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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 虛舟와 가장 비싼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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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 虛舟와 가장 비싼 술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 - 빠뜨렸던 이야기들 <57>

***8. 착한 사람 虛舟와 가장 비싼 술**

1967년 니만 언론 펠로쉽을 얻어 미국의 하바드대학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워싱턴DC를 방문한 방일영(方一榮) 조선일보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와 여비는 걱정말고 워싱턴으로 와서 함께 나이아가라폭포를 구경가잔다. 듀퐁서클에 있는 고급호텔에서 하루밤을 지내고 방 사장, 그의 장남 상훈(相勳· 지금의 조선일보 사장)씨와 함께 5,6명이 주미특파원으로 있는 김윤환(金潤煥)씨의 인솔로 우선 버펄로로 날았다. 거기서 좌석이 많은 차를 세내어 나이아가라로 향한것이다.

운전은 역시 그래도 미국에 익숙해진 김 특파원. 아마 두시간쯤이면 목적지에 도착했을 것같은 짐작이었다. 그런데 시원하게 뚫린 하이웨이를 세시간 이상 달려도 보이는 게 없다. 할수없이 주유소에서 물어보는 수밖에. 그런데, 어렵소, 주유소 가는 데도 20,30분은 걸렸을것이다. 주유소 주인은 우리가 지금 뉴욕시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버펄로서 뉴욕으로의 시원시원한 고속도로였다. 유턴하는 데도 또다시 10,20분을 뉴욕으로 더 달려야 했다.

그래서 나이아가라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길에서 아마 5,6시간을 보낸 것같다. 일행이 짜증이 난듯한 표정이니 김 특파원이 "로드사인은 나에게만 맡기지 말고 함께 보는 게 아니냐"고 볼맨 소리다. 맞다. 표지판은 함께 살펴야 하는 것이다. 나이아가라시의 중국음식점에 들어가 늦은 저녁을 포식했다. 방 사장의 음식주문이 엄청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

허주 김윤환(虛舟 金潤煥)씨와 나는 비슷한 데가 많다. 나이도, 조선일보의 경력도, 10대 국회에서부터의 정치입문도, 정치의 로드맵도 거의 비슷하다. 다만 허주는 자타가 공인하는 정계의 실세였고, 나는 가끔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으나 실은 둘러리로 시작해서 둘러리로 끝난 허세였다는 점이 다르다.

물론 허주가 정치가로 유능한 점을 인정해야 하겠다. 그러나 그밖의 운이 있기도 했다. 선친이 국회의원을 지낸 명문가 출신이고, 천하에 이름을 떨친 경북고 출신인데다가 더하여 노태우· 정호용씨등 정권의 실세와 동기동창이 아닌가. 서양에서는 은스푼을 물고 태어났다고 표현한다든가.

조선일보 때부터 친했다.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그에게 호감이 갔다. 주일특파원을 했으니 처음엔 애칭이 일본말로'긴상'이었다. 편집국의 동년배들은 대부분 그렇게 불렀다. 그러다 국회에 진출하고부터는 그런 호칭을 좋아하지 않는 것같아 그의 아호대로 허주로 불러주었다. 빈 배. 참으로 운치있는 아호다. 합격점이다. 내가 꼭 필요할 때 쓰는 석천(昔泉)이란 아호보다 윗길이다. 영남일보의 문화부기자로 출발했고, 또 젊은 시절 시도 썼던 문학청년이기에 그런 멋진 아호를 생각해냈을 것이다.

역시 정계의 실세이기에 술도 자주 샀다. 자기 빌라로 방일영씨등을 초청하는 자리에 나도 끼어주어 몇 번 가서 보신탕전골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 집의 탕솜씨가 입맛에 맞았다.

그러다 한번은 일본특파원들을 신라호텔 중국부로 초대하면서 내가 일본기자들과 잘 어울리니 나도 불러준다. 허주는 일본통이기도 하고, 또 다나까(田中角榮)· 가네마루(金丸信) 같은 일본 자민당 거물들의 정치방식을 익혀 따르고 있으니 분위기가 만점일 수밖에 없다. (그는 한일의원연맹의 한국측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흉허물없이 친한 터이니 술자리 막판에 내가 억지를 부렸다. 종업원을 불러 가장 비싼 술이 무어냐고 묻고, 이왕이면 그 술을 한번 대접해보라고 허주에게 말한 것이다.

