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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가 빚어낸 비현실적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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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가 빚어낸 비현실적 환상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9> 러시아관-박노자 생각

***“천하 제일의 약탈자 호랑이 러시아”**

허동현 교수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러시아”라는 말을 꺼내면 한국인에게 보통 연상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단순화시켜서 이야기하자면 구한말의 지배층에게는 “러시아”가 무엇보다도 “강병의 국가”, “강한 국가”로 인식됐습니다. 친러적 성향의 인물들이 그 “강함”을 이용하려고 하기도 했고, 반러적 성향의 인물들이 “호랑이와 살쾡이”의 나라 러시아의 “침략성”을 경계, 성토했지만 공통 분모는 그 “강함”의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천하 제일의 약탈자 호랑이 러시아”에 대한 최초의 경보를 내보낸 것은 물론 그 유명한 1880년의 <조선책략>이었지만, 그 후에는 조선의 최초의 근대적 매체인 <한성순보> (1883-1884)와 <한성주보> (1886-1888)는 러시아의 “호전성”과 “강성함”에 대한 중국, 일본 계통의 정보를 계속 그 주된 독자층인 경향의 관료, 지주들에게 전해 주고 있었습니다. 이미 <한성순보>는 러시아의 징병제를 분석하여 러시아의 병력수가 2백43만 명에 이른다는 – 그 당시의 조선 당로자들이 듣기에는 다소 충격적인 – 이야기를 내보냈지만(1884년 5월 11일), <한성주보>는 “강력하고 야수적인 러시아”를 훨씬 더 가시적인 존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성주보>의 러시아 관련의 이야기를 분석해 보면, 동향 파악은 꼭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정보가 유럽과 일본 내지 중국 매체 –즉, 이중삼중의 번역과 전달의 과정 - 를 거쳐 들어온 만큼 과장과 오보가 태심했습니다. 예컨대, <한성주보> 초기의 다음과 같은 기사는 어떨까요:

“러시아 수도의 어느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러시아는 반드시 몽골의 우르가(克而及 – 현재 울란바토르라는 몽골의 중심지) 지방을 점거하여 형세를 도와야 한다고 여러 차례에 논급하였다. (…) 국가를 소유한 자는 덕(德)에 있는 것이지 영토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진실로 덕을 펴서 인 (仁)을 행하여 먼 곳 사람들이 기꺼이 복종한다면 영토 개척을 일삼지 않아도 국세는 날로 확장될 것이다. 그런데 그 러시아 신문이 무례한 이야기를 공언한다는 것은 스스로 분수를 몰랐다고 하겠다.

또 몽골의 우쑤리 (Ussuri) 강과 캐룰렌 (Kerulen)강은 모두 흑룡강 근처에 있는데, 이 두 하천 지역에는 본래부터 사금(砂金)이 생산된다. 수개월 전에 어떤 사람이 그 곳에서 금광을 개설하여 매우 번창했는데, 러시아인과 서양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와서 사금을 채굴하였고, 중국인 역시 이 소식을 듣고 와서 채취하였다. 그런데 지금 러시아 정부에서 병사를 파견하여 그 곳을 지키며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러시아인이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 이와 같다 (…)”(“俄事近耗”, - <한성주보>, 제29호, 1886년 9월 20일, 외보란).

신문이 제시한 전거는 중국의 유명한 선구적 근대 신문 <호보>(滬報)인데, 아마도 이 이야기가 중국 신문에 들어가기 전에 몇 차례에 유럽과 일본 매체의 번역, 전달 과정을 거쳐 이 과정에서 못 알아볼 정도로 변모한 셈입니다. 물론 원동(遠東) 지방에서의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일차적 방향이 바로 몽골이라는 전체적인 동향은 여기에서 올바르게 포착됐으며,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식민화가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러시아의 침략성에 대한 우려도 이해할 만합니다. 제2차 아편전쟁으로 약해진 청나라의 어려움을 이용한 러시아가 이미 1862년에 외몽고에서의 무(無)관세 무역권(權) 등의 이권을 챙기는 등 몽골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일찌감치 나타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청나라가 멀쩡히 엄존했던 1880년대 중반의 상황에서는, 러시아가 몽골을 “점거”한다든가 그 쪽 이권을 “독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허구에 가까운 과장이었습니다. 허동현 교수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청나라가 1911-12년의 혁명으로 망하고 나서야 자주권을 얻은 외몽골이 명실공히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어간 것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 군대가 그 지역을 “점거”한 일까지는 없었지요. 즉,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이고 확실한 정보를 얻을 길이 없었던 <한성주보>는, 중국 신문의 허구성이 심한 보도를 진실로 취급한 셈이지요. 이중삼중의 정보 유통의 모순점, 즉 정보의 측면에서의 그 당시 조선의 극단적인 대(對)중국, 대(對)일본 종속성의 문제점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 아닙니까?

