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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며 배워온 일본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7> 일본관-박노자 생각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한국 근현대의 일본관(觀)에 대해서 글 쓰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일본”이라는 기호는 한국 사회에서 “적대적 타자”의 의미를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보통 해마다 신문 등의 매체에서 “국가별 호감도”를 묻는 여론조사를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통계들을 허동현 교수님께서 유심히 보시니까 잘 아시겠지만 교과서 등으로 인한 파동이 있는 해면 약 60% 정도, 그렇지 않은 해에는 45-50% 정도가 각각 “일본을 가장 싫어한다”고 답합니다.

***식민지의 아픔 – 우리를 “우리”로 만든 공동의 기억**

이처럼 – 일본과의 각종의 교류를 이미 거의 40년동안 해 왔음에도 – 일본에 대한 끈질긴 싫증을 느끼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당연히 지금까지도 아물지 못한 식민화의 상처일 것입니다. 상처에 대한 공동의 기억이, 영예로운 과거에 대한 기억 못지 않게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만들기에 기여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전쟁, 학살 등에 대한 “민족 전체가 나눈 상처”에 대한 “기억”의 정치가 민족을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해서 예컨대Commemorations: The Politics of National Identity, ed. John R. Gilli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참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면에서 각종의 갈등과 모순으로 가득 찬 한국 – 제1세계의 최고 우량기업에 질 배 없는 재벌들과 기술이나 사고발생률이 제3세계 수준밖에 안 되는 중소기업, 세계적 산업지대인 수도권과 농사 지어 봐야 빚밖에 늘어나는 게 없는 농촌 등의 “명”과 “암”이 좁은 국토 속에 공존하는 역설의 땅 한국 – 이 단합된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식민지” 시절이라는 다들 알고 다들 나누는 커다란 “상처”를 안고 살기 때문이 아닙니까?

즉, “우리가 그들에게 당했다”는 – 다들 어느 정도 갖고 있는 - 생각이 바로 민족적인 “우리”를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따져 보면 지금도 이 사회 위에 지금도 군림하는 상당수의 주요 족벌들이 그 때 “당하기”만 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제국의 체제에 잘 적응하여 같은 조선인들을 착취해 가면서 돈과 지위를 확보했음에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었던 식민지의 민중뿐만 아닌, 민족적 “우리”의 전체를 “피해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계급 의식을 결여한 민족관(觀)의 문제점이 어떻든 간에,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한민족의 구성에서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이 차지하는 몫이 매우 크다는 것만큼은 사실인 듯합니다. 한국의 근대사 기점으로 인식되는 강화도조약의 체결(1876년)이 바로 일본 침략의 시점이기도 한 것은, 이 땅에서 양반과 상한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묶은 “근대”가 “일본”이라는 가해의 이미지와 얼마나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지 잘 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한 만큼, 일본과의 각종의 교류의 발전과 별도로, “우리를 괴롭힌 적대적 타자” 일본에 대한 끈질긴 싫증은 좀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을 듯합니다. 물론 만약 “조선 침략의 불법성”을 침략의 그 당시부터 줄곧 주장해 온 일제 시대의 좌파의 계승자인 일본 공산당과 사회당이 일본에서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해,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 메이지 “성공”에 대한 “자랑스러운 우리의 이야기” 대신에 그 당시의 일본 국내 공장에서 폐결핵으로 무더기로 죽었던 여공의 고생과 국외에서의 일본군의 잔악한 의병 “토벌” 등의 범죄에 대한 참회와 반성의 글이 주종을 이루게 된다면 아마도 한국 쪽 “일본”의 의식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1920-30년대의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침략적인 제정 러시아 정권과 국제주의적인 레닌의 정책 방침을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 분리해서 사유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일제의 패망 이후에 미제의 비호 하에서 다시 살아나 결국 공고한 “소프트 권위주의적” 우파 지배의 국가 체제를 갖추게 된 일본의 우익이 그 헤게모니를 – 적어도 가까운 시일 내에 – 내놓을 것 같지 않으니 결국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꿈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일본의 집권 우파가 일제 시절의 관료와 정객들을 계승한 만큼, 우리로서는 “그때의 일본”과 “오늘의 일본”을 분리해서 생각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미제가 천황제라는 군국 일본의 정신적인 기축을 그대로 살려 내 지금까지 천황제가 지속돼 온 점이나, 부시 정권의 적극적인 사주에 의해서 이제 일본의 군국주의적 모습까지 “이라크 파병” 속에서 재현되는 것은, 우리의 심기를 결코 편안케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미국과 꼭 닮은 100년 전의 약화돼 가는 세계적 패권 국가 영국의 힘에 기댄 일본이, 그 때의 미-일 안보 조약의 격인 영-일 동맹의 체제 하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너무나 잘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피해자로서의 우리”의 명과 암**

