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안티 부시‘(anti-Bush)의 함성 소리가 뉴욕 맨해튼을 덮었다. 올해 3월 20일 미 부시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1주년을 규탄했던 집회 이후 5개월만의 일이다. 8월 30일부터 나흘 동안 이곳 뉴욕에서 열리는 미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겨냥한 이 대규모 집회의 참가자는 40만. 주최측인 평화정의연합(United for Peace and Justice)의 추산이다(뉴욕경찰은 이보다 훨씬 적은 10만 추산).
<사진1> 공화당 전당대회를 하루 앞두고 뉴욕 맨해튼 거리에 모여든 반부시 시위대. 주최측 추산으론 40만이 모였다. @김재명
지난 3.20 집회에선 “War, No! Peace, Yes!"가 상징하는 것처럼 반전의 목소리가 넘쳐났다면, 이번 8.29집회에선 ”부시를 다시 떨어뜨리자“(Redefeat Bush)에 모아졌다. 2000년 11월 미 대선에서 부시 후보는 민주당 앨 고어 후보에게 총득표수에서 50만표를 지고도 선거인단 숫자에서 이김으로써 대통령에 올랐음을 말하는 문구다. 집회 참가자 다수는 민주당 케리 후보 지지자이지만, 일부는 제3후보인 랠프 네이더 후보 지지자도 목청을 높였다.
사진2. ‘탐욕, 억압, 특권’이 미 공화당을 뜻한다는 플래카드가 보인다.
오전 10시부터 맨해튼 14번가 유니온 스퀘어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한 시위군중들은 ‘부시 킬러’로 알려진 마이클 무어를 비롯한 유명인사들의 짧은 인사말에 환호를 보냈다. 그리곤 낮 12시 미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34번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메이시 백화점과 매디슨 스퀘어 가든 가까이에선 몇몇 시위자들이 경찰과 충돌, 붙잡혀가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사진3. “부시 정권을 무너뜨리자”고 외치는 시위군중들
4. “부시와 체니를 탄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나선 제3후보 럴프 네이더 후보 지지자들.
그럼에도 뉴욕 거리집회의 특징은 긴장감보다는 일종의 거리축제 같은 성격을 지녔다. 참가자들은 사이사이에 반(反) 부시 구호와 반전 구호를 외치면서도, 각자 준비해온 다양한 플래카드를 흔들어대며 모처럼의 즐거운 나들이에 나선 얼굴들이다. 플래카드뿐 아니다. 많은 이들이 남들의 눈길을 끄는 기발한 의상들을 입고 나온다. 맨해튼 거리는 그들에게 일종의 정치적 놀이문화 공간인 셈이다.
5. “(나 부시는) 석유를 얻으려고 (이라크 민중을) 죽이겠다”
6. 이라크 전쟁에서 사망한 미군들을 기리며 공화당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규탄하는 행렬.
뉴욕경찰은 비상이다. 미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동안 어디선가 날마다 시위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하루 전인 28일에는 공화당의 낙태 반대정책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수천명의 낙태 지지론자들이 브루클린 다리를 따라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들이 특히 신경을 쓰는 부분은 제2의 9.11 테러설이다. 전당대회장인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삼중사중으로 경계가 삼엄하다.
7.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감옥 학대사건을 풍자한 가장행렬.
8. 미국 언론들의 보도 성향을 비판하는 플래카드.
당연한 얘기지만, 맨해튼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의 생각은 부시 쪽과는 다르다. 그들은 “9.11은 부시의 잘못된 대외정책 탓에 일어났다”는 뜻이 담긴 플래카드를 들고 반부시 구호들을 외쳤다. 9.11 유족회원들 가운데 일부도 맨해튼 시위에 참여, “9.11 희생자의 이름들을 당신의 침략적 행위에 팔지 말라”는 내용이 담긴 플래카드를 흔들었다.
9. 부시을 악마에 비유한 플래카드
10.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려는 행동대원들
매디슨 스퀘어 가든 주변에선 몇몇 사람들이 시위대와 핏대를 세우며 입씨름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부시 지지자들이 “4년 더!”를 외치자, 시위대들은 “4개월만 더!”라고 되받았다. 부시 지지자들 가운데는 공화당 전당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뉴욕에 온 것으로 짐작됐다(일부 뉴요커들 사이에선 “부시가 다시 대통령이 된다면 캐나다든 유럽으로든 이민을 가겠다“는 말들이 오간다).
11. 뉴욕경찰은 미 공화당 전당대회로 몸이 고달프다.
12. 경찰에 체포된 한 시위대원.
시위대를 따라가며 다시 유니온 스퀘어에 닿은 시각은 오후 4시. 공원 벤치에 앉아 쉬려니, 네이더 후보 지지자들과 케리 후보 지지자들 사이에 입씨름이 벌어졌다. 결론이 나지 못할 싱거운 토론이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의 공통된 정치정서는 “부시만 안 된다면 누구라도 좋다”(Anybody but Bush)는 것이다. 뉴욕에서야 민주당 지지자들이 워낙 많아 네이더 투표는 대통령선거인단 확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13. “전쟁보다는 평화”를 외치는 시위 참가자들.
14. 레즈비언들의 반전, 반부시 춤사위.
젊은이들은 곳곳에서 악기를 두드리며 뒷풀이 춤사위를 벌인다. 들려오는 가락들은 우리 한국 것이 아니긴 했지만, 신명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부분의 참가자들에게 시위는 어디까지나 1회성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개인주의자가 될 뿐이다. 사정을 알고 보면, 미국인들은 우리 한국인들만큼 지구촌 돌아가는 사정을 꿰고 있지 못하다. 미국인 상당수가 아직도 “사담 후세인이 9.11 테러의 배후”라고 여기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15. 반공화당 시위에 참가한 한 뉴요커의 꿈은 ‘세계평화’다.
반전ㆍ반부시 데모를 주도한 직업적인 활동가들도 (트로츠키주의자에서부터 환경운동가들까지) 워낙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보여 통합을 말한다는 것은 애당초 어려운 일이다. 반전, 반부시라는 공통분모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면 더 이상 더불어 말할 게 없다. 그런 활동가들이 함께 모여 시위를 조직하면서 대중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참가율을 높이려고) 찾아낸 해법이 바로 ‘긴장감을 주지 않는 놀이문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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