***중국ㆍ일본측 정보에의 극단적 의존-부실하기 짝이 없는 대외 정보**

마침 <한성주보>의 이야기를 꺼냈으니 그 신문의 러시아 관련의 또 하나의 기사를 인용해 봅시다:

“(…) 중국으로서 프랑스, 일본보다도 가장 지체할 수 없는 나라는 러시아이다. (…) 러시아는 아시아와 유럽 양(兩)대주의 북쪽에 점거하고 있으면서 바다를 건너 아메리카의 서북 모퉁이도 점거하고 있으므로 북빙양을 중심으로 고래처럼 둘러 있다. (…) 유럽의 책에 의거하면 그 나라의 백성은 4천1백만 명이고 (…) [현역] 군사의 총수는 60만 명인데, 전시에는 1백여만 명까지 증원할 수 있으니 참으로 강대한 나라라고 할 만하다. (…) 러시아 서울인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중국의 변경까지 그 거리가 수천여 리로서 (…) 산 건너 물 건너 달려가자면 수개월이 걸리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고, 바닷길을 이용해서 군대를 보낸다 해도 (…) 길이 너무 멀어서 연료도 떨어지지 않게 취득해 낼 수가 없다. (…) 그래서 지금까지는 중국 변경의 방비는 튼튼했지만, 러시아에는 드디어 러시아 서울로부터 훈춘(琿春)까지 철로를 가설하자고 권하는 사람이 나왔으니 만약 이 일이 이루어진다면 우리 중국의 문호를 어떻게 지키겠는가? (…) 유럽의 각국을 규합하여 (…) [반러시아적] 동맹을 맺고 이 동맹국 가운데 러시아에 약간의 땅이라도 양보하는 나라가 생긴다면 그 나라를 용서 없이 공격해야 한다. (…) 유럽 각국은 중국을 위한 계책을 세우지 않더라도 어찌 자기 나라를 위한 계책을 세워 이 동맹에 기꺼이 참가하지 않겠는가? (…)”(”防俄芻言”, - 제67호, 1887년 6월 13일자 외보란).

역시 중국의 <신보>(申報)의 자료를 전재한 이 기사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가설 계획이 바로 원동 지역에서의 침략을 하나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파악한 셈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 당시의 러시아는 정말로 모든 유럽 국가들이 오늘날의 나토(NATO)를 방불케 하는 ”방(防)러 동맹”을 맺을 만큼 강대하고 위협적인 나라이었을까요? 이 기사가 러시아의 ”아메리카 서북 모퉁이 점거”를 이야기하는데, 실제로는 러시아는 18세기 후반부터 점거해 왔던 알래스카(Alaska) 반도를 이미 1867년에 미국에 헐값에 팔아 버렸습니다(알래스카 석유 매장량, 그리고 차후 석유의 가치에 대해서 알았다면 과연 그렇게 했을까요?). 러시아와 영국은 중앙아시아나 발칸에서의 제국주의적 경쟁에 휘말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당시의 영국으로서 러시아보다는 신흥 산업 대국 독일은 훨씬 더 위협적인 존재이었습니다. 즉, 이 ”방러 동맹”의 계획은 말 그대로 세계에 대한 정보 부족과 분석 미숙성의 결실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면서도 재미있게도 러시아 인구의 통계는 실제 숫자 (대략 1억1천만 명)보다 약 2배 이상 적게 4천1백만 명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대외 정보를 근거로 삼아 세계 정세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그 당시의 조선 당국자들은, 과연 균형 잡히고 장기적인 안목에 입각한 정책을 입안, 결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은 나아졌나-전 체첸 지도자 얀다르비예프 암살의 경우**

