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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는 한달새 세번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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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구에는 한달새 세번 바람이 불었다"

[대구 현지 총선 르포] 탄핵-박근혜-정동영

공식선거일이 시작된 첫 날인 2일, 대구 거리는 지금이 선거철인가 싶을 정도로 한산했다. 후보자 홍보물과 포스터 등록 마감일이 4일이어서 거리엔 선거 벽보 하나 붙어 있지 않아 선거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후보자가 한 지역에 20분 이상 머무를 수 없고, 후보자는 5인 이상 다닐 수 없으며 유세차 위에서만 연설을 할 수 있게 돼있는 개정 선거법도 이같은 한량한 분위기에 일조했다.

<사진>

대구지역 정당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대구 표심(票心)에 영향을 미칠 큰 정치적 이슈가 그동안 세 번 있었다 했다. 첫 번째는 대통령의 탄핵이었고, 두번째는 뒤이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취임, 그리고 마지막이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60·70대는 투표하지 않아도 된다"는 노인폄하 발언이었다.

***탄핵, "어떻게 나라 임금님을 흔드냐"**

전국적인 탄핵 반대 여론은 대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대구에 붙는 수식어는 '한나라당의 텃밭'이나 '보수의 본거지'라는 것이지만 탄핵안 가결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탄핵 반대는 70% 대를 기록해 다른 지역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구 지역의 탄핵 반대의 속내는 다소 특이하다고 할까. 이 지역 정당 관계자들중 상당수는 대구지역의 탄핵반대 여론에 대해 '나라의 가장을 흔드는 것에 대한 반감'이라고 분석했다. TV에서 보여준 정치권의 싸우는 모습이나 16대 국회에 대한 불신 등도 탄핵반대 여론을 형성하는 데 한 몫 했지만, 보수성이 강한 대구 지역에선 '가부장적 분위기' 때문에 일게 된 반대 여론도 만만찮았다는 분석이다.

열린우리당 한 관계자는 "탄핵반대 여론이 높은 것은 TK지역의 가부장적 의식에 따른 것"이라며 "대통령 욕할 땐 하더라도 어떻게 물러나게 하냐고 말들 한다"고 전했다. 그는 "호주제 폐지 반대 여론이 가장 높은 지역도 대구"라고 덧붙였다.

경북대에서 만난 철학과 98학번 권태상씨도 "대구에서 탄핵 반대 촛불시위를 하는데, 옆에 지나가던 여고생 한 명이 '어떻게 나라의 임금님을 흔드냐'고 말해서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그러나 서문시장에서 만난 한 30대 가장은 "16대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자격이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른바 전국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된 '탄핵 자격론'이다. 그러나 그는 지지정당에 대해서는 "누가 나오는 지도 모르는데 더 두고 봐야 한다"며 말을 아꼈다. 탄핵 반대가 곧 열린우리당 지지표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지역 정가에서도 "탄핵 반대 여론에 기대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기는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고, 열린우리당 후보들도 연설 시에 탄핵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경북에서 출마하는 열린우리당 한 후보는 "탄핵 때문에 사람들이 상처받았는데, 자꾸 탄핵, 탄핵 얘기하는 것은 별로 안좋다"고 말했다.

***'박근혜 효과' 이상의 정동영 '60·70대' 발언**

TK지역 정가에서는 정동영 의장의 '60·70대 발언'이 '박근혜 효과'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그 이상으로 표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과연 가부장적 성향이 강한 대구지역이라고 하지만, 정동영 의장의 발언이 과연 '박근혜 효과'를 뛰어넘을 정도일까. 정 의장 발언이 보도된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겠지만, 거리에서 체감한 노풍(老風)은 생각외로 거셌다.

서문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고 있는 이원자(여. 62)씨. 어느 정당을 지지하느냐는 물음에 "내 투표 안할라칸다. 오지 말라카대"라며 "내 가도 된다카면 우리당 콱 찍어줄라 켔는데"라고 말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와중 한두 명씩 모여드는 상인들의 얘기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정동영이 빠지면 찍어 줄란다", "전라도 가서도 그 소리 하라캐라. 하필 대구 와서 해샇노", "위(노 대통령)에가 말이 그란데 밑에서 뭐 배우겠노", "(투표) 해달라고 사정해도 갈똥말똥한데". 포장마차에서 수제비를 먹던 30대 한 여성은 "할머니들 다 발끈하고 있다"며 "표 많이 깎였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북 포항남울릉 열린우리당 박기환 후보 사무실에 갔을 때, '대구를 돌고 왔다'고 하니 관계자는 대뜸 "거기 분위기 초상집이죠"라고 말을 건넸다. 이같은 분위기를 반영한 말이다. 대구의 열린우리당 한 관계자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탄핵 이후 자신이 한나라당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걸 민망해 했는데, 정 의장의 발언은 그 명분을 제공한 것"이라며 "투표할 생각이 없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이런 후레자식 같은 녀석들'이라며 투표하러 간다고 한다"고 전했다.

***박근혜를 바라보는 대구 사람들의 시선**

한나라당 새 대표로 박근혜 의원이 선출된 뒤, 여론조사상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지역이 바로 TK다. 지역 정가에서 박근혜 효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탄핵 역풍으로 등을 돌린 한나라당 지지자들에게 다시 한나라당을 찍어도 괜찮다는 명분을 마련해 줬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향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줬다는 것이다.

