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선생님
반갑습니다.
무엇보다도 종래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던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인식을 비교해보면 그 척도가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인들이 왜구의 침입, 임진왜란, 식민지 지배를 이유로 일본에 보인 적개심과 증오감에 비해 병자호란, 1882~1895년간의 준 식민지배, 6.25전쟁 개입 같은 중국의 침략행위에 대해서는 형평을 잃을 만큼 관대하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아마도 중국은 선진 문물의 공급원이었고 우리는 이를 충실하게 수용한 "동방예의지국"이었기 때문일 터이지요.
8세기 중엽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성씨ㆍ인명ㆍ지명ㆍ관직명 등을 중국식으로 바꾼 이후 개항(1876) 당시까지 우리는 중국문화를 따라 배워 온 중국지향형의 문화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우리는 문화 수용의 통로를 서구 내지 일본으로 전환함으로써 서구 내지 일본 문화를 열렬히 추종ㆍ모방하는 서구지향형 내지 그 아류(亞流)로서 일본지향형의 문화권으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문화란 물과 같아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법이지요. 거시적으로 볼 때 근대 이전에는 중국에서 발원한 '문화'란 이름의 강물이 동류(東流)하여 우리 문화의 토양을 살찌웠지만, 지금은 개항 이후 서구 근대의 여러 가치를 자기화한―다원적 시민사회, 경제성장, 그리고 역동성으로 상징되는―현대 한국문화가 중국으로 역류하는 한류(韓流) 현상을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선생님의 지적처럼 현재 우리 사회 일각에 동양을 비하하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서양인의 하얀 가면을 쓰고 그들의 눈을 빌려―오늘의 중국을 내려다보는 풍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각이 고정 관념화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새로운 시각에서 중국을 알려고 하는 한국 젊은이들의 중국 유학 붐이 상징하듯, 중국의 장래를 낙관하는 경향―"한조(漢潮)"―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2002년 3월 4일자 홍콩의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은 "한조 넘실, 서울을 태운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전국2백여개 대학에 중국 관련학과가 있고 중국에 유학한 한국 학생이 3 만명을 넘어선 우리 사회의 중국 열풍을 손에 잡히게 그려내고 있더군요.
이 기사를 보고 저는 한국 문화에 대한 중국 젊은이들의 관심을 반영하는 한류와, 한국 젊은이들의 중국 배우기가 상징하는 "한조"가 제대로 합류한다면, 지식인들의 지적 공동체 복원은 물론, 시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마음의 거리도 좁혀져 두 나라가 가치를 공유하며 더불어 사는 날도 머지 않아 올 것 같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한ㆍ중 두 나라사이에 지적ㆍ인적ㆍ물적 교류의 연결망이 더욱 긴밀해지길 기대하며 제 생각을 밝혀 보겠습니다.
