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금실 법무장관을 처음 본 게 대략 10년 전이다. 문화판 사람들의 모임이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어서 그 자리의 좌장격인 분에게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살풀이 춤추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그 자리가 끝날 때까지 그냥 국악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이거니 생각했다.
그는 말이 거의 없었고, 남 얘기를 열심히 듣는 편이었다. 간혹 말을 할 때도 분위기가 정말 살풀이 춤추는 사람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 자리가 파할 때까지 그가 변호사라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변호사란 직업은 내게 구체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약간은 논쟁적인 어투를 연상시켰다.
그는 목소리부터가 '논'(論)을 펼치기에는 가늘고 뜨겁고 습했다. 처연하게 깊은 사연을 읊조리면 어울릴 것처럼 보였다. 대화의 주제도 대개는 가까이 있는 사물보다 멀리 있는 이미지나 관념에 조준돼 있었다. 그런데, 변호사? 변호사라니!
이런 불균형 때문에 그는 질문을 하고 싶게 만든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이런 경우 저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런 저런 자리에서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되면서, 나는 그가 사람을 참 안 심심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별로 수다를 떨지 않아도 그는 사람을 대화에 집중시키는 묘한 능력이 있다. 그건 그가 빈 말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두 가지 유형의 얘기는 절대 안 한다. 첫째는, 자기 일 얘기를 먼저 꺼내는 법이 없다. 물으면 마지못해 "오늘 저녁에 민변 모임이 있다"고 얘기하지, "민변에서 국가보안법 폐지관련 모임이 있는데 발제를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하나, 그가 꺼리는 것은 자리에 없는 사람 얘기하는 거다. 그는 비난이든 칭찬이든 남의 말을 꺼내면 무심하게 듣고 있다가, 길어지면 "인생 짧은데 남 말 하고 살 필요 있느냐"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나는 나중에야 남달라 보이던 그의 대화 습관이 하나의 지향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가 자주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밀도'에 대한 집착이다.
'밀도'를 중시한다는 것은 결국은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얘기다. 사람 사이를 매개하는 격(格)과 식(式)에 도착돼 있는 저밀도의 상태를 심심해하는 체질.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도 그의 상상력은 문체와 미장센 너머의 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곧잘 발전하곤 한다.
"이런 문체를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저 영화감독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식으로 그는 상상 속에서 한 동안 르 끌레지오를 만나고, 기형도를 떠나보내고 혼자서 연애하기를 수십 회. 급기야 요즘은 오래전 고인이 된 예수님과 문무왕까지 호명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걸 '소녀취향'이라고 표현했다. 확실히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는 소녀적인 순정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소녀들이 좋아하는 인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거다.
언젠가 철학을 하는 지인 한 분이 "온화한 열정"이란 표현으로 그를 요약했다. 한 소설가는 "햇빛에 데워진 냇가의 조약돌 같다"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창가의 겨울 햇빛"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어떤 말이든 그가 동파된 수도꼭지처럼 사방으로 침을 튀기거나, 기차화통처럼 요란하게 열을 뿜어내지는 않는다는 거다.
내가 보기에도 그는 선천적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에너지를 돋보기처럼 하나의 초점에 집중시키는 쪽이다. 그 초점은 언제나 미세한 경계에 맞춰져 있다. 그는 격식을 싫어하지만 격식 자체를 싫어하는 아나키적 캐릭터는 아니다.
그는 격식이 위계를 구분 짓는 권력의 확인과정으로 동원되는 그 사용 맥락을 싫어할 뿐, 인간관계에서 격식이 갖는 효용을 무시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위장과 화장을 구분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화장을 빙자한 위장이 만연한 위선적인 문화에서 이런 구분에 대한 열정은 언제나 저주받은 회색이 되기 쉽다. 그래도 그는 개의하자 않아 보였다.
장관에 취임하기 일 년 전쯤, 평소 친한 소설가가 신촌에 카페를 개업해 인사차 함께 간 적이 있었다. 대개 이런 경우 적당히 술을 팔아주고 덕담을 하는 게 보통이지만, 그는 신촌 로터리에서 차를 세워 꽃집에 들렀다. 나는 그냥 가도 된다고 우겼지만, 그는 기어코 노란 장미 한 다발을 사 갖고 왔다.
그리고 일년 뒤에 TV에서 법무장관에 임명됐다는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대개 놀라워했고, 조금은 걱정도 한 듯하다. 전혀 정치적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 자리를 견딜까 하고.
나는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저런 캐릭터의 사람은 그 자리에 가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변할까? 하고 말이다. 그런 호기심 때문에 이 인터뷰를 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10개월 사이 그는 대중적인 인기인이 됐고, 뉴스 메이커가 됐다.
파격적이라고 말하는 행동양식들이 그래도 대중들에게는 호의적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강효리, 강효리라고 하지 않는가. 그는 참 이상한 스타고, 그를 지켜보는 대중들도 특이한 관중이다. 스타가 한 시대의 대중적 욕망을 대변하는 기호라면,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미처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았던 어떤 힘들이 그를 통해 분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인터뷰는 12월 3일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강장관의 삼성동 자택에서 진행됐다. 실내는 심플하게 필요한 가구만 제 자리에 놓여 있었다. 벽 여기저기에 걸린 초현실주의 풍의 그림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서가에 빼곡히 꽂힌 책들이 주로 무거운 사상서적들이 많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업무에 시달린 탓인지, 다소 피곤해 보였지만, 장시간의 인터뷰에도 지치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다소 껄끄러운 질문도 별 주저 없이 유머를 섞어가면서 되도록이면 직설적으로 말했다.
