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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민중의 '궐기'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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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민중의 '궐기'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다

<시론> 부활절 맞으며 이라크 민중과의 연대를 제안함

오는 4월 11일은 기독교도에게는 <부활주일>을 맞이하는 날이다. 2천년 전 고난의 땅 팔레스타인에서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살아가던 히브리 민중들의 절망적인 아픔과 절절한 기원을 껴안고 "사랑과 생명, 그리고 의로운 평화의 궁극적 승리"를 온 몸으로 증언한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현존(現存)>을 한 해도 빠짐없이 되풀이 기리는 성일(聖日)이다.

하여 이는 그저 오래 전 고대(古代) 메소포타미아 변방의 한 작은 나라에서 있었던 아득한 종교적 기억이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육화(肉化)되어야 하는 분명한 하늘의 뜻이다. 그 하늘의 뜻은 지금 지상에서 가장 처절한 절규와 고난의 수렁에 빠져 있는 이라크 민중들의 가슴에 뜨겁게 내리고 있다. 그리고 인류의 양심을 격렬하게 난타하고 있다.

***팔루자의 학살을 이겨내는 이라크 민중들에게 내리는 부활의 거룩한 영**

그 거룩한 역사의 영은 알라를 믿는가, 야훼를 믿는가를 구별하지 않는다. 오직 존엄한 생명의 존재가 죽음의 계곡에서 헤매고 있는 현실을 주목하고, 이들이 인류 공동체의 그 어느 누구와도 마찬가지로 하늘의 아들과 딸로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회복시키는 것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로써 제국의 사형대, 죽음의 십자가에 못 박혀 이미 절명(絶命)하고 만 줄 알았던 영혼이 집단적으로 궐기하고 있다. 그야말로 부활이다. 부활의 헬라어 원의(原義)에는 궐기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음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이미 패배시켰다고 여겼으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리어 새로운 시작이었다.

부활은 넋으로만 그치지 않는, 몸의 부활이다."팔루자 학살"의 통곡을 이겨내는 이라크 민중들의 평화 행진소식이 전해져 오는 이 순간, 우리는 그 부활의 몸을 생생하게 목격한다.

***부활은 역사의 궐기를 포함한다**

나사렛 예수의 처형으로 다시는 재기의 가능성 없이 소멸되어버린 줄 알았던 예수 제자 공동체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어느 날 갑자기 들불처럼 소생하는 까닭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다. 그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루어 내신 절대존재는 오늘의 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부활한 그리스도 예수는 제자들에게 "갈릴리에 먼저 가있겠다"고 하셨다. 갈릴리는 팔레스타인 땅에서도 가장 혹독한 핍박과 고난의 현장이었다."오늘의 갈릴리"에 어찌 이라크의 참혹한 현실이 제외될 수 있을 것인가? 그곳에서 우리는 패퇴할 수 없는 생명의 힘이 총칼로 무장한 제국의 병사들과 결연히 마주하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우리는 승패가 어떻게 갈릴 것인지를 이미 보고 있다.

반로마 항쟁분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제국의 사형틀, 십자가는 나사렛 예수를 잠시 죽이는 데 성공했는지 모르나, 영원히 죽일 수는 없었다. 십자가 처형은 제국의 넘볼 수 없는 승리를 만방에 알리는 깃발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승리가 제국의 잔혹한 죄를 폭로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자 종국적 패배로 가는 과정임을 확정짓는다. 탐욕을 추구하며 죽음으로 지배하는 인간의 제국은, 사랑과 생명을 나누는 하나님 나라를 이길 수 없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 있는 하나님 나라**

그 하나님 나라가 바로 우리들 모두의 영혼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고 한 나사렛 예수의 육성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꿈과 기원과 열정, 그리고 역사의 궁극적 진로에 대한 믿음이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지 깨우친다. 이 꿈과 이 믿음을 잃으면 역사는 죽는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도 무차별하게 유린당하고 만다. 그러나 이 꿈과 이 믿음을 소생시키면, 그래서 몸이 되는 하늘의 뜻으로 되살아나면 우리와 세상은 달라진다.

세상의 거대한 힘 앞에 압도되어 주눅 들어 살던 갈릴리 민중들은, "그대들 안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있다"는 나사렛 예수의 뜨거운 일깨움에 눈을 뜬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강포한 힘으로도 압살시킬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스도의 부활로 증명해낸다. 이를 믿을 것인가 아닌가는, 하늘이 인간의 비극적인 역사를 저버릴 것으로 보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 처형의 수난 전, "내가 이미 세상을 이겼다"고 확언한다.

세상은 십자가 처형의 권세를 보지만, 나사렛 예수는 그 권세의 종국적 패망을 보았고 세상은 십자가의 죽음을 주목했지만, 나사렛 예수는 그 죽음의 밑바닥에서 솟구치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확신했던 것이다. 세상은 나사렛 예수의 홀홀 단신을 보지만, 나사렛 예수는 그와 함께 하는 역사의 정의와 하늘의 뜻을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의 결말은, 제국의 파산과 예수 운동의 소생으로 이어진다.