먼저 박지원과 같은 북학파 실학자들의 중국인식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순서겠지요. 저 역시 그들이 청나라를 문화적 열등자로 깎아 내리는 동시대 대다수 지식인들과 달리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넘어서서 중국을 배울 것을 제창하면서도 중국 지배체제의 모순에 눈감지 않은 점을 높이 평가합니다. 박지원이 "내가 이 책을 펴보니 나의 『일록(日錄, 열하일기)』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어, 마치 같은 사람이 쓴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고 평한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북학의(北學議)』(1778)에는 중국 배우기를 넘어서 해외통상을 촉구하는 탁견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나라가 작고 백성들이 가난하다. 이제 농민에게 밭을 가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게 하고 국가에서는 인재를 등용하고 상업이 잘 유통될 수 있도록 하며, 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혜택을 주어 나라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총동원한다 한들 부족함을 면하기가 어려울 듯 하다. …송나라 때 배로 고려와 교류할 때 명주(明州)에서 7일이면 예성강에 닿았다 하니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조 4백년 동안에 딴 나라 배가 한 척도 오지 않았다. …선주를 손님 접대하는 예로서 후하게 대접하기를 예전 고려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한다면, 저들은 우리가 구태여 초청하지 않더라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찾아 올 것이다. 그 사이 우리는 기술을 배우고 그들 나라의 풍속을 알아내어 백성들의 견문을 넓혀 주게되면 천하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될 것이고, 그 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알고 부끄러움을 알게 될 것이므로, 이처럼 외국인과의 교류는 통상에서 얻는 이익 외에도 세상이 나아가는 도를 깨우쳐 주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오직 중국의 배만 통하게 하고 해외의 다른 나라는 통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은 일시적인 책략이지 정론(定論)은 아니다. 이제 앞으로 국가의 힘이 강해지고 백성의 생업이 안정되게 되면 차례차례 이들과 통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김승일 역, 박제가 저, 『북학의』(범우사, 1995), 168~173쪽)
통상만이 아닌 의식의 개방까지 촉구한 박제가의 탁견을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이 받아들여 실천에 옮겼다면, 우리도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의 전환을 타력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었겠지요. 그렇다면 다음세기에 동아시아에서 펼쳐진 "시간과의 경쟁"에서 낙오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동시대나 이전 시대의 지식인에 비해 앞서 있었던 북학파의 사상도 그 역사적 위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일국사의 관점을 넘어 세계사의 흐름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해외 통상론은 16세기에 이미 아시아까지 무역망을 넓혔던 서양과, 17세기 쇄국 하에서도 네덜란드에게만은 나가사키 무역을 허용했던 일본과 비교해 볼 때, 그리고 이들의 북학론은 개인의 존엄성과 인권의 소중함을 이야기한 동시대 서구 지식인들의 사상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보다 합리적인 역사적 자리 매김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또 하나 저 역시 이라크 파병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파병을 "무조건적 숭미주의"의 결과물로 보거나, 이를 용인하는 사람들 모두를 "통찰력과 비판능력"이 결여된 "미제의 지역적인 대리인"인 "숭미파"로 보는 것은 지나친 이분법이 아닐까요? "타자를 잘 보고 다차원적으로 이해하는 기술을 배워야"한다는 선생님 말씀처럼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쪽의 생각도 품고 이해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만이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지키는 첩경이 아닐는지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시발로 사회주의권이 무너져 내렸을 때, 미국의 우파 지식인 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역사는 끝났는가?(The End of History?)"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졌지요. 인간의 머리에서 짜낼 수 있는 이데올로기 상에 있어서의 진보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났으니, 비 서구 국가 모두는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의 헛된 꿈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 "세계화"를 통해 세계자본주의의 표준을 따라 변신하라고 목청을 높였지요.
이에 맞서 좌파 지식인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은 사회주의진영의 붕괴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거둔 최후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세계체계(Modern World -System)"의 해체가 시작되는 자본주의 붕괴의 신호탄이자 폭력에 호소하는 세계질서 재편의 전개를 예고한다고 보았지요. 강자의 패권 추구와 이에 맞서는 약자의 저항이 작열하는 카오스 같은 오늘의 세상을 볼 때 앞으로의 세계사가 어떤 쪽으로 흘러갈지 그 누구도 장담 못할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역사는 과연 반복하는가요?" 거시적으로 조망할 때 한 세기전과 오늘은 크게 두 가지의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기존의 국제질서가 깨지고 "세계화"라는 물결이 도도하게 밀려온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한 세기 전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인 조공체제가 붕괴―선생님 표현으로는 "중국의 지역적 헤게모니가 파괴"―되는 와중에서 한반도를 놓고 열강이 패권을 겨루었듯이,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싸고 열강의 힘 겨루기가 다시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하나의 유사점이겠지요. 그것이 선생님 말씀대로 미국과 중국의 패권 쟁탈전일 가능성도 있지만, 백년 전과 마찬가지로 중국ㆍ일본ㆍ러시아 같은 "이차적 제국주의" 세력들의 각축장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닐는지요?