그러나 표심에 미칠 영향에 대한 평가는 다소 인색했다. 우리당 관계자들은 오히려 "우리당의 지지율 거품이 빠진 하나의 계기"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당 한 관계자는 "생긴지 1년도 채 안된 우리당 지지율이 40%가 넘어갔다는 것은 거품"이라며 "결국 우리당이 감동을 주지 못한 상황에서 지지율 거품은 서서히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고, 박 대표의 취임은 하나의 계기가 됐을 뿐"이라고 분석했다.

이같은 생각은 서민들을 만났을 때도 읽을 수 있었다. 대구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었다. 이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사 독재 시절에 대한 거부감이 대구 사람들에겐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적어도 이 시기는 대구지역의 경제가 호황을 누린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대표 선호도와 지지 정당이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서문시장에서 그릇 장사를 하는 정영목(51) 씨는 "내는 박근혜 팬인데, 이번엔 우리당 함 밀어줄라 칸다"며 "노무현이 힘이 없어가 그래 되는 것 아이가"라고 말했다. 25년째 택시운전을 한다는 정경식씨도 "여자 혼자 한나라당 일으켜 세우려는데 … 박통 향수도 있고"라며 박근혜 대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난 민주노동당 찍어줄란다. 크려고 하는 당 키워 줘야지"라고 말했다.

***"쪼맨한 나라, 지네들 맘대로 갈라놓고…"**

16대 국회에서 대구경북지역은 한나라당이 전석을 '싹쓸이'했다. 그래서 영남권 지역에서 지역 정서가 가장 강한 곳으로 TK가 지목된다. 대구 사람들은 외부에서 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이 달가울 리 없다. 그래서인지 지역감정이라는 틀이 벌어지는 균열은 곳곳에서 감지됐다.

'왜 대구는 한나라당을 지지하게 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돌아온 하나의 대답은 대구 경제 소외론이다. 건설회사 우방 하청업체에 근무하다가 택시운전을 하고 있다는 이정흥(35)씨는 "대구는 건설 경기 아니면 육성된 사업이 없는데, IMF이후에 대구 건설업체인 우방과 청구 등 다 망했다"며 "노태우 대통령때 대구 경제가 발전했었는데, DJ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IMF이후 대구 건설업체인 우방과 청구가 부도 나고 대구 지역 건설 사업이 속칭 '전라도 기업'인 부영건설에 상당수 넘어가게 된 것에 대해 대구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게 됐다는 분석이다.

호남의 강한 지역결집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경북대 총무과에 근무하는 60대의 한 직원은 "전라도 사람들이 한 표도 안 찍어 줄 때, 우리는 20%나 찍어 줬다"며 "어떻게 90몇 퍼센트 지지율이 나올 수 있냐"고 말했다. 정가에서는 대구시민들 속에 내재된 이 같은 견제 심리 때문에 야당의 '거여견제론'도 효과를 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대다수 시민들은 "우리는 지역감정 없어요. 정치인들이 만든 것일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누가 스스로를 지역감정이 있다고 할 것이며 누가 자기 지역 주민들은 아직도 지역주의자라고 말하겠냐마는, 지역감정을 강하게 부인하는 그들의 목소리에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원망감과 이러한 정치 행태에 휘말리는 주변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복합적으로 배어났다.

호남 탓을 했던 경북대의 직원도 어디에 투표할 것이냐는 질문에 "이번에는 보고"라고 답했다. 지역감정과 표심이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다. 택시 운전을 하는 이윤호(60) 씨는 "지역감정 다 정치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며 "이 쪼맨한 나라에 정치인들이 지네 맘대로 갈라놓고, 싸우고..."라고 혀를 끌끌 찼다. 서문시장에서 국수를 파는 한 아주머니도 "전라도 사람들 나쁜 사람 없다"며 "대구에서도 얼매나 억척스레 잘사는데"라고 말했다.

***"3백65일 봐도 모르겠는 걸 하루에 수십 건씩 처리하더라"**

방탄국회, 몸싸움, 국회의원들의 줄구속 등. 그 어느 때보다 16대 국회는 얼룩졌고, 국민들의 정치 혐오감은 극에 달했다. 대구 지역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얼룩진 국회는 되려 유권자들의 의식을 성숙시켰다. 이러한 의식의 기저에는 정당만을 보고 투표한 것에 대한 대구 시민들의 일종의 부채의식도 깔려 있는 듯했다. '습관처럼 1번을 찍는다'는 대구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정말 이번만큼은'이라는 의지는 여기저기서 분출됐다.

"큰 도둑놈이고 작은 도둑놈이고, 거(국회)만 가면 다 도둑놈 되더라. 그래도 부정·부패없는 국회의원을 제일로 뽑을 것"(이윤호 60), "이 당에도 속고 저당에도 속았다"(김수철, 58), "과거엔 다 한나라당 찍었는데, 이번엔 TV연설도 보고, 생각도 좀 해보고"(김장은, 62), "정치인들 참 머리 좋더라. 3백65일 봐도 모르겠는 일들을 하루에 수십 건씩 처리하더라"(정경식. 25년째 택시운전).

대구 시민들은 한결 같이 대구 경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정치인들도 하나 같이 대구 경제를 살리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옥석을 가려내기 위한 유권자들의 눈은 한결 매서워 졌다. '뽑을 사람 없어 투표 안한다'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정흥(35) 씨의 "사람 됨됨이 봐야지. 물론 열어보면 다 똑같은데. 그래도 투표는 해야죠"라는 말처럼 아직 희망은 버리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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