***제국의 파산과 예수 운동의 소생, 그 비밀**

하늘의 뜻에 눈이 밝은 이들은, 권세의 오만한 승승장구에서 파멸의 시작을 알아보고, 의(義)가 겪는 고난에서 그것이 마침내 승리할 것을 내다본다. 아메리카 제국이 유린한 메소포타미아는 제국의 무덤이 될 것이며, 인류의 역사는 하늘의 뜻을 거역한 권세의 죽음과 고난을 통과한 민중의 승리를 기록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미처 보지 못하고 만 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절규에 대한 하늘의 침묵이 곧 절대존재의 부재와 그의 세상에 대한 외면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늘이 세상을 이기는 방식은 세상이 생각하는 방식과 달랐을 뿐이었던 것이다. 오늘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권세자들이 스스로 총명하다 여길지 모르나, 그들은 정작 눈이 감긴 자들인 것이다.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눈과 귀가 먼 그의 장애를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의 표상처럼 인식되어 온 인물이다. 그러나 미국의 공식 역사는 그녀가 평화를 위해 혼신을 다해 반전운동에 뛰어들었던 열정적인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주시하려 하지 않는다.

***헬렌 켈러의 반전 평화 운동**

당대의 기성언론들은 이러한 그녀의 활동에 대하여, 그녀의 신체적 장애가 역사적 현실을 판단내리는 능력을 갖지 못하게 했다는 식으로 폄하하였다. 헬렌 켈러는 그러한 자들을 향해 "눈과 귀가 먼 것은 바로 당신들"이라고 일갈하였다. 제국주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관여하기 직전, 그녀는 카네기 홀의 연설을 통해 전쟁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은 그 연설의 일부이다.

"우리는 지금 국가적으로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대중들의 노동으로 이익을 얻는 소수의 집단이 노동자들을 자본가의 이익을 방어하는 군대로 조직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여 여러분들은 이미 지고 있는 무거운 부담 위에다가 보다 규모가 큰 군대와 더 많은 전쟁무기라는 짐을 지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의회는 미국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멕시코, 남아메리카, 중국, 필리핀 등지에 투자한 자본가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모든 현대전쟁의 뿌리에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존재합니다.....

전쟁반대 파업에 나서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없으면 전쟁은 치를 수 없습니다. 모든 살인 무기 제작에 대한 반대 파업을 합시다. 수백만의 인명을 살상하게 될 일체의 전쟁준비에 반대하고 나섭시다. 파괴의 군대에 속한 어리석고 굴종적인 노예들이 되지 맙시다. 건설의 군대에 속한 영웅이 됩시다." (Howard Zinn, <The People Speak: New York, Perennial, 2004>)

***마틴 루터 킹의 베트남 전쟁 반대**

그리고 나서 50여년 뒤, 베트남 전쟁 반대에 나선 마틴 루터 킹은 1967년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전쟁 반대 연설을 한다. 민권운동에서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좌표를 이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암살은 이로부터 예상되었던 것이다. 미국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문제로 그의 운동 표적이 옮아갔기 때문이었다.

"저는 오늘 이 훌륭한 예배처에 나의 양심이 요구하는 선택으로 왔습니다. 제게는 지금 다른 그 어떤 선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침묵은 배신이다>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 마침내 온 것입니다...

남의 땅에서는 네이팜 탄으로 인간의 육체를 불사르고 이 나라에는 아버지와 남편을 전쟁에 여읜 고아와 미망인들이 날로 늘어나게 만들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대감의 독약을 투입하며 젊은이들의 팔과 다리가 끊어진 채로 집에 돌려보내고 그들의 정신이 미칠 지경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정의와 사랑 등의 가치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이 사회를 보다 낫게 만드는 일보다 군사비에 날로 더 많은 돈을 쓰는 나라는 정신적 사망의 길로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시작합시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길고 험난한, 그러나 결국 아름다운 투쟁의 길로 말입니다."(Howard Zinn, 같은 책)

전쟁은 제국, 그리고 그 제국과 결탁한 소수의 자본가 및 권력자의 이해에 봉사하며, 무수한 민중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뿐이다. 저 장엄하며 비통한 이라크 민중들의 평화행진이 우리에게 총칼을 겨누는 적이 되어야 하는가?

***파병반대의 차원을 넘어선 이라크 민중들과의 연대**

이제 우리는 파병 반대의 차원을 넘어서, 고난에 처한 이라크 민중들과 연대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나서야 할 때이다.

때는 바야흐로 부활절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랑과 생명, 그리고 평화의 승리를 선언하는 하늘의 육성이라면, 우린 그 부활의 역사에서 "갈릴리로 가는" 결단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 결단은 다만 우리의 군대를 보내지 않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양심과 함께 하는 위대한 행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1930년대의 인류에게 던져진 숙제가 파시스트의 공세에 직면했던 스페인이라면, 1960-70년대의 과제는 베트남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이라크의 현실 앞에서 우리의 양심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있다.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던진 나사렛 예수의 고난과 부활은, 바로 그 길이 우리에게 두렵지 않음을 일깨운다. 제국의 권세가 아무리 강해도 그것은 하늘이 내린 생명을 이길 수 없음을 그리스도의 부활은 일깨운다. 그리고 그 종국적 승리의 기쁨을 미리 예고하고 있다.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결단할 때가 있나니, 우리는 어떤 역사의 부활을 맞이하려는 것일까. 마틴 루터 킹이 말했듯이 전쟁의 참혹함이 눈앞에 벌어지면서 침묵이 인류에 대한 배신이 되는 시대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민족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지금 역사의 자리에서 죽으려는가, 살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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