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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강대국' 러시아는 허상이었을까요?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10> 러시아관-허동현 생각

박노자 교수님,

쏜살같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 시간인 것 같습니다. 연재를 재개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강대국' 러시아는 허상이었을까요?**

박노자 교수님께서는 후발 제국주의 국가 러시아의 취약한 산업구조나 후진적 요소를 들어 러시아의 "강대함"이 허상이었다고 보시는군요. 물론 박 교수님이 지적하신 바와 같이 19세기 조선인들의 러시아 인식은 주로 중국과 일본에서 얻은 정보에 의존한 것이었기에 "이중․삼중으로 번역된" 일그러지고 왜곡된 이미지일 수도 있습니다. 당대 최고 지식인 윤치호나 외교통 민영환이 그린 "강대국" 러시아의 이미지도 피상적 관찰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강국 러시아는 결과적으로 러일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으니까요.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면 달리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보아 병적으로 무서워 한 공로증(恐露症, Russophobia)이 웅변하듯, 1860년대나 1880년대 아니 1900년대초까지도 러시아는 주변국들에게 강대국으로 비추어졌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말입니다. 당시 중국과 일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러시아의 위협을 우리만 무시했다면 이것도 피상적인 인식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러시아의 군사력은 중국이나 일본에게는 간과할 수 없는 실체적 위협이었습니다. 일례로 1895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청일전쟁으로 확보했다고 믿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내어 놓아야 했던 일본에게 러시아는 결코 만만한 상대는 결코 아니지 않았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러시아는 서구제국에 비해 취약한 산업구조와 생산력을 갖고 있었지만, 멀리는 유럽을 떨게 한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군대를 패퇴시켰으며, 가깝게는 "오만한 제국" 미국을 상대로 맞설 수 있었던 군사적 강국이자 "몰락한" 지금도 최대규모의 핵무기를 보유한 군사대국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결과를 놓고 볼 때 19세기와 20세기의 최강국은 영국과 미국이었지만, 당시 이들과 자웅을 겨룬 나라가 러시아였던 것도 사실이니 러시아의 "강대함"을 허상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무릎을 꿇었지만, 러시아의 패전은 당시 일어난 적군과 백군 사이에 벌어진 내전 때문이기도 하며, 일본 승리의 이면에는 전비를 빌려준 미국과 영국의 지원이 있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저는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보아 러시아에게 모든 것을 건 대한제국의 위정자들이 "정보적 한계" 때문에 망국의 길을 걸었다는 데 견해를 달리합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는 대한제국을 무너뜨렸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승리는 우리를 남북으로 갈라놓았습니다. 이처럼 러시아의 성쇠(盛衰)는 우리의 운명에 바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렇다면 미국과 자웅을 겨루던 소련의 붕괴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파장을 미칠까요? 제정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가로막은 군국주의 일본의 내부모순도 지금 세계를 호령하는 "오만한 제국" 미국보다 덜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미국이 러시아처럼 약체화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호랑이와의 사냥터 다툼에서 승리한 후 포효하는 사자와 같은 미국은 한 세기 전 러시아의 무릎을 꿇린 일본처럼 우리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크게 보아 한 세기 전 한반도를 놓고 중국과 러시아 같은 대륙세력과 일본․영국․미국 같은 해양세력이 벌인 패권 다툼에서, 승리의 여신은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지요. 2차대전 이후 러시아와 중국은 38도선 분할과 6․25전쟁 개입으로 한반도의 절반을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 두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념의 대결로 게임의 룰을 바꾼 냉전 시대의 쟁패에서도 승리자는 해양세력 쪽이었습니다. 과연 핵을 방패삼아 미국의 위협을 막아보려는 북한에게 러시아와 중국은 튼튼한 울타리일 수 있을까요?

해양과 대륙세력의 쟁패에서 대륙 세력의 승리 쪽에 판돈을 걸었던 우리 위정자들의 잘못된 선택은 결국 나라의 멸망을 막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러시아의 성쇠가 우리 운명의 바로미터라면, 우리들의 러시아 인식과 정책의 추이를 살펴보는 것도 오늘 우리의 생존전략을 가다듬는 데 있어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17세기 조선 사람들 눈에 비친 코쟁이의 나라 러시아는 이미 강대국**

러시아는 우리에게 생면부지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17세기에 들어와 청나라의 발상지로 신성시되어 출입을 금한 흑룡강 일대의 봉금(封禁) 지대에 러시아 사람들이 사금을 캐고 수달을 잡기 위해 몰려오면서 분쟁이 일어나자 총포로 무장한 러시아인들과 맞서기 위해 청나라는 호랑이 잡는 명포수들로 구성된 조선의 화승총 부대의 출병을 요구했지요. 이 나선정벌(羅禪征伐, 1654, 1658)이 조선인들이 러시아와 조우하게 된 최초의 사건이니 두 나라 사이의 만남의 역사는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턱없이 짧지만, 미국에 비하면 상당히 긴 연조를 갖고 있는 것이지요.

