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중견언론인들의 모임인 '새언론포럼'이 개최한 언론관련 세미나(21일 오후 3시,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발표된 발제문이다. 편집자
***대장금과 노무현**
최근 한 언론계 선배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박형, 요즘 ‘다모’나 ‘대장금’ 같은 드라마가 뜨는 이유 아나?” 선배는 이렇게 자답했다. “시대의 주역이 바뀐 거라. 옛날 같으면 임금이나 양반, 장군 등만이 주역이었지만 이제는 여형사나 요리사가 주역이 되지 않았나”
그렇다. 우리는 지금 주류의 교체를 경험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그리고 그 당선을 가능케 한 민초들의 반란이 그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를 이끌어왔던 기득권.제도권 세력은 막강한 조직력과 금력에도 불구하고 근본적 변화를 염원하는 민초들의 거대한 에너지 앞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에 졌다’는 그들의 자탄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노무현정부 출범 이후 우리는 근본적 변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애석하게도 ‘지금까지는 아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근본적 변화의 방향이 어디이며, 무슨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물론 기본적 비전조차 제시되지 않고 있다. 변화를 위한 에너지는 충만해 있으나 실질적 변화는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다.
그 1차적 책임은 물론 ‘변화의 주역’을 자임한 노무현정부에 있다. 변화의 구체적 모습에 대한 비전 제시와 사회적 합의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해야 할 언론에도 노무현정부 못지않은 책임이 있다. 메이저신문을 비롯한 제도언론은 과거와 자본의 포로가 된 채 노무현정부 비방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터넷매체 등 신생언론은 보수기득권층에 대한 공격에 주력하고 있다. 적어도 한반도 차원의 우리 전체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진지한 토론은 도외시되고 있다. 개혁은 표류하고 있다.
***대전환의 시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기본적 성격 규정, 그리고 이에 대한 최대한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세계적, 지역적, 국내적 차원에서 그 키워드는 ‘대전환’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문명전환’이 얘기되고 ‘자본주의체제의 종말’이 얘기되고 있다. 경제개발에 의한 자원 착취, 환경 수탈은 더 이상 지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자본이동의 완벽한 이동이 보장된 90년대 이후 빈발하는 금융위기로 저소득계층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 IMF, WTO 등 국제기구와 거대 다국적기업, 그리고 국제금융자본의 엄청난 힘 앞에 국가는 무기력한 존재로 몰락했으며 더 이상 국민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지켜주지 못한다.(아르헨티나, 볼리비아의 정권교체) 또한 갈수록 심화되는 부의 양극화와 함께 가난한 자들의 저항이 본격화되고 있다. 1999년 시애틀에서 시작된 짓밟힌 자, 억눌린 자들의 저항은 이제 자본주의체제의 유지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5백여년간 이어져온 역사적 사회체제, 즉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종말에 다가가고 있다는 논의들이 무성하다. 그 다음 체제는 무엇이 될 것인가?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한 체제가 될 것인가, 아니면 더 억압적이고 더 불평등한 체제가 될 것인가? 지금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지금부터 벌어질, 변화를 향한 투쟁에서 판가름이 날 것이다.
지역적 차원에서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이 지속되고 남북한과 중국 일본이 세계를 평화와 안정과 번영으로 이끄는 주도세력이 될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군사일방주의에 이끌려 서로가 반목하고 소모적 군비경쟁에 휩쓸려 들어가면서 새로운 세계의 주도권을 빼앗길 것인가?
미국의 저명한 정치경제학자 찰머스 존슨은 그의 저서 <불로우백>에서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동아시아의 비약적 경제성장”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러나 그 중요성은 거의 인식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1945년에서 60년대까지는 미국이 세계경제를 이끌어 왔고 70년대부터 최근까지 미국 유럽 일본 등 3두마차가 이끌어 왔다면 앞으로는 동아시아지역이 견인해 나갈 것이란 얘기다.
문제는 중국을 제외한 일본 남한 대만이 미국의 안보망 안에 포섭돼 있다는 점이다. 군사력에 의한 세계패권 유지를 꿈꾸는 미국의 강경파들은 중국을 잠재적 경쟁자로 설정, 은밀한 봉쇄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그 빌미가 바로 북한의 핵위협이다. 미국은 북한 핵위협을 이유로 미사일방어망(MD) 구축을 추진하면서 남한 및 일본의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그 결과는 남한 및 일본과 중국과의 적대관계 형성이다.