***인기의 비결 - "무장해제하고 있어서?"**
남재일 : 요즘 팬클럽도 생기고 지난번 서울대 강의에서는 사인공세를 받는 등 인기가 절정입니다. 공직에 나가기 전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인기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강금실 : 글쎄요. 인기의 비결이 뭘까요? 저도 왜 그런지 잘 모르겠어요. 긴장 안 해서? 무장해제하고 있어서? 그건 사실 내가 물어봐야 하는 질문 아닌가요?
남재일 : 최근 언론에서 강효리란 별명을 사용해서 불쾌한 감정을 표시했다고 신문에서 봤습니다. 아마도, 이효리의 인기를 빗대어 그런 것 같은데, 굳이 불쾌해할 이유가 있습니까. 연예인에 비유한 것 자체가 혹시 마음에 안 드셨는가요?
강금실 : 그 이야기는 상당히 와전됐어요. 저는 전혀 불쾌하지 않아요. 이름 자체도 강금실 보다는 강효리가 더 마음에 들고.....젊고 아름다운 스타에 비유되는 게 불쾌할 이유가 없지요. 오히려 영광 아닌가요? 공보관이 종합일간지에서 법무부 장관의 이름을 제목에서 강효리란 별명으로 표현하는 게 부적절한 게 아니냐는 공식적 입장을 밝힌 게 그런 식으로 전달된 거죠. 검사장 간담회 같은 공식일정을 강효리가 했다고 표현하는 거는 온당치 않죠. 그것도 본문 정도면 이해가 되는데, 제목에서 그렇게 표현한 거는 적절하지 못했다고 봐요.
저 개인적으로는 뭐라고 불리든 별로 신경이 안 가요. 인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피부로 체감이 잘 안 되고, 멀리서 일어나는 어떤 일을 구경하는 느낌이 들어요. 굳세어라 금순아라고 불러도 마찬가지일 것 같고. 원래 그런데 대해서는 상당히 무감각해요....그런데, 연예계에는 관심이 좀 있었죠. 장관 하기 전에는 스포츠 신문 보는 거 좋아했는데, 요즘은 바빠서 신문도 스크랩해주는 것만 봐요. 그러니 신곡 개발을 못해서 회식 자리에서 맨날 김광석 아니면 김추자만 부르죠.
남재일 : 강 장관님의 인기에는 여성적 외모나 행동양식도 한몫 한다고 생각됩니다. 요즘은 영상시대라 외모도 상당히 중요하다고들 합니다. 사람 볼 때 외모를 많이 보시는 편인가요?
강금실 : 외모를 보는 편은 아니고요, 주로 느낌을 읽는 편이죠. 잘 생긴 이목구비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냥 사람이 풍기는 전체적인 느낌을 읽어요. 책에서 문체를 느끼거나 그림에서 어떤 화풍을 느끼듯이 사람도 그런 게 있어요. 지금 나이가 되니까 사람이 살아온 과거의 경험이 외모를 통해 드러난다는 걸 알게 되더라고요.
전 눈빛하고 목소리를 주로 많이 봐요. 말버릇 같은 것도 무의식적으로 인격을 드러내는 부분이고요. 맑은 사람은 눈빛이 곧아서 사물을 쳐다볼 때 똑바로 쳐다봐요. 목소리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말투나 말꼬리 흐리는 대목, 그런 거 보면 그 사람을 짐작할 수가 있어요. 사람들은 대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원하는 얘기를,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하는 것 같아요.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술자리에서도 어느 한 순간 정치 얘기를 꺼내요. 얘기가 무르익으면 자신의 말버릇이 나오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맑은 사람들이에요. 영혼이 맑은 느낌을 주는 사람들.
남재일 : 사인 공세 받으면 기분이 어떤가요? 스스로 스타 기질이 있다고 보십니까?
강금실 : 왜 해달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열심히 해 줘요. 사람들이 즐거워하면 못해줄 게 뭐 있겠어요. 나는 별로 잃어버리는 것이 없는데 남이 즐거워하면 좋잖아요. 스타 기질이 뭔지는 모르겠고, 그냥 선천적으로 무대 체질은 아닌 것 같아요. 초등학교때 무대에서 떨어진 경험이 있어서 약간은 무대 공포증도 있는 것 같고....6학년 때 상 받으러 단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굴러 떨어졌는데, 전교생이 다 박장대소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요.
그 이후로는 무대 올라갈 때마다 그 생각이 났는데.....왜 지금 이렇게 인생이 반전됐는지 나도 이해가 안 돼요. 사람하고 폭넓게 교제하고 그런 건 로펌 대표할 때밖에 없어요. 그때는 하기 싫어도 업무상 해야 하니까 한 거죠. 솔직히, 제가 공식적인 세계에 관심이 별로 없었어요. 신문 읽어도 문화면과 만화만 열심히 보고, 정치면은 대충 이슈가 있을 때 훑어보는 정도였어요. 장관에 임용됐을 때도 노대통령의 측근이 누구인지도 자세히 모르는 상태였거든요. 문재인 수석만 변호사였으니까 아는 정도였고, 그래요.
남재일 : 지난 번 국회에서 차도까지 걸어가시는 걸 봤다고 누가 그러던데요, 차편을 이용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강금실 : 운동 삼아 가능하면 많이 걸어 다니려고 그래요. 하루에 20분씩 걷거나, 훌라후프라도 하려고 하죠. 요즘 생활이 회식 약속이 많아서 많이 먹고, 신경은 늘 곤두 서 있고, 운동은 안 하고 그런 상태죠. 체중도 늘고 피로감도 심하고 해서, 체력관리를 위해 운동을 하려고 해요. 오늘도 총리공관서 경복궁역까지 20분 걸었어요.
