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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1백년전의 서양인을 닮아가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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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1백년전의 서양인을 닮아가는 것은 아닌가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11> 서양인의 조선관-박노자

***"가는 정"은 두터웠지만, 오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가는 말이 아름다우면 오는 말도 아름답다"(去言美, 來言美)라는 한문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요즘 한국에서 쓰는 방식으로 바꾸자면, "가는 정 (情)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즉, 우리 쪽에서 좋은 감정을 갖고 좋은 말을 쓴다면 상대방도 우리를 그렇게 대해주리라는 이야기인 셈이지요. 유교적인 인의염치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호혜성"(互惠性)의 원칙이 지켜지겠지만, 획일적인 서구 "문명"과 "국민 국가"의 유무의 여부가 한 나라에 대한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즘의 잔혹한 국제 무대에서 "가는 정"이 있어봐야 "오는 정"이 별로 두텁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개화기의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의 상호 인식이 이 안타까운 사실의 좋은 사례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쪽에서는 고종을 비롯한 대다수의 조정 대신들이 미국을 열강 중에서 가장 공평하고 욕심이 적은 나라로 인식하여 미국 선교사들에게 여러가지 혜택을 부여하고, 서재필을 비롯한 친미 개화파들이 서방 선진국들 – 특히 미국 -을 "문명 국민"의 완전무결한 모델로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가는 정"은 이 정도로 두터웠지만, 오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저는 개화기에 한국과 종교적, 외교적 관련을 맺은 모든 서구인이나 미국인들을 일률적으로 "침략의 첨병"이나 "제국주의자"로 매도할 의도란 추호도 없습니다. 전통적인 국내외적 질서가 해체되고 일본을 비롯한 각종의 신흥 침략 세력들이 한반도로 밀려 들어 오는 100년 전의 실질적인 상황에서는, 직접적인 침략적 의도가 당장 없는 구미인들은 – 본인들의 편견이나 세계관과 무관하게 – 한반도 주민들에게 세계 관련 지식 전수를 비롯한 여러 차원에서 실제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경우는 꽤나 있을 수 있었습니다.

***조선 독립을 주장한 데니, 조선의 실상에는 어두워**

그리고 제국주의의 세계관 전체를 문제시하는 우리 입장에서야 그들의 "동양" 인식을 "편견"으로 보지만, 그들의 주관적인 의식의 차원에서는 그들이 한국에 대한 대단한 애정을 가진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서울에서 1882년부터 내정 간섭적인 "예속화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해 온 원세개(袁世凱)의 횡포를 국제적으로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 근대적 국제법상 분명히 독립국임을 만방에 알리는 등 한국의 외교에 상당한 긍정적인 기여를 한 고종의 외무 고문(1886-1890년간) 데니 (한자 이름: 德尼, 본명: Owen Nickerson Denny)를 물론 기억하시지요?

그의 명문 <청한론>(淸韓論: <China and Corea>, 1888년 8월 출판)은 비록 47쪽의 짧고 난해한 글이지만, 여러 가지 국제법적인 근거와 전례들을 들어 "중국과 조선의 전통적인 조공 관계가 국제법 상의 조선의 독립을 전혀 실추시키거나 말소시킬 수 없다"고 명백하게 주장한 구미 쪽의 최초의 논문이 아닙니까? 그 글에 담겨져 있는 "예속화 정책" 반대 주장도 귀중하지만 자강 정책만 잘 펴서 양반들로 하여금 산업을 일으키게 하고 지하자원만 잘 개발하면 조선이 곧 부국이 될 수 있다는 데니의 "조선 미래 낙관론"도 그 당시의 구미인의 입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데니의 글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고종을 긍정적으로 봐야 할 근거로 "서구 문명의 위대한 초원에 첫발을 내디디려는" 고종의 개화 지향적인 정책을 드는 등 "서구화"를 유일무이한 "선"으로 생각했던 데니의 서구 중심주의적 한계입니다. 이와 반대로는, "개화"를 접할 기회를 가질 리 없었던 조선의 평민들은 난이 일어나기만 하면 무조건 모든 외국인들을 다 몰살하려는 "배외적인 야만인"으로 서술됩니다.

