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저마다 잘 살아 보려는 아우성들로 가득하다. 더러 기회를 포착하고 재빠르게 남보다 앞서 달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힘을 합치고 세력을 만들어 집단의 의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잘 살고 싶은 것은 비단 인간만이 아니라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들의 너무나도 당연한 욕구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리 또는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이기에 사회 전체를 관장하는 규칙이나 룰을 만들어서 개인간의 갈등이나 집단간의 갈등, 서로마다 잘 살아보려는 욕구에서 야기되는 갈등을 다스리고 해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규칙 중에 대표적인 것이 법(法)이다. 법이란 최소한의 정의(正義)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인류사회를 문명사회라고 하는데, 그 사회가 문명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기준은 결국 법치주의(法治主義)가 자리를 잡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법은 음양오행으로 파악할 때, 목(木)에 해당된다. 목은 목화토금수의 오행 중에서 가장 먼저 오는 코드이기에, 목은 시작이고 계획이며 틀이다. 법이 오행 상으로 목이 되는 이유 역시 법은 사회 전체를 다스려나가는 큰 기강(紀綱)이자 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법을 싫어한다. 행위를 구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속받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회나 국민에 따라 법에 대한 감정이나 정서-이를 법 정서라고 하자-가 조금씩 다르기 마련인데, 법 정서가 긍정적일수록 그 나라나 사회, 국민은 문명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법치주의의 전통이 아직 밑바탕까지 자리 잡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법치의 전통이 1백년을 미처 넘기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안고 있는 다양한 부조리들 역시 법에 대한 사람들의 정서가 대단히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감정이 미처 뿌리내리지 못한 것이다.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을 매수해서 어떤 일을 한다든지, 선거법 같은 것은 위반이 기본이고, 공원이나 공공장소에서 오물을 버린다든지 하는 행위 등등, 우리 사회는 법 어기기를 다반사로 한다.
그러다 보니 법은 더 엄격해지고, 사람들은 엄격해진 법이 지나치다면서 다시 어기거나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을 매수하거나 공무원에게 대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우리 사회의 법 정서가 아직 미성숙하다는 것은 가령 어떤 사회 문제가 발생했을 때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언론이나 방송이나 그리고 시민들은 그 일에 대한 법이 어떻게 되어있느냐를 먼저 물어야 할 텐데, 그보다는 감정적인 반응부터 거세게 일어난다.
얼마 전 만두소 사건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당연히 식품위생에 관한 법률조항이 있을 것이고, 그 법률에 의거 사안을 처리해가면 되는 것이다.
법이란 이런 경우를 상정해서 미리 만들어놓은 일종의 매뉴얼인 것이고, 그것으로써 사회 정의를 다시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안전장치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 후 만두를 만드는 사업체의 젊은 사장이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살하는 비극으로 이어졌고, 방송사들의 과장보도설이 불거지면서 음모론까지 제기되었다. 그러자 집단 히스테리 반응을 보이던 시민들의 정서는 다시 정상을 되찾은 것인지 아니면 벌써 잊은 것인지, 최근의 김선일 사건으로 옮겨가 버렸다.
우리 사회는 이처럼 끊임없이 사건의 피상적인 모습에서 또 다른 사건의 겉모습만으로 옮겨 다니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두소 사건은 단무지 공장주들과 방송사간의 아직 해명되지 않은 의혹들이 남아있을 뿐 아니라, 죽음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던 한 젊은이의 원혼이 남아있다. 그러니 그 역시 법과 그 절차에 따라 잘잘못을 분명히 가려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아가서 사회 전체의 집단 히스테리를 치유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될 문제이건만 그렇게 될 것 같지 않고 언제나 그렇듯이 유야무야 넘어갈 것 같은 불안감을 지울 수 없으니 답답할 밖에.
앞서 법을 오행 상 목(木)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사회는 무엇인가? 법은 사회를 규제하는 것이니 규제 대상인 사회는 토(土)가 된다. 물론 사회가 법의 규제 대상이라서 토(土)인 것만은 아니다. 토(土)는 종합이고, 무성함이며, 어울림이기에 사회는 토가 되는 것이다.
