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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탁월한 교육자를 떠나보내며

[김민웅 칼럼] 고 조영식 박사의 삶, "학문과 평화"를 쫓은 평생

오 내 사랑 목련화야

따스한 봄이 곧 올 거라는 기대를 안고 신학기가 시작된다. 돌아오는 학생들로 학교는 돌연 활기가 찬다. 이런 가운데 우리 교육의 방향은 어떻게 정리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다시 덮쳐오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인문정신이 실종된 교육현실에서 무엇을 지침으로 삼아가야 하는지 교육철학적 고뇌가 우리사회에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런 와중에 한 교육자의 부음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상상 이상으로 매우 일찍이 당대의 사고를 뛰어넘는 지평을 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평생을 살았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로 시작하는 노래.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 길 잡이 목련화는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그대처럼 순결하게 그대처럼 강인하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라"라는 가사로 70년대 중반 열풍과 같이 국민가요가 된 <목련화>다. 이 시절 대학생이었던 나 역시 열심히 불렀던 이 노래의 작사자가 누구인지 지난 23일 한 영결식에서야 비로소 알았다. 그걸 미처 몰랐던 것이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놀라왔다.

이 노랫말은 작사자 고 조영식 박사가 1973년 비행기 안에서 지었다고 한다. 작곡자는 당시 경희대 음대 학장이던 김동진 교수였고, 그의 제자 엄정행이 불러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이 노래는 많은 이들의 마음에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고 역사의 봄을 갈구하는 모든 이들의 심사를 대변해주어 어두운 시대의 한 줄기 숨통이자 빛이 되었다.

▲고 조영식 박사 ⓒ경희대학교
선각의 교육철학

1921년 평북 운산출생으로 지난 18일 91세로 타계한 경희대 설립자 조영식 박사의 영결식에서 본 영상자료는 한 인간이 그의 일생에서 얼마나 많은 역할과 성취를 이뤄냈는가에 대한 감동을 넘어, 시대의 앞날을 미리 내다본 선각(先覺)의 지혜에 머리 숙이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뜨거운 박수를 치고 싶었으나 영결식의 문화가 서구와는 다른 성격의 무게로 압도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70년대 나의 대학시절 경희대는 일종의 변방의 대학이었다. 캠퍼스는 아름다웠으나 학교의 명성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해왔던 탓에 나로서는 이 학교의 주변적 이미지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마니타스 칼리지>라는 새로운 인문정신의 육성을 위한 미래교육 프로젝트의 시동을 위한 인연을 맺으면서 이 학교의 내면에 지난 세월 꾸준히 자라온 정신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뿌리는 설립자 조영식 박사에게 맞닿아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이 서른의 대학 설립자, "사상의 민주화"를 꿈꾸다

조영식 박사가 경희대의 전신인 부산 소재 2년제 신흥초급대학을 인수한 것은 6.25 전쟁 중이던 1951년이었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이 된 때였다. 인수 제안자는 초대 부통령 이시영선생이었고, 당시 조영식은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국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때였다. 이시영 선생의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의지에 감복해 용기를 가지고 시작된 학교는 2년 뒤 4년제가 되었으나 얼마 뒤 학교 건물이 전소되는 불행을 겪는다. 전쟁 중의 대학설립이라는 것도 가당치 않았고 화재까지 났으니 절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은 그는 다시 학교를 짓고 재기한다. 그런데 이 시기 놀랍게 여겨지는 것은, 학교의 교훈이다. 1951년 대학인수 직후 교문 양쪽 기둥과 건널판에 목판을 설치하고 새긴 글자는 "학원의 민주화, 사상의 민주화, 생활의 민주화"였다. 1948년 법대 재학 중이던 27세 때 <민주주의 자유론>을 펴냈던 그의 이력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사상의 민주화"까지 거론했다는 것은 전쟁과 냉전, 이념의 대립으로 인해 역사의 극심한 우여곡절을 겪었던 시대로서는 위험천만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학설립의 시기인 1951년 그가 낸 <문화세계의 창조>에서 인류의 미래를 위한 "공존공영의 평화세계"라는 주장이 용공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전격 구속되기조차 한다. 일제시기 학병에 끌려갔던 때 동지들과 탈출을 기도하다가 잡혀 복역했던 이후, 겪은 투옥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학교를 탈취하려는 재단의 일부세력에 의해 고발된 일이었지만 조영식의 사고에 담겨 있는 사상적 지평의 폭을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예라고 하겠다.