당시 조선인들이 러시아에 대해 갖고 있던 정보는 러시아를 칭하는 서로 다른 호칭인 아라사와 대비(大鼻)가 각기 다른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보잘 것 없었으며, 조선의 식자층들은 문화의 중국화 정도를 기준으로 문명과 야만을 나누는 화이사상이란 눈을 통해 러시아를 인식함으로써 금수와 야만의 나라로 깎아내릴 만큼 비합리적이었습니다. 실학자 홍대용(洪大容, 1731~1783)조차 <담헌연기(湛軒燕記)>(1765)에서 "대비달자(大鼻㺚子)는 아라사(俄羅斯)이며, 몽고의 별종이다. 그들은 모두 코가 크며 흉악하고 사납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코쟁이(대비달자)라 부른다"고 해 러시아사람들을 코쟁이로 비하할 정도로 당시 조선사람들의 러시아 인식은 피상적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1689년 청ㆍ러 양국 사이에 네르친스크(Nerchinsk)조약이 체결된 이후 북경에서 조선인과 러시아인이 조우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러시아 사절에 대한 청국의 후대를 보고 러시아의 강대함을 인정한 것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점은 1686년 연행사로 청국에 다녀온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아라사는 북해(北海)와 접하고 있는 대국인데, 대비와 가까운 지역으로서 대비가 두려워하여 복종하는 나라입니다. 예부시랑이 나가서 접대하고 병부시랑이 북해까지 나아가 맞아들이며 몽고의 다섯 왕들이 말을 번갈아 타면서 들여보내는데, 그러한 점으로 보아 아마도 강대국인 듯 합니다"라고 한 데서 잘 나타납니다.

***"러시아에 대한 정보를 중국과 일본에 의존한 것도 사실입니다"**

러시아가 우리에게 손에 잡히는 실체로서 다가선 것은 1860년 북경조약의 결과로 중국이 연해주를 러시아에게 넘겨줌으로써 우리와 국경을 접하게 된 이후이지요. 거시적인 눈으로 볼 때 북경조약이 맺어진 1860년은 우리 역사의 전개에 큰 획을 그은 해였습니다. 왜냐하면 러시아와의 접경은 우리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균형을 깨뜨린 것으로 이 때부터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열강의 쟁패가 시작되었으니 말입니다. 러시아가 한반도내에서 부동항을 얻는다면 이것은 해양세력인 영국과 일본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었으며, 대륙세력 중국에게도 울타리가 무너져 내리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두려움을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러시아는 점차 위협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1864년과 1865년에는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통상을 요구하였으며, 1866년에는 영흥만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해 오는 등 러시아의 위협이 가시화 되자 조선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경계의식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흥선 대원군(李昰應, 1820~1898) 치하의 조선에서 러시아에 대한 경계론을 제일 먼저 주창한 세력은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러시아에 대해 경계심을 갖게 된 남종삼(南鍾三, 1817~1866)등 천주교 세력이었지요. 1866년 남종삼은 국청(鞫聽)에서 "아라사는 천하의 1/9을 차지하고 있고, [춘추전국시대에] 강력했던 진나라가 [이웃 나라를] 병탄하는 것과 같은 기세를 가지고 있어 비단 조선에 근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다른 나라라도 장차 차례로 병탄할 것"이며 "아라사가 처음에는 교역으로 말하지만 만약 그것을 허락한다면 장차 침범하는 근심이 있을 것"이라고 해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의식을 노정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연대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자는 이들의 러시아 대비책은 대원군에 의해 묵살될 만큼 당시 러시아에 대한 경계의식은 크지 않았지요. 병적으로 러시아를 두려워하는 공로증적 러시아 경계론은 1880년대 청․일 두 나라를 통해 본격적으로 조선 사람들의 뇌리에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860년 연해주를 할양하면서 러시아를 경계하기 시작했던 중국은 러시아와의 국경분쟁이 일어나자 그 공로증이 더욱더 심해졌지요. 두 나라의 국경분쟁은 1871년에 러시아가 지금의 신장성인 중국령 터키스탄에서 일어난 회교도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중국 진출의 관문인 이리(伊犁: 지금의 중국 신장성 서북부 텐산산맥 중부에 있는 분지) 계곡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일어났습니다. 더구나 이 국경분쟁을 이용해 일본은 대만을 침략하고 무력으로 조선을 개방시켰는가 하면 류큐(琉球: 현재의 오키나와)왕국까지 병합한데다, 또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일본의 진출을 이용해 이리 지역에 대한 공격의 기세를 드높이자 중국으로서는 일본과 러시아를 모두 견제해야 했지요. 특히 중국은 일본보다는 러시아가 더 큰 위협으로 간주해 전략적으로 자국의 안보에 매우 중요한 조선이 러시아 세력권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1879년이래 조선 조정에 군비 확충과 서구 국가들에 대한 문호 개방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습니다.

