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서구 간섭 막고, 조선 침략 합리화 위한 '복제 오리엔탈리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서구 간섭 막고, 조선 침략 합리화 위한 '복제 오리엔탈리즘'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13> 일본인의 조선관-박노자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적 과잉충성, 권위주의적 근대국가라는 괴물 만들어내**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어렸을 때 배운 마르크스의 명언 중에서 제 머리 속에 지금까지도 남은 구절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진보'란 노동자의 시체들을 짓밟고 다니는 우상(偶像)을 모신 초대형 마차(juggernaut: 인도 신전의 전통 마차, 그에 치여 죽으면 곧 극락으로 간다는 믿음이 있었음)와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사회, 경제적인 차원에서 자본가들의 최대 희생자란 노동자임에 틀림없지요. 그러나 상징적인 폭력의 차원을 이야기하자면 그나마 "우리"의 울타리 안에 있는 존재로 인식되는 자국의 노동자에 비해서는 식민화의 희생자가 되는 비(非)서구 지역은 훨씬 더 심한 멸시와 타격을 당하게 돼 있습니다.

"발전"의 망상에 도취된 서구는, 비서구 사회들을 늘 정체돼 있고 발전되지 못하는 "산 시체", "불구자", "병자"로 그리면서 그 언어적 폭력을 통해서 식민화의 물질적 폭력을 합리화합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이라는 탁월한 연구 저서는, 이와 같은 상징적 폭력에 "오리엔탈리즘"이란 명칭을 붙였지요. 19세기말 서구의 서적에서 나오는 "허약하고 비현실적인" 인도의 성직자나 "비겁한 음모만 꾸밀 줄 아는 "중국 사대부 등의 이미지를 보면, "오리엔탈리즘" 이라는 "우상을 모신 초대형 마차"가 비서구인을 얼마나 잔인하게 짓밟고 다녔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서구의 세계 체제에 편입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메이지 시대의 일본 지성인들의 "오리엔탈리즘"에 대응하는 방법이 무엇이었는가요? 한편으로는, 그들이 서구인의 빈축을 사는 혼욕(混浴), 문신(文身)과 같은 전래 풍속을 금지하는 등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칼을 피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혼욕, 문신뿐입니까? 서구 열강들이 일체 폭력을 국가적으로 독점하여 개인적인 자의적 폭력을 원칙적으로 불허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파헤친 메이지 정부는 1873년 2월 7일에 "구토"(仇討, blood revenge - 양친이나 가까운 친척의 살해에 대한 사적인 복수)라는, 중국이나 조선에도 법적으로 일정한 범위 내에서 허용됐던 오랜 법속(法俗)을 공식적으로 금지했습니다. 모델이었던 서구열강에서 사적인 폭력의 한 형태인 상류층의 결투(duel)가 아직 성행했던 그 당시에(러시아 군의 경우에는 1890년대 후반부터 장교가 모욕을 당했을 때 꼭 결투를 하는 것이 아예 법제화돼 있었습니다!), 일본은 "근대"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스승들"보다 더 충실히 준수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오리엔탈리즘적 "과잉 충성"이라 할까요? 문제는, 과거에 대한 "단절 선언"과 근대적 제도들의 졸속 확립은, 시민 사회의 발전이 국가에 의해서 억압됐던 상황에서는 바로 "국가 통제의 과잉", 즉 무소불위의 국가적인 폭력의 횡행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개인끼리의 전근대적 "복수"는 많이 근절됐지만 1923년 9월 16일의 헌병에 의한 거물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와 그 가족 몇 명의 잔혹한 살해와 같은 국가에 의한 사형(私刑)들은 제국 일본의 새로운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1868년 이전에 오리엔탈리즘에 젖은 서구인들이 마음대로 멸시할 수 있었던 혼욕, 춘화(春畵), 쌍칼잡이 사무라이, 그리고 사랑의 약속이란 의미로 문신이 새겨진 요시와라(吉原)라는 사창가의 게이샤들이 없어지거나 안 보이는 데로 감추어졌지만 서구의 여느 열강 이상으로 초법적인 통제력과 야망이 강한 메이지 식 권위주의적 근대 국가라는 괴물이 출현했습니다.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에 의한 서구화를 과연 "역사적 진보"의 동의어로 봐도 되는가?**