한 세기전 동아시아지역에 세계화의 충격으로 국민국가 형성의 시기가 도래했을 때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일으켜 서구 근대 국민국가의 모형을 일본화 하는데 성공한 반면, 중국과 한국 두 나라는 실패의 역사를 써야만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급진개화파"나 "온건개화파"나 모두 "반민중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주변부형 관료 자본주의"를 꿈꾸었다는 데서 별 차이가 없지만, "악질적 서구 중심주의"에 함몰된 "모방적 오리엔탈리즘"의 눈으로 중국을 본 급진개화파보다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양무(洋務)운동을 모방한 "온건개화파"가 "조선의 반상이 동의할 수 있는 '합의의 정치'"이자 "중도정책"을 펼쳤다고 보아 온정적인 시선을 보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온건개화파"가 주도한 갑오경장은 중국의 양무운동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와 마찬가지로 일본형 국민국가를 수립하려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갑오경장 주도세력들은 국가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내각(內閣) 중심의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와 제한적 대의정치의 도입, 경찰제도의 창설과 법제의 근대화, 그리고 상비군(常備軍) 양성을 꾀했으며, 경제통합의 방안으로 왕실 재정의 정리를 통한 정부 수입의 증대, 징세법 개량, 새로운 세원의 발굴, 정부 주도하의 민간 상공업 진흥 등을 도모하는 한편 이에 필요한 재정수요를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으로 조달하는 계획을 세운 바 있었습니다. 나아가 이들은 국민통합을 위해 전통적 신분제도의 철폐와 근대적 학교제도의 보급을 통해 국민을 창출하고 육성하고자 했으며, 중국에 대한 조공(朝貢)을 폐지하는 등 대외적으로 국가의 자주와 독립을 확보하려고도 했기 때문입니다.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중국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이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서 조선을 보호해주는 "보호자"가 아니었으며, 선생님이 지적하셨듯이 이미 "고압적이고 착취적이면서도 구미 제국주의와 달리 교육과 의료 같은 선진 문물"을 이식해 주지 않는 "후진형 제국주의" 국가로 돌변했으니 말입니다. 사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중국의 "이차적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탈할 당시 "온건개화파" 인사들은 친청(親淸)ㆍ보수의 민씨 척족정권 아래에서 중국의 주차관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에게 "독립노선파"로 찍힌 반청 인사들로 탄압과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온건개화파"의 대표 인물인 김윤식조차 1886년에서 1893년까지 죄인으로 유배당할 만큼 이들은 모두 정부요직에서 쫓겨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중국을 긍정적으로 볼 리가 없다는 점은 미루어 알 수 있겠지요. 당시 중국에 대한 호오(好惡)와 긍부(肯否)의 갈림은 "급진개화파"과 "온건개화파" 같은 세계질서의 변동을 직시하고 이에 대응하려했던 지식계층의 내부에서 찾기보다는 유교적 구질서와 세계관을 지키려한 위정척사적 지식인이나 동학과 같이 전통문화를 지키려한 민중들과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응하려한 세력들 사이에 존재한 인식의 균열에서 찾아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보호자인가, 침략자인가? 1882년 3,000명의 군대로 임오군란을 진압한 후 조선의 내외정치에 직접 간섭하면서부터 중국은 서구열강과 일본의 침략을 막아주는 보호자인지, 근대화를 가로막는 침략자인지 그 정체가 모호해지고 말았습니다. 중국은 개화기에 유교적ㆍ도덕적 가치를 지키려 한 위정척사나 동도서기 계열의 사람들이나, 전통가치를 지키려 한 동학교도들에게는 여전히 중화이자 문명이었지만, 서구 근대를 따라 배우려 한 개화파 인사들에게는 이미 미개한 야만국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모순된 중국 인식은 일제하에서 냉전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일제하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세력에게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믿음직한 후원자였지만, 6·25 전쟁 이후 냉전시대 남한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중국 공산당 정부는 통일을 가로막는 침략자로 보였습니다. 반면 중국 공산당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세력들에게 사회혁명의 이상을 같이하는 동지였고, 냉전시대 북한의 위정자에게는 "제국주의 미국"의 침략을 물리쳐준 독립의 옹호자였습니다. 