80년대 중반으로 기억한다. 신라호텔이 갖고 있는 제일 비싼 술은 < 체어맨스 레서브(Chairman's Reserve) >. 굳이 번역하자면 회장님전용이라는 뜻일게다. 현란한 크리스탈병에 들어있는데 케이스에는 증서가 들어있어 거기에는 "당신은 이제 체어맨스 레서브 클럽에 가입한 것입니다."라고 되어있다. 한잔씩 돌려가며 음미했는데 일본특파원 하나는 그 병을 기념으로 갖고 가겠단다. 나도 욕심이 날 정도였다. 그때 신라호텔에 그 술이 딱 두 병 있단다. 나중에 알아보니 한 병 술값이 60만원 가까웠다. 요즘 친구들과 그 이야기를 하니 지금은 아마 2백만원선이 아니겠느냐고 한다. 호텔에 문의할 마음은 내키지 않는다. 발렌타인 30년이 소매상에서 90만원이 넘는다 하니 그 값은 짐작할 만하다. 내가 억지를 부려 허주에게 바가지를 씌웠고 나는 일생에 가장 비싼 술을 맛본것이다.

허주가 어이없게도 창(이회창씨를 흔히 그냥 창이라 한다)에게 당하여 낭인으로 있을 때, 김정례(金正禮) 여사가 그와, 역시 DJ에 팽당한 김상현(金相賢씨와 그리고 나 세 전직의원들을 위로·격려한다고 신라호텔 중국부로 초대한다. 참 통 큰 김정례여사다. 술은 중국서 일반적으로 마시는 명주 소흥주(紹興酒)였지만 바다가제,상어지느러미 덩어리에 신라호텔이 자랑하는 불도장(佛渡墻)이다. 스님이 담을 넘을 정도로 맛이 있다 하여 불도장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산해진미를 넣은 탕이다. 그후 권노갑씨가 한끼에 30만원짜리를 신라호텔에서 자주 먹었다고 신문에 비난성 폭로가 났었는데, 실은 우리도 그 반 이상 값의 음식을 먹은 셈이다.

2003년말 허주가 타계하였을 때 참 마음이 안 되었다. <킹메이커> 운운은 그렇다치고 매우 착한 사람인데.....하는 생각이 앞섰다. 빈소에 가서 동년배에 조문을 하니 나도 이제 일수거사(一水去士: 한물간 사람)이구나 하고 느껴졌다.

거기서 외국어대 교수 출신인 김덕(金悳) 서울법대 동기동창을 만났다. 그리고 "섹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몬타규가와 카프렛가 이야기가 나오는데......."하며 그의 조문을 치하했다. 김윤환가와 김덕가는 경북 선산의 명문이며 마치 몬타규가와 카프렛가와 같은 라이벌이다. 모두 선친이 국회의원이었고 또한 선거소송으로 당선이 뒤바뀌기기도 한 사이이다. 거기다가 김덕씨도 YS때 안기부장·통일원장관·국회의원을 계속해서 맡은 총아가 아니었던가.

허주가 타계한 후 신문들은 대단한 거물 취급의 보도였다."탁월한 정치감각과 분별력, 이해를 조정해내는 정치력"등의 찬사다. 맞다. 다만 허주도 거물정치인답게 기자들을 다루는 데 지대한 공을 들였다는 점은 지적해두어야 하겠다.

꼭 추가할 이야기는 허주가 임종 전에 김상현 의원의 주선으로 천주교 영세를 받은 일이다. 상가에서 박권상(朴權相) 전 KBS사장 등에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주 오래전에 들은 것인데 하바드대학의 와그너 교수는 한국연구가로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두가지 현상이 있는데, 하나는 평생을 독신으로 사는 남자가 드물다는 것이고, 둘은 지식인 가운데 말년에 손쉽게 천주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독신주의를 말하며 잘 나가던 사람들이 50이 지나 훌쩍 결혼하는 것이 서양과는 다르며, 종교가 그리 간단한 게 아닌데 어떻게 개종이 그리 쉬우냐는 것이다. 허주의 경우는 김상현 의원의 특유의 순발력에 의한 결과로 다르다고 하겠지만 일반론은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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