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5일 대통령 권한대행 고건 국무총리는 청와대 영빈관에서 그리스, 아프가니스탄, 쿠웨이트, 태국, 방글라데시 등 5개국의 신임 주한대사에게서 신임장을 받았다. 외교나 국방은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고유한 권역이기에, 한 국가를 대신하여 공식적인 외교를 하게 되는 대사는 외교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파견된 국가의 국가원수에게 신임장을 제정(presentation)해야만 한다. 대통령 탄핵안 가결로 노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된 상태라 권한대행인 고건 총리가 대신 신임장을 받은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외교는 국가와 국가간의 공식적인 관계와 협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두 국가간의 원만한 관계가 전제될 때만 매끄러운 외교가 이루어질 수 있기에 외교관의 파견도 두 국가간의 상호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파견되어 본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은 자국의 이익을 중재하는 막중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외교에서 사용되는 많은 용어들이 프랑스어이다. 그것은 프랑스가 역사적으로 유럽의 최강대국으로서 국제정치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근대외교의 기점으로 잡는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프랑스는 유럽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그 후 외교문서는 공식적으로 프랑스어로만 사용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외교용에는 그 잔재가 많이 남아있다.
대사가 파견될 때 접수국 국가원수에 신임장을 제정(提呈)한다고 했는데 이는 외교적 관례로 굳어진 절차이다. 보통 대사나 공사 등의 외교사절을 파견할 때 파견국 국가원수는 접수국 국가원수에게 외교관으로 임명했다는 것을 통고하고 그 외교관을 신용해주기 바란다는 의미로 일종의 신분증명서와 같은 신임장을 제출한다.
신임장 제정은 대사가 파견된 이후, 접수국에서의 첫번째 절차이지만 사실은 이에 앞서 미리 접수국에게 신임대사나 공사의 임명에 대해 동의를 구해야 한다. 이것을 일컬어 외교용어로 ‘아그레망(agrément)'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그레망은 특정 인물를 외교사절로 임명하기 전 상대국의 이의(異議) 유무를 사전에 조회하는 절차이다.
보통은 2주 정도 걸리지만 중요한 외교파트너일 경우에는 하루이틀만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일단 아그레망이 부여된 인물은 반드시 사절로서 접수해야 한다. 파견대상국에게 파견할 대사에 대해 동의를 구하는 것은 ’아그레망을 요청한다‘고 하고 상대국은 이에 대해 아그레망을 주거나 아니면 거부할 수 있다. 참고로 아그레망을 받은 사람을 ’페르소나 그라타(persona grata)‘라고 하고 아그레망을 받지못한 사람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라고 한다.
탄핵정국이라 대통령 권한대행이 외국사절인 신임대사들에게서 신임장을 받는 것도 외교적으로 그리 모양새가 좋지 않지만, 외교관으로서의 첫 시작부터 대통령이 아닌 대통령권한대행에게 신임장을 제출해야 되는 그들 당사자의 기분도 유쾌하지는 않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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