데니의 거시적인 세계관도 문제가 많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고종의 최측근으로 있었던 그의 국내 정세의 이해에도 그야말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예컨대 그는 명성황후 민비를 "용감하고 애국적인 지도자"로 묘사한 것까지 좋은데, 민씨척족들의 "근왕적인 애국당"이 청나라와의 일체 전통 조공 관계를 끊어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자 한다는 데니의 주장(" Corea," - <Chinese Times>, Tientsin, June 30, 1888, pp. 413-415. 국사편찬위원회 편, <데니문서>, 1981, 233-235쪽)은 조금 믿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민씨척족의 궁극적인 목적이야 물론 본인 집단의 세도의 영구화를 위한 점차적인 기술적 서구화 개혁이었지만 – 미국이나 러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접근을 시도하면서도 -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불가피한 것으로 믿었던 그들을 "청나라와의 일체 관계를 끊으려는 일파"로 묘사한 것은 과장 중의 과장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고종의 대러, 대미 외교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려 했던 데니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집권 정파를 "반(反)중국적 인물"로 묘사하려 했던 것을 어쩌면 이해할 수도 있지만 조선에 상당 기간 내에 요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어를 배우려 하지 않아 통역에만 계속 의존했던 데니의 "정보의 한계"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데니 이야기를 한 뒤에 아무래도 사족을 하나 달아야 할 듯합니다. 데니의 의식이나 정보의 한계가 어땠든 간에 그에 대해서 높이 평가해 주어야 할 점은 그가 미국 등지의 친지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에서까지도 조선과 자신의 "고용주"이었던 고종에 대해서 늘 그 나름의 호감을 내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에 한국과 관련된 일을 했던 미국 외교관 중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이나 존중이란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고종이 "고용주"가 되고 그 신하들이 "파트너"나 "동료"가 되더라도 "가장 진보된 나라"로 인식됐던 미국에서 "가장 뒤떨어진 오지"로 여겨졌던 한국으로 "내려 왔던"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고용주"나 "동료"들을 동등하고 존중 받아야 할 인간으로 쉽게 취급할 리는 없었습니다.

***의사ㆍ선교사ㆍ외교관이었던 알렌의 조선인 멸시**

예컨대, 데니가 "선교사로서도 외교관으로서도 아무 자격이 없다"고 폄하하고 혐오했던 최초의 미국 선교사, 외교관 중의 한 사람인 그 유명한 알렌(한자 이름: 安連, 본명: 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을 들어 봅시다. 1884년에 무명의 젊은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온 그는, 그의 치료 성과에 매료된 고종과의 가까운 관계를 발판 삼아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 (1890-1893), 주한 미국 공사대리, 전권 공사 (1893-1905) 등으로 출세하는 등 한국과의 관계를 "사업 분야"로 삼아 "성공"을 이룬 최초 미국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잘 알려졌듯이 러-일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그가 본국 정부의 친일 일변도의 외교 방침에 반대하여 한국에서의 미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러시아와 일본 사이를 조절하여 한국의 독립을 보호해야 한다는 자신의 지론을 펴는 등 고종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그의 공적인, 개인적인 발언과 생각을 보면 한국과의 관계 덕택에 출세한 자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철저한 인종주의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1887년에 주미 공사 박정양의 사절단과 함께 한국에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같이 간 그는, 자신의 한국인 일행에 대한 소감을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박 공사는 사절단 일행 중 가장 나약하고 바보 천치 같은 인물이었다. (…) 이완용과 이하영은 그래도 전반적으로 조선사절단의 나쁜 인상을 상쇄하지만 그들이 항상 자기 객실의 지정좌석에서 일어서서 자리를 어지럽히고 있는가 하면 (…) 그들의 몸에서 계속 고리타분한 똥 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그들은 선실에서 끊임없이 줄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이 담배 냄새에다가 목욕하지 않은 고린 체취, 똥 냄새, 오줌 지린 내, 고약한 냄새가 나는 조선음식 등이 뒤섞여 온통 선실 안은 악취로 가득했다. 이 여객선(오션익호)의 승객들은 매우 친절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냄새 나는 조선사절단을 한 방으로 몰아 격리해 준 데에 대해 감사했고,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나는 그들의 옷에서 기어 다니는 이 (虱)를 가리키면서 잡으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아무래도 악취는 별 차이 없었다 (…)" (<알렌의 일기>, 1887년12월26일).