중국의 공로증(恐露症)은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에 잘 나타납니다. 김홍집이 동경주재 청국 공사관의 참찬관 황준헌과 필담한 내용이 담긴 이 책은 러시아를 영토확장욕에 가득찬 야만국으로 묘사하는 공로증적 방아론(防俄論)을 제기한 바 있었습니다.

"지구 위에 더할 수 없이 큰 나라가 있으니 아라사라 한다. 그 둘레의 넓음이 3대주[유럽․아세아주, 그리고 북아메리카주(?). 북아메리카주에 있던 러시아령 알래스카는 1867년에 미국에 매각되었다]에 걸쳐 있고 육군 정병이 1백여만 명, 해군의 큰 함정이 200여 척이다. 다만 나라가 북쪽에 위치하여 기후가 춥고 땅이 메마르기 때문에 재빨리 그 영토를 넓혀서 사직(社稷)을 이롭게 할 것을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선세(先世)인 피득왕(彼得王, 표트르 1세, pyotr Ⅰ: 재위 1689~1725] 이래 새로 강토를 개척하여 이미 [전보다] 십 배가 넘었으며, 지금의 왕(알렉산드르 2세, Aleksandr Ⅱ: 재위 1881~1894)에 이르러서는 다시 사해(四海)를 차지하고 팔방을 병합할 마음을 가지고 중앙아시아에서 위글 여러 부족의 땅을 거의 잠식하였다. 천하가 다 그 뜻이 적지 않음을 알고 이따금 서로 합종하여 대항하였다 …지금 서양의 여러 대국들, 예컨대 독일․영국․오스트리아․이탈리아․프랑스가 모두 모두 호시탐탐하여 단연코 한치의 땅도 남에게 넘겨주려 하지 않는다. 러시아가 서방 공략을 할 수 없게 되자, 번연히 계략을 바꾸어, 동쪽 강토를 넓히려 하였다. 십여 년 이래로 화태(樺太,사할린)를 일본에서 얻고, 흑룡강의 동쪽을 중국에서 얻었으며, 도문강 입구에 주둔하고 있다. 높은 집 지붕 위에서 동이의 물을 쏟아 붓는 듯한 형세로 그 경영하여 여력을 남기지 않는 것은 아세아에서 뜻을 얻으려는 것이다. 조선이라는 땅은 실로 아시아의 요충에 놓여 있어서 반드시 다투어야 할 요해처(要害處)가 되고 있다. 조선이 위태로우면 중국과 일본의 형세도 날로 급해질 것이며, 러시아가 영토를 공략하려 한다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아! 아라사가 이리와 호랑이 같은 진나라처럼 정벌에 힘써온 지 3백여년. 그 처음 [대상]은 구라파이었고 이어서 중앙아시아였으며, 오늘에 와서는 다시 동아시아로 옮겨져 마침 조선이 그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오늘날 급무를 계책할 때 러시아를 막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을 것이다."

러시아를 두려워한 것은 중국만이 아니었지요. 시베리아를 관통하는 철도가 없었던 러시아는, 새로 얻은 연해주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고 이를 발판으로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부동항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1875년 일본은 러시아의 위협에 굴복해 개발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할린을 넘겨주고 불모지나 다름없는 쿠릴열도를 받은 뒤로 러시아에 대해 거의 병적인 공포심, 즉 공로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1876년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러시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조선에 권고했습니다. 제1차 수신사 김기수(金綺秀, 1832~1894)는 1876년 일본 체류시 만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로부터 "러시아(魯西亞)가 동병(動兵)할 징조가 있다는 것은 내가 강화도에서 이미 말한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저 러시아의 땅에 갈 때마다 그들이 날마다 병기를 만들고 흑룡도(黑龍島)에 군량을 많이 저장하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장차 무엇을 할 것인지, 귀국에서는 마땅히 미리 대비하여 기계를 수선하고 병졸을 훈련시켜 방어의 계책을 강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라고 해 러시아에 대한 방비책을 세우라는 권고를 들었습니다. 1880년에 김홍집도 귀국 후 고종이 "그 나라에서 과연 러시아를 몹시 두려워하던가?"라고 묻자 이에 답해 "온 나라가 그 문제를 절박한 걱정거리로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라고 해 일본이 병적인 공로증 증세를 보이고 있음을 보고한 바 있었지요. 당시 일본인들은 정부관리나 재야인사를 막론하고 조선인들에게 공로의식을 전파함으로써 조선을 자국의 영향권 하에 두려하였지요. 그 때 일본인들이 공로증 이식의 매개수단으로 활용한 것이 서구제국 특히 러시아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조ㆍ중ㆍ일 삼국의 연대, 즉 아시아연대론이지 않습니까?