걷고 있는 시간만은 구경에 정신을 빼앗기니까 휴식이 되거든요. 전 원래 걷는 속도로 사물을 구경하는 걸 좋아해요. 천천히 걷는 속도에서 보는 사물이 가장 아름답거든요. 오늘도 삼청동 길 걸어 나오는데 눈길 끄는 가게도 많고 갤러리도 아름답고 그렇대요. 가방 파는 가게에서 낙엽을 수북이 쌓아서 가방을 전시해 놓는 곳이 있어서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어요.
남재일 : 직무 이외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십니까? 문화생활에 관심이 많으셨는데, 요즘은 바쁜 와중에 어떻게 문화생활을 하시는지요? 그리고, 평소 어떤 장르에 특별히 관심이 많으셨는지....
강금실 : 요즘은 일정이 불규칙해서 문화생활 거의 못하죠. 맥주나 와인 한 잔 마시고 쉬는 게 전부죠. 체력 달려서 술도 못 마시겠어요. 문화예술은 특별히 장르를 가리진 않아요. 대신 취향이 좀 강한 편이죠. 음악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맞는 것만 편식하는 편이죠. 어떤 장르든 예술 작품을 대할 때 작품에 있는 어떤 걸 내 안으로 끌어오기 보다는, 내 안에 있는 걸 작품에서 찾아가는 방식으로 대해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죠? 그러니까 취향이라는 게 생기는 거 아니겠어요.
남재일 : 구체적으로 그 취향이 어떠신지 궁금한데요. 최근에 인상적인 작품이 어떤 게 있었는지요?
강금실 : 밀도가 빡빡한 게 좋죠. 최근에 김기덕 감독의 '섬'이란 영화가 참 좋았어요. 뭔가 치열하고 진실에 접근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 치열함은 관객에게 불편함을 줄 수도 있겠죠. 사회적 권력관계로 엉킨 공간에서 그런 걸 걷어내 버리면 각질을 벗겨낼 때처럼 아프지 않겠어요.
남재일 : 사람들이 승무 실력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요즘도 춤을 추시는지요? 그리고, 전통춤의 어떤 면이 좋아서 배우셨는지, 그것도 어떤 행위의 밀도하고 관계가 있습니까?
강금실 : 춤은 그냥 추고 싶어서 배웠죠. 승무문화재이던 한영숙 선생 제자한테 배웠어요. 85년부터 88년까지 부산에서 근무할 때 김수악 선생에게 살풀이하고 굿거리 춤도 배웠고요. 원래 춤추는 거 좋아해서 막춤도 추고 그래요. 전통춤을 좋아하게 된 것은 정신이 깊이 몰입되지 않으면 안 되는 춤이어서 거기에 끌렸어요. 오래 추면 호흡도 깊어지고 명상하는 거 비슷한 상태가 돼요. 몰입이라기보다 정확하게 모든 걸 잊어 먹고 빠져야 되는 춤이죠.
***장관직 수락 - "나 자신을 던지고 싶었다"**
남재일 : 법무장관에 임용됐을 때 다들 의외적인 인사라고 놀라는 분위기였습니다. 젊은 여성이 권력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법무장관이라는 자리에 간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반응은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평소 정치나 권력에 별로 뜻이 없는 인물로 알고 있다가 갑자기 그런 자리로 직행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장관직을 맡은 지 10개월 정도 지났는데, 장관직에 대한 소감이 어떠신지요?
강금실 : 법무장관직은 제가 살아오면서 한 일 중에 가장 격무였어요.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새벽부터 밤까지 머리에서 일을 놓아버릴 수 없어요. 특히, 한번에 여러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해야 하는 게 가장 힘들어요. 원래 게으른 사람인데, 갑자기 나의 한계 이상을 요구하는 자리죠. 그런데, 이 자리가 저랑 딱 맞는 것도 있어요. 장관은 글을 안 쓰고 말만 하면 되잖아요. 판결문이나 변론 안 써도 되잖아요.
남재일 : 법무장관 자리가 원래 권력관계가 복잡하고, 특히 이번 정권은 개혁이란 과제를 안고 출범해서 어려운 자리라는 건 예측이 됐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평소 본인이 원하던 삶의 방향도 아닌데, 굳이 법무장관 제의를 받았을 때 응한 이유랄까, 개인적인 동기는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한데요. 사회에 대한 개혁의지 때문인가요?
강금실 : 원론적인 이유는 법 전공자니까 법무부 장관자리도 전문가 영역 안에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그 때 상황은 주변에서 다 반대하고 대통령만 지원하는 그런 상태라서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는 자리였죠. 그런데 왜 갔느냐? 이런 게 기사화 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나 자신을 던지고 싶은 심리, 어떤 극한 체험의 유혹 같은 게 있었어요. 고민이 많이 됐었는데, 어떤 직관적인 느낌이 등 위에서 가라고 등을 밀었어요.
왜 이런 거 있죠. 미지의 땅을 밟을 때 원시인들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데, 그 공포에도 불구하고 등을 떠미는 유혹 때문에 발걸음을 옮겨 버리는 거, 그런 거랑 비슷해요. 처음에 엄두가 안 나고 자신 없고, 마음 밑바닥에 있는 모든 것들이 고민과 근심으로 한꺼번에 올라왔어요. 어떻게 낙마할지 모르기 때문에 죽으러 가는 심정이었는데 어떤 직관이 가라고 등을 밀었어요. 자기를 다 던지고 가는 어떤 체험에 대한 열망 같은 게 있지 않았나 싶은데.....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처음에만 일기도 못 쓸 정도의 긴장의 연속이었지 좀 지나서 익숙해지니까 그 이전의 나로 다시 돌아와 있어요. 다시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같은 기억과 관계 속에 있고.....인생의 바닥부터 완전히 뭔가 새롭게 뒤집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아요. 그래도, 이전보다 마음이 오히려 훨씬 편해졌어요. 간혹 무모해지는 거는 나쁜 게 아닌 것 같아요.
