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정치인
통합 진보당 이정희 공동대표의 관악을 후보 사퇴는 매우 잘한 결정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전혀 원하지 않는 선택일 수 있지만, 중대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이정희가 펼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야권 연대의 틀을 관리하는 민주당의 책임이 더 한층 무거워지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번 전화여론 조사 과정에서 불거진 여론조작 문제는 중대사이다. 혹여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거나 그 수준에서 정리하려고 해도 조작은 어디까지나 조작이라는 점에서 관련 최종 책임자가 이에 대해 철저하게 책임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경우, 이 사안은 확대 해석되고 기본적인 신뢰를 흔들게 하는 암초로 선거 중이나 그 이후에도 끝없이 등장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이정희 개인의 불행만이 아니라 진보정치 전체와 이 나라 정치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지 이 덫에서 먼저 나오는 것이 순서다. 덫에 걸린 채 아무리 애를 써봐야 남들이 보기에 그것은 허우적거리는 것으로 비치고, 현실적으로는 그물망이 더더욱 온 몸을 죄어들어오는 악몽이 된다.
"새로운 이정희" 얻다
정치현실의 구체적인 면모에서 보자면 이 정도 사안으로 출마를 접는다는 것은 억울하고, 진보정치의 진전이 기대되는 지점에서 기가 막힌 사태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정희 공동대표는 자신이 살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아끼는 이들이 "이정희 살리기"에 적극 나설 때 이루어진다. 이번 용퇴는 그런 지점의 근거를 확실하게 만들어 냈다.
정치 초년생으로서 진보정치의 새로운 아이콘이 되기까지 꾸준히 성장해온 이정희는 이로써 다른 단계로 들어서는 이정희가 될 것이다. 보다 더 단련되고 보다 더 인내하고 보다 더 길게 보고 보다 더 겸손하고 보다 더 튼튼해진 정치인으로 성숙해나갈 것으로 믿는다. 진보정치의 희망이 그렇게 자라난다. 관악을 후보 사퇴로 진보정치는 이정희를 잃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정희를 얻은 것이다.
백혜련이 소모품인가?
이제 민주당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선에서 패배한 백혜련 공천은 명백한 잘못이다. 아무리 사소한 수준의 조작이라도 조작은 조작인 것처럼, 아무리 근소한 차이의 패배라도 그것은 패배다. 이에 승복하지 못한다면, 정치는 기만과 사기로 전락하고 만다. 후보 단일화를 전제로 한 공천이라는 식의 야비한 술수는 대권을 목표로 움직이는 야당으로서 취할 태도가 결코 아니다.
만일 백혜련 공천을 이정희 사퇴와 맞물려 조건부로 기획했다면 그것이야 말로 민주당의 수준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 된다. 경선 불복을 당이 직접 지휘해버린 꼴이 된 이 사태 앞에서 이제 민주당은 후보들의 불복사태를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하겠다는 것일까? "당의 자살"을 열망하지 않는다면 이런 결정은 당장에 집어치워야 한다. 더군다나 이정희 사퇴를 조건으로 걸기 위해 했다면 백혜련은 정치공학의 소모품 내지 희생물이 되는 것 아닌가?
민주당의 한명숙 체제는 공천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지도력의 한계를 그간 노출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명숙 체제의 강점과 약점을 두루 살펴보고 난 뒤 내릴 결론이다. 한명숙 체제는 지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내려진, 다양한 집단의 동거에서 오는 파열을 완충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걸 하나의 방향을 향해 혁신적으로 이끌고 나가는 것까지 기대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잘 되지 않으면 지도부의 집단적 역량이 이를 보충하면 된다.
민주당의 지도력 문제, 문재인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민주당 지도부와 대선 주자 문재인에 이르기까지 한명숙 지도부의 한계를 끊임없이 보완하면서 지도부의 국민적 권위를 지켜내고 민주당의 갈 큰 그림을 그려내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질타와 압박은 있는데, 함께 방향을 만들어내고 서로 위신을 세워주면서 민주당의 대국민 이미지를 새롭게 창출하는 데에는 게을렀거나 미숙했다. 제 살 제가 깎아 먹은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야권연대를 구성하고 유지하는데 있어서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야권연대의 상대 수장인 이정희 공동대표와의 관계에서도 함께 하는 동지라는 의식이 별반 특별하게 내세워지지 않은 채 문제가 있기만 하면 비난과 질타성 입장표명이 반복되었다. 이 역시 제 살 제가 깎아 먹기의 연장이었다. 이견이 생기면 금세 골이 깊어지고, 쉽게 얕잡아보고 모욕을 주는 태도로 무슨 야권연대요, 큰 정치인가?
대권 주자 문재인의 경우에도 이 나라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고, 국가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이 큰 것도 알겠는데 어떤 정치를 펼쳐나갈 것인지 잘 모르겠고 당이 어지럽게 비틀거리고 있을 때 대인의 풍모로 다독거리면서 하나의 방향을 크게 잡고 나가는 능력은 아직 잘 보이지 않는다.
이건 문재인 스스로 깊이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바다. 문재인 하기에 따라 박근혜의 앞날이 결정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이 나라 역사의 미래에 결정적인 사태가 되는 것임을 모르지 않지 않은가? 좀 더 결연하고 좀 더 긴장되고 좀 더 큼직한 선을 그으면서 정치를 할 수 있는 그가 되기를 바란다. 미안하지만 대권주자로서 아직은 잘다. 이건 그가 좀 뼈아프게 새겼으면 좋겠다.
교만했던 민주당, 반성하라
이제 총선 앞으로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 초반에 여유를 부렸다. 교만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여유를 부릴 판세는 아니다. 어느새 역전되었다고 할 지경이다. 이런 정도의 정치력을 보이는 정당에게 미래를 맡길 수 있을까? 이런 회의가 확산된 지난 두 달이었다. 앞으로 남은 이십여 일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에 따라 2012년이 결정될 것이다.
동지의 손 맞잡고
야권연대를 하기로 했으면 제대로 하라. 겸손한 자세로 돌아가, 야권연대의 동지적 관계를 든든하게 만들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굳게 손을 잡는 모습이 없다면 민심은 돌아설 것이다. 민주당은, 혹여 "당연한 거 아냐?"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진보통합과 야권연대를 이끌어 낸 이정희 공동대표의 용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심으로 성찰하고 자세를 고쳐나가기를 바란다.
자신에게 더욱 크게 떨어진 책임을 깨닫고 이번 총선에 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역사에서 범죄가 될 것이다. 민주 통합당은 이정희 공동대표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통합 진보당과 함께 열어나갈 미래를 위해 결연한 태도를 재정비하기를 바란다. 홍세화 선생이 이끄는 진보신당도 무시하지 말고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함께 하는 것이 옳다.
정권을 교체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복지체제를 만들며,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한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국민들의 열망을 잊는 순간, 그것은 절망과 분노로 변할 것이다. 부디 야권연대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진지한 자세를 복구하여 무너졌던 집을 다시 짓자.
이런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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