물론 저는 쌍칼잡이 사무라이가 새로 만든 칼을 시험한다는 의미에서 평민을 야간 노상에서 죽이곤 했던(그것이 일본어로 "쓰지기리" - 辻斬り라고 하지요? 막부에서 금지령을 내려도 꽤나 흔했던 일이랍니다) 그 무자비한 사족 지배 체제를 낭만화하거나 옹호할 뜻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에 의한 서구화를 과연 "역사적 진보"의 동의어로 봐도 되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많은 것일 뿐입니다. 민중이 주체가 돼서 평등 지향적 혁명의 길로 갔으면 모르지만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체득하여 민중을 "문명화"의 대상물이자 수단으로만 봤던 자들에 의한 "근대화"란 결코 진정한 의미의 "진보"나 "발전"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진보적인 일본"과 "퇴보적인 아시아"가 본질적으로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본인들의 "문명개화의 업적"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따려는 동시에 이웃인 중국과 조선을 마땅히 멸시를 당해야 할 "오리엔트"로 묘사했습니다. 즉, "오리엔탈리즘" 이라는 마차로 중국이나 조선을 같이 밟자고 하면서 본인들의 "준(準)서구인"으로서의 세계 체제에의 편입을 도모한 셈이지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4-1901)의 <탈아론>(脫亞論: 1885)의 말대로, "혹시 우리의 땅이 지나, 조선과 인접한 고로 서구인들이 우리를 지나, 조선과 동일시"할까 봐서, 일본의 "다름"을 애써 강조하는 것이었지요. 이 <탈아론>이 "지나"와 조선을 문책할 때 재미있게도 "유교적인 인의예지에의 맹목적인 집착"과 "법치의 부재", "전제주의", "문명에 대한 무지" 그리고 "잔혹성과 오만"을 주된 공격의 표적으로 삼습니다. 즉, 유럽인들이 이슬람 국가나 중국에 가진 "과거에만 집착하는 무지하고 오만한 폭군(暴君)의 나라" 라는 고정 이미지는, 다시 한번 일본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잔혹하고 무지한 동양인"으로부터 "문명적인" 자신들을 차별화시킬 의도는, 메이지 시대의 "대륙"관련 저술에서 늘 너무나 강력하게 느껴집니다.

"동양에서 첫째 가는 완고한 나라"(<近時評論>, 1878년 1월 18일),
"동해의 후미진 구석에 침체된 한 야만국"(<近時評論>, 1876년 6월 24일),
"조선 인민을 위해서라도 빨리 멸망하여 문명국의 관리 밑에 들어가야 할 야만적 정부의 나라"(후쿠자와 유키치, 1885),
"한국은 봉건제도로도 못 나간 고대 사회일 뿐이고, 그 민족적 특성은 부패와 쇠망이다"(나중에 마르크스주의자로 이름을 날릴 경제사학자 후쿠다 도쿠조 福田德三, "한국의 경제 조직과 경제 단위", 1904),
"한국인들은 여성들처럼 나약하고 한국은 어차피 죽어가는 나라일 뿐이다"(일본적 개인주의를 제창했던 기독교적 지식인 니토베 이나조 新渡戶稻造, <隨想錄>, 1905),
"유교의 영향으로 발전이 상당 부분 마비된 조선 사회는,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로 이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일본에서 한국 경제사의 최고 전문가로 꼽혔던 시가타 히로시 四方博, <조선사회경제사 연구>, 1933)

