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 'preaching to the choir'라는 표현이 있다. 목사가 '성가대원들에게 설교를 한다'는 뜻으로, 이미 내 편이거나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을 회유하거나 설득하려 하는 것을 두고 하는 비유다. 모르긴 몰라도, 성가대를 향해 복음의 메시지를 갈파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거나 스릴이 있는 일은 아닐 듯싶다. 결론은 이미 나 있는 바,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는 열성 신자들이 목사의 설교를 비판의식이나 적대감을 품고 들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교말씀의 논리가 허술하거나 억지 주장이 있더라도, 신앙적 대전제만 내 것과 일치한다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
2003년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상을 포함하여 웬만한 다큐멘터리상은 죄다 휩쓴 마이클 무어 감독의 'Bowling for Columbine'(2002)은 '성가대원들에게 설교하는' 그런 영화다. 미국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미국인을 포함한)에게 이 영화는 적지 않은 감동을 주었을 테고,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마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듯한 통쾌한 시각의 연속이며, 화자와 더불어 미국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한편 "아, 미국인도 이럴 수 있구나" 하며 감탄까지 하는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실로 이 영화가 제기하는 미국의 폭력 문화의 문제는 보편타당성을 확보하기에 충분한 소재임에 틀림없다.
'Bowling for Columbine'은 1999년 4월20일 콜로라도 주 리틀톤에 있는 콜럼바인 고교에서 발생한 대형 총기사건을 출발점으로, 미국의 기형적 총기문화와 유혈 낭자한 폭력의 역사에 대한 고발을 시도한다. 졸업을 한달 앞둔 두 학생이 중무장을 하고 학교에 나타나 13명을 쏴 죽이고 자신들 스스로 자결한 이 사건의 원천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무어 감독은 일상화된 폭력에 멍든 미국의 치부를 들춰내고, 평온한 듯한 표면아래 깔려있는 미국인들의 공포에 질린 모습들을 찾아낸다.
이 영화는 무어 감독 특유의 블루 칼라식 접근과 비아냥조의 인터뷰가 어우러져 직설적이면서도 반어적인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그 설정과 주제 모두 가치 있는 것들이다. 이런 영화가 반미감정이 팽배해 있는 유럽과 한국 등지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음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데 한국이나 유럽의 관객들은 그 유머와 재치에 매료되어 웃고 즐기는 와중에 그 논리의 허점과 뒤틀린 시각을 대충 흘려버린 것 같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자명하게 나타나는 무어 감독의 편향적 시각과 삼단논법적 논리, 그리고 선동적 화법은 이미 그와 시각을 같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몰라도, 약간이라도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보는 사람은 그 속에 당치않은 결론과 함량미달의 내용이 다분히 있음을 느끼게 된다. 특히 미국 권리장전 2조의 '무기를 소지할 권리'를 성역으로 생각하는 수많은 미국인들에게는 이 영화가 이 권리에 대한 여론을 호도하려는 진보주의자의 허튼 수작에 불과한 것으로 비춰진다.
미국은 지금 파랑(민주당)과 빨강(공화당)으로 뚜렷이 이분되어 있다. 크게 나누어 진보 쪽으로 기우는 민주당은 총기규제를 지지하고, 보수파인 공화당은 총기규제를 반대한다. 극도로 단순화하여, 미국의 절반 또는 그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보수들이 총기규제를 반대하는데, 이들은 마이클 무어 같은 리버럴에 대한 적지 않은 반감을 갖고 있다. 총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마치 광기 어린 저급시민으로 묘사하는 이 영화에 대한 그들의 시선이 곱지 않으리라고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미국 가정의 42%가 집에 총기를 두고 있다는 통계(2000년 갤럽)를 볼 때 더욱 그렇다.
무어 감독은 이같이 가뜩이나 편이 확연하게 갈려있는 이슈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다루면서, '사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치밀하고 신중한 자세로 임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를테면 '사우스파크'식 애니메이션을 통해 1871년에 창립된 전국총기협회(NRA)가 마치 1866년에 창립된 KKK의 자매단체인양 묘사한 것과, 미국의 총기관련 살인 건수를 영국· 호주· 캐나다 등 타국의 수치와 비교하면서 단순하게 숫자만을 부각시킴으로써 실제 인구대비 건수보다 훨씬 높다는 느낌을 받게 한 것 등, 불성실한 아전인수식 논리가 곳곳에 보이는 것이다.
