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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경계선 너머에 있는 이름, '송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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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냉전의 경계선 너머에 있는 이름, '송두율'

<송두율을 위한 변론>

“냉전시대 최대의 사상적 죄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권력과 그 권력을 떠받치고 있는 이념이 정해놓은 틀 밖의 것은 사고(思考)할 수 없게 하거나, 또는 사고할 경우 처벌의 대상이 되도록 만든 현실이다. 국가보안법은 다름 아닌 그 생생한 증거이다. 이리하여, 냉전시대는 “권력의 지침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근본적으로 봉쇄되도록 그 틀이 짜여진다. 여기서 “다르게 생각 한다”는 것은 단순히 견해가 다르다는 정도가 아니라, 기존체제를 대체할 대안의 체계에 대한 혁명적 선택까지를 포함한다.

냉전시대의 지식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투쟁은 바로 이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압축된다. “지식인”이란 당대의 역사가 규정한 한계를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운 대안적 세계를 추구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것이 인정된다면, 이 자유는 모든 사상적 모색의 근본 출발점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 토대 위에서 가능해진다. 민주주의란 인간 사유(思惟)의 자율성과 그에 따른 세계관의 선택을 배제하려는 움직임과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자유의 선택**

민주주의의 본질은 인간의 자존을 훼손하는 권력과 사상의 통제를 극복하는 가운데, 진정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인가를 따지고 드는 데서 그 내용이 실질적으로 채워진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대안의 체계에 대한 상상력과 이성적 논의, 그리고 공론의 광장을 허용하지 않는 체제는 그 이름이 무엇이든, 그 체제를 유일무이한 절대적 현실로 내세우는 <독선(獨善)의 성채>가 된다. 독선은 민주주의와 인연이 없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이 자유를 유린하는 일체의 행위는 기만이며, 자유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파괴행위에 다름이 아니다.

이러한 성채의 주인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그 자유를 선택하려는 자는 “이단자”의 멍에를 쓰게 된다. 그리고 유럽 중세 종교재판에 버금가는 혹독한 정치적/사회적 파문의 형벌에 처해진다. <송두율>은 그로써 옥에 갇힌, 이 시대의 자유가 가진 다른 이름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송두율>을 가두는 사회는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으며, 다른 유형의 대안모색을 포기한 “단세포적 정신수준에 머물러 있는 공동체”임을 스스로 폭로하는 셈이다. 그는, 이 사회가 오늘날 민주주의의 사상적 공간을 제대로 가지고 있는가없는가를 드러내는 시험대이자,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깊이가 어디에 이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그 까닭은 자명하다. <송두율>은 한국이라는 사회가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 경계선 밖의 세계와 경계선 안의 세계를 어떻게 서로 화해롭게 만나게 할 수 있는가를 놓고 자신의 존재 전부를 건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그 경계선의 초월과, 그 경계선으로 나누어진 분단지역의 새로운 미래적 통합의 길을 찾아나서는 작업은 한반도 전체의 자유를 확대심화 시키는 과정이자 우리 모두를 지난 세월의 냉전형 금기체제로부터 해방되도록 하는 대단히 중요한 단서이다. 그는 이 자유의 완성을 위해 적지 않은 위험과 오해를 각오하고 자기를 던진 용기 있는 지식인의 한 사람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에는 그가 북의 “조선 노동당 입당”이라는, 이 편에서 보자면 치명적인 과오에 대한 엄중한 평가의 과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것은 지식인의 자유로운 정신의 발휘를 위해서는 당연히 제약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는, 경계선 밖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당대의 불가피한 통과의례로 적용되었다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하는 것을 우선적 전제로 해야 한다. 이것은 엄격히 말하자면, 그의 과오라는 측면보다는 냉전시대의 극단적 대립상황에서 북이 취한 안전장치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체제에 접근해오는 한 지식인의 의도와 동기에 대하여 완전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 상황에서, 돌아서서는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비난과 매도를 하지 않도록 하려는 자기 방어기제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는 점도 아울러 주목해야 그의 노동당 입당에 대한 평가가 그나마 공정해질 것이다. 조선 노동당 입당으로 가해진 그에 대한 일정한 제약은, 그러나 그가 북의 일방적인 대변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북의 사상적 접합점이 무엇이 되겠는가에 대한 질문을 놓지 않고 추구해왔다는 점으로 해서 사실상의 커다란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점 역시 주시해야 한다.