오늘의 한국인들이 중국에 대해 애증이 교차하는 모호한 감정을 갖게 된 이유 역시, 냉전적 세계관과 이념체계의 영향뿐 아니라, 중국이 개항 이후 행한 후원자이자 침략자라는 이중적 역할의 영향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남한의 적국, 북한의 형제국이란 구시대의 고정관념에 기반을 둔 중국 인식은 냉전해체와 한중수교(1992) 이후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로운 시장이자 기회의 땅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중국이 남한 사람들에게 적국이란 낡은 이미지 대신 경제발전의 동반자이자 세계시장의 경쟁자로 비추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지금 현안이 된 핵 보유 문제나 동북공정에 보이는 고구려에 대한 역사 기억을 둘러싼 갈등이 웅변하듯 북한의 위정자들에게 중국은 더 이상 운명을 같이 할 만큼 믿음직한 후원자나 보호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 경험에 비추어볼 때, 화이론(華夷論)이나 냉전 같은 이분법적 세계관이나 이념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중국이 적이나 동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지만, 힘이 곧 정의인 지금은 침략자일 수도 혹은 후원자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중국은 신자유주의와 세계체제의 폭압에 저항해 인간의 얼굴을 한 세상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미국의 패권추구에 맞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남아 있는 마오쩌둥의 사상과 "중국혁명"의 유훈이 살아 숨쉬는 땅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한 세기 전의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또 다시 지역 내에서의 패권추구에 나선 "이차적 제국주의" 국가의 모습으로 비추어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외치며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전개한 한 세기 전 중국과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외치며 "개혁ㆍ개방정책"을 추진하는 현 중국의 모습은 너무도 유사합니다. 근대 이전에 동아시아 지역에는 중국이 세계를 한(漢)민족과 오랑캐(夷)로 구별하는 화이사상에 입각해 차별하는 화이(華夷)사상과 자연계와 인간세계에 상하의 서열이 존재한다는 유교사상에 기초해 중국을 종주국으로 주변국을 속방으로 삼는 종속체제가 구현되어 있었지만, 이러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는 도덕률에 의해 규율되었기에 속방의 내치와 외교는 자주였고 힘으로 간섭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양무운동이 전개된 1860년대 이후 중국은 이리(伊ꝃ, 지금의 신강지역)를 놓고 러시아와, 유구(琉球, 지금의 오키나와)와 조선을 두고 일본과, 베트남을 갖고 프랑스와 패권을 다툰 제국주의 국가였습니다. 세상을 적과 동지로 이분하고, 자본주의 제국의 침략에서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을 지원한다는 국제협력의 기치가 살아있던 냉전시대에도 중국은 적국 미국과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싸운 것 이외에도 이미 사회주의 형제국인 소련과 베트남과 영토를 둘러싼 분쟁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이념의 속박에서 풀린 오늘 중국의 지역 내 패권추구는 예상컨대 냉전 시대에 비길 바가 아니겠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반미적 지식인들도 중국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것이겠지요. 저는 티베트 민족억압이나 동북공정에서 보이는 현 중국정부의 패권주의를 "본질적인 패권 야욕"이 아니라 "서구의 식민주의와 개발주의를 철저히 본 딴 것"이니 좀 너그럽게 보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조 범죄자를 흉내낸 모방범죄자라는 사실이 면책사유가 되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자! 다시 돌아온 약육강식의 시대에 우리 눈에 맺힌 중국의 이미지는 동반자일까요 침략자일까요? 아마도 중국의 향후 역할은 우리하기에 달려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의 중국을 만든 두 인물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과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 이 두 사람이 주도한 "문화혁명(1966~1976)"과 "개혁·개방정책(1978~ )".