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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작곡자 '안익태'와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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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와 아르헨티나

김영길의 '남미 리포트' <12>

***아르헨티나 음악계를 놀라게 한 안익태선생**

아르헨티나가 ‘남미의 파리’로 불리울 정도로 문화와 예술의 전당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르헨티나에는 클래식 음악인이라면 누구나가 한번쯤은 서 보기를 갈망하는 꿈의 무대인 꼴론극장을 비롯, 유럽에서도 접하기 힘든 유명한 미술품 등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예술의 전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설명: 1.지난1960년 9월 안익태선생이 '코레아 판타지'를 연주했던 산마르틴극장 무대위에서 본 객석.@김영길

그런 아르헨티나에 애국가를 작곡했던 안익태 선생이 지난 1960년 8월 방문하여 한달이 넘게 머물렀다는 사실이 알려져 아르헨 현지에 살고 있는 2만여 한국동포들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안익태 선생의 해외 활동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공연한 몇가지 자료가 한국에 알려져 있을 뿐 유럽이나 아르헨티나 공연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안 선생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향악단을 지휘했다고만 그의 약력에 간단하게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필자가 현지 언론사와 당시 공연을 접했던 사람들의 증언과 현지 언론, 음악계의 관련자료들을 살펴본 결과 안익태 선생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향악단이 아니라 뚜꾸만시(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북쪽으로 1천2백여km 지점)’9월 음악제’를 계기로 뚜꾸만 국립대학교 교향악단을 지휘한 것으로 확인됐다.

안익태 선생이 한국의 음악계에서 환영은커녕 세계음악계를 놀라게 했던 천재적인 음악성을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한 채 해외를 떠돌다 이역만리 스페인에서 병상에 누워 조국 산천, 형제 자매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자신이 국제음악제 때 지휘 녹음했던 레코드를 들으며 고요히 숨지셨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필자는 안선생에 대한 새로운 사료 발굴이라는 소명의지를 가지고 5년 가까운 시간을 할애하며 당시의 음악계 인사들을 만나보고 아르헨티나의 각종 자료실을 찾아다니면서 안선생의 흔적을 수집했다.

<사진2는.거장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로부터 개인지도를 받고 있는 안익태선생.@김영길

필자가 안익태선생의 사료 발굴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정말 우연이였다.

지난 99년 6월 아르헨정부가 주관했던 아르헨 주요 언론사 편집장 간담회에서 필자는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 자리에 초대를 받았었다. 이 자리에서 만난 은발의 노신사가 필자에게 다가와 ‘익타이 안을 아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익타이 안’…생소한 이름에서 아르헨티나의 노 신사가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선생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무엇을 했던 사람이냐’고 돼 물었다.

그 노신사는 약간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당신 나라의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 이름도 모르느냐’는 것이였다.

그날 이 후로 이 노신사는 지금까지 필자와 만날 때마다 안익태선생이 아르헨티나를 방문해 청년시절 받았던 음악에 대한 안선생의 열정에 감명을 받았던 순간들을 회고해주는 것이였다.

올해로 70세인 그가 한국인 지휘자 안익태선생을 만난 것은 1960년 뚜꾸만에서였다. 아직 한ㆍ아 양국 국교가 맺어지기 전이어서(1963년 수교) 아르헨티나 그것도 시골 도시에서 동양인을 보면 신기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해 9월 15일부터 30일까지 뚜꾸만시가 ‘9월 음악제(Septiembre Musical Tucumano)'를 개최하면서 익타이 안을 초청한 것이다.

<사진3은 런던 필 하모니 프로그램. 여기에는 스트라우스가 안선생을 추천한다는 소갯말이 인쇄돼 있다.

당시 스페인 마요르카섬의 빨마 데 마요르까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였던 안익태선생은 8월 25일 뚜꾸만에 도착, 그 다음날 저녁 산마르틴극장에서 국립 뚜꾸만대학 교향악단을 지휘해 자작곡 ‘코레아 판타지’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정화’를 선보였다.

그리고 9월 15일 음악제 개막행사의 일환으로 오후 7시 뚜꾸만시내 주립음악홀에서 ‘동양음악’강연을 한 뒤 그날밤 10시 역시 산마르틴극장에서 두번째로 뚜꾸만대학 교향악단을 지휘, 자작곡 교향시’강천성악’과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비창’을 연주하고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 안토니오 데라꼬와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K-456’을 협연했다.

당시 27세의 청년이였던 이 노신사는 이 두 번의 연주회를 통해 54세의 한국인 안익태의 음악적인 기량과 인간적인 면모에 큰 감동을 받게 된다.