송두율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서로가 이질적으로 그 발전의 양식이 진행되고 있는 남과 북, 두 사회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각기의 논리가 과연 상대에게 각기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해독불가능의 암호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인지, 아니면 상호 이해의 숨통이 트여 그것을 고리로 서로가 만나 새로운 미래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사상적 성찰의 능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것은 그가 살아왔고 경험했던 남쪽 사회와, 그가 철학적 훈련을 통해 사고해온 유럽의 현실, 그리고 냉전의 벽을 깨고 접근한 북쪽 사회, 이 세 가지 축이 하나로 통합되어 민족 내부의 단절이 극복되고 그것이 근거가 되어 민족단위의 사고에서 그치지 않고 그 다음 단계로는, 세계를 향한 인류사적 역량이 생겨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비록 처음에는 대립과 갈등의 모순을 겪더라도 자신과 다른 것과의 진실한 만남을 통해 변증법적 성숙의 체화를 지향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남과 북의 변증법적 발전을 위한 사상적 접점은 어디에?**

그러기에, “송두율을 가두는 사회”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극복의 능력을 갖지 못한 지점에 처해 있다. 성찰의 기준이 자신의 내부에만 존재하는 개인과 사회는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며, 자기와는 다른 타자, 또는 상대에 대한 이해의 능력 역시 극도로 약하거나 부재(不在)한다. 타자를 자신의 내면에 담아내지 못하는 존재가 주도하는 공동체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몰이해, 추궁과 정죄가 일상화된 곳이다. 그런 사회는 다양한 인간이 겪는 숱한 사연과 우여곡절에 대한 가슴 아픔이 없고, 그래서 영혼의 눈물을 쏟지 못하는 사회이며 자신의 기준에 따라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함으로써 인간을 쉽게 매도하고 비난하며, “진실”에 대한 최대한의 성의를 갖지 않는, 야비하고 냉혹한 영성을 가진 현장으로 전락한다.

실로, 경계선 안에서 아무리 경계선 밖의 세계와의 승화된 만남을 부르짖는다 해도 그것은 경계선 안의 질서와 기준에 맞추라는 일방적인 요구일 뿐이지, 진정한 화합(和合)의 수순은 되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사고하는 사회는 결국 상대의 굴복과 정복 외의 대안은 생각하지 않는 논리에 집착해 있는 셈이다. 남과 북이 서로를 살려내기 위한 생명력 있는 관계로 나가는 방법은 내가 알지 못했던, 상대의 내면에 얼키설키 엮어져 있는 인생사의 사연을 먼저 경청하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찾아질 수 없다. 상대의 자리에 서보려는 자세와 안목을 죄악시 하는 현실에서는 오로지 이 편의 사고와 현실만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오만과 일방주의가 주도함으로써, 처지와 사연이 다른 개인과 공동체의 진실한 만남은 불가능해지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기에, 자신을 상대에게 자유롭게 열고, 상대의 내면에 기존의 선입관, 편견에 묶이지 않고 다가설 수 있는 절차를 통과하지 않는 평화와 통일은 어느 일방의 권력과 논리의 우월적 지배를 향한 폭력을 낳을 위기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송두율이 우리에게 귀중한 까닭은 그가 이 폭력의 저지를 위한 사상적 모색의 중심을 잡는 삶을 일관해서 살아왔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이 비록, 현상적으로는 북의 입장에 기울어 있다고 보여 진다 해도 그 “기움”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상대(북)에 대한 정당한 이해의 균형을 위해서 필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북쪽 사회에 내재한 목소리가 이곳에서 공정한 발언권을 얻어 이 사회에 내재한 목소리와 동등한 위치와 좌표에서 대화할 수 있는 철학적 과정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상대에 대한 부인(否認)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확인을 하겠다는 것 외에 다름이 아니다. 이는 이미 언급했던 바와 같이, 일방적 군림의 정복주의적 논리로 흐르는 것이며, 이 논리의 현실적 결과는 남북간의 격돌과 그로 인한 재앙일 뿐이다.

