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정치권에서 상생이란 어휘가 유행이다. 물론 서로 잘 해보자는 뜻으로 쓴 것이겠지만, 상생이 담고 있는 원래의 의의(意義)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느낌이다. 그래서 오늘은 상생이란 무엇인지 아울러서 상극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상생이란 동아시아 세계에만 존재하는 특유의 개념이다. 현대 문명을 주도하는 서구나 미국, 그리고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중동이나 이집트 등지의 문화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상생을 영어로 하모니(harmony)라고 한 것을 보았는데, 뜻으로 새기면 상당히 잘 번역한 것이지만 하모니에 해당되는 어휘는 ‘조화(調和)’이다. 그런데 서구의 조화란 개념과 동아시아 세계에서 말하는 조화라는 뜻이 많이 다른데 이는 음양의 조화란 의미가 저쪽 세계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구 철학에서는 사물이 변화 발전하는 원리를 정반합(正反合)이라는 변증법으로 설명한다. 변증법은 전혀 골치 아픈 얘기가 아니므로 간단히 설명하기로 한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비교할 대상이 없을 때는 스스로를 사람이라든지 그리고 ‘나’라고 하는 생각마저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언덕 너머에서 또 한명의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자. 아직 두 사람은 사람이라는 개념도 없고 모르던 존재이므로 서로 적대시할 가능성이 크다. 대개의 경우 모른다는 사실, 즉 미지(未知)야말로 적대감의 원천인 것이다.
이리하여 나와 너, 양자가 생기게 된다. 비교할 대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때 나는 정(正)이 되고 너는 반(反)이 된다. 둘은 죽도록 싸우는데 이 싸움에서 상대를 제거한다면 다시 하나만 남게 되므로 나와 너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그런데 싸우고 싸우다가 결국 서로를 제거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면 어쩔 수 없이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합(合)이 된다. 이리하여 둘은 ‘우리’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공존하게 된다. 이것이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조화이다.
언제나 처음에는 자신이 옳은 법이기에 내가 옳고 상대는 틀렸다. 상대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서로를 제거할 수 없을 때, 서로의 주장을 양보해서 우리가 되고 이제는 우리가 옳게 된다. 그리고 그 ‘우리’라는 틀 속에서 각자는 부분이 되고, 서로의 생각과 지혜, 그리고 힘을 합쳐서 또 다시 나타날 새로운 무리들에 대해 또 다시 투쟁의 길로 들어선다.
이런 과정을 변증법은 정반합(正反合)이라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사물의 변화 발전하는 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 세계는 사물의 변화 발전 원리를 상생과 상극이라는 두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음양오행에서 말하는 상생이란 서로가 서로를 생장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원래 음과 양이라는 것 자체가 남과 여를 의미한다. 남녀(男女)는 만나면 기본적으로 좋아하고 끌리게 되어있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며, 이는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끌림’이다. 따라서 음양의 조화라는 말은 간단히 말해서 남녀가 함께 있으면서 좋아지내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세상은 남녀라는 이성이 없으면 도저히 살 재미가 없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남녀가 만나면 아이를 낳으니 그것이 바로 생식하고 생장하는 것이다. 명리학에서 좋은 사주라는 것도 결국은 이와 같이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진 사주, 다시 말해서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를 잘 구비한 사주팔자를 일컫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생이란 근본적으로 네가 있어야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것, 네가 없다면 이 세상은 정말 재미없고 지루해진다는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서구의 조화처럼 싸우고 으르렁거리다가 마지못해 타협하는 조화와는 다른 관념이며, 우리 정치에서 서로를 기본적으로 불신하고 타파하려 들면서 입으로 내뱉는 상생은 상생의 원 뜻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의 발전과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으로서 상생이 있어야 하지만 상극(相剋)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지도 알아보기로 하자.
음양오행의 원리에서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적의(敵意)나 증오는 없다고 전제한다.
가령 어떤 총각이 있어 길에서 아주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자. 이 경우, 총각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가? 사귀고 싶다면 우선 그 아가씨의 환심을 사야 할 것이다. 무턱대고 다가가서 이른바 터프하게 ‘나 너 좋아. 우리 사귀자’하면 그것은 십중팔구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런 행동은 상대에게 공포심이나 적개심을 유발하기 십상이며, 그런 직접적인 접근에 마음이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경우가 바로 상극의 접근이다.
하지만, 아가씨의 신원을 알아내어 서서히 접근한다든지, 그 상대와 아는 사람을 중개인으로 내세워 자리를 만들게 되면 훨씬 접근이 쉬울 것이다. 그런 연후에 선물 공세를 한다든지, 생일을 기억했다가 생일 선물을 사준다든지 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정상적인 접근 방식이다. 이런 것이 바로 상생의 접근이다.
정리해서 말하면 상생이란 무턱대고 직접적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절차와 예의, 내지는 중개인을 내세워 접근해가는 방식이다.
이 세상의 모든 투쟁은 근본적으로 상대를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싸우는 가운데 서서히 서로를 알게 되는 과정도 존재한다. 이런 것은 상극에서 상생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세상은 상생의 원리를 통해서만 변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상극의 원리를 통해서도 그런 과정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상극이 궁극적으로 사물을 생장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 또한 중요한 인식이 된다.
예를 들면,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게 될 유한한 생명체이다. 유한한 생명이기에 생명의 소중함은 더욱 빛이 나는 법이며 때로는 영원 불사의 희구를 가슴 속에 품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사후에 미이라로 처리되어 피라미드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영원불사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궁극적으로 죽어서 사라질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죽어야 하는 궁극의 이유는 뒷사람들이 태어나 활동할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함이다.
나아가서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는 것이다. 유명한 공포소설 ‘드라큐라 백작’에서 드라큐라는 사멸의 순간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죽음은 싫고 내키지 않는 것이지만 결국은 커다란 안식이기 때문이다.
죽는다는 것은 바로 상극의 원리인데, 이처럼 상극 역시 삶이라는 상생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원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음양오행은 사물이 상생을 통해 때로는 상극을 통해 변화 발전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상처를 입고 고통스런 짐승이 불쌍해서 차라리 죽여서 내가 먹어줘야지’ 하는 식의 발상은 지극히 위험한 오류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오류가 생겨나는 것은 스스로 도덕적 확신을 지닐 때가 대부분이다. 스스로의 생각이나 입장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자세야말로 바로 이 세상에 무의미한 갈등과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종교전쟁이 가장 골치 아픈 것도 도덕적 확신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진보냐 보수냐를 놓고 진영을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진보냐 보수냐는 어떤 사안에 대한 서로마다의 입장이고 생각일 뿐이지, 모든 면에 대해 진보 일방인 사람은 없으며 마찬가지로 보수 일방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라는 구분은 결국 사람의 체취를 배제한 추상적인 나눔일 뿐이다. 이는 상생이란 문화적 개념을 지니지 못했던 서구인들로부터 수입된 것인데, 최근 우리는 전혀 원래의 우리와는 상관없는 편 나눔을 해놓고 서로를 비난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서로가 스스로의 관점에 대해 도덕적 확신을 가질 때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질 수 있다.
다 잘 살아보자고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근본에 있어 우리라는 틀을 위협하는 어떤 행위나 생각도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만큼은 지니고 가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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