평생 처음으로 여객선을 타 보는 조선 사절단이 서구적인 위생 규칙을 지키는 데에 익숙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똥오줌도 제대로 못 치우는 더러운 조선인"과, 이를 잡으라고 "주의를 주는" (어른이 어린아이를 가르치듯이!) "깨끗한 미국 신사"인 자신을 이렇게 대조시키는 알렌의 사고방식은 분명히 그 시대의 통상적인 인종주의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이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도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지만 알렌의 "조선인 멸시론"이 영향력을 꽤나 행사했던 그의 공개적인 발언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보다 큰 문제이었습니다. 예컨대, 1908년에 자신의 유명한 저서 <조선견문기> (<Things Korean>)에서 알렌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서술을 시작합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블라디워스토크 지역에서 자신의 부인을 죽인 마적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무수한 중국인들을 죽임으로써 "용명" (?)을 얻은 한 미국 선장은, 한 한국 마을을 방문할 때 "원주민" 앞에서 그의 의치(義齒)를 한 번 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의치라는 것이 뭔지 모르고 인체가 이렇게 분리되는 걸 상상조차 못하는 "원주민"들이 결국 그에 대한 비길 바 없는 경외심을 가지게 됐으며 늘 그에게 말을 잘 대주는 등 극진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pp. 14-19).

중국인이나 조선인들을 무자비한 복수로 위협하거나 "문명의 이기"로 압도해야 한다는 이 시각을, 우리가 오늘날에 와서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이러한 세계관을 가진 자가 자신을 동아시아의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복음과 문명의 전도사"로 의식했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쓴 웃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샌즈, 조선 중립화 실패하자 미련없이 떠나**

고종이 미국인 사업가의 이권 챙기기에 비협조적으로 나서자 그의 "대미 불신"을 미국 정부에 고발하겠다고 위협할 정도로(현광호, <대한제국의 대외정책>, 신서원, 2002, 92쪽에서 Allen Papers, Vol. 7-1, M.f. 367, 1901년 10월 10일자 기사를 재인용함) 한국 정부와 한국인 위에서 군림하려는 태도를 취했던 알렌과 달리, 1899-1903년간 한국 궁내부의 고문으로 재직했던 미국인 외교관 샌즈(한자 이름: 山島, 본명: William Franklin Sands)는 민영환 등의 친미파 요인들과 가까이 협력하면서 민영환이 고민 끝에 고안해 낸 한국의 중립화 계획을 – 알렌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 나름대로 충실히 실행하려고 애썼습니다.

그가 한국어를 기초 수준 이상으로 구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궁내부 외사과장 고희경 (高羲敬)이나 강석호 (姜錫鎬), 현상건, 이학균 등의 영어 실력이 뛰어난 중인(中人) 출신의 "신흥 궁내 세력"들과 하도 가까이 밀착된 결과 그 당시의 한국 국내 정세의 그야말로 뛰어난 파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종을 "개혁주의자", 그리고 민비를 "애국자" 이상으로 이해하지 못한 데니와 달리, 샌즈는 구한말의 내정 상황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되는 회고록을 남길 정도로 한국 관련의 "내부자로서의 지식"이 유별났습니다. 예컨대, 요즘 고종을 마치 "계몽 군주"쯤으로 생각하려는 일각의 극우 사학자들은 샌즈의 다음과 같은 텍스트를 아마도 염두에 두셔야 할 듯합니다:

"한국의 관료 임명 제도는 타락될 대로 타락됐다. (…) 모든 행정적인 벼슬들은 개인의 정실 인사 아니면 뇌물로만 얻어질 수 있었다. 뇌물로 벼슬을 얻은 탐관오리들은 그들이 투자한 돈을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내느라 과중한 임의 잡세들을 마음대로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민란들의 주된 원인이었다. 뇌물에 의한 매관매직 제도가 하도 상식이 됐기에 일본인 고리대금 업자까지도 이를 이용할 지경이었다. 그들이 원님이 될 사람에게 월당 20%의 이자로 (…) 뇌물을 바칠 돈을 꾸어 주곤 했다. 그러한 사람이 원님이 된 뒤에 맨 먼저 이 융자를 갚느라 조세를 부과하고 그 뒤에 황제에게 바칠 상납금을 만들라고 새로운 잡세를 부과하고, 그 뒤에 끝내 자신의 이익이 될 돈을 같은 방법으로 만들었다. (…) 황제와의 직거래를 할 수 있는 행운아들은 궁내의 중개인들에게 돈을 바칠 필요가 없었다. 궁내 요직들은 뇌물이 오가는 통로이었기에 가장 귀중히 여겨 졌다. (…)" (<Undiplomatic Memories>, Royal Asiatic Society, Korean Branch, 1990, p. 121).

다소 과장이 심한 구미인의 기록이라 치더라도 고종에 대한 나름대로의 호감을 가지고 그의 궁내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든 샌즈는 의도적으로 거짓말 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뇌물쟁이들이 고종과 직거래했다는 이야기를, <매천야록>과 같은 국내 기록들도 충분히 내포하지 않습니까? 고종이 어디까지나 개화 지향적인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지만 가렴주구와 뇌물의 "먹이사슬"을 상식쯤으로 알았던 그에게는 모든 개혁의 유일한 목표는 바로 자신과 그 측근들의 권력의 공고화, 그리고 수탈 체제의 영구화이었던 듯합니다.

역사에 가정법이란 없지만 만약 샌즈와 민영환의 "중립화" 계획이 성공돼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황실과 그 측근의 "살찌우기"를 궁극적 목적으로 했던 그 기형적인 "유사 근대화"는 아마도 계속 민중의 거센 저항에 부딪쳤을 것이고 민씨척족과 고종 측근들을 극단적으로 혐오했던 지배층의 대다수조차를 결코 만족시켜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담이 너무 길었습니다만 한국의 조정을 한국인 이상으로 잘 파악하고 "용감하고 인간적 존엄성이 강한" 한국인들에게 그 나름의 선심으로 "중립화의 혜택"을 입히려 했던 샌즈의 한국관(觀)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샌즈는 한국인들과 밀접히 유착된 상태에서 궁정 생활했지만 (백인에 비해서 "물론" 열등한) 일본인에 비해서도 한국인들이 비도덕적이며 능력이 모자란다고 봤던 그는 한국인들을 결코 동등한 인류로 생각하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에게는 한국 "귀족"들도 무능력과 협잡 이상으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았지만 한국인 하인들을 체벌하지 않고서는 도박과 같은 벽들을 없앨 수 없다는(p. 105) 이야기나, "일본의 게이샤들은 지능 아니면 미모를 갖고 있지만 천민인 한국의 기생들은 게이샤만한 대접을 받은 적이 없다. 기생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말하면 한국의 어느 계급의 여성 중에서도 미인이란 별로 안 보인다"(pp. 197-198)는 식의 "경험담"들을 읽어 보면 그의 거의 체질적 수준의 인종주의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한국의 "중립화" 계획이 좌절된 뒤에 한반도를 떠난 샌즈는 그 뒤에 한국에 대한 별다른 미련 없이 남미 등지에서 미국의 패권주의적 외교를 전개했으며, 회고록 작성 때에 이미 식민지로 전락되고 만 한국의 참극에 대해서는 그 텍스트에서 별다른 동감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션교사 혈버트의 조선문화 멸시**

외교관 이야기를 하도 장황하게 했기에 국가 공무원들보다 조금 더 인간적이며 인본주의적여야 할 선교사들의 이야기도 해야 할 듯합니다. 혹시, 양화진의 외인 묘지에 있는 유명한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한자 이름: 轄甫, 본명: 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의 묘비를 가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고종과 매우 가까운 개인적 관계를 가졌던 "해이그 밀사 사건"(1907년)의 주역 중의 한 명인 헐버트의 묘비명은, "나는 [영국의 명사와 귀족들이 묻히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고 돼 있습니다.