따라서 경계선 이쪽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상대의 내면에 대한 진심어린 이해의 노력을 하려는 개인과 사회가 존재하는 것은 평화, 민주주의, 그리고 통일의 근본조건이 된다. 송두율이 지금 이 시각, 육신의 자유를 회복해야 하는 이유는 그 근본조건의 성립을 위해 필요한 최전선에 그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나라는 그 최전선에 서고자 하는 자유의 역량을 능멸하고 있다. 자기와는 다른 상대를 어떻게든 최대한 껴안고 나가려는 의지와 결단을 갖지 못한 사회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경계선 너머로 월경하려는 자는 우리의 적인가?**

이렇게 보자면, 우리는 아직도 민주주의의 참된 의미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중세적 단계에 처해 있다. 냉전의 경계선 너머로 월경(越境)하려는 자는 오로지 적(敵)외에는 없다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실정법적 공식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셈이다. 실로, 냉전의 논리는 교전(交戰)상황을 전제로 한 극단적 적대관계와 일치한다. 이 적대관계를 허물고 새로운 우호적 미래를 만드는 것은, 권력의 결정에 따른 것이어야지 그 외의 시도와 결단은 반역(反逆)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역사의 미래를 권력에게만 맡기는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 공동체 내부의 그 누구라도, 필요하다면 시대적 한계를 돌파하는 행위와 선택을 하는 것이 정당함을 적극 인정하는 체제이다. 그 권리가 박탈된 사회는 소수의 특권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이다.

오늘날 우리가 송두율과 함께 불행한 이유의 하나는 바로 그 박탈된 권리가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송두율 하나의 희생은 우리 모두의 전체적인 자유의 상실을 뜻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더욱 탄식할 일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송두율의 처벌이 이 사회의 법과 질서,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고들 여기고 있는 점이다. 자신의 자유를 겨냥하여 스스로 칼을 꼽고 있어도 그것이 자해행위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냉전시대가 이 세대를 세뇌시켜온 결과이다. 그리고 송두율은 그 세뇌된 사회가 만들어내고 있는 유배자(流配者)이자, 소수의 특권세력이 이 사회의 역사의식을 마비시키고 기만하기 위해 요구하는 희생제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전시 중에는 동맹이었던 소비에트 연방(소련)과의 세계적 대치구도를 심화시키는 과정, 즉 냉전정책에 대한 내부의 비판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른바 <비 미국인활동 조사 위원회(Un-American Activity Committee)>를 만들어 “반역자”들을 가려내고 축출했다. 냉전시대의 진영전(陣營戰)에서, 이 편의 절대적 정당성을 엄호하는 것은 모두의 이익이라는 이념적 속임수를 건드릴 수 없는 성역(聖域)으로 만들기 위한 “광란의 프로파간다”였다. 무서운 야만의 역사였다.

이 “반역자 만들기 소동”에서 살아남으려면, 경계선 이 편에 대한 “충성심”과 경계선 저 편에 대한 “적개심” 또는 “이 전의 충성심 포기라는 전향”을 공개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에 순응해야 했다. 가령, 미국의 제국주의 외교정책, 노동탄압 역사, 독점 대자본의 횡포 등을 고발하는 진보적 교육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당시 미국은 교사들에 대한 연방정부 차원의 충성심 조사 프로그램을 가동했고(투르만 대통령령 9835), 사회적 매장과 생계위협을 통해 무수한 “전향자”들을 만들어 냈다. 이로써 독점 대자본이 장악하는 미국 사회에 대한 대중들의 충성심은 확보되어갔고, 제국주의 대외정책에 대한 내부의 비판은 진압되어갔다.