***"정치권력이란 원래 대리자, 그 사실에 충실할 때 정치 투명해져"**
남재일 : 법무부 장관으로서 일에 대한 자세나 고위공작자로서 자기관리의 비결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강금실 : 법무장관 자리를 저는 전문가 영역으로 생각하고 갔어요. 그런데, 그 자리는 현실적으로 민감한 정치적 자리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어요. 말하자면 권력이 집중된 자리인데, 저는 권력이 집중돼 있는 걸 역할이 집중돼 있다고 봐요. 정치권력이란 게 원래 대리자 역할을 하는 거고, 그 사실에 충실할 때 정치가 투명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죠.
자리를 역할이 아니고 권력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도취이자 도착이죠. 한국의 정치상황은 그런 도취와 도착이 아직도 만연해 있죠. 어느 조직이나 사회가 위임해준 권력을 자기 권력으로 전유해서 영속화하려는 속성이 있는데,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곳이 정치의 장이죠. 그 사실을 뒤집어 보면 정치가 그만큼 사회적 소통에서 의미가 집중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런 이유 때문에 사회 운용을 위해 가장 잘 돌아가야 하는 장이죠.
그런데, 사실은 진실이 가장 막혀 있는 곳이 정치라는 생각을 해요. 사람들의 진의가 서로 통하는 게 진실된 상황이라면, 예술이나 학문이 거기 좀 가깝게 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 안에서도 그런 도취와 도착은 어느 정도 있죠. 전 요즘 가장 지혜로운 그룹이 그냥 일상적인 국민들 같아요. 어떤 이해관계로 묶이지 않고, 집단으로 조직화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에서 가장 진실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아마 생활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은데, 이런 의견들을 체계적으로 수렴하는 작업이 정치의 선진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고위공직자로서 자기 관리 비결도 그냥 이런 원칙 하나 지키는 거죠. 이 자리가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 잠시 빌려온 것이라는 말짱한 정신을 유지하는 거죠.
남재일 : 검사들에게 보낸 이메일이 한 때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거기 보면 검사들에 대한 애정이 많은 것처럼 보였는데, 장관직을 맡기 전과 맡은 후의 검찰을 보는 시각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강금실 : 시각의 변화라기보다는 정서의 변화가 있었죠. 검찰조직 전체를 보는 시각은 변화가 없어요. 여전히 개혁의 과제들이 많고, 그걸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데, 검사 개개인을 보는 정서는 애틋해졌어요. 검사들은 정치권력이 검찰을 왜곡시켰다는 깊은 피해의식 같은 게 있었어요. 밖에 있을 땐 그걸 이해 못했는데, 지금은 왜 그런지 사정이 이해가 돼요.
제가 온 이후 수사검사들이 정치권력에 대해 제대로 수사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 이유가 뭐겠어요. 정치권력에 휘둘리면서 강력한 권력기관 역할을 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자기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검찰개혁 실효 있으려면 문화가 바뀌어야"**
남재일 : 야당 총재도 칭찬을 한 바가 있지만 대체로 직무수행능력에 후한 점수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주간지에서는 참여정부 장관들의 성적표를 매기면서 장관께 A학점을 주었더군요. 검찰 개혁의 총대를 멘 사령탑으로 개혁의 성과에 대한 스스로의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강금실 : 아직 한번도 스스로 평가한 적은 없어요. 그건 왜냐하면 아직 평가할 시점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죠. 개혁에 대해 한국 사회는 아주 심한 조급증에 걸려 있어요. 일본만 해도 사법 개혁하면 2-3년에 걸쳐 준비하고 그 후로 추진하는데 적어도 5년은 잡는데, 한국은 아무 준비 없이 장관 한 명이 들어와서 밀어붙이면 되는 것처럼 생각해요.
검찰 개혁은 기본적으로 몇 년이 걸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검찰 스스로 개혁해 나갈 수 있도록 정서를 이해하고 분위기를 맞춰주면서 해 나갈 때 내실 있는 개혁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취임 석 달 지나서 '검찰 개혁 물 건너갔다' 이런 기사를 보면 한심해요. 우선 보기 좋게 강압적으로 밀어붙여서 외과적으로 뭔가 하는 시늉을 개혁과 동일시하는 그런 발상 자체를 바꿔야 돼요.
저는 기본적으로 개혁이 실효가 있으려면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런 외과적인 것보다 내부의 변화를 중요하게 고려해요. 어쨌거나, 내년 3월까지 검찰 내에서 개혁 과제들이 결정되면 개혁이 가시적으로 속도를 더할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다행히 검찰 내부에서 기대 이상으로 개혁방향에 대한 합의가 모아지고, 문제의식도 있는 것 같아서 낙관적으로 보고 있어요.
남재일 : 개혁하면서 검찰의 저항도 만만찮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개혁하면서 검찰조직과의 관계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어떤 부분입니까?
강금실 : 처음에 나이가 젊은 여성이고 검찰 경험도 없고 해서 조직 전체가 거부하는 듯한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준사법 기관으로 지위 회복을 목표로 한 개혁방향에 대해서는 일단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평검사부터 검사장까지 두루 모임을 가졌는데, 의견이 잘 모아지고 있다고 봐요. 내년 상반기 중에는 상당한 성과가 있을 것이고요.