***공로증(恐露症) 감염과 방아론(防俄論)의 대두**

1880년대 초반 일본과 청국 두 나라가 전파시킨 공로증은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매개로 일반인들에게로까지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신문에 보이는 공로의식 관계기사 두 개가 이를 입증합니다. <한성순보>는 <상해신보>와 일본신문을 각각 인용해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황제가 쉴 새 없이 과도한 사치와 국토의 확장에 전력하여 4대주의 땅을 죄다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하므로, 동맹국에 대해 겉으로는 우호의 태도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음흉한 마음을 품었으니 터키가 싸움을 벌리고 아프가니스탄이 영국을 배반한 예가 다 러시아의 간계에서 나온 것이요, 그 국내에는 날마다 군사를 훈련하여 장차 무력으로써 온 천하에 과시하려 하였다. (2호, 1883년 11월 10일자)"

"지금 아국(俄國)의 강역은 구라파와 아시아 양 대륙과 연접되어 있고 그들의 강역은 전세계 육지의 7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니 지구에서 고금에 없이 큰 나라이다. 그러나 옛날 이 나라의 강역은 거의 몽고의 관할이었는데, 그후 몽고의 국력이 점차 쇠미하여졌기 때문에 서기 1462년에 모스크바의 영주 이반(Ivan)이란 자가 휴양하면서 한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강역은 39만 4천 평방마일에 불과했으니, 지금의 모스크바가 그곳이다. 이후부터 전국이 몽고의 관할로부터 벗어나 가까운 이웃나라를 잠식하였다. 1505년에는 러시아의 강역이 79만 2천 평방마일로 증가하였고, 1584년에는 2백67만6천 평방마일로 확장되었다. 그 후에 내란이 계속되어 이반의 계통이 끊어졌으나 인근 국가를 잠식하는 계책은 그만두지 않았다. 1614년 미하일 로마노프(Mikhail Romanov)란 자가 군주가 되었는데, 이 때에 러시아의 강역은 실로 5백42만7천여 평방마일이나 되었으니, 이는 미하일 로마노프 지금 황제의 비조(鼻祖)이다. 이후부터 대대로 왕위를 이은 자가 강역을 개척하기에 전력하였고, 피득(피요트르)황제는 자손에게 동쪽 지경(地境)을 전적으로 개척하라는 유언을 했기 때문에 1689년에는 러시아의 강역이 5백63만 평방마일이 되고, 1725년에는 5백84만1천 평방마일, 1763년에는 6백81만6천 평방마일, 1825년에는 7백5만 평방마일, 1837년에는 7백50만 평방마일, 1855년에는 7백82만1천 평방마일, 1867년에는 은(銀) 7백20만불을 미국으로부터 받고 알래스카 39만4천 평방마일을 팔았다. 그래도 지금의 러시아 강역은 실로 8백38만7천8백16 평방마일이나 된다. 대저 러시아 사람들이 구라파와 아시아 양 대륙에서 강역을 개척하는데 대대로 내려오면서 있는 힘을 다했다. 그래서 스웨덴ㆍ독일ㆍ오스트리아ㆍ터키 등의 나라는 러시아를 엄히 경비하고, 중국ㆍ일본 및 波斯(페르시아) 등은 북방 경계에 전력을 기울여 그들의 잠식을 면할 수 있었다. 이제 조선도 러시아와 접경하고 있으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이상은 일본의 근신(近信)이다.(11호, 1884년 2월 7일자)"

갑신정변으로 인해 발행이 중지된 <한성순보>에 이어 1886년 1월부터 1888년 7월까지 주간으로 발간된 <한성주보>의 경우에도 청국의 공로의식을 <신보(申報)>와 같은 중국신문을 전재해 보도함으로써 일반에 유포시켰지요.