특정 국가/민족에 대한 피해 의식에 기반한 민족 의식의 구성이란 아마도 장ㆍ단점이 두루 있는 것 같습니다. 단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여러 가지 열거할 수 있지만 몇 개만 뽑겠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집단적 피해 의식이 “일본”에 집중된 만큼 한반도 주위의 기타의 제국주의적 야수에 대해서 우리가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인 듯합니다. “관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적대적 타자”의 역할을 “일본”이 전담한 만큼, 나머지 야수와의 관계를 “과거 기억의 부담” 없이 그 때 그 때의 필요성대로 만들어 가도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지난 2004년 2월 12일에 인천에서 러-일 전쟁 그 당시에 인천 앞바다 해전에서 전사한 러시아 해군을 기념하는 추모비가 – 여러 시민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 끝내 한국측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서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제막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북한 문제 등의 안건이 있어서 노무현 정권이 푸틴 정권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에 힘을 싣는 걸 외교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역사적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한반도 – 적어도 한반도의 이북 지역 – 를 러시아의 군사적 보호령으로 만들기 위한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인 러-일 전쟁에서 죽은 제국주의 국가 군인들을 과연 한국 측이 한국의 영토 내에서 “추모”까지 할 하등의 이유라도 있습니까?

제 말씀이 과하다고 생각하시는 모든 분들께서, 러-일 전쟁 발발 직전에 원동(연해주)의 총독인 알렉세예프 (Alekseev)가 러시아 외무부 장관인 람스도르프 (Lamsdorf: 1844-1907) 백작에게 보낸 서한을 읽어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면 한반도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게 돼 있습니다 (…) 우리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오게 하는 힘은, 우리로 하여금 우랄 산맥에서 태평양까지 오게 하기도 한, 우리로 하여금 중앙아시아를 우리의 영토나 우리의 보호국으로 만들게 한, 그리고 이제는 만주에 진출하게 하기도 한 바로 그 힘이다 (…)” (РГАВМФ, ф.32, о.1, д.201, л.5 об., 6 – 최근에 러-일 전쟁의 100주년과 관련해서 <서울 헤럴드>가 낸 특집 기사에서 이 문서의 원문이 재인용됐습니다: http://vestnik.tripod.com/novosti04/021201.html ).

알렉세예프가 이야기하는 “힘”은, 그가 확신했던 러시아의 “동진의 운명”, “하나님이 부여하신 동방 여러 민족들의 문명화의 사명”이었습니다.

만약 일본 쪽에서 청일 내지 러일 전쟁에서 전몰한 일본 군인들을 위한 추모비를 한국 영토 내에서 세워 달라는 요청이 온다면 아마도 우리는 “망언”으로 규정하겠지만, 100년 전에 똑 같은 한반도 침략을 꿈꾼 러시아의 “러-일 전쟁 영웅화”에 노무현 정권이 일조를 해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즉, “우리”를 오늘과 같은 “우리”의 민족 집단으로 만든 그 아물지 못한 상처가 주로 “일본”으로 인해서 발생된 만큼, 주위의 기타의 야수들의 야수성에 대해서 우리가 그다지 강한 자각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러시아도 그렇지만, 한국전쟁 때 “이북 지역 융단 폭격”이라는 이름의 인종주의적 살육을 자행해 수십만 명의 동포를 무참히 죽인 뒤에 참회나 사과의 한 마디를 하지 않은 미제의 범죄도 그렇습니다.