그런데 처음에는 왜 그렇게 뭔가 안 풀렸을까? 저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나의 등장을 상당히 오해한 거 같아요. 다시 정치권력이 검찰을 흔들려 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과 불신으로 관계를 시작한 거죠. 나중에 진의가 전달되면서 점차 신뢰가 쌓여가는 느낌을 받아요.
남재일 : 검찰이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스스로 변화를 가장 실감나게 느끼는 것은 어떤 부분입니까?
강금실 : 수사를 자율적으로 열심히 하니까 밖에서 보기에는 달라진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수사검사는 원래 그랬어요. 그게 겉으로 나타나지 않고 수뇌부의 정치적 모습만 드러나서 그렇죠.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일선 수사검사들이 정치권에 대해서 피해의식과 반발심이 있었어요. 검찰이 밑에서부터 왜곡돼 있었다면 이렇게 빠른 시간에 신뢰회복이 불가능했겠죠.
일반적으로 검사들이 애국심도 강하고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문화가 검찰문화 속에 있어요. 문제는 조직 전체의 권력구조가 그걸 보장해줄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는 거죠. 토론회 때 보여준 장관인사에 대한 불신의 표현도 정치권의 개입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이었죠. 과거에 소신수사 했다가 좌천당한 사례가 비일비재 했거든요. 수사를 열심히 하는 검사들이 성공을 못하고 상처받고 떠나거나 좌천당하는 구조였다고 할 수 있죠. 심재륜 전 고검장도 그런 사례로 볼 수 있고요. 인사권자라면 최소한 소신 있는 수사검사를 보호하는 것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남재일 : 변호사 시절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에도 참여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 폐지돼야 할 악법이 있다면 어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관련 법안 개정**
강금실 : 현재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형사시스템이예요. 특별법이 양산돼 있어서 형법이 사문화되는 경향이 있죠. 기본법에 의해서 대부분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정상적이고 안정된 사회죠. 특별법이 많다는 건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니까 그런 건데, 그래도 기본법 중심으로 나갈 때 안정적인 법치가 이루어진다고 봐요. 그리고,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가 투명해져서 국민들의 목소리가 잘 반영되도록 정치관련 법안들을 고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남재일 :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얼마 전에 한겨레신문에 부산 성인오락실 기사가 났습니다. 조직폭력배들이 불법임이 분명한데도 버젓이 영업을 해서 막대한 폭리를 취하는 것은 관련 사법기관의 묵인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서울의 경우도 부산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도 중요하지만, 일선 수사기관으로 부패에서 독립하는 도덕적 독립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일반 서민들 삶에는 정치적 독립보다 이런 문제들이 더 절실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워낙 만연해서 그런지, 폼이 안 나는 문제여서 그런지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개혁할 방안은 없다고 보십니까?
강금실 : 그런 사회구조적인 부패는 검찰의 개혁만 갖고 해결된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다른 그룹도 개혁돼야 해결될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검찰과 관련해서만 얘기하면, 검찰이 그런 비리에 노출되는 것도 지나치게 일차 수사기관으로서의 역할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어요. 준사법기관으로 거듭나서 그런 비리의 사슬에서 독립된 위치에 있어야 일차 수사기관의 비리 연루에 대해서도 소신을 갖고 수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비단 오락실 사건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비리를 근절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권력을 분산해서 상호 견제하는 장치를 정교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명분으로도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비리의 온상이 된다고 봐요. 누가 그랬죠? 권력은 본질적으로 남용되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남재일 : 장관께서는 현 국무위원 중 가장 재산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이해를 잘 못합니다. 이 참에 간단하게 그 얘기를 좀 해 주시죠. 그리고, 평소 돈에 대해서는 어떤 철학을 갖고 계시는지요?
강금실 : 재산이 없고 빚이 많은 건 집안 사정이고요. 이미 알려진 대로 전 결혼에서 남편의 사업실패로 인한 빚이죠. 돈에 대해서는 평소에 철학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요. 일단 돈에 깊은 관심이 없었어요. 특별히 어려웠던 적도 없었고 해서 그냥 판사 월급 받으면 그 안에서 쓰는 정도였어요. 재테크는 전혀 할 줄 모르고, 관심도 없었어요.
친한 사람과 금전거래 하지 말라는 말은 이해는 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는 안 해요. 정말 친하면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돈 쓰는 재미보다 돈 버는 재미가 좋다는 건 경험하지 못했지만, 빚이 생기고부터 빚 갚는 재미가 돈 버는 재미의 열배라는 건 알겠대요. 빚 없이 적당히 생활할 수 있는 상태가 사람에게 좋은 거라고 봐요. 너무 넘쳐도. 글쎄요, 독이 될 수도 있겠죠.
남재일 : 그럼, 법조인의 길을 선택한 것은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습니까?
강금실 : 어릴 때 꿈이 없었어요. 딱히 꿈이라고 할 만한 게....커서도 뭐가 돼야지 이런 꿈은 없었던 것 같아요. 흘러가는 대로 살았는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지 이런 건 있었어요. 세상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학교 가면 학교가 뭐하는 곳이지, 법원에 가면 법원은 왜 이렇게 돌아가나 이런 생각 많이 했어요. 그것도 사실 어떻게 해야지 이런 생각에서보다는 그냥 체질적인 반응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고 느끼고 이런 걸 좋아하거든요. 세상이 내게 가깝게 있다는 그런 느낌이 참 소중했어요.
남재일 : 대통령 하겠다는 꿈보다 그냥 세상이 가깝게 있다는 느낌을 갖겠다는 게 어찌 보면 더 어려운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변호사 시절도 남다른 점이 있을 것 같은데....가장 인상적인 수임사건은 어떤 것입니까?