단순히 침략의 선전꾼도 아니고 극단적인 국수주의자도 아닌 당대 일본에서 "최고의 지성"과 "자유주의자"로 인식됐던 사람들이 "일본형 오리엔탈리즘"의 틀을 전혀 벗어나지 못한 것은 사실 메이지의 근대성의 모방성과 천박함만 보여줄 뿐입니다. 과거에 유럽에 문명의 은혜를 베풀었던 이슬람 문명에 대해서 19세기의 유럽인들이 "이슬람 때문에 유럽의 발전지향적 봉건 사회도 자본주의도 자생적으로 배태할 능력이 없는 완고한 세상"이라고 한 것과 하등의 차이 없이 메이지 지식인들은 과거에 일본의 스승이었던 한국의 "정체성"과 "타율성"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조선의 지식인은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적 "멸한론"(蔑韓論)에 과연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런데 한 가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한국으로서 내셔널리즘 형성 시기이었던 구한말에는 그 내셔널리즘의 초기 담지층이라 할 만한 언론인, 학자들이 이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적 "멸한론"(蔑韓論)에 과연 어떻게 반응했는가 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내셔널리즘 형성에 있어서는 원래부터 "외세로부터의 자극"이 결정적이었던 만큼, 자극적이기 끝이 없는 일본의 한국관(觀)에 대한 담론적인 저항이란 없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일본 고위 현직 관료나 정치인들의 망언들이 지금도 한국을 분노의 도가니로 만드는 것처럼, 구한말 초기의 내셔널리즘은 일본의 체계적인 대한 의식을 반영한 온갖 망언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미 최초의 민영 신문인 <독립신문>의 단계로부터 "일본인의 왜곡 보도에 대한 대응"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한국의 공론에서 그 자리를 확고히 잡은 것입니다.

예컨대, 원래 임금의 외국 공관 체류(아관파천)와 같은 국가의 일에 무관심하고 사리사욕만 챙기는 한국 대신들이 평소에 러시아의 조정을 받았다가 러시아 자본가의 이권 사냥에 의해서 그 소득을 잃고 나서야 반러 쪽으로 돌아섰다는 <오사카 마이니찌 심분>(大阪每日新聞)의 악의적 왜곡 보도가 일본의 대표적인 영문 신문인 <The Kobe Chronicle>에서 1896년 10일 13일에 번역돼 나가자, <독립신문>은 국문, 영문 양쪽 판에서 당장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 고종 정부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 일본의 간섭을 제거하기 위해서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는 계책을 기본적으로 불가피한 일로 생각했던 <독립신문>은, 조선 대신 사이에서의 "반러적 기류"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아가서는 외국의 "조정"이 아닌 내부적 필요성과 논리에 의거한 조선 정부 정책의 주체성을 부각시켰습니다.

"대군주 폐하께서 아관에 가실 때에 형세가 위태하신 까닭에 아관에 가셔서 보호하여 달라 하신즉 아라사 공사는 조선 대군주를 사랑하는 까닭에 마저 편안히 계시게 한 것이니 (…) 조선 인민이 되어 외국사람이 대군주 폐하를 도와 드렸을 것 같으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옳거니와 미워할 이치는 없을 듯한지라. 아무 때라도 대군주 폐하께서 환어하시려면 누가 막을 사람도 없고 더구나 아라사 공사야 환어하시는 것을 맙소사고 할 리가 없는지라. (…) 대군주 폐하께서 아관으로 가실 밖에 수가 없어 된 사정은 우리만큼 분해 하고 탄식 하는 사람이 세상에 없을 듯하나, 사세가 그렇게 된 것은 일본에서 잘못한 일이 있는 까닭이라. (…)" (1896년 11월 5일자 국문판 논설).

고종 정부 방침의 "상황의 논리"와 그 주체적 의도를 부각시킴으로써 "의타적이며 독립심이 없는 조선인"의 신화를 만들려는 일본 언론 쪽의 기본적인 인식 틀을 공격했던 셈입니다. 이외에도 잘 알려져 있듯이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일본 내의 신문뿐만 아니라 독립협회를 "외국인 이권 챙기기를 위한" 일종의 로비 단체로 그리려는 제물포의 <조센심보>(朝鮮申報) 등의 국내의 일본 신문들과의 지상 설전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만들려는 "독립심이 없는 조선인"의 상(像)에 늘 일침을 가하곤 했습니다.