여기에서 바로 한반도 분단구조 극복의 문제가 제기된다. 북한은 궁극적으로 세계체제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이다. 북한 붕괴에 의한 남한의 흡수통일인가, 북한 스스로 경제적 자생력을 갖춰나가면서 남한과 평화롭게 통일될 것인가, 아니면 전쟁이라는 방식을 통할 것인가? 전쟁이 재앙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북한 붕괴가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 상당한 불안정을 가져올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북한이 자체의 자생력을 갖춰나가면서 동아시아경제에 합류할 경우, 그 이득과 혜택은 너무도 분명하다. 시베리아횡단철도 등으로 상징되는, 진정한 동아시아 경제권이 형성되면서 동북아 3국은 물론 러시아, 유럽 등과도 엄청난 경제적 과실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 지역이 지난 150년간의 반목과 질시와 착취와 수탈을 벗어나 진정한 평화와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평화와 번영으로 이끄는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현재의 미국이 이를 원치 않는다는 것은 지난해 가을 분명히 드러났다. 유럽연합과 러시아 등이 잇따라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아시아 최대의 동맹국인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가 미국의 반대를 무릅쓴 채 역사적 북일 정상회담을 실현시키자(2002년 9월 17일), 그로부터 한달도 안돼 북한의 ‘우라늄농축’ 의혹을 제기하여 그때까지 동아시아에서 일고 있던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어 버린 것이다.
한반도 분단구조의 평화적 극복은 현 시점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최대의 민족적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정상적 국익은 보장하되, 강경파의 일방군사주의에 의한 부당한 압력을 거부하면서 우리의 활로를 찾아나가는 지혜와 외교 역량이 필요하다. 그 요체는 자주국방이 아니라 자주적 외교에 있다.
국내적으로는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서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정부가 내세우는 ‘탈권위’와 ‘참여’는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내용을 보다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부패 근절을 핵심으로 하는 정치개혁이 변화의 전부일 수는 없다. 노동자.농민.도시빈민 등 그 압도적 인구비중에도 불구하고 기존 정치과정에서 소외돼 있는 약자들의 정치적 발언권 및 영향력 확대가 더 중요한 과제이다.
노동과 환경, 교육과 보건, 그리고 여성 문제 등에서 구성원들의 참여와 발언권 확대를 최대한 보장해야 하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서 최대의 피해와 희생을 당하고 있는 노동자.농민.도시민빈의 삶의 질을 보장하고 개선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요체는 이들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약자의 발언권 및 영향력 확대이다.
***노무현정부의 허와 실-스타일의 변화는 있으되 내용적으로는 공허**
노무현정부의 키워드는 ‘탈권위’와 ‘국민참여’이다. 실제로 통치스타일 측면에서 이러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과연 내용 측면에서 실질적 변화를 이루고 있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대미관계와 대언론관계에서는 태도의 돌변이 나타나는가 하면 재벌개혁이나 노동.환경정책 등에서는 이전 정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정책기조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과의 관계는 혁명적 변화가 예상되던 분야였다. 그러나 집권 이전 “사진이나 찍고 굽실거리기 위해 미국에 가지는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노 대통령은 첫 미국방문에서 “미국이 없었다면 지금쯤 나는 포로수용소에 있었을 것” 등의 발언으로 태도를 180도 바꿨다. 또 법정소송까지 불사하며 거대보수신문들과 예리한 대립각을 세워왔던 대언론관계에서도 최근 중앙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과 일련의 만찬을 가지는 등 집권 초기와는 분명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후보자 신분일 때와 대통령이 되고 나서의 언동은 아무래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 나라를 책임지는 자리에 앉게 되면 일정 부분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에의 적응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나아가 미국이나 거대언론과 같이 현실적으로 막강한 힘을가진 집단과 항상 예리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대미, 대언론관계에 나타난 노 대통령의 변화는 현실에의 적응과정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다. 정체성 자체를 의심해야 할 만큼 그 변화의 진폭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첫 미국방문을 통해 훼손된 한미관계를 복원시켰다고 스스로 자평하고 보수언론들도 그렇게 평가했지만, 미국이 그의 달라진 모습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변화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지난 여름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라는 새로운 국정목표를 추가했다. 박정희 개발독재시대에 나옴직한 구호가 지금 왜 새삼스럽게 제시되어야 하는지 필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경제의 지속적 성장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정치의 영역에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IMF사태 이후 급속하게 악화되고 있는 부의 양극화를 교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너지는 중산층을 일으켜세우고, 희생의 대부분을 떠안고 있는 저소득층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 나아가 경제규모에 걸맞는 사회안전망을 갖춰 나가야 한다.