둘째는, “밖으로부터”의 상처에 대한 골수에 박힌 기억, 즉 “우리는 다 피해자”라는 통념은, 우리를 지배해 온 우파 정객들이 미제의 세계적 헤게모니에 편승해 저질러 온 “밖”에 대한 가해를 우리로 하여금 잘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중산층이 지금 누리고 있는 번영에, 베트남전쟁이라는 4백만 명 이상의 같은 아시아인들을 죽인 미제의 범죄에 편승해 벌었던 돈, 그리고 한국 기업들이 중국이나 베트남 등지의 노동자를 착취해 벌고 있는 돈이 지금 밑천이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피해 의식이 강한 만큼 “가해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강하지 못합니다. 바로 그렇기에 노무현에 실망한 수많은 과거의 지지자들이 그 실망의 원인을 물으면 “도덕성 상실”이나 “경제 침체”, “개혁 부진” 등을 들지, 미제와의 최악의 공범 행각이자 이라크 민중과 독립군에 대한 가해인 소위 “이라크 파병”을 들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와 “가해자” 라는 두 단어는 아직까지 우리 뇌에서 동의어가 되기 어렵지만, 집권 우파의 숭미 정책이 우리를 자원 수탈을 위한 중동 침략의 “졸병”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참, 항일 운동에 목숨을 바치신 분들께서, 태극기를 휘날리는 남아들이 또 하나의 약소 민족인 이라크인들의 가슴에 총을 겨누는, 이 수치스럽게 짝이 없는 광경을 지금 저승에서 지켜 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인기몰이에 아주 능한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그 무슨 말을 해도 다 좋지만, <백범일지>를 애독한다는 말을 더 이상 제발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부시 도당의 이라크 침략에서의 동참을 “아랍권과의 우호 증진을 위한 일”과 같은 정신 나간 망언을 퍼부은 그 입에 김구 선생과 같은 어른의 함자가 오르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 여담이 너무 길어 져서 죄송합니다!

그러면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우리”가 피해의식이라는 “태” 내에서 태어난 것은 과연 어떤 장점을 갖고 있습니까? 일본이 점령한 한반도의 땅에서는, 지금의 우리로서 상상하기 어려운 너무나 많은 신분/지역적 집단 간의 경계선들이 존재하지 않았습니까?

노비제가 갑오개혁 때 철폐됐음에도 식민지 때만 해도 과거 상전의 집안들이 과거의 노복 집안들을 어디까지나 동등하게 존댓말을 쓸 수 없는, 함부로 대해도 대상으로 인식했는가 하면, 독립운동가 사이에서조차도 기호인 지도자(이승만 등)들이 평안도인 지도자(박용만, 안창호 등)들과 종종 태심한 갈등을 빚는 등 “지역색”이 무시할 수 없는 정체성들 중의 하나이었습니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이 아예 충분한 의미의 정치 사회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일본인 지배자들이 총독부의 관료 임용 과정에서 기호인 양반을 우대하는 등의 교묘한 “분리 통제 정책”도 썼지만, 일단 그들의 인종주의적인 멸시적 “조센징”관(觀)에서는 양반이든 상한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기호인이든 서북인이든 누구나 다 “태생적으로 열등한”, 언제나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해도 되는 “통치 대상으로서의 반도인”이었습니다.