"러시아는 여러 나라의 꺼리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그 꺼림으로 인하여 질투심을 일으켜 합종연횡을 하니 마치 전국시대에 제후들이 연합하여 진나라를 배척하던 국세(局勢)와 같다. …함풍(咸豊) 연간에 두 차례에 걸쳐 땅을 요구하여 흑룡강 동쪽 이르쿠츠크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우루무치 서쪽 이리ㆍ쿠커ㆍ아커수의 여러 지역을 모두 점거하였다.…또 동쪽으로는 일본 사할린 지방을 빼앗아 쿠릴열도의 18도와 바꿨으며, 다시 동해를 건너 고려의 동쪽으로 와서 탄광을 개발하고 석탄과 철을 채굴하며 근래에는 또 흑룡강 경계에 병사를 주둔시켜 철도를 부설하여 중국에까지 통하도록 하려고 하고 있다. (32호, 1886년 10월 11일자)"

"아무리 맹서로 요구하고 혼인으로 신중하게 하더라도 일단 집어삼킬 기회가 오면 호랑이와 이리 같은 게 러시아인들의 심성인데 어떻게 살찐 고기를 택하여 뜯어먹지 않을 것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는 내란이 끊이지 않아 수시로 난당(亂黨)이 일어나 그 황제를 자살(刺殺)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군사가 비록 강하기는 하지만 국고가 이미 고갈된 상태이다. 비록 철도의 가설을 권한 말이 있기는 했지만 이는 공언일 뿐 과연 그 일이 성취될는지는 기필할 수 없다. 아! 이 말은 참으로 잠시 동안의 편안을 훔치려는 자들의 말이다.(67호, 1987년 6월 13일자)"

청ㆍ일 두 나라가 자국의 이해를 위해 조선에 전염시키려 공러의식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이 점은 수신사 김홍집이 복명한 후 <조선책략>에 제기된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중신 회의에서 이최응(李最應, 1815~1882)이 한 말에 잘 나타납니다.

"신이 그 책을 보았는데 그가 여러 조항으로 분석하고 변론한 것이 우리의 심산(心算)과 부합되니 한 번 보고 묶어서 시렁 높이 얹어둘 수는 없습니다. 대체로 러시아는 먼 북쪽에 있고 성질이 또 추운 것을 싫어하여 매번 남쪽을 향해 나오려고 합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이득을 보려는데 지나지 않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욕심내는 것은 땅과 백성에 있으며 우리나라의 백두산 북쪽은 바로 러시아의 국경입니다. 비록 큰 바다를 사이에 둔 먼 곳이라도 한 대의 돛배로 순풍을 타고 오히려 왕래할 수 있는데 하물며 두만강을 두고 두 나라의 경계가 서로 접한다면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보통 때에도 숨쉬는 소리까지 서로 통할 만한데 얼음이 얼어붙으면 비록 걸어서라도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러시아 사람들은 병선 16척을 집결시켰는데 배마다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추위가 지나가게 되면 그 형세는 틀림없이 남쪽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 의도를 헤아릴 수 없으니 어찌 대단히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은 1876년이래 1880년대 초반까지 일본과 청국이 조선을 상대로 전개한 공로증 주입 노력이 주효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러한 공로증의 감염이 방아론으로까지 확대되었음은 같은 날 고종과 이최응이 나눈 다음과 같은 문답에 잘 보입니다.

"지시하기를, '일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러시아를 두려워하여 조선은 방비하라고 요구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희나라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사실은 저희나라를 위한 것이고 조선을 위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선이 만일 방비하지 않으면 저희 나라가 반드시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우리 나라야 어찌 러시아 사람들의 뜻은 일본에 있다고 핑계대면서 심상하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지금 성곽과 무기, 군사와 군량은 옛날만 못하여 백에 하나도 믿을 것이 없습니다. 마침내 비록 무사하게 되더라도 당장의 방비를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방비대책은 어떠한가?'라고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방비대책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가 어찌 강구할 것이 없겠습니까. 청나라 사람의 책에서 논한 것이 이처럼 완벽하고 이미 다른 나라에 준 것은 충분한 소견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 중 믿을 만한 것은 믿고 채용해야 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당시 공로증에 감염된 조선정부는 백춘배(白春培)를 아라사 채탐사(採探使)로 임명해 블라디보스톡에 보내 러시아의 침략 가능성을 조사해 보고하게 했으며, 그는 러시아가 남하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조선을 향한 러시아의 팽창 방향과 부동항의 필요성" 등 10여 가지를 제시한 바 있었습니다. 특히 조사시찰단을 따라 일본에 유학했던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은 귀국 직후인 1883년 고종에게 올린 <언사소(言事疏)>와 1885년에 쓴 <중립론>에서 다음과 같이 공로증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현재 유독 우리 국가의 영토는 바로 아주의 인후에 해당하고 인근에 막강한 러시아와 접경하였으니, 천하가 필시 쟁패를 겨루는 지역인 것입니다. 또 러시아인은 사납기가 범이나 이리와 같아서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는 지 벌써 여러 해 되었습니다. 러시아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단지 구실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 오호! 위태롭습니다. 무릇 국경 사이에 걸린 이해관계에 있어서는 도리를 알고 서로 친애하는 국가라도 굽히지 않고 주장하는 바가 있을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러시아인과 같이 포악함에야. 세력이 서로 균등한 나라라야 싸워서 판가름 낼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러시아와 같이 강대함에야. 서로 조약을 체결한 나라라도 힐변(詰辯)이 있을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러시아인과 같이 틈만 노리고 있음에야."