강금실 : 형사 단독판사 할 때 사기죄로 실형선고 받았다는 사람이 변호사 할 때 연락을 했어요. 필로폰 투약으로 구속됐는데, 변론을 맡아달라고. 그래서 변론을 맡았고...... 재판받고 석방 된 뒤에 몇 번 전화 오다가 시간이 지난 뒤에 여동생이 찾아와서 죽었다고 하더군요. 한 여름 밀실에서 필로폰 투약하다 죽었어요. 실연의 상처도 있고, 삶에 대해 좌절해서 번민이 깊었다고 그랬어요.
그 소식 듣고 순간적으로 그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겪었던 번뇌 같은 게 연상됐어요. 그 사람이 사기도 치고, 깡패짓 하면서 범죄와 가까이 평생 산 사람인데, 그런 사람도 죽는 순간에는 어떤 순정성이 올라오는구나 이런 인상을 받았거든요. 범죄자들의 평소 행동양식은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데, 그런 사람도 마음 한 구석에는 순정성이 있어서 자신이 그걸 발견해도 이미 그때는 이런 저런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돌아가지는 못하죠. 그 돌파구로 죽음을 찾아 간 사람이었는데, 말하자면 부조리를 깨닫게 해준 사람이죠. 다 알면서 안 되는 상황, 그게 부조리잖아요.
남재일 : 살면서 어떤 순간에 그런 부조리를 느끼셨는지 궁금하군요.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얼마 전 신촌의 섬언니(80년대 운동권과 문화판 사람들이 자주 찾았던 신촌의 카페 '섬'의 주인)가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이 각별히 친한 사이였고, '섬'을 자주 찾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얘기 좀 해 주시죠.
강금실 : 향숙이가 매우 위중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이미 사망하고 난 다음이었어요. 상가에 가서 한참 울다가 왔는데.....향숙이는 영혼이 맑고 자존심이 곧아서 남한테 신세 안 지고 자신의 삶의 조건을 혼자 감당하려 했던 사람이죠. 최근 몇 년은 자주 보지도 못했어요. 해마다, 12월 31일날 가서 보고 그랬어요.
저는 저대로 인생이 힘들고, 나는 빚 때문에 고생하고 서로 여유 없이 지내다보니, 그냥 매년 마지막 날 약속한 듯 찾게 된 거죠. 마음으로 가장 가까운 친구였는데, 그 친구는 자신이 세상을 혼자 감당하려다 외형적 삶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꺾였고, 나는 타고 나기를 공부 잘 하게 타고 나서, 어떤 흐름 때문에 이 자리까지 왔고, 마음은 같은데 결과가 너무 대조적이잖아요. 허무하죠. 도대체 뭐가 진실이냐, 마음의 순정성이 지켜낸 삶이 뭐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이 복잡해져서 사진 두 장 얻어 갖고 왔어요. 지금도 향숙이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요.
남재일 : 장관께서 사람 사귀는 폭이라고 할까요 그게 참 넓은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이 사귄다는 의미가 아니고요, 사귀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나 성향이 참 다양하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겁니다. 사람 사귀는 원칙이라 할까 스타일은 어떤 거지요? 혹자는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던데.....
***세상을 움직이는 건 이성이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건 정서**
강금실 : 일로 만나는 경우 외에는 마음으로 묶어주는 사람과만 친해요. 일 할 때도 되도록이면 마음으로 호흡이 맞는 사람과 일하길 희망하죠. 이성은 세상을 움직이는 데 필요하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건 정서인거 같아요. 마음이 맑은 사람, 자기를 지켜내는 사람을 좋아하죠. 자기를 지키려는 사람은 어느 측면에선가 좌절하게 돼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욕심 부릴 이유가 없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뭔가 대단히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닌데, 나도 대단히 많이 가질 필요가 없잖아요. 요즘은 어디에 올라간다. 이런 말 자체가 낯설게 받아들여져요. 사람이 올라갈 데가 어디 있어요. 그냥 그 자리에서 내 자신을 잘 지키면서 살고 그런 사람들 만나는 게 행복이죠.
남재일 :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시각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장관께서 생각하는 남녀간의 사랑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강금실 : 저는 스스로 사랑주의자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사랑에 대해서는 절망감을 많이 느꼈는데, 그럴수록 사랑을 갈망했어요. 연애를 하고 싶다 이런 건 아니고,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는 근원적인 질문 같은 것이었어요. 젊을 땐 남녀간의 사랑을 통해 그런 걸 상상하게 돼죠. 그런데, 사랑이란 가치에 나머지 가치를 다 던지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였어요. 사람이라는 존재가 다 제 피해에 취해서 돈버는 데 몰입하면 가치는 관심 없고, 운동가는 운동가대로 이념에 몰입하고, 출세하는 사람은 성취에 취하고 그런 거 같아요.
자기들이 갖고 있는 가치를 어떤 형태든 사랑을 위해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보여요. 개인이 가진 순정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사랑이 아닌가 싶은데.....요즘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고독한 존재고 최선의 사랑을 만났을 때도 각자의 고독을 유지해야 그 사랑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어제는 히스토리고, 오늘은 축복이고, 미래는 미스테리**
남재일 : 요즘도 사랑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십니까? 좀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결혼은 다시 안 하실 겁니까?
강금실 : 사랑에 대해서는 전에 오래 생각을 해서 언제 시간 있으면 나중에 글 쓰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내가 사랑에 실패한건가?.... 적당히 사랑하고, 사랑은 기본적으로 지나가는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이루어지는 건데......요즘은 일 외에 생각할 틈이 없어요. 어느 신부님이 강연하시는데 그런 말씀을 하셨대요. 어제는 히스토리고, 오늘은 축복이고, 미래는 미스테리라고요.