미국의 역사가 마티 제저(Marty Jezer)는 그의 책 <암흑의 시대: 1945-1960 미국의 생활 (The Dark Ages: Life in the United States 1945-1960)>에서 “지식인 사회의 체제 순응(intellectual conformity)”이 강화된 시기였으며, 한때 진보적이었던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젊은 시절 사상적 입지는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적 순진함 때문이었다는 전향발표가 줄을 이은 때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전향공작의 결과로 인해 미국 사회의 지적 전통은 급속하게 우경화되어갔으며 대안체제에 대한 논쟁은 이후 신좌파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질식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냉전시대 미국의 비극**

<한국전 비사(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1950-1951)>를 쓴 아이. 에프. 스토운(I. F. Stone)의 경우, 바로 이러한 지식인들의 체제순응주의에 도전하여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도하면서 당국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어려움을 겪었고, 미국 자본주의 체제가 제3세계에서 어떤 착취구조를 유지확대하고 있는지를 해부한 폴 바란(Paul Baran)의 경우, 그가 죽기까지 스탠포드 대학 교수자리를 위협당하는 고통을 치뤘다. 오늘날 그 지적 사고의 폭과 깊이로 지식인들을 압도하고 있는 트리나다 출신의 지식인 씨. 엘. 알 제임스 (C.L.R. James)는 냉전시대 초기, 트로츠키주의자라는 것으로 해서 미국 입국이 거부, 또는 추방되기도 했으며 1930년대 이래 미국 노동운동의 역량 위에서 대통령 후보까지 내는 등 대중적/실정법적 합법성을 단단하게 쌓아 올려왔던 미국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정부의 폭력전복 기도라는 죄명을 뒤집어 씌워 정치사회적 매장의 대상으로 희생된다.

특히 이들 좌파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의 정치적, 법적 처단은 미국 민주주의 역사의 후퇴를 가져왔으며 적지 않은 세월, 미국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발전을 지체시켜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이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에 대한 상상력과 사고능력을 거의 사망의 단계에 이르게 했고, 그로써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봉사하는 기술 지식인의 양산에 치중함으로써 미국사회의 사상적, 철학적 기반은 메마를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1968년 세대의 역사적 공헌은 바로 이러한 냉전시대의 논리를 격파하고, 인민들의 민주적 권리를 억압하는 관료화된 사회주의도 아니며 독점 자본의 지배를 근거로 하는 제국주의적 단계에 이른 자본주의도 아닌 새로운 대안의 모색을 지향하도록 사회 전체의 인식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왔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은 한 세대 전체에 걸친 엄청난 자유의 신장을 가져왔으며, 제국주의 침략전쟁인 베트남전의 비극이 더 이상 연장되는 것을 막아내고 미국 내부에 자신의 사회를 새롭게 바꾸어 내는 힘이 길러지는데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러한 미국 내부의 지적 전통은 오늘날에 이르면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나 하워드 진(Howard Zinn), 또는 얼마 전 작고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마이클 해링턴(Michael Harrington), 씨 라이트 밀즈(C.Wright Mills)등으로 대표된다. 미국 내부의 진보적 전통의 기본 철학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논리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문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 사회가 이념적으로 적대화하고 있는 상대-그것이 국가이든 계급이든 아니면 지식인이든-의 자리에 서서 세상을 총괄적으로 새롭게 검토해보는 것이다. 이것은 냉전의 논리로 보자면 경계선 내부의 세계에 대한 충성서약과 전향의 명백한 거부이자 경계선 너머 적과의 내통이 된다.

그러나, 이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의 책 <지식인의 표상(Representation of the Intellectual)>에서 말했듯이, 자신의 체제권력이 배제하고 주변화하며 적대화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껴안음,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체제가 가진 진정한 면모의 비판적 성찰을 통해 인간사회의 고통을 극복하는 중대한 지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지식인이란 자기 땅에서 망명자”일 수밖에 없으며, 그 시대가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대변하여 권력과 기존 이념이 부인하고 있는 현실의 진상을 밝혀내고 인간사회의 억압과 폭력, 무의미한 격돌과 전쟁을 피할 수 있게 하는 “대안의 행동방식(alternative courses of action)”을 제출하는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다.