"대저 러시아라는 나라는 만여리에 달하는 거칠고 추운 땅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백만명의 정병으로 날마다 그 영토를 넓히는데 힘쓰고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작은 나라들을 회유하여 보호국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그 독립권을 보장하기도 했지만, 그 혈맹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 토지를 모두 군현화하고 그 인민들을 노예화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병탄하고자 하는 것은 본래 인간세상의 다반사다. 그런데 러시아는 특히 무도하기 때문에 천하가 탐욕스럽고 포악한 나라로 지목하고 있는데도, 그 호랑이와 이리 같은 마음은 더욱 왕성해져 그칠 줄 몰랐다.…러시아인이 강대한 인접국 [영국과 프랑스 등]과 반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마침내 그 군대를 동쪽으로 옮겨 대병력을 블라디보스톡에 주둔시키고 시베리아 철로를 가설하기에 이르렀다. 그 비용이 매우 거대하여 얻는 것이 잃은 것을 보충하지 못하니, 그 노리는 바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도 알 만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위태로움은 그 절박함이 얼마나 심한 것인가."

나아가 유길준은 이러한 공러의식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중립국이 되는 것이 실로 러시아를 막는 큰 계기가 될 것이며, 또한 아시아 강대국들의 서로 보존하는 정략도 될 것이다"라고 해 방아를 위한 조선의 중립화 방안을 구상한 바 있었습니다.

***인아책(引俄策)의 수립 : 러시아, 조선 독립의 옹호자**

일본과 청국 두 나라로부터 이입된 공로의식은 일반화된 것은 아니었지요. 왜냐하면 1880년대초 러시아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균세책을 선전하기 위해 고종은 ꡔ조선책략ꡕ을 위정척사파 유생들에게 유포시켜 공러의식을 붇돋우려 했지만, 이들은 17세기이래 러시아와 별다른 마찰 없이 지낸 전례를 거론하며 러시아의 잠재적 침략 가능성을 일소에 부쳤다. 일례로 이만손(李晩孫)이 소두로 올린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는 러시아의 남침가능성을 부인하면서 <조선책략>에서 제시된 방아론을 비판하였습니다.

"러시아로 말하면 우리와는 본래 아무런 혐의도 없습니다. 공연히 남의 이간술에 빠져 우리의 권위를 손상시키면서 먼 나라와 사귀고 이웃 나라를 건드려 전도된 행동을 하다가 헛소문이 먼저 퍼져 이것을 구실로 삼아 가지고 병란(兵亂)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황준헌의 말과 같이 설사 러시아가 정말 우리를 집어삼킬 만한 역량이 있고 우리를 침략할 뜻이 있다고 한들 장차 만리 밖의 구원을 앉아서 기다리면서 턱밑에 있는 오랑캐 무리들과 싸우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이해 관계가 뚜렷한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서 무엇 때문에 백 가지 해가 있고 한 가지의 이익도 없는 이런 일을 굳이 함으로써 러시아 오랑캐에게는 마음먹은 적도 없는 생각을 가지게 하고 미국과는 일없을 일을 일으킴으로써 원수를 오게 하고 병란을 초래하겠습니까?"