주로 러시아나 러시아의 맹방 프랑스를 공격의 표적으로 삼은 1898년의 독립협회의 활동 내용 중에서도, 일본의 절영도 석탄고(石炭庫) 기지 반환을 요구하는 등 일본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는 일부의 내용(물론 일본의 전례에 따라 주된 혐오의 대상인 러시아까지도 절영도 임차를 요구할 우려는 일본의 기지까지 문제 삼은 핵심적 이유이었지요: 정교, <대한계년사>, 제3권, 光武二年戊戌-1)이 들어 있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서재필, 윤치호의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성격에 "반외세적 내셔널리즘"이라는일면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할 듯하지요?

즉, 반러 운동이야 독립협회가 러시아 세력 팽창을 원치 않았던 영국과 미국 공사관과 내각 내의 친미파 (이완용, 박정양 등) 등의 이해 관계에 따라서 한 부분도 있지만, 러시아보다 현실적으로 훨씬 더 큰 위협이었던 일본에 대해서 담론적인 차원의, 그리고 아주 미약하게나마 실질적 이권 침탈 반대 차원의 저항을 편 것은 훨씬 더 성숙된 내셔널리즘으로 봐야 할 듯합니다.

***서재필ㆍ독립협회의 민족주의-메이지 제국주의의 근본적인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그런데, 일본의 "복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응이라는 각도에서 본다면 여태까지 수많은 보수적인 사학자나 찬드라(Vipan Chandra) 선생과 같은 미국의 "주류" 중진 사학자들이 주로 긍정적으로 여겨 왔던 서재필과 독립협회의 내셔널리즘에 대해서 훨씬 더 비판적으로 생각할 여지가 큽니다.

왜냐하면 서재필이나 그 추종자들이 일본측의 구체적인 왜곡(예컨대 러시아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러시아 조정"만의 강조, 미국 선교사들을 마치 고종을 움직이는 실세로 서술하는 일 등)이나 노골적인 무례(조선 대신의 성씨를 빠뜨리고 이름만으로 언급하는 일 등), 매우 무리한 요구(의병이 내륙 지방에서 살해한 일본인에 대한 국가의 거액 보상금 요구 등) 등을 비판, 반박할 줄 알았지만, "진보적인 서양"과 "개화된 일본", 그리고 "정체되고 후진적인 동양"이라는 일본 메이지 제국주의의 근본적인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고스란히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피 제손"이라고 자랑스럽게(!) 서명한 서재필의 <동양론>이라는 논문은, 이 "동양", 즉 "오리엔트" 라는 "상상의 공간"을 "한국 자유주의의 시조"로 칭해 왔던 사람이 어떻게 봤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동양은 세계 오대주 안에 제일 큰 대륙이요. 그 중에 큰 섬들도 많이 있고 인구도 제일 많으나 지금 동양 경계 대단히 참혹지라. 아셰아 서은 지금 토이기 (터키) 속국인 그저 야만의 풍속이 많이 있어 백성이 도탄에 있고 도적이 사면에 횡행며 악형과 고약 풍속이 성야 인민의 목숨과 재산이 튼튼치 아니고 그 다음은 파사국 (Persia - 현대의 이란)인 그 나라도 역시 토이기 속지와 같아 나라가 점점 못되어 가고 아라사(러시아)와 영국 권리가 대단히 성야 독립 권리를 거의 다 빼앗기게 되고 푸간니스(아프가니스탄)은 영국 아라사 틈에서 마다 점점 없어져 가고 인도 벌써 영국 속지가 되야 일억만 명 인구가 오늘날 영국 관할이 되어 지내니 나라 동양 나라나 실상인 즉 영국 속지라 (…) 섬나(Siam –태국) 정부에 개화 사이 많이 있어 외국 정치를 힘들여 본 받닭에 오늘날까지 자주독립을 보존고 쳥국은 지면이 크고 인구가 삼억만 명이 되나 정치가 고약고 인민이 완고야 지금 약기가 죠션에셔 못지 않고 백성이 도탄에 있으며 정부에 완고 당이 성야 야만에 복색과 야만의 풍속을 지금지 숭상닭에 영국이 향항 (香港: 홍콩)을 차지고 아라사가 아세아 북편을 모두 차지고 지금 만주와 요동이 아라사 손 속에 들었고 쳥국 남방 지방을 불난서(프랑스)에 뺏기고 일본하고 싸움하여 세계에 망신을 고 죠션을 잃어버리며 대만을 일본에 뺏기고 또 연전에 유구국 (流求–오늘의 오키나와) 을 일본에 뺏기며 전국 형세가 대단히 위태게 됐으나 청국 정부 안에서 밤낮 협잡이요. 구습을 버리지 못여 허탄(쓸모 없는) 일에 돈을 쓰고 세력 있 사이 약 사을 무리게 대접 고로 정부와 인민이 원수 같이 지내고 인민끼리 서로 의심며 서로 속이며 서로 해를 끼치려고 야 나라 안에 삼억만 명이 있으나 합심이 안되고 애국마음이 없에 실상인 즉 약기가 죠션에셔 못지 아니 지라 어찌 한심치 아니리요.