조선 왕조 때는 서로 다른 법적인 카테고리였던 사족과 상한과 노복과 백정의 자손들이, 일제의 식민지 법으로 다들 똑 같은 “조선인”으로 분류됐습니다. 일제의 목적이야 어디까지나 식민적 통치 “대상물”의 분류이었지만, 바로 이와 같은 피지배자인 “조선인”으로서의 일체감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전근대적인 각종의 분류법들을 벗어나게끔 한 것은 아닙니까?

전근대적 신분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한국전쟁 때이지만, 그 전의 일정 (日政)의 쓰라린 경험도 일치된 집단으로서의 “한국인”의 탄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일본 통치자들의 “민족적” 분류법의 민족 정체성에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는 일부 미국의 한국계 소장파 학자들의 이야기 (예컨대, Em, Henry H. "Minjok as a Modern and Democratic Construct: Sin Ch'aeho's Historiography." In Gi-Wook Shin and Michael Robinson, eds. Colonial Modernity in Korea.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999. 참조하시기를 바랍니다)에 완전히 찬동하기가 힘들지만 (개화기 때의 “국민 만들기” 노력이 미국 학자들에 의해서 너무 과소평가되는 듯한 씁쓸한 느낌입니다), 거기에 일단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어쨌든 영토의 상당 부분이 간접 지배를 받은 영국령의 인도에 비해서는, 직접 지배를 받은 한반도에서는 전근대적인 신분제에 대한 기억들이 훨씬 더 철저하게 사라진 듯합니다. 물론 전통적 지배자인 사족들이 비워준 자리를, 곧잘 “선진 지식”을 통해서 그 권위를 확립한 “유학파”의 지식인들과 역대 정권들의 비호 하에서 부를 축적한 재벌의 정상 (政商) 등의 “신흥 양반”들이 차지해 버렸지만 – 즉, “국민”의 형성이 결코 평등과 박애를 의미하지 않았지만 – 역사적으로 이미 그 유효 기간이 지나 버린 조선시대적 혈통적 권위 체제의 종말이 일종의 의미의 “진보”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합니다.

***일본, “근대”의 위협이자 거울**

일본의 지배로 인한 집단적 아픔이 오늘과 같은 “우리”를 만든 이상, 일본에 대한 적대감뿐만 아니고 “친일” 문제에 대한 분노도 그렇게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친일”의 화신이라 할 만한 박정희가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강압적인 통치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렸을 때 이 문제가 금기의 영역이 됐기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의 지배층인 우익 보수층을 공격할 때, 반대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 “친일파 후손”이라는 언설을 보수층의 역사적 정통성 부정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재일 교포 작가나 사업가가 일본에서 인정을 받아 성공한다면, 국내에서 보수언론이든 진보언론이든 늘 크게 부각하지요.

예컨대, 한국인 대다수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의 소설을 잘 안 읽지만, 재일 작가 유미리(1968년 생)가 “일본의 최고 권위인 아쿠타가와상”을 탔다는 소식을 들어 “아쿠타가와”의 이름을 알 것입니다. 그만큼 “일본의 권위”가 인정을 받는 것이겠지요?

일본이 분명히 한국 근현대사의 “부정적 타자”(The negative Other)이면서도 “유의미한 타자” (The significant Other)인 셈이지요. 한국 근대의 담론이 일본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 만큼, “따라 잡아야 할” 대상으로서의 일본, “우리 우수성을 보여주어 인정을 받아야 할” 권위자로서의 일본, 그리고 시찰하여 이해해야 할 “근대의 모델 중의 하나”로 일본은 늘 우리 머리를 떠나지 않는 듯한 느낌입니다.

밉기도 하고 배워야 하기도 하고, 근대성 체화 과정에서 경쟁해야 하기도 하는 일본에 대한 근현대 한국인의 의식을 어떻게 쉽게 서술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한국인들의 일본관이 근대성 그 자체를 보는 태도와 구조적으로 흡사한 면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옛시절”을 향수하면서 근대가 가져다준 “인간성의 상실”을 한탄스럽게 여기는 감정, 즉 강제적으로 이식된 근대성에 대한 원한은, 우리 모두에게 약간씩 내재돼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국제적 경쟁에서 이겨서 “일등 국가”가 돼야 할 경쟁적 강박감, 그리고 근대성 성취의 모델로 인식되는 “선진국” 사람들의 눈을 크게 의식하는 근대성 권위의 인정도 우리 뇌리에 이미 박혀 잇는 것이 아닙니까?

