면 자신의 삶이 너무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그 방식을 조금 창조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아름다운 가게'는 좋은 사례인 것 같다. 그렇게 찾아보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평생 사회 운동가로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젊었을 때 치열하게 사회운동을 하다가 다른 길이 보이면 그 길을 갈 수 있다. 그것이 절대 나쁜 일이 아니다. 경제적인 요인 등의 이유로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다른 일과 양립해나갈 수도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길도 많다.

사람에게는 너무나 많은 길이 나타나고, 또 자기 생각만으로 그 길을 안전하게 걸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0년 후에 10억 원을 벌겠다고 벌어지는 것이 아니며, 20년 후에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큰 흐름 속에서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에 배치되지 않게 열심히 살면 된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많은 길을 만나게 되며 그때마다 여러 선택을 하며 계단처럼 올라가는 것이 인생이다. 저 산꼭대기 위에 깃발 하나 꽂아놓고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행복하고 즐거울 때 많은 에너지가 나오고 더 좋은 일도 할 수 있는 것이라 이야기하고 싶다.

'CEO 김선현'이 아닌 '인간 김선현'의 또 다른 꿈과 목표가 있는가?

계획은 해왔고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하려는 것이 있다. 할머니 성함을 따서 '정정화 재단'을 만들려고 한다. 할머니는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유치원을 만드시는 등 교육에 굉장히 관심이 많으셨다. 내가 나중에 은퇴한 후에 재단을 통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싶은데 그 중 하나가 어린이 교육이나 여성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다.

CEO로서의 삶도 행복하지만 늘 바빠 사실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언젠가는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웃음) 사람들은 나에게 열심히 산다고 얘기하는데, 내 천성이라기보다 그 상황에서 '이것만큼은 해야지' 하다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는 게으르고 정말 한량이다. 암벽등반과 승마를 즐기고 자연 속에서 동물들이나 어린아이들이랑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 조카들이 명절 때 오면 자기네들 사이로 꼭 나를 불러서 같이 논다. 그래서 나는 어른들 쪽에 끼지 못하고 항상 조카들 쪽에 있다.(웃음) 나는 정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인데 현실적으로는 그러지 못해서 항상 언젠가는 꼭 자유롭게 살겠다는 열망이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이 인터뷰 제목이 자유인이다. 김선현에게 자유란?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체화된 부분이 있다. 그러나 항상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받기 때문에 개인적인 자유는 조금 많이 포기하고 산다. 나뿐만이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모두의 바람은 즐거운 일을 하면서 스스로의 발전을 찾으면서도 사회에 기여 하는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이라 본다. 이것이 곧 자유로운 삶이자 바람직한 삶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사회적 원인을 해결해주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에 맞게 가는 것 같지 않아서 마음이 아프다.

공부와 취업,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청년들이 많이 있다. 동시대의 청년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공무원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그것이 안 되면 삼수, 사수까지 해가면서 매달리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닐까. 그것들에 목을 매는 이유는 통과하기만 하면 크게 힘들지 않게 살 것 같은 생각에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두 해 도전해 보다가 안 되면 다른 길도 찾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면 좋겠다. 이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것에 자본이 크게 필요하다거나 인맥이 필요하지는 않다. 굉장히 작은 일, 작은 아이디어, 작은 도움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런 일이 어찌 보면 하찮게 보이고 남들과 사회가 인정해주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20대에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지 않은가. 5년 후에 다르고 10년 후에 또 다르다. 자기 인생이니 더 용기 있게 더 길게 보며 한 발을 내디뎠으면 좋겠다. 시험에 매달리며 젊음을 낭비하는 사람을 볼 때 참 안타깝다. 그리고 사회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좌절하는 사람을 볼 때 전(前)세대로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미 주어진 여건이라면 본인들이 좀 더 전향적으로 생각하고, 더 많은 창조적 생각과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눈높이도 대폭 낮추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낮추는 눈높이가 자신의 인생이 아니다. 대학교를 나왔어도 제조업 현장에도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조업 현장에는 항상 사람이 부족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쓰고 있는데 누가 안 받아주겠는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눈과 실력과 철학이 남다르다면 그곳에서도 남다른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렇게 자기가 들어간 중소기업을 발전시키고 그 안에서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는데 사회가 인정하는 고정 틀을 가지고 세상을 시작하려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기발한 아이디어로 창업해서도 일을 잘한다. 누구는 할 수 있고 나는 못하는 일이 절대 아니다. 개인이 갖고 있는 특성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다. 자신의 역량을 찾아내고 개발해라. 사업을 하다 보면 성공한 기업인들을 많이 만나는데 그 사람들 모두 객관적으로 똑똑하고 뛰어나서 성공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성에서 창조적 아이디어와 길고 멀리 보는 안목, 낮은 곳에서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는 꾸준함과 성실함이 모여 성공을 이룬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름의 내공을 갖게 된다. 그러니 지금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공을 쌓아가자. 시간이 흐르면 무림의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장지선)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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