미래에 내가 결혼할지 안 할지는 미스테리죠. 지금 생각으로는 결혼은 별로 내키지 않아요. 간혹 사랑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생각했어요. 사람이 마음에 있는 걸 다 비워버리면 뭐가 남나, 고독한 공간이 남지, 그걸 채워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사랑밖에 없는데, 그게 없으면 불안한 상태가 되니까 인간으로 실존한다는 거는 뭐를 채워도 늘 불안하지 않을까......그래서, 사랑이 지나가는 거라면 찾아오는 순간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죠.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자문해보면 좋겠어요.
남재일 : 사랑에 대한 생각이 종교적인 어떤 생각과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한다는 게 사람 사이에 뭐가 통하는 거라는 말씀인지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강금실 : 전 남녀간의 사랑과 다른 사랑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보지 않아요. 사랑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벗어나 개인이 가진 고유하고 고독한 영혼들이 부딪치는 거라고 봐요. 사랑을 하면 가장 좋은 것이 영혼이 드러나는 느낌을 갖잖아요, 이건, 사회적 지위와 학벌, 남녀 이런 조건들이랑 관계없는 거죠. 그냥 진심이 받아들여지는 상태가 아닌가 싶어요.
***르 클레지오, 기형도, 김기덕, 문무왕, 키에르케고르, 예수**
남재일 : 장관께서는 예술 작품 속의 인물이나 역사 속의 인물을 마치 연애하듯 상상하는 데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들은 계보는 르 클레지오, 기형도, 김기덕까지입니다. 그 다음이 누군지 궁금합니다.
강금실 : 문무왕이 궁금했어요. 대왕암에 여행 갔다가 죽어서 바다에 묻히고 싶다는 남자가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만나고 싶었지만, 시간이 우리를 갈라놓았잖아요. 작년에는 '불안의 개념' 책 읽다가 키에르케고르에 반했는데 요즘은 예수님 생애에 관심이 많아요.
얼마 전에 모스크바에 갔을 때 갤러리에서 컴컴한 곳에 엎드려 기도하는 남자 그림을 봤는데,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예수님이라고 그러더군요.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이건 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얼마 전에 머리가 복잡해서 뚱딴지 명탐정 만화책 빌려서 읽고 있는데, 만화의 수준이 우리 어릴 때 하고는 차원이 다르더군요.
***"정치, 한마디로 생각 없어요"**
남재일 :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사 중에 하나가 정치할 의사가 있는가 하는 겁니다. 열린 우리당에서 열심히 러브 콜을 보낸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정치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강금실 : 한 마디로 없어요. 몇 번이나 의사를 밝혔는데 자꾸 이 질문을 받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기자들에게 물어보니까, 좀 이름이 난다 싶으면 다들 정치하는 게 일반적인 경향이어서 그런다고들 하대요. 한국 사회가 어떤 조급증이 있지 않나 싶어요. 사회 각계의 층이 얇아서 자체적인 볼륨이 없으니까 권력이 몰린 곳으로 다들 쏠리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 같은데, 저는 개인적으로 정치도 정치적 역량을 쌓으면서 전문가 정치를 해야 된다고 봐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저는 그만 나가고 싶어요. 장관까지 갔는데 그만 나가고 싶어요. 한참 뒤로 후진하고 싶어요. 살고 싶은 방향하고 정치하곤 잘 안 맞아요.
남재일 : 대중적인 인기가 급부상해서 그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여성 진출이 두드러진 사회분위기가 여성 정치인이나 지도자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는 것도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여성정치 지도자상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요? 또 혹시 주변에서 대권 이야기 나오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강금실 : 여성들의 사회 진출은 시대의 대세니까 당연히 앞으로 여성 정치인들이 많이 나와야겠죠. 정치인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에서 여성들의 자리가 마련돼야 하겠지요. 여성 정치인은 많이 나올수록 좋다고 봐요. 지금 제가 법무부 장관하는 게 사회적 화제가 되는 것은 변화의 과도기여서 희소성 때문에 그런 거고, 앞으로는 여성 법무부 장관도 평범한 일상이 돼야겠지요.
그런데, 노랫말에도 나오듯이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고, 장관도 노력하면 업무를 잘 해나갈 수 있는 자리지만, 대통령은 아무나 하는 자리는 아니라고 봐요. 제가 확신하는 건 난 아니라는 거지요. 신기한 건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그런 상상의 비약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예요. 사회가 풍요로워지려면 상상력이 다양해야 하는데 그렇게 과민하게 정치적으로만 상상하는 걸 보면, 확실히 한국사회는 상상력 자체가 정치밖에 없는 나라처럼 보여요.
사람들이 법무부 장관 오니까 정치로 갈 생각하고 온 게 아닌가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에요.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장관할 때 나를 툭 던지는 심정으로 했기 때문에, 전혀 그런 세상의 말들이 내 마음의 반응을 일으키지 않아요. 지금 별 반응이 없는데 앞으로라고 달라지겠어요. 나이도 들었는데 내 살고 싶은 대로 살아봐야 하지 않겠어요.
***"아주 평범하지 않는 동네에서 평범한 행동을 하니 그게 파격이 된 거 같아요"**
남재일 : 장관께서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 비결 중에는 파격적인 행동양식도 한몫 한거 같습니다. 대체로 엄격한 관습이 적용되는 곳에서 파격은 마이너스로 작용할 공산이 큰데, 장관의 경우는 결과적으로 플러스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어떤 기자들은 그게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행동이라고 말하기도 하던데요....