광복 직후에 한국에 초빙됐다가 미국의 땅에서 묻히고 싶어 죽기 직전에 미국에 돌아간 서재필과 대조적으로 1949년에 한국에 들어와서 서거하여, 생전의 숙원대로 한국 땅에서 묻힌 헐버트 같은 경우에는, 한국에 대한 커다란 사랑을 가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그의 한국 인식의 기본틀은 제국주의 시대의 비틀어진 "상식"을 크게 벗어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의 <한국사> (<History of Korea>, 1905)라는 방대한 저서의 제2권에서 한국 전통 문화의 "몰락"을 다음과 같이 논했습니다:

"퇴보하는 왕국이나 죽어가는 문명을 위해서 통곡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철학이다. (…) 한국에서 지금 낡은 것들이 소리나게 죽어가고 있으며 새로운 술이 옛날의 술병에 부어지고 있다."

다른 저서인 <대한제국 멸망사> (<The Passing of Korea>, 1906)에서 한국 전래의 무속을 "한국인들에게 씌워진 저주"라고 서술하고 불교 사원의 "잔인한" 지옥도 (地獄圖)들이 한국 형벌 제도를 잔혹하게 만드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등 한국의 전통 문화를 "청소"의 대상으로 본 헐버트인 만큼, "죽어가는" 전통 문화에 대해서 "통곡"할 리는 만무했습니다.

데니, 알렌, 샌즈, 헐버트… "지한파" 내지 "친한파"라 부를 만한 이들은 각자 구한말의 한국 문화의 새로운 변모에 나름대로 기여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지 않습니까? 데니의 "독립론"도, 알렌이 처음으로 소개한 근대 의료도, 샌즈의 "중립화" 노력도, 헐버트의 개척적인 한국사 서술이나 독립 운동도 다 대외 접촉의 긍정적인 결실로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도 그들 중의 일부에 한국에 대한 호감이나 선심이 남달랐다는 것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본인의 사회와 시대를 뛰어넘을 수 없는데다가, 이들 "지한파"들이 속했던 제국주의 중심지 미국의 상류층, 중산층의 경우에는 혁명가나 아주 특별한 종교적 이상주의자가 되지 않고서는 그 당시 제국주의의 중심 담론인 서구 우월주의와 인종주의를 결코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혁명가인 마르크스라 해도 인도가 영국인에 의해서 "수천 년의 잠에 깨어났다"는 식의 속류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혁명가도 정말로 탈(脫)속세적인 이상주의자도 아니었던 이들 "지한파"는 더더욱 잔혹한 인종주의와 오리엔탈리즘, 서구/기독교 우월론에 그대로 매몰됐으며, 구미지역/기독교/"근대문명" 중심적인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한국에 이식시키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외국인노동자의 지옥이자 미국 투기꾼들의 천당이 된 오늘의 한국**

사실, 선심과 (서구화시키고 싶은 대상물로서의) 한국에 대한 호감이 강할수록 그들의 강도적인 세계관을 남의 땅에 심는 일에 더욱더 열을 올렸던 것이지요. 제국주의라는 마굴을 정신적으로 벗어나지 않고서는 소위 "선심"이란 – 옛날 속담대로 - 결국 지옥으로 가는 길을 포장해 주는 돌로 돌변되지 않습니까?