그는 안익태선생이 뚜꾸만에 머무는 동안 집으로 초대해 가족처럼 지냈으며 그런 연고로 인해 안익태선생의 타계 이후 지금까지 유족인 딸들과는 물론 안선생의 교우 자녀들과도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왜 안익태선생이 조국 한국에서 버림을 받고 세계를 떠돌아 다니다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당시 한국인으로써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인이자 민간 외교관 역할을 했는데도 말이다.”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국가를 작곡한 음악가는 영웅 대접을 받아야 당연한 것 아닌가”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안익태선생의 아르헨티나 방문은 런던 필하모니 등을 통해 음악활동을 함께 한 지우인 피아니스트 헤럴드 콘의 주선으로 이루어 졌다.

당초 뚜꾸만 음악제에는 콘이 초청을 받았으나 콘이 안익태선생을 대신 추천, 안익태선생이 아르헨티나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아르헨 지방신문, 안선생 음악성 대서특필**

안익태선생의 방문과 관련, 뚜꾸만시의 지방일간지 ‘라 가세타’의 1960년 8월 26일자에서 아래와 같은 기사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사진4.안선생의 아르헨티나방문 소식을 소상히 소개한 뚜꾸만 '라 가세타'지의 네가필름.

“익타이 안은 12년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문하에서 지휘수업을 받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이며 한국의 애국가를 작곡한 한국 유일의 서양음악 작곡가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또 “한국은 불과 12년 전인 48년에 일제로부터 독립(정부수립)했으며 남북분단으로 6.25전쟁을 겪은 지 7년밖에 되지 않아 문화적인 발달이 낙후될 수밖에 없는데도 서울에는 수준높은 음악원과 국립교향악단이 설립돼 있으며 베토벤 교향곡9번 연주때에는 3백명규모의 대규모 합창단이 참가하기도 했다”고 보도해 한국인들의 음악적인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

‘라 가세타지’는 또 9월 15일 음악제 개막 소식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안익태선생의 뚜꾸만 활동상황을 소상히 전했다.

안익태선생에 대한 사료발굴 중 가장 보람이 있었던 것은 안익태선생의 지휘하는 모습과 세계각국을 순회하며 공연했던 포스터가 담긴 필름, 한국을 방문해 열렬한 환영을 받은 모습과 어린 딸들과 부인과의 단란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필름의 발견일 것이다.

이 필름 전반부 안선생의 지휘모습은 청중들에게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정열적이다. 관중들의 반응 또한 열광하고 있는 모습을 담아놓았다.

그러나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 아르헨티나를 오가며 공연을 선전하는 포스터에는 모든 공연이 ‘입장료 무료’라고 찍혀있는 모습이 잡혀 한국이 낳은 이 천재 음악가가 해외에서 크게 대접 받지는 못했던 것 같아 서글픔을 느끼게 해준다.

<사진1(두번째 메일 '사진추가'라고 써진 것)은 안익태선생이 뚜꾸만을 방문했을 당시 라 가세타지 기자가 찍은 사진. 가세타지는 이 사진을 아주 소중한 자료로 보관중이다.

다시 말해서 안선생은 유럽의 지방도시가 주관하는 음악축제 정도에 초대받아 체재비와 약간의 수고비 정도를 받지 않았나 여겨진다.

이 필름의 후반부 3명의 어린 딸들과 단란했던 모습에서,그리고 그 딸들과 함께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를 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핑 돌 정도다.

그리고 한국방문에서는 그의 평생지우인 헤랄드 콘과 함께 귀국공연을 했던 것도 볼 수 있으며 상당한 환영을 받은 모습도 보인다.

***뚜꾸만에 꽃핀 ‘코레아 판타지’**

안선생이 세계를 떠돌다 이곳 아르헨티나로 초청돼 45일간 머물렀던 뚜꾸만시는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1200Km 떨어진 레몬의 세계 최대 생산지이며 설탕과 대두콩 등 전형적인 농업도시로 알려진 곳 이다.

역사적으로는 아르헨티나 독립의 영웅 산 마르틴 장군이 스페인 총독부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곳이 뚜꾸만이었다.

인구 1백70만의 이 도시에는 스페인계와 이탈리아계, 중동국가들의 이민자들이 대다수며 한국 동포들은 그야말로 소수민족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선생의 영향 때문인지 그곳의 동포들은 문화 민족으로서 대접을 받으며 주 정부가 주관하는 각종 문화 행사에 초대되어 귀빈 대접을 받는다.

<사진2는 또레스 교수가 안선생 기념관에 보내 달라는 9월의 음악제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에는 안선생의 일정과 연주 내용 등이 담겨져 있다.