여담이지만, 러시아와 같은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의 중심으로부터 약간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 대한 정보는, 러시아어에 능통한 한국의 특파원들이 현지에 직접 가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120년 전보다 질적으로 과연 어느 정도 개선됐는가요? 물론 영토나 인구 수치에 대한 그 때와 같은 웃지 못할 오류를, 오늘의 한국 신문들은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보 수집의 포괄성이나 분석의 깊이나 독자성 등의 측면에서는, 지금만해도 너무나 뚜렷한 한계가 보입니다.

예컨대 지난 2월 13일에 중동의 작은 나라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체첸공화국의 전 대통령인 얀다르비예프라는 시인이자 체첸 독립운동의 이념가가 차량 폭발로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와 같은 ”사고”의 배후에 있는 것은 바로 KGB 출신의 러시아의 통치자 푸틴의 KGB 계통의 선후배들이 있었다는 것은 체첸 독립운동, 그리고 적지 않은 수의 서방 관찰자들의 판단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이 벌어진 뒤에 카타르에서 배후 조정의 혐의로 러시아 대사관의 2명의 ”비(非)외교 계통의 직원”(즉, 보안 기관 요원)이 경찰에 잡히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확증이야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체첸 전쟁을 최고의 인기몰이 수단으로 이용해 온 푸틴의 ”살육 정치”의 맥락으로 본다면 ”러시아 안보기관 배후설”은 가장 유력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온 분자”에 대한 무제한적 폭력을 주된 바탕으로 삼는 요즘의 러시아의 ”현대판 군국주의”의 진짜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이 사건에 대한 국내 보도는 과연 어느 정도이었습니까? KBS 등은 ”러시아 배후 조정의 가능성”을 언급하되 이 문제와 관련시켜 러시아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논의한 적이 없었는데, 신문들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한겨레>는 간단하게나마 ”러, 납치, 암살 정치 흉흉”(2004년 2월 16일)이라는 기사를 내보내 곧 다가올 러시아 대선과 카타르에서의 암살을 연결시켰는데,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상론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가까운 이웃인 러시아가 요즘 국외에서의 국가 범죄(즉, 정보 기관에 의한 체첸 독립운동가 암살)를 거침 없이 저지르고 있을 정도로 이미 야수적인 모습으로 복귀됐다는 것은 과연 한국과 무관한 일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분석과 토론의 부재는 러시아의 눈치를 보고 있는 외무부의 신문에 대한 ”압력”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아니면 단순한 정보 수집, 분석 능력의 한계로 여겨야 하는지 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한국에서의 러시아 관련의 공공적 논의는 지금도 결코 만족스러울 만한 수준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를 이용하려는 “인아” (引俄) 정책을 실현하려 하였던 고종의 측근 이용익 (李容翊)과 같은 친러적 인물들의 경우에는, 러시아가 “최강의 군대”를 보유하여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줄 수 있다는 것은 세계 인식의 골자이었습니다. 그러나, 1897년 3월부터 고종을 압박하여 노골적인 간섭 정책을 펴기 시작한 러시아에 저항하여 나선 친미적 개혁가 서재필, 윤치호도 러시아의 “강성함”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독립신문>에서 게재된 러시아 관련 논설들을 보면, 러시아가 산업 개발이 저조한 농업 국가인 만큼 오히려 곡물 수입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적국들이 봉쇄해봐야 소용이 없는, 국제 무대에서 다른 열강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 행동을 할 수 있는 강대국이다(영문판, 1897년 11월 23일)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고, 러시아 군대의 전투력에 대한 찬사들이 연발되기도 합니다.

