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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과 퇴행을 청산할 새로운 혁명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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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과 퇴행을 청산할 새로운 혁명을 꿈꾸며

<새해를 맞으며> 희망은 바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지난 2003년은 우리 사회의 역사적 진로에 “반동과 퇴행”이 심각하게 진행된 시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시대를 갈망했던 서민대중의 민중적, 민족적 요구가 마침내 정치적 관철로 완결되어 갈 것이라는 기대에 대한 “반역”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그 좌절과 혼돈은 더욱 깊었다.

더군다나, 그 반역의 주체가 다름 아닌 “서민대중을 위한 정치, 개혁과 자주 평화를 내세웠던 노무현 정권”이라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충격과 함께, 역사의 진정한 변화를 위한 동력의 집결에 필요한 방안이 무엇인지 고뇌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점에 서 있게 되었다.

***2003년, 반동과 퇴행의 우울한 연대**

돌아보자면 1년 전인 2002년 이즈음, 우리는 노무현 정권의 수립을 위해 냉전수구세력과의 치열한 쟁투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얻은 승리를 자축하면서, 다가올 시대에 이루어져야 할 바에 대한 전망과 전략의 논의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논의의 중심에는 정파적 차별성을 뛰어넘는 개혁-평화세력의 총집결과 이를 토대로 한 주체세력의 역사적 교체를 전면화시켜야 한다는 요구가 뜨겁게 존재했다.

이러한 혁명적 선택에 버금가는 요구에는, 무엇보다도 (1) 종속적 분단의 세월을 청산할 수 있는 자주적/평화적 남북관계 해결을 모색하여 민족적 주체성을 분명하게 확립하고 (2) 신자유주의 세계체제의 압박에 의한 사회적 양극화로 인한 민중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3) 자본과 권력의 결탁을 허물고 민주적 정치참여의 공간을 극대화하는 체제를 마련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이는 한마디로 지난 세월 이 사회를 지배해왔던 특권체제의 전복(顚覆)과 그를 기초로 하여 질적으로 전혀 다른 민주사회로의 도약을 의미하는 변화가 된다. 따라서 그러한 변화의 일차적 책임주체가 되어야 할 노무현 정권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과제에 총력을 모으고 그로써 이 사회의 활력을 열정적/혁명적으로 일으켜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분열, 파괴, 반역, 억압, 폭력으로 점철된 노무현 정권**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치달았다. 우선 개혁-평화세력의 견고한 연대와 총집결이라는 전략적 목표는 우선적으로 노무현 대통령 자신의 정파주의적 자세로 인해 자파세력의 배타적 결속을 우선하는 적대적 분열을 결과했다. 대선 승리 이후의 치솟아 오르던 동력은 이로써 약화, 파괴되어갔고 개혁-평화 세력의 정치적 진영은 적어도 당분간은 치유하기 어려운 내부적 대결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와 함께 남북간 민족내부의 정치경제적 통로의 개설에 중대한 역할을 했던 남북 정상회담과 대북 송금이 실정법적 단죄의 대상으로 격하되게 함으로써,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 여지를 안에서부터 상당 정도 붕괴시켰다. 뿐만 아니라 <6.15 남북 공동선언>의 정신과 그 실천의지는 노무현 대통령의 기념일 당일 우천 골프로 상징되듯, 모멸을 겪으면서 실종되다시피 해버리고 말았다. 김대중 정부의 최대 치적인 한반도 햇볕정책의 정치적 관성이 심대한 타격을 받은 것이었다.

이러한 자세의 연장선에 서 있는 현실은 무엇보다도 세계 제국으로서 이 나라를 식민지적 통치대상으로 삼아온 미국의 군사주의 노선에 민족의 운명을 맡겨버리는 반민족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를 정책화함으로써 결국에는 이라크 침략전쟁에 가담하는 파병결정으로 나타났다. 폭력과 야만의 대열에 선 것이다.

그로써 인류적 양심과 세계평화의 차원에서 최소한의 문제제기도 없이 미국의 요구에 그대로 끌려갔으며 그 결정 과정도 전혀 민주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일관함으로써 <참여정부>라는 스스로의 자기규정도 배반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본의 독점적 지배체제를 의미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압박 아래 고통 받고 있는 서민대중들의 삶과 관련해서도, 노무현 정권은 대자본과 초국적 자본의 입장에 서는 경제적 판단과 선택을 일관해서 관철해왔다. 애당초 집권 이전부터 주안점으로 내세웠던 “서민대중을 위한 정치”라는 깃발은 이로써 폐기된 셈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야만의 권력이 되려는가?**

이와 같은 현실은 자본과 권력의 결탁구조를 혁명적으로 청산하는 선택을 어렵게 하고 있으며, 결국 민중들의 민주적 참여의 공간은 확대되기 매우 어려운 근본적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더하여 민중들의 저항에 대한 억압과 폭력적 대응은 권력의 야만성까지 드러냄으로써 노무현 정권에 대한 절망을 더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노무현 정권 자신의 불법자금 관련 논란은 한나라당과의 상대적 비교로 처리될 문제가 아니라, 개혁주체로의 자격 차원의 사안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정권의 윤리적 기초에 막대한 균열을 가하고 있다.