인간 사회, 그리고 모든 사회는 하나의 커다란 카오스이다. 상호 협조도 있지만, 상호 배척도 있으며 때로는 극렬한 갈등도 생겨나는 곳이다. 오늘날과 같이 공업화되고 정보화된 사회에서 부와 힘을 가지는 기본은 과거처럼 농사를 통해 수확을 많이 거둔다거나 소나 양을 많이 가졌다거나 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사회 구성원들을 설득하고 유인하는 데 있다.
설득하고 유인하는 행위에서 부와 힘이 얻어진다는 말이 다소 의아하다면, 간단한 예를 몇 가지 들고자 한다.
오늘날 온 천지에 가득한 상업광고가 바로 그것이고, 선거 때만이 아니라 일상화하는 정치선전이 바로 그것이다. 모두 다른 구성원들을 설득하고 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이며, 그 성공 여부가 부와 힘을 가지는 기본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다른 구성원들을 설득하고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치열한 노력, 결국은 잘 살기 위한 노력은 어쩔 수 없이 구성원간의 상호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노력이 치열하다 보니, 과대광고나 허위 광고가 있기 마련이고, 상호 간에 흑색 비방도 당연히 생겨나며 그 과정에서 비리가 끼어들 여지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나 법 정서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우리 사회는 더욱 그렇다.
갈등의 요인은 자신의 것을 잘 선전하려는 측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인 되는 측도 마찬가지이다.
객체가 되는 사회 구성원들은 그렇기에 정보와 광고의 홍수 속에서 서로마다 좋은 정보, 양질의 정보, 다시 말해 돈 되는 정보, 나아가서 잘 살 수 있는 정보를 얻고 가려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집중한다. 그 또한 갈등의 유발 요인이 된다.
가령, 학부모들은 어느 학원이 대학 입시에 능한지를 알아내려고 혈안이고, 지방의 학부모들은 모든 정보는 서울에 다 있다면서 자녀들을 서울로 보내거나 아니면 서울에 살지 못하는 스스로를 한탄한다. 나아가서 서울 사람들을 미워하기까지 한다. 이 모두 갈등 요인이다.
그런가 하면 서울 강남의 비싼 땅값을 두고 예전에 강남이 이렇게 오를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는 정보를 캐낸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막연히 시기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런 돈이 되는 정보가 정작 있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강남땅을 사지 못한 사람들의 불만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상대적 박탈감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란 곳은 끊임없이 우리이면서도 한편으로 적(敵)으로 가득한 곳이다. 그렇기에 사회는 하나의 커다란 카오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카오스를 규제하여 하나의 구성체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법(法)의 역할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법과 사회는 긴장 관계에 있다. 법은 목(木)이고 사회는 토(土)이기에 이 둘만의 관계는 목이 토를 누르는 결과라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 법과 사회의 양자를 완충해주는 그 무엇이 필요한데,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문화(文化)이다. 우리 사회에는 법제화되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법의 구실을 하면서 한편으로 갈등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맡는 기능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문화이다.
문화는 오행 상, 화(火)로서 그 기능은 추진(promotion)이고 전달이다. 공원에서 쓰레기를 버리면 당연히 경범죄 위반이지만, 그에 앞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눈총을 받는다. 그것은 공공장소에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 법에 앞서 사회 전체가 약속한 시민문화에 저해되기 때문이다.
흔히들 ‘문화시민으로서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 라는 말을 하는데 대단히 정확한 표현인 것이다.
사람들의 정서를 부드럽게 만들고 고양시키며, 있을 수 있는 갈등의 요인을 미연에 막아주는 모든 것들이 바로 문화인 것이다. 민족의 문화라는 전체의식이 있기에 우리는 사회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적이 아니라, 하나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어느 사회의 내부 갈등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면, 그것은 전체를 하나로 엮어주는 문화 의식이 무너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럴 경우, 그 공백을 사회의 일부분인 집단의 문화가 메우게 된다.
집단의 문화는 전체의 문화가 아니기에, 집단간의 갈등은 골이 더 깊어지고 그로써 전체 사회는 붕괴의 징후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법이라는 엄한 규제만이 남게 된다.
하지만 전체는 집단이라는 부분의 합을 능가하는 그 무엇이기에, 전체를 위협하는 어떤 문화도 그 사회의 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열린 사회의 적’인 것이다.
오늘은 법과 사회, 그리고 그것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문화의 기능에 대해 음양오행의 측면에서 얘기해 보았다. 다소 딱딱한 얘기였다면 양해해주기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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