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저번의 한국전쟁과 러일 전쟁에 이어 1941년 말경에 있었던 일본의 진주만 기습 작전을 음양오행으로 살펴봄으로써 전사(戰史) 사례를 끝마치고자 한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은 1941년 신사(辛巳)년의 일이다.
을목(乙木)인 일본에게 있어 신사(辛巳)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천간(天干)을 살피면 신금(辛金)이 을목을 극(剋)하는 형국이다. 또 지지(地支)로 보면 사화(巳火)가 있어 을목 일본이 신금에 대해 강한 저항을 보인다는 것이 된다. 정리하면 금 기운이 와서 나무를 베어버리려고 하니 나무가 불을 써서 그 금기(金氣)을 물리치는 상황이다.
결국 일본의 진주만 기습, 그리고 태평양 전쟁은 일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미국의 압력에 대한 격렬한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속에는 태평양의 주도권을 둘러싼 미일간의 투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해 7월 2일, 일본은 어전회의에서 자원 확보를 위해 남방진출을 결정했는바, 이 날의 음양오행은 다음과 같다.
연 신사(辛巳)
월 갑오(甲午)
일 신해(辛亥)
을목인 일본은 갑목(甲木)의 기운을 만나면 언제나 용기를 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날의 일진이 신해(辛亥)일이니 대단한 스트레스 속에서 결정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이에 대해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같은 달 26일에 보다 강경책으로 대응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 내의 모든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일본과의 무역을 중단한다. 이에 따라 당연히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 또한 금지된다. 당시 일본의 석유 수입 창구는 미국이었던 바, 루즈벨트의 결정은 일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으며, 이로써 미국과 영국, 중국, 네델란드로 이루어지는 일본에 대한 전략적 자원봉쇄, 이른바 ABCD 라인이 구체적으로 결정되었다. 이 날의 음양오행은 다음과 같다.
연 신사(辛巳)
월 을미(乙未)
일 을해(乙亥)
계수(癸水)의 나라인 미국이 을목의 날에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옳은 조치이지만, 그 해가 신금(辛金)이니 이는 미국 역시 장차 이 결정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때의 의미를 종합하면, 일본에게는 년의 신금이 월의 을목을 누르고 있으니 고난의 형국이고, 미국 또한 강경책에 따른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 이상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외교적 노력의 데드라인을 정하고, 전쟁 준비로 들어가게 된다.
전쟁준비 결정은 같은 해 9월 6일 어전회의에서 이루어졌으니 사실상 이로서 일본은 전쟁으로 돌입한 셈인데, 그 날의 음양오행은 다음과 같다.
연 신사(辛巳)
월 병신(丙申)
일 정사(丁巳)
저번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힘을 쓸 때는 주로 병화(丙火)의 기운이 올 때라고 했는데, 이번 역시 병신월임을 알 수 있으며, 결정 당일은 정사일이다. 정화(丁火)가 이 해의 신금을 제압하고 있으니 결국 전쟁으로 가는 출발점이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정유(丁酉)월이 시작되니 월의 정화가 연의 신금을 제압하는 형국이라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그에 앞서 8월 마지막 주에 일본은 미국과 비교해 자체의 전쟁수행 능력을 평가했다. 그 결과, 철강생산능력에서 20 대 1, 석유에서는 100 대 1 이상, 석탄은 10 대 1, 전투기 생산능력은 5 대 1, 선박건조에서 2 대 1, 노동력에서 5 대 1, 종합적인 능력 면에서 10 대 1 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미국을 이길 능력이 없다는 것이 명백했지만, 일본 군부는 초전에 기습을 통해 미 해군을 무력화시킬 경우 협상을 통해 미국 측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는 도박에 국가의 명운을 걸었던 것이다.
당초 일본 해군의 전략은 미국 해군력을 일본 근해로 끌어들여 격파한다는 손자 병법의 원리, 즉 이일대로(以逸待勞), 편안함으로써 지친 적을 격파하는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는 러일 전쟁 당시 멀리서 항해해 온 지친 러시아 발틱 함대를 쓰시마 부근에서 격파한 선례를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연합함대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야마모토 제독은 당시로서는 상식인 주력전함간의 결전이 아니라,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항공모함들로 기동부대를 편성하여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 일시에 미국 전함들을 격멸할 수 있다는 기발한 발상을 발전시켜가고 있었다.
야마모토 제독의 발상은 쓰시마 해전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여순항 기습공격을 확대재생산한 것이었다. 쓰시마 해전에 젊은 나이로 참전하여 두 손가락을 잃은 상처가 있던 야마모토 제독은 당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던 항공모함 부대로 그 먼 태평양을 가로질러 진주만을 기습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발상은 그러나 당초 일본 해군 본부로서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그렇지만, 이 작전 계획의 소문은 어느새 외부로 유포되어, 당시 일본 주재 페루 외교관이던 슈라이버 박사의 귀에 들어갔고 그는 친구인 미국 대사관의 에드워드 크로커 비서관에게 귀띔해 주었다.