강금실 : 제가 들은 말 중에 한편으로 가장 희망적이고 즐거운 말이 그 말이었어요. 전 체질적으로 어떤 사안이든 고도의 계산을 못하는 지진아 기질이 있어서, 오히려 그 말이 위안이 됐어요. 그냥, 제 생각에는 과도기에 젊은 여자가 장관을 하니까 그 덕을 본 거라고 생각해요. 좀 관대하게 봐주려는 그런 기운이 있었던 것 같거든요.
제가 일부러 파격을 구사한 건 전혀 아니고요, 아주 평범하지 않는 동네에서 평범한 행동을 하니 그게 파격이 된 거 같아요. 첫날 귀걸이 한 거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지 몰랐어요. 나로서는 정성들여 귀걸이 했거든요. 검사장 회의할 때 현악 4중주 들었는데,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신문에 난 거보고 놀랐어요. 검사와의 대화 때 대통령 앞에서 다리 꼰 것도 이상하다고 그러는데, 여자들이 치마입고 취할 수 있는 자세가 그것 밖에 없지 않나요. 경험이 있었다면 바지를 입고 갔겠죠.
국회출석 때 웃은 것은 그 광경이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실소한 거고, 국회답변 때 "이런 얘기 들었냐"고 물어봐서, "지금 들었다"고 대답한 것도 그냥 솔직하게 답한 건데 이상하게 보인 거 같았어요. 법무장관이 세상 얘기 미리 다 들어야 되는 자리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옷소매 긴 거 입으면 그것도 왜 그런지 의미부여 하려고 해요. 아무 의미 없어요. 체구가 작고 옷이 커서 그렇죠. 마음에 드는데 딱 맞는 사이즈 없으면 그중 가장 맞는 사이즈 택해서 옷 사잖아요. 그러면 소매가 좀 길 수도 있지 않나요. 정치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너무 평범한 행동을 하니까 그게 튀어 보이는가 봐요.
***"두 번 정도 진지하게 인생을 바꿔볼까 생각해 봤어요"**
남재일 : 지금 말씀하신 오해들이 다 주목받는 자리에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에도 살아온 삶이 주목 받는 자리의 연속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경기여고 수석, 서울법대, 사법고시 패스, 여성 로펌 대표, 법무장관 이런 과정이 화려한 만큼 피곤할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살면서 다른 인생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신지요?
강금실 : 두 번 정도 진지하게 인생을 바꿔볼까 생각해 봤어요. 언제 어떤 방식인지는 말하기 그렇고요, 판사 할 때 다시 무용과 갈까 불교철학과 갈까 한때 고민했었던 적이 있어요. 그런 고민들이 갖고 있는 점은 생각하고 느끼고 조용히 살 수 있는 삶을 막연히 꿈꾸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앞은 언제나 캄캄해서 안 보이고, 늘 방황으로 끝났죠.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와서 이런 저런 일 겪다 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런게 오히려 선명하게 다가와요. 뭔가 구체적인 감이 잡히고, 미래도 비교적 선명하게 상상이 돼요.
남재일 : 그러면 장관 그만두고 어떤 일을 하실 계획이신지요?
강금실 : 장관 그만 두면 일단 좀 휴식을 취하고 싶어요. 그리고 자유롭게 개인생활하면서 살고 싶어요. 빚을 갚아야 하니까 열심히 벌어서 갚아야 할 거고.....그거 어느 정도 정리되면, 소소한 개인 생활하면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소소한 봉사활동하고 싶어요, 출퇴근하는 직업 안 하고, 집에서 놀면서 글쓰기 할 생각도 좀 있고, 여기에 와서 장관일 하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이런 거라는 생각이 선명해졌어요.
지금까지는 끌려오면서 살았는데, 앞으로는 그렇게 안 살려고.....직업은 정말 갖고 싶지 않아요. 원래 제가 건달 끼가 좀 있어요. 저혈압이라서 늦잠자고 운동 조금만 하고 많이 안 먹고 이래야 되는데, 지금은 그 반대로 새벽부터 움직이고 많이 먹고 운동은 여전히 안 하고 그러잖아요....솔직히 말하면 사회생활을 안 하고 싶어요. 너무 안 하면 안 되니까 봉사활동을 좀 하고...다른 사람도 그렇게 살고 싶어 하지 않나요?
나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싶은 꿈은 꾸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실천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법무장관직을 그만둘 때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일은 미스테리이기 때문이다. 강장관의 파격을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행보로 보는 사람들의 예측대로 정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 해도 지금 이 말들이 미리 계산된 정치적 행보는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은 바뀐다. 강장관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도, 그냥 정치 안 한다고 명확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현재 그가 그렇고 앞으로도 별로 달라질 게 없다는 어떤 확신 때문이 아닐까?
현재 그가 관심 있는 건 총선이 아니라, 건강관리, 검찰 개혁, 춤, 연말에 열리는 전인권과 한영애의 콘서트 같은 것이다. 그리고 법무장관 그만두게 되면 여행부터 실컷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그 흔한 해외여행을 한번도 안 했던 사람이다. 내가 들은 건, 몇 년 전에 네팔에 다녀온 게 첫 해외나들이였다. 왜 하필 첫 여행지가 히말라야였을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다보면 뭔가 비우기 위해 채워 넣는 사람 같았다. 말하자면, 집을 짓는 게 아니라 길을 찾는 것, 그는 그런 태도를 종교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렇게 보면 사위를 더할수록 마음이 비워진다는 승무는 그의 삶을 압축하는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그는 앞으로 어느 길 위에서 춤을 출까?
<'월간중앙'과 동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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