고종을 위시한 조선정부도 직접적인 정보수집을 통해 러시아의 남침 가능성에 대해 검증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했지요. 일본이 공로증 전파를 위해 이용한 아시아 연대론의 논리와 황준헌이 ꡔ조선책략ꡕ에서 제기한 균세론․자강론의 논리는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시아 연대론이나 ꡔ조선책략ꡕ이 제기한 균세론의 배후에는 일본이나 청국이 조선 개화의 옹호자 혹은 인도자라는 의식이 깔려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에 개방을 촉구하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권유한 이면에도 정치․경제적으로 일본이나 청국의 영향력을 증대하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이는 역으로 청․일 양국에 의해 침략세력이라는 이미지로 소개되었던 러시아도 청․일 양국이 조선에 대한 실질적 위협세력이나 참략자로 판명났을 때에는 이들을 견제해 세력균형을 이룸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조선 독립의 옹호자로 그 역할이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실제로 조선정부는 일본과 청국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유입된 러시아 위협론에 맹목되지 않았으며,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조선을 둘러싼 열강간의 세력균형을 이루는 데 러시아를 동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계속 타진해 왔던 것이지요.
실제로 당시 조선인들은 러시아의 위협이 과장된 것임을 보여주는 정보도 접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1884년 6월 23일자 ꡔ한성순보ꡕ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수도에서 혼춘(琿春)까지는 서쪽으로든 동쪽으로든 수만리의 거리며 중간에 동부시베리아가 황막하여 끝이 없으니 서쪽으로부터 군사를 움직이려고 하면 결코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고 동부에는 비록 병사가 있으나 충분하지 못하니 러시아가 비록 침식하고 싶은 뜻이 있더라도 다른 날을 기다릴 것이라 결코 지금 싸움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가 비록 고려를 넘어다본다 하여도 동부의 힘으로는 병탄하기에 부족하고 서부의 병사는 또 실어 나르기가 쉽지 아니하니 실지는 중국의 길림․흑룡강 두 성을 도모하려는 것처럼 뜻은 있어도 이루지 못하는 것과 한가지다. 더욱이 고려는 현재 미국과 이미 통상을 하였고 또 영국과도 조약을 맺었으며 그리고 중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일본의 후원이 있으니 러시아가 어찌 감히 사지(私志)를 드러내겠는가."

오히려 러시아는 조선을 둘러싼 열강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는 데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김옥균(金玉均, 1851~1894)ㆍ박영효(朴泳孝, 1861~1939) 등 개화파 인사와 고종은 러시아와의 수교를 위해 독자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지요. 즉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부차적 제국주의(secondary imperialism) 세력으로서 청국의 간섭이 점점 노골화하자 청국이 가장 두려워한다고 본 러시아와 수교함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옹호해 줄 세력으로 불러들이려 했습니다. 즉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절로 일본에 갔을 때 주일 러시아공사 로센(Romananovih R. Rosen)과 만나 수교를 위한 교섭을 전개했지요. 특히 김옥균은 1884년초에도 주일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Alexandre P. Davydow)에게 조약체결 의사를 표명한 바 있으며, 고종도 김관선을 노브키예브스코(Novokievskoe)로 보내 러시아 관리에게 수교의사를 전달한 바 있었습니다. 마침내 서울로 들어 온 천진주재 러시아 영사 웨베르(Carl Waeber)는 1884년 전격적으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지요. 갑신정변 실패이후 청국의 간섭정책이 더욱 심해지자 고종은 이른바 조로밀약(朝露密約)을 추진하는 등 인아책을 적극 구사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면 당시 인아책을 구사했던 인아론자들은 누구였을까요? 고종의 측근이었던 민영익(閔泳翊, 1860~1914)과 한규직(韓圭稷, ?~1884)이 바로 그들이지요. 민영익은 보빙사(報聘使)로 미국과 유럽을 다녀온 후 고종에 복명하면서 "유럽에서는 특히 러시아가 강대하며 유럽 여러 나라는 모두 러시아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조만간 러시아가 아시아로 침략의 손을 뻗쳐 조선에도 그 영향이 미칠 것이니 우리나라 입국의 근본정책은 일본이나 청국만 상대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러시아의 보호를 받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다"고 고종에게 헌책한 바 있었습니다. 민씨 척족정권의 중요인물 중 하나이자 경흥부사를 역임한 한규직도 "일본은 청과 러시아를 의식하여 감히 조선을 병탄하지 못하지만 늘 침략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청은 다른 나라가 조선을 점령해도 힘이 부족하여 조선을 보호하지 못할 것이지만 조․일간의 조약에 문제가 있으면 '감국제권(監國制權)'하려고 할 것이며, 러시아는 세계 최강국으로 세계가 두려워 하지만 조선과 더불어 도울 수 있다"고 보아 인아론을 제기하였지요.

1880년대 이전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발칸반도 경략에 몰두하였으며, 새로 개척한 극동지역 쪽으로의 육로 교통망도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적극적으로 기도하지 않았던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러시아가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치 무대에서 눈에 띠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결과 조선의 대내외 정치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 간섭이 가해진 후부터이며, 조선을 둘러싼 각축전에 능동적으로 개입해 괄목할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굴복시킨 다음부터의 일이었습니다. 일본 등 주변국을 통해 감염․이입된 공로증적 러시아 인식은 한․러관계의 진전과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역관계 변화에 따라 러시아를 조선 독립의 옹호자로 이용하려는 인아책이 수립․추진되기에 이르렀던 것이지요. 따라서 저는 윤치호나 민영환 같은 사람들의 러시아 인식을 피상적인 것이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힘의 균형이 도모된 시기이기도 하지만 렌센(G. A. Lensen)의 말처럼 "책략의 균형"이 획책된 시대로 볼 수 있지도 않습니까?