***경계선 안과 경계선 밖의 합류**

이 점에서 <송두율>은 냉전시대에 다만 오랜 세월 밖에서 유랑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땅에서 계속 망명자가 된 지식인”이다. 그는 이 시대의 분단이 낳고 있는 저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대립과 갈등, 그리고 그것이 결과할 수 있는 재앙으로부터 남과 북 두 사회 모두 구원되기 위한 화해의 모색이라는 대안의 행동방식에 충실해왔다. 그것은, 경계선 이편의 논리와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재단(裁斷)해온 상대를 상대의 자리에서 한번 그 내면의 복잡한 사연을 들여다보려는 진정어린 노력으로 상호이해의 자유를 확대하려는 역사적 선택의 결론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사회는 그러한 자유의 확대를 체제에 대한 반역의 관점에서 매도하는 가운데, 냉전의 경계선을 완강하게 지켜내려 하고 있다. 그리고 더욱 가관인 것은, 송두율의 망명을 촉발시킨 책임 당사자들인 냉전수구세력들이 자신들의 과거의 역사적 죄과는 완전히 덮어버린 채 그를 체제의 적(敵)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생존과 평화의 미래를 위협하는 진정한 적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분단시대의 상호이해를 위한 사상적 노력을 가로막는 일체의 사고와 행위, 제도이다. 상대에 대한 능멸과 부인, 적대와 대결을 기초로 한 관계의 결말은 폭력적 지배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의 자유에 대한 유린이자 민주주의의 파괴이며 평화를 겨냥한 침략행위이다. 따라서 송두율은 이 사회의 적이거나 반역자, 또는 고개를 숙여야 할 죄수가 아니다. 그는 냉전시대의 한국사회가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또는 세뇌로 인해 도달하려 하지 않은 경계선 너머의 자유지대에 존재하는 미래의 지표이다.

도대체가, 이 분단의 시대가 가야할 평화와 통일의 길이 일단 상대의 자리에 서서 그 안목으로 새롭게 교정해나가는 상호이해의 사상적, 감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방법이 있기나 한 것인가? 이 세대가 진정 한반도 전체의 새로운 화합과 성숙한 만남을 위한다면, 송두율이 이미 사상적으로 통과했던 과정을 밟지 않고 서로의 삶을 나누면서 새로운 미래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대안이 과연 따로 있기나 한 것인가?

송두율은 초국적 자본이 민족국가의 경계선을 파괴해나가면서 세계자본주의 체제 안에 인류사회를 통합해나가는 시대에 있어서도 여전히 민족의 의미를 묻는다. 그리고 그 민족이 세계적 차원의 발언권을 가진 사유의 능력을 획득하기 위한 과정에서, 먼저 민족 내부의 상호 존중과 상호이해의 절차가 가진 중요성을 혼신을 다해 설득해왔다. 그는 단 한번도 남과 북 어느 체제가 일방적으로 우월하다는 식의 경박한 비교논리에 기운 바가 없다. 남이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논리에 보다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민족적 주체성의 관점이고, 북이 민족주체의 결속력을 다지는 과정에서 생존해온 역사가 직면한 과제는 변화하는 세계에 어떻게 본래의 중심을 잡으면서도 자신을 열어나갈 것인가라고 압축한다. 그리고 이 과제의 해결에 남과 북은 자기 안에 있는 타자로서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자기 안의 타자, 그리고 자유를 향한 투쟁**

이 논리가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가? 이 주장이 누구의 자유를 침해하는가? 이 사유의 지향점이 이 시대의 역사를 어떻게 훼손하고 있는가?

송두율을 가두고 있는 사회는 무지와 편견에 안주하는 사회이다. 송두율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는 사회는 자신의 미래를 가로 막고 있는 사회이다. 송두율의 권리를 부인하는 사회는 민주주의의 사상적 근본을 유린하는 사회이다. 송두율의 입을 닫게 하고 있는 사회는 민족적 진실의 추구를 적대시하고 평화를 훼손하는 사회이다. 지식인 송두율의 존재를 능멸하고 매도하는 사회는 권력과 기존의 이념이 설정한 경계선에 이 사회의 양식을 가두고 있는 사회이다.

송두율 그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넘어서야 할 경계선 저 너머의 자유이다. 그 자유가 유린되고 있는 한 분단시대를 극복하는 민주주의의 영예는 우리의 것이 될 수없다.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구속하는 명백한 모순에 대하여 “이건 아니다”라고 외치지 않는 시대는 미래를 남의 손에 맡기고 사는 자의 비운(悲運)을 피할 수 없다. 자유를 향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이 글은 계간지 <황해문화> 최근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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