뚜꾸만시의 19세대 100여명의 동포들이 결성한 한인회를 이끌고 있는 채수경 한인회장은 “주 정부가 매년 주관하는 이민의 날 행사에 우리가 빠져 버리면 행사 자체가 취소될 정도로 우리가 이곳에서 차지하는 문화적인 비중은 아주 크다”고 말했다. 그곳 한인교민 전체가 참여하는 한복 행렬과 부채춤 등은 뚜꾸만의 명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뚜꾸만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또 10년 전부터 한글학교를 운영, 현지에서 태어난 2세들에게 한글과 한국의 문화 역사 등을 가르치고 있다.

필자가 안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해 그곳을 2번째로 찾았던 날은 뚜꾸만 한국학교 개교 1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초급반과 중급, 고급반을 졸업하는 21명의 학생들은 거의가 국적은 비록 아르헨티노들이지만 한국인의 핏줄을 받아 태어났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라틴 문화권에서 태어난 아르헨티나 한인 2세들은 국제화 시대에 걸맞게 쉽게 4개국어 이상을 구사할 수 있는 교육적인 토양에서 자라고 있다.

<사진3은 안선생의 지휘로 코레아 판타지 리허설에 몰입하고 있는 뚜꾸만 교향악단.

그러나 아무리 스페인어, 이태리어, 포르투갈어, 영어에 능통해도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교육이 된다는 것을 실감한 뚜꾸만의 한인들은 지금 한국어 배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비록 열악한 환경과 한국관련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속에서도 말이다.

지구의 반대편 아르헨티나에서 안익태선생이 아르헨티노들과 함께 연주했던 ‘꼬레아 판타지’가 45년이 지난 지금 그 뒤를 이은 한인 2세와 3세들에 의해 아름답게 꽃 피우고 있는 것이다.

***거장 스트라우스의 추천서**

안선생의 아르헨 방문을 기록으로 남긴 현지 신문사 자료보관실에서 당시 안선생님의 소식을 전한 신문 기록 네가티브 필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사에 사용했던 3장의 흑백사진과 프로그램, 영국 런던 필 하모니를 지휘했던 안선생님의 프로그램 한 장도 깨끗하게 보관돼 있었다.

안익태선생이 런던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는 증명서로 세계음악계에 통했던 공연 프로그램을 아르헨티나의 시골 도시에서 발견한 것은 행운이였었지도 모른다.

한국의 안선생 기념관에 이 자료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그리고 필자가 확인한 많은 안선생의 자료 가운데 유일하게 런던 공연은 입장료에 대한 부분이 언급돼 있는 공연이었다. 처음으로 발견된 유료 입장 공연이었다는 말이다.

런던 필의 프로그램에는 다음과 같은 거장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추천서를 함께 인쇄해 놓았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 안에게.

나는 당신이 지휘자로서 특출한 재능과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여러 차례 나에 의해 확인돼 증명해 주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당신의 국제적이며 값진 음악적인 자질은 세계 주요 음악계에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당신의 예술적인 장래에 행운을 기원합니다.

당신의 진실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박사”

1940년대 당시 최고의 거장으로 세계 음악계의 추앙을 한몸에 받고 있었던 스트라우스의 이 추천서 한 장이야말로 안익태선생이 세계각국 음악계의 출입증 역할을 했을 것이다.

1960년 6월 15일 런던의 로얄 페스티발 홀에서 열였던 이 공연이야말로 안선생을 일약 세계적인 지휘자로 발돋음하게 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런던 공연으로 세계음악계에 이름을 알린 안선생은 비엔나, 베를린, 도쿄, 서울, 부다페스트, 파리, 멕시코, 마드리드, 취리히, 뚜꾸만에서 ‘코리아 판타지’와 ‘강천성가’로 세계 음악계에 한국인의 예술성을 널리 알렸을 것이다.

***안선생의 열성팬 ‘그는 위대한 지휘자였다’**

안선생의 행적을 찾아 나선 필자는 최근 3번째로 뚜꾸만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안선생이 뚜꾸만 오케스트라를 지휘,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했던 산 마르틴 극장을 찾아가 내부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혹시나 선생의 자료가 아직 남아 있을까 해서 자료 담당자와 만나 보았으나 “지난 60년대 극장 내부가 불타 모든 자료가 없어졌다”는 대답을 듣고 실망해서 돌아서는데 “당시 안선생과 함께 공연했던 오케스트라 멤버 중 몇몇이 아직 살아 있다”며 연락처를 건네주었다.

<사진 4는 안선생의 평생팬임을 자처하는 기도 또레스교수. 노환으로 각종 병마에 시달리는 그는 안선생의 영전에 바칠 추모시를 완성하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한다.