***오늘의 시점에서 바라 본 한ㆍ러관계**

개화기이래 우리들의 생존전략은 크게 미국과 영국 축에 서느냐, 아니면 중국과 러시아편을 드느냐 둘로 압축됩니다. 어떤 전략을 취하느냐에 따라 러시아는 침략자나 독립의 옹호자라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비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로증에 감염된 유길준, 러시아의 경제침략을 반대한 독립협회 관계자, 소련을 사회혁명을 책동하는 위협세력으로 인식한 식민지시대 민족주의 우파와 남한의 위정자들은 러시아를 침략세력으로 본 반면, 인아책을 구사한 고종과 민씨 척족세력, 아관파천을 추진한 친러파, 마르크스ㆍ레닌주의의 세계관을 받아들인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세력과 북한의 집권세력들에게 러시아는 둘도 없는 우방이었습니다. 냉전 해체 이후 러시아는 남북한 모두에게 적국도 될 수 있고 우방도 될 수 있기에 러시아를 보는 남북한 사람들의 인식은 아직 불확정적인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냉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어떤 것이 옳다고 믿느냐는 선악을 기준으로 적과 동지를 나누었다면, 개화기나 요즘과 같이 힘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어느 편을 들어야 득이 되는지를 살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도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조선의 위정자들은 도덕률이 지배하던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세상에서 무난한 보호자였던 중국과 큰 탈없이 지내오던 일본이 침략자로 돌변하자, 이들의 야욕을 막기 위해 생면부지의 미국이 새로운 보호자가 되 주길 간절히 바랬지요. 계속된 구애가 짝사랑으로 끝나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어 버리자, 중국과 일본이 병적으로 무서워하는 러시아에게 추파를 던졌지요. 그러나 러시아도 일본의 팽창을 막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 했던 일본의 야심을 독일과 프랑스와 같은 대륙세력과 힘을 합친 삼국간섭으로 꺾을 수 있었지만, 결국 러시아는 영국과 미국이 노골적으로 일본 편을 든 러일전쟁에 패배해 동아시아 진출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영국과 미국은 자신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해양세력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키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한 세기 전 이해를 놓고 열강들이 편을 가르던 시절, 우리 선조는 자신의 힘으로 생존하기보다 남의 힘을 빌려 살아 남으려 했습니다. 다시 돌아 온 열강 쟁패의 시대에 과거와 다른 점은 우리는 백년 전 우리 선조들이 그토록 원했던 해양세력 편에 서있으며, 우리의 다른 반쪽은 여전히 대륙세력에 생존을 위한 판돈을 걸고 있다는 것이지요. 러ㆍ프ㆍ독 삼국간섭으로 한반도 지배를 10년 늦추었던 제정러시아와 같은 힘을 오늘의 러시아가 발휘할 수 있을까요?

봄기운을 온 몸으로 느끼는 수원에서

허동현 드림

***더 읽을 만한 책**

박노자. 「19세기후반 한인의 노령 이민의 초기 단계」, 『한인의 해외이주와 그 정착과정』, 전주대 역사문화연구소ㆍ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주최 국제학술회의 발표요지, 1998.
송병기 편역. 『개방과 예속』.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0.
송종환. 『러시아의 조선침략사』. 범우사, 1990.
씸비르쩨바 따찌아나. 「1869~1870년간에 진행된 러시아와 조선간의 경흥협상과 그 역사적 의의」.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2, 2002.
원재연. 「19세기 조선의 러시아 인식과 문호개방론」. 『한국문화』23, 1999.
최문형. 『제국주의 시대의 列强과 韓國』. 민음사, 1990.
최문형.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2001.
한국사연구협의회 편, 『한로관계100년사』, 한국사연구협의회, 1984.
허동현, 「1880년대 한국인들의 러시아 인식 양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2, 2002
George Alexander Lensen, 『Balance of Intrigue : International Rivalry in Korea & Manchuria, 1884∼1899』. Tallahassee : University Press of Florida, 1982.
V. Tikhonov(박노자).「The Experience of Importing and Translating a Semantic System: 'Civilization', 'West', and 'Russia' in the English and Korean Editions of The Independent」.『한국민족운동사연구』 3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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