“따라 배우기”와 “경쟁하기”와 “인정 받기”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원한을 씻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근대관이기도 하고 일본관이기도 한 셈이지요.

“미워도 배운다”는 일본에 대한 오늘날의 태도는, 이미 개화기 때 어느 정도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정치적으로 “친일적”이라 전혀 할 수 없는 개화기의 계몽주의자들까지도 대개 일본을 한국으로서 현실적으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모델로 인식한 것이었습니다. 이승만의 <독립정신> (1904년 탈고)이나 서재필의 <독립신문>에서 명치유신의 근대주의적 면모 – 예컨대 유학파의 등용이나 법률ㆍ제도의 서구화, 부국강병 정책 – 가 큰 칭찬을 받는 한편, “온고지신”에 중점을 두었던 개신 유학자들은 명치유신의 보수적인 측면들 – 예컨대, 유교적 충효 사상이나 신도, 불교의 이용 – 을 부각시켰습니다. 예컨대, 개화파가 구래의 풍습을 급진적으로 버리는 것이 “국성” (國性: 전통을 바탕으로 한 국민적 통합)을 해친다는 논리를 전개했던 한 논객이 명치 유신의 권위에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어느 나라든 간에 그 유신을 창도하는 초기에 일반 인민이 크게 깨달아 바람에 휩쓸리는 구름처럼 크게 일어나는 것은 보통 잘 없는 일이다. 민습(民習)이 오랫동안 그대로 있었다가 갑자기 획기적으로 바뀌는 것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메이지 유신 초기에 인민들의 고유한 불교 신앙을 기반으로 삼아 그들을 고취한 관계로 일본이 크게 일어나는 것이 쉬었던 게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의 개화파는 도리어 우리 나라의 고래의 국성 (國性)이 어떤가를 전혀 참작하지 않고 객관적인 기준만 적용하여 대대로 내려온 선조들의 풍속을 다 불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 (松南, “開化守舊兩派의 胥失”, - <서북학회월보>, 제19호, 1910년1월, 3-7쪽,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였음).

조선에 한때 영향을 끼쳤던 유라시아의 두 개의 후발 근대화 국가 – 청나라와 제정 러시아 – 가 차례로 일본에 의해서 참패를 당하자 이제는 수많은 한국 유학생의 목적지가 된 일본이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근대성의 대표자”의 표상을 구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장하도다 우리 학도 병식 행보가 나파륜 (拿破崙: Napoleon)의 군인보다 질 것 없겠네”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의 체조 노래: 주요한, <안도산전>, 삼중당, 1975, 71쪽)와 같은 개화기의 수많은 시가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나 독일, 미국 등의 서방 국가들의 “최상의 근대적인 권위”는 늘 인정돼 왔지만, 머나먼 그들과 달리 가까운 일본은 일단 손쉽게 따를 수 있는 “현실적인 모델”이었습니다. 1905-1910년 간의 개화기의 주요 학술지들을 보면, 자치제나 근대 법률, “정신 교육”의 원칙부터 조혼 폐지와 여성의 이혼 권리의 확립까지의 거의 모든 “근대화”의 구체적인 분야에서는 “유신 이후의 일본”은 일차적인 참고 모델이 된 것입니다.

