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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나라 민중의 진정한 이익을 대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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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나라 민중의 진정한 이익을 대변하는가?

<주장> 진보정치의 대약진을 위해

2004년의 한국정치는 이 시대의 진정한 과제와 정면으로 마주할 <진보정치의 약진>을 이루어야 하는 역사적 단계에 놓여 있다. 이에 성공하지 못할 때 우리는 정파적 정략과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일관해온 보수정치의 틀에 여전히 갇힌 채, 정작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사각지대(死角地帶)로 밀려나는 비극을 반복하게 된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선거 때에만 표를 얻기 위해 민중을 위하는 척 하면서 결국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는데 몰두하는 “보수정치의 기만적 이중성과 권력의 사유화(私有化) 전략”에 결코 속지 말고, 누가 진정 이 땅의 민중들을 위해 헌신하려는지에 대해 분명히 눈떠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각성이 실질적인 정치적 선택으로 이어지는 중대한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보수정치의 기만적 이중성 똑바로 봐야**

지난 2002년 이 나라의 정치사에 충격을 몰아왔던 “혁명적 노풍(盧風)”은 더 이상 없다. 집권전략으로 대중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한 정치적 몸짓을 했던 세력과, 역사적 과제의 근본적 해결을 지향했던 세력 간의 거리는 과연 멀었다. 그리고 집권에 성공한 세력은 곧바로 역사의 대의에 등을 돌렸고 정파적 계산에 유리한 선택을 우선함으로써 혁명적 변화의 절실한 전개과정을 왜곡시키고 말았다.

이는 마치, 프랑스 혁명의 과정에서 민중의 혁명적 열정을 집권전략으로 이용했던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긴 순간, 민중에 대한 배반을 개시했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들 부르주아 계급이 깨닫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마침내 부르주아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를 가져온 보나파르티즘의 도래를 스스로 준비한 과정이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대 혁명사>를 쓴 크로포트킨(Kropotkin)은 권력의 전제적 집중을 의미하는 보나파르티즘을 저지할 유일한 동력은 민중의 혁명적 의지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한 “직접 민주제”의 길을 역설했다. 그것이 곧 민중들의 역사적 이해를 관철할 수 있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지금 그러한 기로에 서 있다.

노무현 정권을 성립시킨 2002년 대선 이후 변혁의 대열은 잠시 혼돈에 처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누가 진정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순결하고 용기 있게 바칠 수 있는지 그 정체구분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그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칼 폴랴니(Karl Polanyi)가 날카롭게 갈파했듯이 역사는 일면적으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닌 법이다.

***시대적 과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진보정치**

민족의 주체성을 끊임없이 파괴하는 식민지적 현실, 그리고 빈부격차의 심화라는 사회적 양극화의 재생산 구조를 척결할 의지가 없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모순이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으나 이것이 그대로 방치된 채 이 나라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불가피하고도 불가역적(不可逆的)으로만 보이는 현실과 대결, 정면으로 해결하려는 진보정치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는 분명하다. 이 진보정치의 대중적 역량을 강화하는 노력에 힘을 모으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정치는 오로지 “저들만의 잔치”이자 이 나라의 앞날은 암담해져 갈 것이다. 실로 대안은 있다. 그것을 선택하려는 용기와 의지가 있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소수 특권세력의 기득권 질서를 타파하고 민중의 정의로운 생존권을 확보하며 민족의 주체적이고 평화로운 통일의 길을 열어나가는 동시에 민주적 참여 사회의 근본을 세우기 위해 집결했던 대중적 힘은 정치적 환멸의 늪에 빠져 있다. 또한 “분명한 대안세력의 부재”라는 허상적 논리로 인한 세뇌로 말미암아 전망과 열정으로 충만한 집단적 의지가 발동될 계기가 잡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계기는 이제 모두에게 확연히 인식되어 갈 것이다.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정치의 역량은 그간 알게 모르게 성장해왔다. 이 힘들은 기존 언론의 무시와 차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끈기 있게 이 나라의 운명과 관련된 발언권을 길러왔으며 보수 정치의 기회주의적 처신과는 달리, 정치경제적 사안을 비롯하여 대외관계에 있어서 민중적 원칙과 민족적 주체성 그리고 인류적 양심을 견지해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민중적 원칙, 민족적 주체성, 인류적 양심이 바로 대안이다**

대중들은 올바른 정치, 제대로 된 나라, 민생을 깊이 살펴나가는 지도력을 바라면서도 안타까울 정도로 아직도 보수정치의 환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가혹하게 다루는 남자에 대하여 비난하면서도 여전히 애정을 버리지 못하는 병적 매조키즘에 걸린 여인의 모습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대중들 자신의 책임만이 아니라 그렇게 여론을 조장하는 기존 보수언론의 정치 이데올로기적 조작 행위의 결과이기도 하다.

냉전수구세력의 집결체인 한나라당과 자민련이야 구시대적 유물의 실체임은 재론의 필요가 없고, 분당 이후의 민주당은 개혁기조의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자칫 몰락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으며 열린우리당은 개별적 정치인들의 진보적 개혁성에도 불구하고 노동문제, 이라크 파병문제, 대외관계에 있어서 현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정치적 발언의 요구 앞에서 침묵하고 있다.

결국, 정당 내부의 민주적 원칙에서나 민중적 요구에 대한 부응에 있어서나 민족적 주체성의 진로 선택에 있어서도 보수 정치는 그 한계를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 없이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답은 다시 강조하건대 진보정치의 대중적 지지확대를 통해서 이루어낼 수 있다.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역량에 대중적 힘 몰아줘야**

민주노동당의 현실적 역량은 다른 보수 정당의 위세에 비해 현재 약하다. 그러나 진보정치의 진상을 대중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 그 의의에 뜻을 같이 하려는 순간, 상황은 급변할 것이다. 물론 진보정치의 여러 가지 한계와 미숙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보수정치의 폐해에 비해 훨씬 미미한 것이다.

민중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경제위기, 주체적이고 평화적 대외정책의 근간을 파괴하는 이라크 침략 전쟁 동조 파병, 확고한 민족적 주인의식으로 밀고나가지 못하고 있는 한반도 통일정책의 현실, 시장의 논리에 병들어가고 있는 교육현장. 이 모두에 대하여 보수정치는 해답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권력”에 봉사하는 보수정치의 맥을 단절하고 진정 이 땅의 고뇌를 끌어안고 생명을 살려내는 정치가 절실하다. 거대한 제국주의적 세계화의 족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꿈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것이 당장에 불가능하게 보인다고, 현실에서 달성하기에는 힘겨워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 우리에게 아름다운 미래는 없다.

마른 땅위에 던져진 물고기가 되어도 바다를 포기하는 법이 없는, 그런 용기와 의지, 물러섬이 없는 이상주의가 우리에게 새로운 현실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식지 않는 열정, 그리고 역사에 대한 양심적 투신이 진정 선하고 옳은 것이라고 여긴다면 이제 더 이상 진보정치의 새 날을 미래의 먼 어느 날로 연기할 까닭이 없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각성과 결단이 혁명의 새로운 장을 열어나갈 것이다.

믿을 것은, 그 어떤 장애 앞에서도 아름다운 꿈을 접지 않으려는 우리 자신 밖에 없다. 다름 아닌 우리 안에 길이 있다. 이를 깨우치는 한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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