통찰력이 뛰어난 윤치호가 1896년에 민영환(1861-1905) 사절단의 일원으로 러시아를 방문할 때 “그 나라의 공장에서 설치된 좋은 기계들이 거의 다 서구나 미국제다”라는 사실 – 즉, 러시아가 서방 선진국에 비해서 기술 발전이 훨씬 느렸던 사실 –을 눈치챘음에도, 러시아의 군사력을 계속 높이 평가했습니다. 윤치호를 통역으로 데리고 러시아에 간 민영환도, 그의 유명한 외교 시무책 <천일책>(千一策)에서, 이와 같은 그 당시의 통상적인 러시아관(觀)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러시아의 강함은 천하에서 무적입니다. 그들의 영토는 30여 만리이며, 육군은 66여 만 명이며, 군함은 368척입니다. 천하의 동북, 서북 지역을 통제하고 그 험악한 지세의 이점을 살리면서 만국을 호시탐탐하여 병탄의 뜻을 가집니다. (…) [피터 대제 이후의 역대의 러시아 황제들이] 폴란드를 멸하고 터키를 침략하고 중앙아시아를 공략하고 유럽 여러 나라의 일에 간섭했습니다 (…) 그들의 군함이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 정박하고 흑룡강 철도가 부설된 것은 말하자면 한 새의 왼쪽 날개가 준비된 셈인데, 만약 오른쪽 날개라 할 만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까지 완성된다면 동아시아를 심각하게 핍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그 손아귀에 놓이지 않겠습니까? 특히 우리의 동쪽 나라는 바로 그 충돌의 길에 있기에 맨 먼저 그들의 마수를 당할 것입니다. 타국과 비교될 바도 못됩니다. 설령 우리를 도와 줄 외세가 있더라도 어찌 내수 (內修)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내수의 방략을 불가불 준비해야 합니다“(<閔忠正公遺稿 卷二>)

***당대 제일의 외국통 민영환의 피상적 세계인식**

민영환이 제시한 징병제 실시나 학교 진흥, 민심 안정 등의 “내수책”이야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러시아를 “천하 무적”으로 여겼던 그의 텍스트를 읽으면 민씨 척족 중에서 “제일의 외국통”으로 알려졌던 그마저도 얼마나 피상적인 세계 지식을 가졌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당시 러시아의 졸병 중에서 절반 정도가 글을 해독하지 못하는 문맹자이었다는 사실(독일의 병졸 중에 이미 문맹자란 거의 없었습니다!)이나 1897년에 러시아의 전체 인구에서 도시 인구가 11%밖에 안 됐던 사실(영국은 80%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일인당 국민 소득은 40달러도 안 됐던 사실(미국은 350달러를 넘었습니다!) 등의 러시아의 극단적인 경제적, 사회적 취약함을 보여 주는 기본적인 통계조차도, 한국의 최고 외교관 중의 한 사람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19세기말 러시아 실정 관련 통계를, Blackwell W., <Russian Economic Development from Peter the Great to Stalin>, N. -Y., 1974, p. 161-196에서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러시아가 최다수의 육군을 가졌지만, 대형 대포나 최첨단 무기 등의 생산, 그리고 군함 제조 등의 측면에서는 유럽의 어느 열강과도 “게임이 안 될” 정도로 취약한 산업 구조의 탓으로 영, 불, 독 등의 유럽 열강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능력을 결여했습니다. 러시아나 일본과 같은 “아류 급” 제국주의적 야수를 놓고 볼 때 세계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었던 영국과의 중앙아시아에서의 식민지 쟁탈 경쟁을 벌여 영국의 견제 대상이 된 러시아보다, 영국과 친밀해져 가는 데다가 러시아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서구화 정책을 채택한 일본이 한국에 더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은 과연 상식적인 판단은 아니었겠습니까?

물론 1900년도의 의화단 투쟁을 핑계로 삼은 러시아의 만주 점령과 그 후의 지속적인 철병 지연과 같은 니콜라이 2세 정권의 모험주의적인 침략적 노선은 고종 정권과 경향의 유지들의 경각심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겠지만, 이 모험의 승산이 낮은 사실을 러시아의 부실한 내정이나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 등을 잘 아는 그 당시의 상당수의 관찰자들이 명확히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러시아의 “강대함”을 거의 맹신하다시피 한 한국의 지배층은,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의 결과로 닥쳐 온 일본의 침략과 보호국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러시아의 참패를 예측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중앙 정부의 명령이 이미 지방에서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던,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내장원의 재정이 국고를 압도할 정도로 황실의 독식이 태심했던, 그리고 그나마 있었던 군대마저도 화적보다 민폐가 더 심각하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황성신문>, 1903년 4월 11일) 관기(官紀)란 바로 서지 못했던 고종 정권하의 대한제국이 과연 어떤 방비를 할 수 있었는가 라는 것은 별도의 질문입니다.

