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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하루 전, 김지하의 '오적(五賊)'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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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총선 하루 전, 김지하의 '오적(五賊)'을 생각한다

[김주언의 '언터처블'] "국회의원(猿) 아닌 국회의원(員)을 뽑자"

본격적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때아닌 '5적 논란'이 벌어졌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은 각각 이번 선거에서 심판해야 할 후보 5명을 '5적'으로 지목했다. 민주통합당은 수도권 격전지의 새누리당 후보 5명을 'MB 아바타-박근혜 최측근 5인방'으로 규정하며 정권 심판론을 내세웠다. 이에 뒤질세라 새누리당도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인사 5명을 '나라를 망친 5적'이라며 원색 비난하고 나섰다. 구한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 5적'에 빗대 유권자의 눈길을 끌기 위한 구호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곧바로 사그라졌다.

여야의 '5적 공방'을 보면서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썼다가 곤욕을 치른 김지하 시인은 속으로 웃었을지도 모른다. 김 시인이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보다 못 해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단숨에 써내려 간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기'가 '5적'이다. '간뗑이 부어 남산만 하고 목 질기기가 동탁배꼽 같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천하흉포 5적'이 그들이다. 이들은 원숭이(猿), 성성이(猩), 미친개(狾) 등 모두 흉측한 동물들이다. '5적'에 속하는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에서 또다시 '5적'이 거론되니 민망하기 그지없다.
▲ 김지하 시인이 그린 '5적'

담시 <오적>에 나오는 국회의원(猿)은 '곱사같이 굽은 허리'에 '조조같이 가는 실눈'을 가졌으며 '가래 끓는 목소리'를 내뱉는다. 이 원숭이는 '쭉 째진 배암 샛바닥에 구호가 와그르르' 담겨 있다. '혁명이닷, 구악(舊惡)은 신악(新惡)으로! 개조(改造)닷, 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 근대화닷, 부정선거는 선거부정으로! 중농(重農)이닷, 빈농(貧農)은 이농(離農)으로!', 국회의원은 '손자(孫子)에도 병불염사(兵不厭詐·병가는 사술을 꺼리지 않는다)'라고 했으니 '치자(治者) 즉 도자(盜者)요 공약(公約) 즉 공약(空約)이니 우매(愚昧) 국민 그리 알고 저리 멀찍 비켜서랏'이라고 외친다.

김 시인이 말한 국회의원과 우리가 뽑는 국회의원은 다르다. 김 시인이 '5적'을 쓴 이후, 40년이 흐르면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국민의 정치의식도 높아졌다. 국회의원의 자질도 크게 향상됐다. 유권자를 바라보는 인식도 달라졌다. 10여 차례의 총선을 거치면서 과거의 '곰보표'나 '빈대표' 같은 부정선거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시인이 꼬집은 국회의원의 행태는 그대로 남아 있다. 말 바꾸기와 헛공약, 유권자를 현혹시키는 '말의 향연'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공약(公約) 즉 공약(空約)'이라는 경구(驚句)다. 김 시인의 혜안이 돋보인다. '5적' 발표 이후 40년을 관통하는 경구기 때문이다.

정당들은 선거를 앞두고 공약(公約)을 발표한다. 이를 통해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듯이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으로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선거 때만 등장하는 공약이 '다리를 놓아 주겠다'는 것이었다. 홍수 때만 되면 쓸려 버리는 허술한 다리를 지어놓고 4년마다 똑같은 공약을 되풀이하는 웃지 못 할 촌극도 벌어졌다. 이러한 헛공약의 남발은 40년이 지난 뒤에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들의 개발공약이 그렇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정당들은 복지, 일자리, 경제민주화 등을 대표적인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지역후보들의 공약은 이와 배치되는 지역개발 공약을 남발했다. 한국 매니페스토 실천본부가 총선 후보 386명이 제출한 5대 핵심공약 1182개를 분석한 결과, 개발공약이 53.6%로 절반을 넘어섰다. 각 당이 앞다투어 내놓은 민생공약(46.1%)보다 많았다. 개발공약 중에는 국책사업 유치와 산업단지 조성, 도로 건설, 재개발 및 재건축이 주를 이뤘다.

