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민당을 중심으로 한 독일 진보세력의 1919년 혁명 실패는 결국 10여년 뒤 나치스의 집권을 가져왔다. 파시즘을 불러온 노동계급의 패퇴는 사민당 지도부의 기회주의적 처신과 혁명적 의지의 결핍이 가장 중대한 원인을 제공했던 것으로 역사는 평가한다. 독일 사민당은 이 과정에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라는 탁월한 이론가이자 열정적인 혁명가를 잃고 만다.
마르크스 자서전의 뛰어난 저자 프란쯔 메링(Franz Mehring)이 "마르크스 이래 최고의 두뇌"라고 부른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동지인 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48세의 아까운 나이에 유럽 진보세력의 역사적 진출이 좌절된 무대 위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의 죽음은 착취와 불평등으로 인한 인간소외를 심화시키고 전쟁을 포함한 야만의 현실을 그 구조적 속성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극복에 필요한 민주혁명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과 민주혁명의 험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진보세력의 투쟁이 가진 최고 목표는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강조했다.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약자들의 정치경제적 권리가 주체적으로 확보되는 것이 곧 민주주의의 완결이라고 주장한 그녀는, 이것을 이루어내지 못할 때 자본의 권력은 인류사회를 야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것이라고 수없이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녀의 이러한 거듭된 경고는 당시 독일 진보진영에 의해 절실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 파시즘의 도래 이후 그 가공할 실체가 비로소 깨달아졌다. 하지만 그 깨우침은 희생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었다.
러시아 혁명의 파장 속에서 당시 유럽의 진보세력은 독일을 주목했었다. 독일혁명의 성공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침탈이 시작된 1492년 이래 유럽의 역사를 관통해온 제국주의적 팽창체제의 종식과 함께 새로운 세계체제의 형성을 내다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가능성의 현실로 인식되었었다. 따라서 독일 혁명의 역사적 책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모순에 대한 혁파보다는 자본주의 체제의 잉여를 나누어 갖는 일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에 더하여 이른바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독일 국가주의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용인해버린 사민당 일부 지도세력의 배신적 투항은 노동계급의 혁명의지에 심각한 폐해를 끼치고 말았다.
***진보진영 지도부의 확고한 자세가 갖는 역사적 의미**
독점자본과의 일정한 타협, 전쟁정책에 대한 지지 등 일련의 과정은 사민당의 정치력을 기존질서에 확대시켜나가는 것처럼 인식되었으나 사실은 독일 진보진영의 장래에 족쇄를 채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노동계급의 정치력을 일정하게 희생시킨 대가로 얻은 사민당의 정치적 위상은 그 정치적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의 계약"에 불과했던 것이다.
독일 사민당의 역사는 이러한 점에서 진보정치세력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그것은 "대중과 함께, 그러나 대중보다 한걸음 앞서"에 필요한 원칙적 통찰력과 용기 그리고 의지와 역사적 실천의 꺾이지 않는 기세이다.
***민노당 노회찬 선대본부장의 일기**
민주노동당의 노회찬 선대본부장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자신의 <선대본 일기> 2004년 1월 15일자에 MBC 100분 토론에 임하는 이야기와 함께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과 관련된 소회를 적고 있다. 그녀가 살해당한 지 85년이 되는 날에 대한 회상이 그녀의 다음의 말을 인용하면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것은 노동자의 자기해방이 아니면 안 된다. 누구도 당신을 위해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사람은 없다."