일본은 근년에 구습을 모두 버리고 태서 (서양) 각국에 좋은 법과 학문을 힘 들여 배운에 오늘날 동양 안에 제일 강고 제일 부요며 세계에 대접 받기를 개화 동등한 나라로 받으니 치하 만고 칭찬 만더라. 그러나 일본도 아직 구라파 각국과 겨뤄 보기 어려워 조심을 면서배우며 더 진보를 여야 아주 독립권을 차지할 것이라. (…). 죠션은 쳥국 학문을 배운에 각색 일이 쳥국과 같은 일이 많고 나라 형세가 쳥국과 같으니 어찌 슬프고 분하지 아니리요. 그러나 나라 안에 있 인민들이 종시 (끝까지) 구습을 좋아고생각기를 쳥국 학문들을 가지고 생각 즉 이것을 바꾸지 아니고 쳥국 모양으로 완고게 있으면 후사 (後事) 어떻게 될지 우리가 말기 어렵더라. 이 을 보 사들이생각이 잇고 지혜가 있으면 나라를 사랑고 백성을 구완(구제) 뜻이 있으며 (…) 구습을 버리고 문명 진보 학문을 힘쓰며 을 합야 나라 일을 며 옳고 정직고(…) 편리고 실상으로 유익고 자주 독립 을 가지고 일을 며 사사(私事)와 청과 비루 것과 완고뜻을 내여 버려 나라를 속히 세계에 대접 받고 농상 공무와 교육과 법률과 각색 정치를 유신케  것이 다만 나라만 보호 만 아니라 몸과 집을 보호 양책(良策)이니 안남(베트남)이나 면전(버마)이 되려면 될 터이오. 동양에 자주 독립 부강 나라가 되려면 될 권리가 죠션 사의 손 속에 있더라. 이것이 동양 세계이니 참작야 여러 분은 읽어 보시요”(<대조선독립협회회보>, 제6호, 1897년 2월, 9-12쪽)”

이 논문을 원문으로 읽으면 100년 전의 아직 오늘처럼 표준화돼 있지 않았던 한글의 묘미를 맛볼 수 있어서 좋지만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조선이 베트남이나 버마처럼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동포들에게 "애국"과 "개혁"을 주문하는 서재필의 애국심이나 진정한 "나라 걱정"의 심정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애국"이라는 주관적인 심성적 "포장" 그 뒤에 과연 어떠한 세계관이 도사리고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기술적인 서구화를 도모하면서도 국가의 유교 관료주의적 본질을 고수하려는 중국 집권층을 "야만의 복색과 야만의 풍속을 완고하게 숭상하는 세력가와 협잡꾼"으로 몰아 영국의 홍콩 강탈이나 러시아의 만주ㆍ요동 이권 침탈을 "청나라 완고당"의 탓으로 여기려는 서재필은, 민중의 고혈을 짜서 대륙 침략이라는 필수적인 요소를 포함한 "초고속 서구화"의 가도를 달렸던 일본의 집권 세력가들을 "구습을 버리고 서양의 좋은 법과 학문을 배운" 문명개화의 영웅으로 치켜세웁니다. 청일 전쟁에서의 승리의 결과로 일본이 대만을 침략한 것을, 서재필이 마치 "비루하고 완고한" 중국이 당해야 할 "망신", 받아야 할 "천벌"처럼 그리는 등 일본의 대륙 침략을 사실상 중국의 "완고함" 등을 들어 합리화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중국의 "민생도탄"을 비판하면서도 영국 식민지 인도의 대량 아사(餓死) 사태는 외면**