이들 "선심에 가득 찬 제국주의자"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 격이 되는 지배층이 아시아 노동자의 고혈을 잔혹하게 짜면서 미국의 투기 자본 앞에서 꼼짝 못하는 오늘날의 한국은, 바로 이와 같은 인종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지옥"이 됐다고 봐야 합니다. 한국 문화를 무시하면서 한국을 "제2의 미국"으로 만들려는 자들의 망상이 결국 현실로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끝없는 절망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념가 프렌시스 푸쿠야마가 퍼붓는 말과 달리, 역사는 아직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한파"이야기만 하면 안 될 듯합니다. 헐버트와 같은 "문명의 전도사"들이 한국을 사랑하면서도 "유일하게 진보할 수 있는 기독교 문명"에 그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식민화를 막는 데에 도와달라는 고종의 애원을 무시해버린 미국의 정책에 대해서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한민족을 배신하는 데 제일 앞장섰다 "고 소리 높여 비판한 헐버트와 같은 친한파 양심적 미국인들조차도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 당시의 대다수의 미국의 학자, 저널리스트들이 한국이라는 "퇴보적인 국가"(George Kennan, "Korea, a Degenerate State": <Outlook>, Oct. 7, 1905)가 "진보적인 일본"(William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1889)에 그 국권을 빼앗기는 것을 "당연하고 다행스러운 일"로 평가했습니다. 미국 사학의 거두로 알려져 있는 데네트 (Dennett, Tylor: 1883-1949)가 "한국이라는 자그마한 보트가 침몰되지 않으려면 일본에 의해서 반드시 견인돼야 한다"라는 – 지금이면 망언쯤으로 들리는 – 발언을 했을 때, 그는 단지 미국 학계와 외교계의 지배적인 분위기를 정확하게 표현했을 뿐입니다. 필리핀이나 중미 등지에서의 식민지 약탈 정책을 "문명의 전파"라는 미명으로 합리화했던 당대 미국의 "주류" 인사들은, "조선 폐정 (弊政)의 개혁"을 들먹였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더 쉬웠던 것입니다.

서구와 미국을 모범, 보호자, 시혜자로 생각했던 구한말의 많은 인물들에게 돌아온 것은, 정(情)이 아니라 제국주의적인 냉혹함과 모멸이었습니다. 그리고 구한말에 일각의 개화파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기 시작된 미국 중심적인 친제국주의적 세계관은, 결국 미군에 의한 한반도 남반부 점령 (1945년) 이후에 한국 지배층의 주된 담론으로서 공고화돼 한국을 오늘날의 아시아 노동자 "지옥"이자 오만한 미국 투기꾼들의 "천당"으로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친미주의의 승리는 어디까지는 그 다음의 이야기이며, 구한말로 국한시켜 이야기하자면 미국 방조 하의 일본의 한반도 침탈은 그 때의 민영환 등의 궁정 "신미"(信美)파를 극도로 절망시켰습니다. 믿었던 미국이 결국 배신한 것은, 민영환 자살의 하나의 요인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현재 미국을 "불변의 동반자"나 "혈맹"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그 당시에 고종을 비롯한 여러 "신미"(信美)파들이 궁극적으로 느꼈던 좌절과 배신감이 어느 정도 컸는지를 꼭 기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봄이 찾아 오는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도움이 되는 책**

Coleman, Craig, <American Images of Korea>, Hollym, 1997.

Chay Jongsuk, <Diplomacy of Assymetry: Korean-American relations to 191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0.

Choy Bong-youn, <Koreans in America>, Chicago, 1979.

Dennett, Tylor, <Americans in Eastern Asia>, NY, 1922.

William F. Sands, <Undiplomatic Memories>, Royal Asiatic Society, Korean Branch, 1990 (한국어 번역: <조선비망록>, 신복룡 옮김, 한말 외국인 기록 18, 집문당, 1999).

Robert R. Swartout, Jr., <Mandarins, Gunboats, and Power Politics: Owen Nickerson Denny and the International Rivalries in Korea>, Honolulu: The University Press of Hawaii, 1980.

김원모 완역,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출판부, 1991.

김현숙, "구한말 고문관 데니 ( O. N. Denny : 덕니 (德尼) ) 의 『 청한론 』 분석", - <이화사학연구>, 제23-24권, 1997, 113-141쪽.

<조선견문기> - 한말 외국인 기록 4, H.N.알렌 (지은이), 신복룡 (옮긴이), 집문당, 1999.

현광호, <대한제국의 대외정책>, 신서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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