사회주의를 끝까지 민주주의의 문제로 인식한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의 확신이 딛고 서 있는 땅은, 노동자들 자신의 해방을 향한 주체적 의지와 행동이었으며 이것이 민주주의의 완결에 요구되는 역사적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시대와 환경은 다르지만, 그리고 그 놓여 있는 현실에 필요한 이념적 좌표의 구체적 실상 또한 차이가 있으나 오늘날 한국사회가 직면한 가혹한 혼란을 극복하고 해결책을 제시해나가기 위한 근본적 원칙에 있어서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고뇌하고 투쟁했던 1910년대의 독일과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이 다르지 않는가? 사미르 아민(Samir Amin)이 지적하고 있듯이 "1492년 체제"는 지금도 여전히 작동중이며 이는 노동하는 이들을 시효가 다하면 폐기처분해도 되는 상품으로 취급하고 이윤과 임금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그로 인해 반복되는 위기의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상황이 종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가 가하고 있는 각종 억압과 착취, 기만과 야만에 희생당하고 있는 이 땅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대변자로서만이 아니라 이들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이 나라 역사에 혁명적 진출을 꾀하도록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민주노동당 창당 4주년의 역사는 지난 세월 이 땅의 진보진영이 겪었던 희생과 헌신 위에 서 있다. 그러기에 그것은 단지 4년이 아니라, 우리의 선조들이 1차 대전 이후 세계적 진보운동에 합류하기 시작했던 지난 100년에 가까운 세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흐름 속에 존재한다. 그러기에 민주노동당의 역사적 현존은 만만치 않다. 다만, 현실 정치에서의 연륜이 짧다고 여길 뿐이다.
***지난 역경이 도리어 자산**
그러나 그 짧은 연륜은 도리어 다행스럽기 짝이 없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정치권의 구제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패륜에서 민주노동당은 비켜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노동당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정치적 생명력을 길러나가야 할 것인지를 반면교사적(反面敎師的)으로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냉전체제 아래 오랜 이념 공세의 박토(薄土), 어려운 언론환경, 대중들의 인식 부족, 정치적 후발자로서의 불리함 등 여러 가지로 힘든 요소들이 있으나 각도만 달리 해서 생각해보면 바로 이러한 여건들이 민주노동당이 이 나라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 뚫고 나가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참신하고 힘 있게 제시해나갈 수 있는 자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역경 앞에서 진보정치의 원칙을 관철해 나가는 용기와 의지, 그리고 대중들의 마음 속 깊이 뚫고 들어가는 진정성과 성실성이 결합해나간다면 민주노동당의 앞날은 밝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의 대중 인지도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그로써 새로운 대안세력의 정치적 구심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도 이 나라 진보정치의 앞날을 위해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민혁명"을 외치고 있는 노무현 정권의 현실은 그 외침에 어울리지 않는 역사적 퇴행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과오는 줄이고 남들의 과오는 키우는 자세로 시민 혁명의 주도자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혁명은 역사적 전망의 제시도 없는 채로 정치적 세몰이를 통한 권력 장악과 유지가 아니라, 억압과 착취, 기만과 폭력, 민족적 굴종과 식민지적 상황을 낳고 있는 기존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 혁파에 나서는 결단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이 땅의 민주주의 완성 역군이 되기를**
보수 정치권은 이러한 결단을 내릴 수 없다. 그것은 곧 자신의 기반을 스스로 부정하고 무너뜨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책임을 감당할 주체는 진보진영일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 4주년을 축하하며, 이 나라의 진정한 민주주의 완성을 위한 민주 혁명의 역군이 되어나가기를 기원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의 생명력을 최고의 가치로 놓지 못하게 하는 야만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교육의 현실을 극복하고 이 나라 구성원 하나하나가 자신의 삶과 역사에 주체가 되어가는 길을 뚫어나가는 일에 큰 몫을 다해나갈 수 있기를 비는 마음이다.
이 어지러운 시대적 현실은 민주노동당에게 최선의 기회를 주고 있다. "보수정치의 파산"에 따르는 주도권의 이동과정이라는 매우 의미 있는 지점에 우리는 지금 서 있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필연적 단계이자 시대의 엄중한 요구이기도 하다. 이 기회와 이 요구 앞에 어떻게 결단하고 행동하는가에 민주노동당의 장래가 걸려 있으며 이 나라 역사의 전진여부가 결정되어 갈 것이다.
장차 야만의 권세가 우리를 향해 덮치는 것을 단호하게 막아내기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성공을 바라 마지않는다. 인간의 존엄성과 평화의 가치, 그리고 지구촌의 생명력을 지켜내는 민주주의의 성장 발전은 진정 진보진영의 정치적 주도권 장악을 요청하고 있다.
부디, 겸손하고 온유하게 그러면서도 당당하고 힘차게 대중들의 희로애락을 자신의 것처럼 삼아 한걸음, 한걸음 후퇴하지 않는 발걸음으로 전진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