이 정도라면 "아시아에 정신적으로 속하지 않는" 일본과 "잔혹하고 정체된 아시아"를 대조시킨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적 세계 구상과, 서재필의 "아시아" 인식 사이에서는 어떤 의미 있는 차이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전통이 된 지 오래된 유교를 "청나라의 학문"이라고 지칭하는 것까지, 조선인들의 "지나에 대한 숭배심"을 비난하는 메이지 일본의 신문에서 그대로 베낀 듯한 느낌입니다.

어렸을 때 일본의 군사학교로 유학 가서 거기에서 일본식의 "복제 오리엔탈리즘"에 이미 노출된 바 있었던 서재필은, 미국에서 "문명국가의 시민 Phillip Jaisohn"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구미 지역의 "원판 오리엔탈리즘"까지 그대로 받아들여 서구의 세계 침략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을 아예 상실하고 말았던 셈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중국에서의 "민생도탄"을 언급하면서도 영국의 "속지"(식민지)가 된 인도에서의 대량 아사(餓死) 사태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영국과 프랑스의 세력권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형식적인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태국의 "성공"을, 그 나라의 지정학적인 특성이 아닌 그 집권자의 "개화" 열성으로 설명하는 것도 "아시아"에 대한 편견과 무지의 극치를 나타냅니다.

침략의 희생자들에게 "다 너희 탓이야" 라고 외치고 세계를 서구와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로만 상상했던 Philip Jaisohn의 정신적인 후예들이 지금도 한국에서 계속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으면서 이라크 파병과 같은 형태의 비열하기 짝이 없는 제국주의 부역 행각을 벌이는 것은, 어찌 한 나라의 비극이 아닙니까?

물론 독립협회가 대중들의 정치 참여 발전이나 새로운 법률 등의 평민들에게도 유익한 여러 제도들의 착근과 발전을 위해서 투쟁하는 등 진정한 의미의 진보에 기여한 바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지도부의 세계관이란 일본의 메이지 엘리트에 의해서 이미 한번 "복제"된 바 있었던 구미의 오리엔탈리즘의 "재(再)복제"에 불과했음은 역시 부정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물론 일본적인 오리엔탈리즘적 "멸한론"(蔑韓論)에 대한 초기 내셔널리스트들의 대응은, 꼭 일본측 왜곡 기사에 대한 "그 때 그 때"의 시비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다 넓은 의미의 "대응"이란 일본인들이 그토록 무시하고 "타율성과 정체성"의 덩어리로만 본 한국 역사에 대한 본격적인 대중적 소개의 작업이었습니다. 거북선이나 실학 등 한국사의 발전적인 측면들을 보여 주는 대목에 대한 기사들이 바로 그때부터 신문의 지상을 크게 장식하기 시작했는데, 이와 같은 부분을 역사 서술에서 부각시키는 것이 그 다음에 "내재적 발전" 중심의 역사학에서 하나의 관습이 되지 않았습니까?

꼭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한의학을 "미신"으로 취급하고 불교를 역시 무속 신앙과 다를 게 없는 "우상 숭배" 쯤으로 봤던 극단적 친미주의자 기관 <독립신문>과 달리 개신 유림의 <황성신문>은 "아국 고대발달의 유적" ("我國 古代發達의 遺蹟": 1909년 2월 6일자 논설)이라는 대표적인 "우리 역사 발전적 측면 소개" 형(型) 기사에서 <동의보감>과 <금강경 주석>을 "우리 고대 문명의 광명을 보여 주는 귀중한 문헌"으로 칭하는 등 "우리도 서구인처럼 우리 과거의 유적을 소중히 여기자"는 훨씬 더 성숙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에서 한국의 과거 인물과 문화의 소개에 꽤나 공을 들인 박은식 선생과 같은 개신 유림만 해도, 서구인이나 일본인의 편견대로 한국인들의 "나태"(懶怠), "분발심이 없는 고루한 심성" 등을 질타하지 않았습니까?