***"외적보다 민중을 더 두려워했던 고종의 수탈적인 정권에게 이와 같은 저항을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일본과 같은 외적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서 민중적인 전력 (全力)전쟁을 전개하여 – 지금 이라크의 독립군이 미군에게 하는 것처럼 – 일본 주둔군의 전력(戰力)을 침략자들이 못 견딜 만큼 소모시켰어야 했는데, 외적보다 민중을 더 두려워했던 고종의 수탈적인 정권에게 이와 같은 저항을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물론 근대적 무장의 절대적 부족 등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와 같은 全민중적 저항도 과연 일본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러시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만큼 대외 정보력이란 매우 취약했던 구한말 지배층의 “정보적 한계성”은 대한제국의 패배에 한몫을 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외세에 대한 철저한 정보 수집과 분석이 국가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우리에게 잘 이야기해 주는 교훈이라 봐야겠지요?

러일 전쟁에서의 러시아의 참패는, 구한말의 지배층에게는 예상 밖의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보호국화는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나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 등의 여태까지 “백인 침략자 강국 러시아”를 보다 더 경계했던 일부의 독립 지향적인 인사들이 반러에서 반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됐지만, 친일적 성향의 상당수에게는 일본의 뜻밖의 전승이 “노대국 러시아까지도 이긴 황인종의 유일한 근대 국가”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불가피하거나 “백인 침략으로부터의 방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었습니다.

인종주의란 그 당시 구미 세계의 “근대성의 핵심 담론” 중의 하나이었던 만큼 놀랄 일이 안 되지만, “황인종과 백인종의 생존권 전쟁”이라는 일본 아시아주의자들의 세계 인식의 구도가 개화기 후기의 한국의 “신지식인”들에게는 우리 상상 이상으로 그야말로 지적인 “히트 상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가 “황인종에 대한 위협”이라는 기호로 계속 기능해도, 그 기호는 1895-1904년간의 시기만큼은 경계심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근대적인 지주층의 대토지 소유에 대한 농민의 커가는 분노에다가 근대적 식자층과 무산계층의 거세져 가는 반발이 가세돼 제정 정권의 기반이 파괴돼 가는 당대 러시아의 실정을 이해하지 못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1904년 이전에 “강국 러시아”의 대한 환상에 잠겨 있다가 그 환상이 깨진 뒤에 러시아에 대한 관심을 많이 잃었습니다.

물론 톨스토이와 같은 그 당시의 최고급의 러시아 문호에 대한 관심이야 구한말 후기나 식민지 시대 초기에 지속됐지만, 톨스토이가 이미 유럽과 미국 등의 “문명의 중심지”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는 것은 그 관심을 불러일으킨 하나의 이유이었습니다. 사실, 톨스토이를 존숭했던 최남선과 같은 대표적인 젊은 지식인들은 그 작품들을 주로 일본어나 영어로 읽었습니다. 세계 체제의 한 준(準)변방 (러시아)의 문화가 또 다른 변방 (조선)으로 이식될 때 꼭 세계적 중심부나 지역적 중심부의 언어(영어 내지 일어)라는 “중심적” 매개를 거쳐야 한다는 것은, 과연 세계 체제 안에서의 문화적, 정보적 예속 관계의 심도를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가 아닙니까?

식민지 시기도 그랬지만, 지금도 세계 중심부의 착취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는 멕시코의 사파티스타와 같은 훌륭한 혁명 운동가에 대한 정보를 우리가 대개 바로 그 중심부의 언어 (영어)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과연 슬픈 아이러니가 아닙니까? 미제의 문화적 헤게모니와 싸우는 첩경 중의 하나가 바로 세계 “비주류” 언어에 대한 공부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정보력의 낮은 수준과 종속된 세계관의 내부적 부실**