크로커는 당연히 이 루머를 상관인 그루 대사에게 알렸고, 결국 미 해군에게로 전달되었다. 하지만 미 해군은 이에 대해 “현재까지 알려진 일본 해군의 배치 상황을 볼 때, 일본 해군이 가까운 미래에 진주만을 기습 공격할 것이라는 움직임이나 계획이 있다는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진주만 기습 구상은 1941년 4월에 가서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작전명도 '오퍼레이션 Z'라고 명명되었다. 여기서 ‘Z'는 도고가 러일 전쟁 당시 쓰시마에서 총공격을 명하면서 올렸던 깃발 신호를 본뜬 것이다.
이리하여 진주만 기습 작전은 9월 2일, 도쿄 인근의 해군대학에서 일본 해군의 모든 주요 인물들이 배석한 가운데 도상훈련이 실시되었다. 도상훈련 결과 미군의 정찰기에 의해 발견되면서 일본 해군기의 1/3이 격추되고 항공모함 2척 손실이라는 결과가 나왔지만 사임을 불사하는 야마모토의 강한 저항으로 이 계획은 기각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일주일 내로 진주만 기습 개시 일자는 작전참모들에 의해 일단 11월 16일로 잠정 결론이 났다. X 데이가 정해진 것이다. (보통 미국 측에서는 D 데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6척의 항공모함을 축으로 하는 일본의 기동부대는 11월 5일부터 준비에 들어갔던바, 이 날은 다음과 같다.
연 신사(辛巳)
월 무술(戊戌)
일 정사(丁巳)
드디어 정화(丁火)가 들어오는 날에 신금을 누르기 위해 출발한 것이다. 작전 개요는 다음과 같다. 먼저 기동부대가 하와이 북서쪽 200 마일 안쪽에 접근해서 급강하폭격기를 전투기의 에스코트 아래 발진시킨다. 다음으로 고도수평폭격기와 어뢰를 장착한 뇌격기 부대를 이어서 보낸다.
해군기들은 보안을 위해 인터컴을 떼어내고, 신호는 비행기 조종석 위에 설치된 신호등을 사용하기로 되었으며, 가장 고질적인 문제점이던 어뢰 문제가 이 때는 이미 해결되어 있었다.
어뢰 문제란 진주만은 수심이 얕아서 당시의 일반 어뢰로서는 해저에 부딪쳐서 가라앉을 뿐, 제대로 작동되질 않았는데, 일본 해군의 어뢰 전문가에 의해 비행기의 수평안전판을 본 뜬 나무 판을 장착함으로써 극적 해결이 되었다. 미국이 진주만 기습을 방심한 가장 큰 이유도 어뢰가 진주만에서는 효과를 보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일본의 기동부대가 출발하던 날 야마모토 제독은 장장 151쪽에 이르는 연합함대 극비작전명령 제 1호를 발동시켰고, 11월 8일에는 진주만 기습 일자를 12월 8일로 확정한 명령 제 2호를 발동시켰다. 12월 8일로 결정된 이유는 그 날이 만월이라 새벽의 어둠 속에서도 함재기를 발진하기가 쉽다는 점, 그리고 그 날이 하와이 현지 시각으로는 12월 7일, 일요일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기습 계획은 외교적 노력이 최후의 순간에라도 성공을 거둔다면 즉각 공격을 철회하고 당초 지정된 합류지점으로 돌아온다는 명령도 동시에 내려졌다.
11월 16일 당초 예정된 대로 진주만 기습에 동원될 모든 함선들이 일본 내해의 출구에 집결되었고, 이윽고 북태평양으로 나아갔다. 이리하여 12월 4일 일본 기동부대는 당초 목표한 집결점인 북위 42도, 동경 170도 지점에 무사히 도달하였고, 기간 중에는 아무런 무선 교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로서 이미 기습공격은 성공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일본 시각으로 12월 7일, 하와이 시각으로 12월 8일 아침에 일본 함재기들이 발진하여 저 유명한 진주만 기습이 개시된 것이다.
연 신사(辛巳)
월 기해(己亥)
일 기축(己丑)
진주만 기습 공격을 전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해는 신사(辛巳), 월은 정유(丁酉), 일은 기축(己丑)일이 된다.
신금이 을목을 압박하는 해에 전쟁의 배경 무대가 완성되었고, 이에 9월 정유월에 일본은 상황 타개를 결정하게 되며, 기축일에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연월일의 지지(地支)를 종합하면 사유축(巳,酉,丑) 금국(金局)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결국 금기가 강해져서 을목인 일본이 종내는 어려워지고 패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태평양 전쟁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군사학적인 견지에서 진주만 기습공격은 실로 일본적 정치(精緻)함과 공학적 기술이 최고도로 발휘된 작품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은 주로 병화(丙火)의 기운에 공격을 시작했는데, 이번은 정화(丁火)의 기운을 썼다는 점이다. 이는 명리학에서 볼 때, 상관(傷官)과 식신(食神)의 차이인데, 이는 준비가 충실한 경우, 역시 식신의 힘이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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