지역 후보들의 개발공약은 말 그대로 '공약(空約)'일 가능성이 높다. 실현이 불가능하거나 유권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장밋빛 공약'과 선거 때만 되면 등장하는 '해묵은 공약'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18대 의원 공약 중 보류되거나 폐기된 291개 공약 중 재건축·재개발, 국책사업 유치 등 개발공약이 81.4%에 달했다. 매니페스토 본부는 "지역 민원성 개발공약은 표를 얻기 위한 대표적인 거짓말"이라고 평가했다.

경실련이 발표한 '5가지 유형별 개발 헛공약'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헛공약의 5가지 유형은 신공항 건설, 경전철 사업, 철도 및 전철 역사 신설 또는 유치, 철도 및 전철의 노선 연장, '사업 중단'이 판명된 사업 등이다. 개발공약은 결국 건설 대기업의 영리추구 수단으로 악용되고, 이로 인한 피해는 모두 지역 주민과 혈세를 납부한 국민에게 전가돼 왔다. 경실련은 정당들이 "국가 전체의 이익은 아랑곳없이 지역주민의 환심을 사서 어떻게든 의석수를 확보하고 보겠다는 식의 무책임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선거과정에서 발표한 각 정당의 정책공약은 우리의 미래를 가늠하는 중요한 '사회적 약속'이다. 유권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헛공약은 정치인의 기본덕목인 진실성과 진정성을 떨어뜨려 대의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할 뿐이다. 유권자들은 어느 후보의 공약이 진정성을 갖추고 실현 가능하며 우리의 미래를 위해 소중한 정책이라는 점을 판별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후보들이 제시한 공약들을 꼼꼼히 짚어봐야 한다. 매니페스토 본부가 발표한 '나쁜 공약 5대 유형'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매니페스토 본부는 다음 5가지 유형을 '나쁜 공약'으로 제시했다. ① 표를 얻기 위한 거짓말, '못 된 피노키오' 형 공약 ② 선거 전에 한 말 다르고 선거에서 하는 말 다른 '표리부동'형 공약 ③ 메가톤급 공약을 내놓으면서도 구체적인 방법은 없는 '빈 수레' 형 공약 ④ 우리 사회의 갈등과 반목을 유발하는 표를 얻기 위한 '급조' 형 공약 ⑤ 기존에 진행되고 있는 정책을 자신의 것처럼 포장하는 '기만' 형 공약. 한마디로 김 시인이 지적한 '공약(空約)'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이번 총선은 정책이 실종된 선거라는 게 일반적 평가이다. 선거를 앞두고 정당들은 경제, 복지, 일자리, 주거, 교육, 보건 의료 등 각 분야의 공약을 앞다퉈 내놓았다. 특히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은 복지 및 일자리에 중점을 둔 공약을 내세워 '복지국가'를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진행되면서 민간인 불법사찰 등 대형사건이 불거지면서 정책 이슈는 묻혀버리고 정치적 공방이 선거판을 휩쓸었다. 때아닌 '5적 공방'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에 따라 정책공약에 대한 철저한 검증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제는 유권자들이 정책공약을 따져 보고 국회의원을 뽑아야 할 때다.

김지하 시인은 국회의원(猿)이 선거가 끝난 뒤에는 '냄새난다, 퉷'이라고 가래를 내뱉으며 '골프나 쳐야겠다'며 '도둑시합'에 골몰한다고 했다. 40년 전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에는 이런 몰골의 동물들이 창궐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그런 국회의원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만큼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감시하는 유권자의 눈이 번뜩이고 있기 때문이다.

11일은 선거일이다. 내가 던지는 한 표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꾼다. 국회의원을 뽑고 난 뒤 후회하지 말고 뽑기 전에 신성한 한 표의 중요성을 깨닫고 올바른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유인원 국회의원(猿)이 아닌 국민의 머슴 국회의원(員)을 뽑는 일은 유권자의 현명한 선택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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