<대한매일신보>처럼 확고한 반일적인 입장을 취한 매체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즐겨 사용했던 근대적 어휘와 개념들 – 예컨대 “국가 사상” (1910년 6월 25일자 논설, “소리 없는 무기”)이나 “국수” (國粹: 1908년 8월 12일자 논설, “국수보전론”), “정신 상의 국가” (같은 이름의 1909년 4월 29일자 논설) 등의 국가주의적인 어법의 요소들 – 은 거의 다 당대 일본의 매체에서 사용되었던 일본의 국가주의적 근대의 주된 관념들이었습니다. 어떤 <대한매일>의 논설들은 “서구의 정신이 자유 독립이고 일본의 정신이 명치 유신의 정신인 것처럼 우리 대한의 정신도 있어야 한다”는 “그들이 그렇기에 우리도 그래야 한다” 식의 논리를 편 “대한 정신”이라는 유명한 논설(1907년 9월 29일자)처럼, 일본 근대의 구체적인 현실들을 “우리의 근대”의 참고로 직접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즉, 근대주의적인 항일 운동가들은 “적대적 타자”로서의 일본의 근대적인 “유의미성”을 결코 부인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위협”인 일본은 그 동시에 “근대의 교사”이기도 했습니다.

***“강간” 형태의 “근대 수업”**

파르타 차테르지 (Partha Chatterji)라는 유명한 탈식민(post-colonial) 이론의 대표자가, “근대성에 대한 원한”이라는 것이 식민지 내지 구(舊) 식민지 지성인으로서 정상적인 정서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서구 침략의 결과로 제3세계로 전락하게 된 아시아 대륙의 전통적인 문화 중심지 – 중동이나 인도, 중국, 한국 등 – 가 서구적 근대성의 세례를 강제로 받은 만큼, 근대로의 전환을 “가치의 상실”로 인식하는 것도, 일종의 “강간”에 비유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차테르지가 주된 준거로 삼은 인도의 경우도 그랬지만, 하물며 전통 시대 내내로 늘 천시해온 “도이"(島夷)들에게 전통 문화의 가치라는 “정조”를 빼앗긴 한국의 경우는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웬만하면 극언을 삼가하는 유림 출신들이 일본이 “그 놈들의 수도를 빈터로 만들며 그 종족을 멸종시킬 만큼의 천지가 용납 못할 죄를 범했다”(최익현, 1898년 10월 9일의 상소문)고 말하고, “강도 일본과 그 주구에 대한 암살, 파괴 폭동"(신채호, “조선혁명선언”, 1923년 1월)을 외친 것으로 보면, 당시의 원한이 어느 수준에 달했는지 알 수 있고, 박정희 정권의 국내적 지지 기반이 “굴욕 외교”로 인식됐던 1965년의 한일 수교 이후에 급속도로 파괴돼 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면, 그 원한이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원한이 강한 것은, 항일에 목숨을 바친 사람뿐만 아니고 식민지의 현실에 순응한 사람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우리가 통상 1920-30년대의 윤치호를 “친일적 인물”로 보지만, 그가 그 일기에서 “조선에 충만한 것은 천황의 은혜가 아니라 천황의 악의이다”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일상적인 오만과 핍박을 한탄했습니다. 정치적 지향이 아무리 현실 순응적이라 해도, 속 깊은 곳에서 원한을 갖지 않기란 매우 어려운 노릇이었습니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이러한 원한의 직접적인 동기는 대개 –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지적했듯이 – 일본인들의 인종주의적인 일상적 폭력이었습니다. 식민화 이전이었음에도, 1890년대에 일본 상인들은 조선인들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괴롭혔습니다:

“시가로 5천환씩 하는 토지를 저당 잡아 불과 1-2백환만을 빌려주고 이에 50-80%의 고리를 받을 뿐만 아니라 원래 저당 잡힌 땅을 빼앗으려고 하는 대금인지라 기한이 오면 법률을 앞에 내세우고 용서 없이 토지를 빼앗는다. (…) 혹은 상점에 조선인이 나타나 상품을 손에 들고 값을 물었다가 만일 그것을 사지 않는 경우에는 손때가 묻었다고 하여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없다 하여 트집 잡아 20-30% 이상 비싸게 메긴다” (龜岡榮吉, <朝鮮を直視して>, 경성, 1924, 32쪽 – 최준, <한국신문사>, 일조각, 1990, 75쪽에서 재인용).