1917년에 볼셔비키들이 집권한 뒤에는,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에게 다시 한 번 가까이 다가와 “유의미한 타자”가 된 “러시아”가 대개 “혁명”의 동일어가 됐습니다. “적로"(赤露)에 대한 입장의 문제는, 조선의 지성인들을 이미 1920년대 초반부터 양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으로, 님 웨일즈가 쓴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인 혁명가 김산(본명 張志樂)에게는 소련은 “세계 모든 혁명가들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었으며, 공산주의를 어느 정도 동감하거나 호의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던 상당수의 사회주의 지향적인 지식인들에게는 “신문명 건설의 현장”(모스크바 주재 특파원 이관용의 기사, <동아일보>, 1925년 5월 23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미국의 여론을 기본적 준거틀로 삼았던 안창호와 같은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에게 제정 러시아의 외채를 갚지 않겠다고 선언한 소련이 “도둑놈의 정부”에 불과했으며, 완강한 민족주의자 김구는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지휘와 명령”을 조선에 대한 또 하나의 간섭이자 속박으로 이해했습니다.

러시아 혁명과 공산주의에 대한 노선의 문제로 민족운동이 분열된 것도 불행한 일이었지만, 좌파와 우파 양쪽에서 소련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도 없이 융통성과 깊이가 결여된 무조건적 긍정과 부정만을 내세웠던 것도 큰 문제이었습니다. 공산주의를 “야만”과 “위협”만으로 본 우파의 반소련적 분위기가 결국 남한 “주류” 사회의 반공 이데올로기로 계승됐으며, 강제 협동화 정책에 의해서 아사하거나 이농하게 된 수백만 명 농민들을 희생시킨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의 “대성공”을 치하만 했던 좌파의 맹목적인 스탈린주의적 편향은 스탈린주의의 망령을 쉽게 벗어나지 못할 남한의 일부 진보적 “운동권”의 비극을 예견하기도 했습니다. 제정 러시아의 실정에 대한 무지가 그 “강대함”에 대한 비현실적인 환상을 키우듯, 스탈린의 소련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의 부족과 교조적인 사고 방식이 스탈린주의에 대한 균형적이지 못한 일방적인 긍정으로 이어졌습니다. 동구권의 몰락이 스탈린 식의 “병영 사회주의”의 내부적 모순들을 노정했을 때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놀라움은, 1904년의 제정 러시아 참패 때의 놀라움과 비슷한 정도이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꿈과 환멸의 역사를 다시 되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면 어떨까요? 어떤 외국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그 외형적인 강약이나 군사력보다도 먼저 그 사회의 내부적 갈등과 모순부터 바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순의 직시"라는 상대적인 객관성의 필수 조건이 바로 이중삼중의 “세계 체제 중심부를 거친 정보 전달”이 아닌 “현지 정보의 직접 입수”를 요구하는데, 이 부분은 188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정말 너무나 취약했습니다. 중국 신문에서 따 온 <한성순보>와 <한성주보>의 러시아 관련 기사, “주먹구구”식의 민영환 등의 러시아 관련 서술, 주로 일본어로 읽은 1920년대의 레닌주의의 교과서들, 역시 일본어나 영어를 통해서 1980년대에 들어온 “이념 서적”… 중심부 매개체의 세계관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이미 “인식 실패”의 조건들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1900년대의 제정 러시아나 1980년의 소련이 외형적으로 매우 강해보였지만, 곧 몰락했다는 사실이 정보력의 낮은 수준과 종속된 세계관의 내부적 부실을 드러냈습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러시아 관련 정부의 “직수입”을 위한 여러 조건들이 조성됐는데, 러시아라는 주변 정세의 중요한 변수에 대한 관심 부족과, 푸틴의 개발 독재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는 독자적인 이론적 틀의 부재는 매우 아쉬운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러시아의 “강함”이 계속 비현실적으로 평가됐듯이, 오늘의 미국의 “강대함”을 과연 과대평가할 필요가 있을까요? 외형이야 그렇지만, 그 내부적 모순이 이제 곧 드러날 듯한 예감입니다…

***도움이 된 책**

국사편찬위원회 편간, <민충정공 유고 - 민영환 -> (한국사료총서 제7). 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58.

<해천추범>, 을유문화사, 1959 (민영환 사절의 러시아 방문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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