필자의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하는 대목은, 무어 감독이 공군사관학교에 모셔져 있는 B-52기의 명판이 이 전투기가 "7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베트남 사람들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하고 있다"고 한 부분이다. 실제로 이 명판에 새겨진 문구는 "72년 크리스마스 이브 공중전 끝에 미그기를 추락시켰다"(일부 발췌)라고 되어 있다. 무어는 여기에서 "미그기를 추락시켰다"는 부분을 "베트남사람을 죽였다"로 '의역'함으로써 교묘하게 민간인 학살을 연상케 하는 반칙을 범하고 있다.
마이클 무어는 'Bowling for Columbine'의 흥행을 계기로 뭇 총기소지자 단체를 비롯한 미국의 우익으로부터 만만치 않은 공격을 받고 있다. 그가 이 영화에서 시종 보여주는 우월감과 비아냥거림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 영화의 '사실 전달' 부분을 조목조목 해부하고 여기저기서 루머를 취합해 무어의 '거짓'을 까발리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진위를 모두 가릴 수는 없겠으나, 우익은 물론이고 뉴욕타임스· 뉴요커·빌리지 보이스 등을 포함한 진보 언론에서까지 이 영화의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지적할 정도면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논리구조의 엉성함이 '옥에 티' 이상의 수준임을 눈치 챌 수 있다. 사실 필자가 발견한 오류만 해도 대여섯 가지가 되니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엔, 문제의 근원은 마이클 무어가 이데올로그라는 것이다. 특정이념('자학적 리버럴리즘'이라고 할까)에 치우친 그가 자신이 설정한 전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왜곡된 팩트로 점철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는 데 문제가 있고, 아울러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진실의 추구보다는 편향적 메시지의 전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의 논지에는 이념과 액티비즘이 너무도 짙게 배어 있다. 그의 영화는 그 주제의 신선함이나 설득력이나 당위성의 여부를 떠나, 그 주제를 자신이 갖고 있는 이념의 도약판으로 이용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념은 여러 면에서 종교와 비슷한 양상을 띰으로, 논리나 타협이 설 자리가 변변치 않다. 그런 견지에서 이념이 원천인 무어의 작품은 결국 프로퍼갠더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프로퍼갠더의 기본 의도는 진실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다큐멘터리로는 46년 만에 처음으로 칸느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여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마이클 무어의 'Bowling for Columbine'은 프로퍼갠더 영화일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무어가 '부시 몰아내기'를 선언하고 요즘 민주당 대통령 예비선거에 출마한 웨슬리 클라크의 열렬한 지지자로 나선 것은 그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것에 비추어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다큐멘터리의 생명은 그 차가운 시선에 있다. 차가운 눈으로 현실을 보고, 맑은 시각으로 이념이나 감정에 흐려지지 않은 메시지를 전달하여야 한다. 다큐멘터리는 저널리즘과 같은 혼을 갖고 있다. 이만큼을 전제로, 나는 프로퍼갠더로서의 예술의 한계를 새삼 생각해 본다. 만일 'Bowling for Columbine'이 참으로 현실을 충실하게, 치우침 없이 파헤치고 그 의미를 전달한 작품이라면, 우익이든 좌익이든, 반미이든 친미이든 골고루 감동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한바탕 웃고 즐기고 나서라도 관객으로 하여금 그 메시지의 거부할 수 없는 진실 앞에 숙연케 하고, 고요한 성찰을 이끌어 내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우익과 좌익간의 싸움을 야기하는 작품이 되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Bowling for Columbine'은 엔터테인먼트로서는 분명 성공한 작품이나, 솔직히 다큐멘터리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성가대를 향해 하는 설교를 성가대원의 입장에서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진실을 전달한다고 하는 매개체들 속에는 이념이 도사리고 있다. 모든 것이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서 있는 요즘, 중립에 꿋꿋이 선 이들의 이념에 흐려지지 않은 차가운 시선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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