“천황의 악의”라는 윤치호의 표현은, 이처럼 일상적인 폭력을 당하면서 사는 식민지의 백성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것을 의미했던 셈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보자면, 당당한 항일적 입장에 섰던 사람들도 일본으로부터 근대를 배운다는 것을 당연한 걸로 생각한 것도 사실입니다. “조선의 문명이 일본에 미치지 못함은 사실인즉, 독립한 후에 문명을 수입하려면 일본을 외면하려면 달리 길이 없을 것이다”. 3.1 운동이 일어난 이후에 투옥된 만해 한용운(1879-1944)의 명저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1919)에서 나온 문구입니다. 1908년에 일본을 시찰한 한용운은, 정치적으로 확연히 독립 지향적 입장에 섰음에도, 한국 불교의 개혁에 있어서 일본의 전례를 많이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양어를 잘 몰랐던 관계로 세계 시사를 읽는 데에 있어서 주로 일본의 신문과 잡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즉, 한마디로 원한을 원한대로 품으면서도 “근대의 공부”를 일본을 통해서 하는 것은 정치적 지향과 무관하게 한국 근대 지성의 하나의 특징으로 봐야 할 듯합니다. 거듭 강조해서 말씀 드리지만, 이 과정에서 일본 특유의 근대적인 전체주의적 이념들 – “단일 민족”이라는 배타주의적 관념이나 “국민 의무”에 대한 무조건적 강조 등 –이 한국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것은 한국 근대의 최대 비극 중의 하나입니다.

***탈근대적인 공존: 길의 모색**

원한과 지속적 “따라잡기”를 강요하는 일본의 “근대적” 권위에의 승복… 특정 국가에 대한 피해 의식에 기반한 근대적 “민족” 정체성의 형성… 일본의 폭력에 대한 깊은 원한을 가지면서도 일본의 “인정(認定)"을 갈구하는 “따라잡는” 마음… 불우한 역사가 낳은 이 복잡한 감정들을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요?

우파 헤게모니 구조의 완전한 해체가 불가능하다 해도, 일본 사회가 적어도 어느 정도 근대 지상주의를 극복하여 메이지시기 서구화의 야만적이며 배타적인 측면들에 대해서 충분히 자각, 반성한다면, 그리고 한국이 일본 정도의 경제적인 수준에 도달하여 “일본 컴플렉스”의 물질적 원인이 없어진다면 한일 양국이 프랑스와 독일처럼 불우한 과거를 잊고 새로운 연대와 연합의 시대를 열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위해서 양쪽의 지식인들이 근대적 국가지상주의적 패러다임의 해체와 인간 위주의 새로운 포용적인, 화쟁적 사관(史觀)의 성립에 노력해야겠지요?

아직도 영하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도움이 된 책**

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돌베개, 2002, 207쪽.

주요한, <안도산전>, 삼중당, 1975.

최익현 저, <면암집>, 민족문화추진회 편, 솔, 1997, 제1권,

안병직 편, <한용운>, 한길사, 1979.

권태억, ”근대화, 동화, 식민지유산”, - <한국사연구> 108. 서울: 한국사연구회, 2000.

권태억, ”자강운동기 문명개화론의 일본 인식”, - <한국문화> 28. 서울: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2001.

Partha Chatterji, Our Modernity, SEPHIS, Rotterdam, 1997.

Commemorations: The Politics of National Identity, ed. John R. Gilli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Gi-Wook Shin and Michael Robinson, eds. Colonial Modernity in Korea.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999

***이 시리즈는 앞으로 박노자 교수와 허동현 교수가 1주 간격으로 쓰게 됩니다. 따라서 허 교수의 반론은 오는 12일 실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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