사태가 이러한 수준에 이르면서 더 이상 책임전가나 진상에 대한 호도, 그리고 상황의 반전을 겨냥하는 전술의 정치적 효과는 바랄 수 없게 된 현실은 노무현 정권과 그 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세력 전반에 대한 국민적 판결의 중대성을 절감하게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개혁-평화 정권으로 비 주류적 소수자의 처지에 서서 이 시대의 기득권과 맞서리라 기대했던 노무현 정권의 비극적 면모이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으로서도 잘 해보려는 선의가 없지 않았겠지만, 역사에 대한 철학적 견해의 빈곤과 자주적 의지의 박약, 책임감 있는 결단의 부족, 민주적 포용력의 결여와 무엇보다도 민중에 대한 깊은 사랑의 부재로 말미암아 시간이 흐를수록 자충수의 늪에 빠지고 있음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성찰해보자면 2002년 봄에 불었던 <노풍>은 단지 노무현이라는 개인에 대한 민중적 열광이 아니라, 당대의 역사가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한 민중적 분출구의 실체라는 점에서 그 진정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이 시대의 역사적 요구를 담은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낙담과 좌절을 뚫고 새로운 희망을 선포하면서 그 희망이 이 시대의 열정과 능력이 되도록 하는 우리 모두의 집단적 결단과 행동이 있는가 없는가, 이다.

***이 시대의 새로운 혁명을 꿈꾸며**

프랑스 혁명이 나폴레옹의 전제권력으로 중도에 타살당하고, 러시아 혁명이 스탈린의 공포정치로 반동화 되었던 것처럼 혁명은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의 경로를 거쳐 정치권력의 장악에 몰두하는 세력들의 추악한 반역에 직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민중들의 정치경제적 주체성을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본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은 그의 <프랑스 대 혁명사>에서 배반당하는 혁명의 고비에서 도리어 민중의 역사적 각성이 날카로워지면서 새로운 시대를 잉태하는 비밀을 열정적으로 토로한다.

그렇다. 빼앗긴 혁명의 열매를 도로 찾아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역사적 각성으로 그 정신이 뜨거워진 민중의 역사적 행동 외에는 없다. 그로써 혁명의 대의와 애초부터 맞서거나, 또는 그 대의를 기만하고 정치권력의 투쟁으로 전락시킨 일체의 세력들은 퇴각의 운명에 놓일 수밖에 없으며, 역사는 그로써 진정 진전할 수 있는 계기와 힘을 얻는다.

전망이 어둡고 희망이 시들어가며 권력의 혼탁한 싸움으로 인해 절망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새로운 혁명을 꿈꾼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의 거짓과 위선, 그리고 오만과 전횡에 대하여 민주주의적 의지와 인류적 양심을 가진 자의 결연한 도전에서 비롯된다.

자본과 권력, 그리고 제국의 지배로 인해 민중들의 삶이 파괴되어가는 사태를 저지하지 못하면 그 결과로 무서운 야만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갈파했던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는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소수의 권력자들에 비해 거대한 다수인 민중들이 더 이상 자신을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권력의 주체로 집단적인 위력을 행사할 때 비로소 그 사회는 모두를 위한 진정한 민주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그녀의 주장은 옳다.

***결국 믿을 것은....**

민중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 역량과 집단적 위력의 가치를 각성하지 못하면, 역사는 질곡에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사미르 아민(Samir Amin)이 정확하게 진단했듯이 오늘날 세계는 평화와 인권의 질서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탐욕으로 치닫는 미국에 의해 거대한 “혼란의 제국(Empire of Chaos)”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러한 지구적 현실에서 믿을 것은 우리 자신의 역사적 양식과 순결한 의지, 그리고 인류적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함께 하려는 의로움의 연대 이외에 있겠는가?

바로 이와 같은 의지의 결집에서 우리는 고단한 삶의 절벽에 서 있는 백성들을 자신의 몸처럼 껴안고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는 아름다운 지도력의 탄생”을 희망할 수 있을 것이다. 원칙과 중심이 분명하면서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두를 최대한 포용하고, 갈라지고 찢겨진 영혼을 다독거리면서 하나로 모아가는 그런 지도력이 우리에게 절실하다. 그와 동시에, 민족의 절박한 이해와 인류적 양심의 문제 앞에서는 결연한 자세로 임하는 용기 있고 철학적 깊이가 있는 지도력이 우리에게 간절한 것이다.

이 간절함, 그에 따른 각성과 행동이 우리에게 다름 아닌 대안이다. 이 마음과 이 뜨거움이 역사를 주도하는 힘이 되어갈 때 시대정신은 변화할 것이며 우리의 현실은 그 시대정신의 판단과 선택에 의해 달라져 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상처받은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면서 이 우울하고 지겨우며 고단하기 짝이 없는 세월을 훌륭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2004년의 한 해에 대한 소망**

그 승리의 절정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결코 좌절하지 말고, 서로를 격려하고 아끼면서 희망의 현실을 만들어가는 일에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과정 하나하나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알지 못했던, 놀라운 힘을 서로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로써 새로운 역사 창조의 존엄한 주체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실로, 그 역사적 투쟁과 도전, 그리고 위기의 통로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각성된 역사의 주인으로 이 시대를 책임 있게 감당할 수 있는 역량 있는 민족이 되어갈 것이다. 그에 더하여, 인류의 역사에서 양심과 평화와 생명의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대안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기쁨을 다른 민족들과 함께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2004년의 한 해가, 비관적 전망과 현실의 복잡다단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우리로 하여금 그런 역사의 특권을 실현할 수 있는 감격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이다.

희망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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