***서구 근대와 다른 문화들을 서구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빨리빨리"가 특징이 된 근대와 달리 어느 나라든 전통 문화의 리듬은 "시간이 돈이다" 라는 방식으로 당연히 돼 있지 않은데, 바로 이 특성을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 "나태"로 범주화하여 "오리엔트"의 "열등함"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나타지벌"(懶惰之罰: <서우>, 제1호, 1906년 12월, 32쪽)이라는 짤막한 글에서 "앉아서 부를 즐기는 것을 행복으로 삼는 조선"과 "백수들에게 벌을 주는 서양"을 대조시킨 박은식은, 바로 이 오리엔탈리즘적 "동양 나태론"의 함정에 그대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서구 침략 합리화의 논리인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삼아 내셔널리즘의 철학을 구성했던 그들로서는, 서구인과 일본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을 물리칠 만한 논리적 근거가 부족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까? 그 편견을 물리치려면 서구의 소위 "문명"과 거리를 두어서 상대화시킨 채 그 내부적 모순을 파악, 비판할 줄 알았어야 됐는데, "문명 개화"가 서구중심주의에의 압도를 의미했던 개화기로서는 그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의 공격을 받은 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구, 일본인들의 경멸적인 시선을 의식한 양계초(1873-1929)와 같은 개혁파 논객들이 중국의 위신을 높이는 의미에서 조선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인 "종주국으로서의 입장"을 강조함으로써 중국의 영향력을 과시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관념상의 "종주권"의 문제와 무관하게 중국 근대의 인사들이 개인적 교제의 차원에서 한문으로 필담이 가능한 한국 선비들을 동등한 지식인으로 간주하여 따뜻한 우정을 많이 보였습니다.

물론 일본 제국주의를 부정해온 공산주의나 아나키스트 뿐만 아니라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1893-1961)와 같은 온건 기독교적 자유주의자들은 일제의 동화 정책이나 식민지 약탈을 비판하면서 조선이 독립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온건파 야나이하라는, "자치 실시를 통한 점차적 독립"을 이야기했지요).

그러나 많은 조선인 제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야나이하라와 같은 신앙인이라 해도, 일본 자본주의의 성장을 "진보"로 보고 남양(南洋)의 "미개인"들을 일본이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서구적 자본주의 긍정론을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한계가 있었음에도 그와 같은 사람들이나마 있었기에 1945년 이후의 일본에서 반성과 참회의 사조가 일어날 수 있게 됐습니다.

메이지 일본 "오리엔탈리즘"의 언어적, 사상적 폭력을 회상하면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제 자본주의 중진권에 진입한 우리라도, 경제적 우열에 의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멸시하고 무시하지 않았으면, 그리고 서구 근대와 다른 형태를 취한 다른 문화들을 서구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구름이 낀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도움이 될 책**

하타다 다카시 저, 이기동 역, <일본인의 한국관>, 일조각, 1983.

강진철, "정체성 이론 비판", - <한국사 시민 강좌>, 창간호, 1987, 20-53쪽.

<탈아론>의 영역 (英譯):
http://www.udel.edu/History/figal/Hist370/text/er/entrepreneurs.pdf .

강상중 지음, 임성모ㆍ이경덕 옮김,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산, 1997.

신용하, <박은식의 사회사상 연구>, 서울대출판부, 1982.

이광린, "馬建忠과 한, 중 관계", - <개화기 연구>, 일조각, 1994, 91-101쪽.

최기영, <한국 근대 계몽운동 연구>, 일조각, 1997

한철호, <친미개화파 연구>, 국학자료원, 1998.

宇野俊一 [ほか]編集, <日本全史 : ジャパンクロニック >, 東京 , 講談社, 1991

Chandra, Vipan. <Imperialism, Resistance, and Reform in Late Nineteenth-Century Korea: Enlightenment and the Independence Club>,Berkeley: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Center for Korean Studies, 1988

Susan C. Townsend, <Yanaihara Tadao and Japanese Colonial Policy>, Curzon, 2000.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