가난한 나라의 세계총장회의

일일이 예를 들자면 한이 없기에 굵직한 일만 거론해보자면 조영식은 1965년에는 <세계대학 총장회>를 주도한다. 아시아의 최빈국에 해당했던 한국의 한 대학 총장이 세계대학을 상대로 조직을 꾸린다는 것은 우선 상상을 하기 어렵고, 현실적으로 조롱당할 수 있는 일이자 가능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해냈다. 44세 때의 일이었다. 1981년에는 유엔에 가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세계평화의 날> 제정에 제안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 다음 해인 1982년에는 일천만 이산가족 재회추진 위원회를 결성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며, 1987년에는 평화복지 대학원 설립의 기초를 위해 <세계평화대백과사전>을 세계 최초로 펴낸다. 4년간에 걸친 이 작업에는 350여명의 세계적인 석학이 집필에 참여하고 1996년부터는 냉전해체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기 위해 수정보완작업에 들어가 1999년에 증보판이 마무리된다. 발상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93년에는 1983년부터 십년간 구상해왔던 평화복지대학원을 설립하고 1997년에는 인류 평화 공동체 재건을 위한 네오 르네상스 운동을 제창하여 추진해나간다. 이것은 오늘날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인문정신에 기초가 되는 작업이었다. 또한 1999년에는 7년간의 작업을 주도하여 <동양의학대사전>을 출간하고 한의학의 체계화에 기여한다. 한의학이 과학적 위치를 갖도록 만드는 토대를 세운 것이다.

평화, 복지, 인류

그런 그가 5.16 군사 쿠데타 세력과 1980년 신군부 세력에 의해 두 번이나 총장직에서 물러나도록 강요받았던 바가 있다. 1970년과 198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경희대가 발전을 위한 기획에 더 나가지 못했던 밑바닥에는 이러한 정세가 얽혀 있었다는 점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대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이 청산되지 않으면, 한 시대의 학문발전과 교육도 지체되기 마련인 것이다.

돌아보면, 평화와 복지, 인류공동체 재건이라는 개념이 추상적이고 현실 생활과는 너무 멀다고 생각했던 때에 그는 이에 대한 선도적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충격적이고 그 여파는 깊다. 뿐만 아니라 변방에 놓여 있는 우리의 전통적 자산을 중심에 옮기는 노력을 치열하게 기울였던 것이다. 학교 이름이 경희인 것도 조선시대 개혁군주 영·정조 시기 정궁이 경희궁이었다는 점에서 착안되었다고 하니, 이 역시 그의 역사의식을 보여준다.

그는 전쟁의 경험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고, 이념의 혼란과 대립 속에서 사상의 민주화를 꿈꾸었으며 그것이 학교와 생활에서 그대로 구현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역사와 자산을 기초로 세계를 향해 나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육의 지평이 세계적 차원으로 올라가기를 열망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국가의 여러 능력과 수준이 그런 단계에 오르지 못한 때에도 그는 끊임없이 교육이 세계적 발언과 차원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던 것이다.

"평화는 개선보다 귀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교육철학에서 깊게 다가오는 어록은 "학문은 평화를 위해서"라는 대목이다. 그리고 "평화는 개선(승전)보다 귀하다"라는 소신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인류사회의 재건이라는 원대한 목표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청년 조영식은 목사가 되기를 꿈꾸었다. 당시 목사가 된다는 것은 식민지 치하의 민족을 일깨우는 교육자, 지도자가 된다는 의미였다. 그런 그의 삶에서 "인간은 기획하고 하늘은 설정한다"라는 믿음이 나온다. 그 믿음 안에서 그는 인간이 복지를 누리며 평화롭게 살기를 기도했다. 생각의 자유로움과 시선의 세계적 수준을 통해 학문이 기여할 바가 무엇인지 평생을 통해 사유하고 실천해온 그의 삶은 뒤이어 오는 이들의 이정표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복지를 말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 인류의 미래를 논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지만 여전히 구체적이지 못하다. 이런 뜻과 생각이 교육현실과 생활 속에 파고드는 작업이 더더욱 치열하고 진지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교육이 물질적 욕망을 위해 도구화되고, 복지가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하며 평화가 위협당하는 시대에, 조영식 박사의 교육철학과 실천의 역사는 귀감이며 늘 펼쳐봐야 할 서책이다. 세계화의 시대에 세계시민은 기르지 못하고 있는 교육에서 그의 세계를 향한 시선은 우리에게 개안(開眼)의 기초다.

실로 우리의 교육은 인간과 평화를 사고하는 능력이 부족하기만 하다. 미래세대를 기르기 위한 교육의 전환점은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그로부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힘이 나온다.

아름다움의 근원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아온 고 미원(美源) 조영식 박사의 영전에 삼가 경의를 표한다. 우리에게 이런 귀중한 푯말이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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