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두 사람과 지도노선에 대한 평가는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검은 고양이건 흰 고양이건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과 "부유할 능력이 있는 사람부터 부유해져라"는 "(先富論)"을 내걸고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보다는, 서구 신좌파(New Left) 학자들에게서 한때 "만민평등과 조직타파를 부르짖은 인류역사상 위대한 실험"이라는 최대의 찬사를 받았던 "문화혁명"을 이끈 마오쩌둥에게 높은 점수를 주시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덩샤오핑은 "서구 근대의 무분별한 개발주의 신념과 정책"을 모방해 환경을 파괴한 개발독재자로서 "중국형 박정희"이자, 경쟁원리를 설파해 평등이라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깨트리고, 세계체제에 영합해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들어 민중을 자본의 착취대상으로 전락시킨―"중국혁명"의 이상을 무너뜨린―장본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시각을 달리하면, 1981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ㆍ국가ㆍ인민에게 건국이래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모택동의 극좌적 오류"라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던 "문화혁명"도 서구 자본주의제국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대안적인 근대―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맞서 중국민족의 독립을 지키고,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며, 서구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국민경제 시스템을 지키는―를 찾다가 빠져버린 극단이라고 면죄부를 줄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개혁ㆍ개방정책"으로 세계체제에 편입되어 "세계의 공장"이 되어버린 중국의 노동자들이나 민중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지하 서클에서 모택동 사상을 다시 학습하는 중국 노동자 같은 중국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문화혁명"과 마오쩌둥의 시대가 "황금시대"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홍위병(紅衛兵)과 대자보로 상징되는 그 시대에 일어난 비극을 되새기는 중국의 "개혁·개방정권"과 지식인들이 기억하는 마오쩌둥의 시대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 같습니다. 현재 중국은 "기억의 내전"을 치르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한때 서구에서도 1960년대 학생운동을 이끈―오늘의 환경운동ㆍ반전운동ㆍ페미니즘운동을 주도한 NGO운동의 선구자들로 거듭난―주도세력들이 당시 서구 자본주의의 폐해를 넘어설 대안으로 마오쩌둥의 사상과 문화혁명을 가슴에 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사실 1970~80년대 개발독재의 폭압에 항거하던 우리 젊은이들과 지식인들 중에도 물신(物神)숭배의 자본주의에 찌든 우리사회의 모순을 넘어서는 대안으로 중국식 사회혁명을 꿈꾼 이가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러한 중국인식이 퍼지는데 큰 영향을 미친 책이 리영희 선생님이 편역한 유신시대의 대표적 금서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 비평사, 1977)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시발로 사회주의권이 무너져 내리고 천안문 사태가 무력으로 진압되자, 우리사회의 병폐를 고치는 묘약으로 중국식 사회주의와 인간형이 더 이상 유효하다고 보는 사람들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지요.
선생님께서는 "마오쩌둥의 사상" 내지는 "문화혁명"으로 귀결된 "중국혁명"의 이상과 가치가 오늘날에도 세계체제와 신자유주의에 맞서 중국민중의 미래를 밝혀줄 희망이자 모든 세계인을 폭력적 세계화의 함정에서 건져줄 동아줄일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인 수원에서
허동현 드림
<더 볼만한 책>
강만길.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 창작과 비평사, 2002.
송병기. 『근대한중관계사연구』. 단국대출판부, 1985.
김기혁.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한국사시민강좌』7, 1990.
왕후이 저, 이욱연 외 역.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 창비, 2003.
야마무로 신이찌 저, 임성모 역. 『여럿이며 하나인 아시아』. 창비, 2003.
민두기. 『시간과의 경쟁』. 연세대출판부, 2001.
유영익, 『갑오경장연구』. 일조각, 1990.
池田誠 외 저, 김태승 역. 『중국공업화의 역사』. 신서원, 1996.
가시모토 미오 외 저, 김헌영 외 역.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 역사비평사, 2003.
이혜경. 『천하관과 근대화론: 양개초를 중심으로』. 문학과 지성사, 2002.
이양자. 『조선에서의 원세개』. 신지서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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