약간은 흥분된 마음으로 당시 음악제의 조직위원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기도 또레스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저녁이나 함께하자는 필자의 제의에 또레스 교수는 “몸이 불편해서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내집으로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뚜꾸만에 거주하는 한 교포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찾아간 또레스 교수의 집은 의외로 뚜꾸만 한인들 밀집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안선생의 평생팬이라고 밝힌 또레스 교수가 뚜꾸만 한인 교민들 사이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필자의 방문을 알리자 침대에 누워있던 또레스 교수는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경사가 거친 계단을 내려와 직접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바로 옆에 젊은 제자인 현직 교수가 있었는데도 자신이 평생을 두고 존경하는 ‘그란 마에스트로(위대한 지휘자)' 한국인 안익태선생의 흔적을 알기 위해 찾아온 한국 손님은 자신이 직접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금년 72세인 또레스 교수의 방은 그야말로 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벽에는 세계유명 지휘자들의 사진으로 가득 덮혀 있었고 두 개의 방과 응접실은 카세트 테입과 각종 공연 비데오 테입으로 꽉 차 있었다.

또레스 교수는 먼저 안선생의 안부를 물었다.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시느냐는 것이였다.

지난 65년 9월16일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에서 자신이 작곡한 코레아 판타지를 들면서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는 필자의 대답에 이 노 교수의 두 눈에는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지난 45년동안 잊혀졌던 옛 동양인 음악가에 대한 추억을 또레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45년 전 뚜꾸만 주 전체는 안익태라는 한 동양인 음악가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통치와 한국전쟁을 거친, 가난한 나라의 대명사 격이였던 한국에서 어떻게 그런 훌륭한 음악가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몹씨 궁금해 했다. 30년대에 스트라우스 밑에서 사사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으로 생각하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 예술계와 쌍벽을 이룬다는 아르헨티나 음악가들도 스트라우스 문하에 들어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동양인 음악가가 스트라우스의 신임을 받은 제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마에스트로 안은 세 가지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항상 흰 장갑을 끼고 다녔던 안의 훌륭한 서구적인 세련된 매너와 풍부한 유머 감각이었고 두번째는 지휘자로서 두루 갖춘 그의 훌륭한 지도력이였다.

마지막으로 그의 완벽한 스페인어는 만나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그 당시 ‘뚜꾸만 여인들은 모두가 나의 이상형 미인들’ 이라는 그의 말은 상당 기간동안 이곳에서 화젯거리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은 지난 60년 9월 15일의 뚜꾸만 음악제는 그때가 첫 개막 공연이였고 지금까지 이어오는 음악제의 개막 공연의 지휘자가 안이었다는 사실이다.

마에스트로 안은 제1회 우리 음악제의 주인공이었다는 말이다.

당시 그의 인기는 대단해서 이곳 주민들 서로가 그를 초대해서 식사를 하려고 난리를 떨었고 문화계 인사들과 학생들은 자기 집으로 안선생을 초청하려고 우리에게 매달리기도 했다. 또한 수백에 이르는 음대 여대생들과 음악인들이 요즘으로 말하면 오빠부대를 만들어 안선생을 따라 다니기도 했다.

특히 뚜꾸만 대학에서 그의 동양음악 강의는 우리를 감동시켰고 동양의 문화와 한국에 대해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었다.

우리 조직위 위원들은 스트라우스의 신망과 스페인 마요르까 상임지휘자 였던 마에스트로 안을 초청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고 결과 또한 모두가 아주 만족해 했다.”

또레스 교수는 필자에게 “기회가 된다면 한국을 방문해 안선생의 기념관을 보고 싶다” 며 “다음에 다시 이곳을 방문하면 당시 안선생이 지휘를 했던 공연실황 테입을 구해서 들려 주겠다. 그리고 안선생의 영전에 추모시를 하나 지어 올리고 싶다.”며 “안선생의 생년 월일과 애국가의 스페인어 번역을 부탁한다”는 말로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그리고는 지난 60년 9월 음악제 프로그램 원본 몇장을 필자에게 전해주며 “안선생 기념관에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해외에서는 위대한 음악가로 한국을 알린 안선생이 정작 태어난 고향인 한국에서는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은 일찍이 한국을 떠나 해외 생활을 하면서 서구 문화에 젖어 시쳇말로 한국 음악계 인사들과 코드가 맞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안선생은 외모와는 다르게 상당히 엉뚱한 장난을 즐겼으며 유머 감각이 풍부했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발견하게 됐다. 이런 부분이 한국의 보수적인 음악계 인사들로부터 배척을 당해 고국을 떠나 유랑생활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Buenos Ai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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