부안 핵폐기장 건설, NEIS 시행 등에서는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미숙함, 또는 독단 등으로 커다란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노동.환경정책 등에서도 그의 지지기반과는 다른 정책기조를 보임으로써 지지계층이 이탈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도는 집권 반년 남짓 지난 시점에서 20-30%대의 낮은 비율을 기록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10월 이후 ‘재신임 선언’과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통해 정국의 반전을 노리고 있다. 실제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를 통해 정치개혁을 이루고 그 모멘텀을 내년 4월 총선에까지 이어가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집권 1년도 안 돼 ‘국민의 재신임을 묻겠다’는 극약처방을 쓸 수밖에 없었던 지금까지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은 결코 만족스러웠다고 할 수 없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변화에 대한 깊은 철학적 기반의 부재, 정책시행상의 미숙함, 인재 등용의 편협함 등을 꼽을 수 있을 것같다.
원내 소수당의 한계, 거대야당인 한나라당과 조중동 등 거대보수신문의 막무가내식 딴지걸기 등에도 책임을 물을 수 있겠다. 그러나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그러한 변화를 위한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시키지 못한 책임이 가장 크다 할 것이다.
***급변하는 언론상황-언론주체의 다양화와 자본의 영향력 확대**
개혁의 표류에 언론의 책임은 없는가? 그에 앞서 언론상황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새롭고 다양한 언론주체가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언론주체란 다수의 수용자들을 향해 나름의 정보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집단을 말한다.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을 비롯한 인터넷매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메트로, 데일리포커스, AM7 등 무가지들이 경쟁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방송에서는 시사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제 전통적 의미의 기자와 제도언론이 언론을 독점하던 시대는 지났다. 일반시민, 학자, 심지어 연예인과 공무원들까지 사실상 언론인의 역할을 할 정도가 됐다. ‘언론민주화’라고 일컬을 만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 ‘신생언론’은 기존 제도언론에 비해 아직은 여론점유율이 낮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조중동의 여론독점만은 확실히 무너뜨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해 대선이 이를 증명한다.
또하나 주목할 만한 현상은 언론에 대한 자본의 지배력이 현저하게 강화됐다는 점이다. 이제 언론은 정권을, 정권의 탄압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김대중정부 이후 조중동이 걸핏하면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고 있지만 이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지금 제도언론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삼성으로 대표되는 자본이지, 정권은 아니다. 언론, 보다 정확하게는 제도권 신문의 생존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문화일보가 무가지 대열에 참여하고 다른 일간지들도 무가지 발행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은 이같은 사정을 잘 말해준다. 지난 9월 민언련이 발표한 ‘무가지 보도내용 분석’에 따르면 무가지의 보도 태도는 철저하게 친자본, 친기업적이다. 광고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무가지의 특성상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일간지들이 앞다투어 무가지 시장 진입을 추진하고 있는 현상은 제도권 신문이 자본의 영향력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을 것임을 보여준다 하겠다.
한편 조중동 등 거대보수신문은 아직은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중앙일보가 남북문제 등에서 일정부분 진보적 모습을 보이면서 ‘조중동’이 ‘조동'이가 됐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로 보인다. 대미관계나 노동문제 등에서의 보수적 태도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들 거대보수신문의 완고한 보수성의 원인으로는 2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과거 청산의 미흡함, 둘째 자본의 영향력 강화이다.
80년대까지 언론의 중핵이었던 신문이 보수화된 결정적 계기는 2차례에 걸친 언론인 숙청이었다. 75년의 동아.조선사태와 80년 신군부의 언론인 숙청으로 모두 1천2백명 가까운 진보적.개혁적 언론인들이 언론계를 떠났다. 그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특히 정치권의 경우는 민주화와 함께 인적 청산 및 쇄신이 이루어졌으나 언론계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과정이 없었다.
또한 유신과 5공시절에 독재정권에 부역한-그것이 자의였든, 강압에 의한 것이었든-잘못을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반성한 언론은 거의 없다. 여기에 동아와 조선은 친일 혐의로부터 아직도 자유스럽지 못한 입장이다. 이러한 과거 청산의 미흡함이 거대보수신문 등의 근본적 쇄신을 가로막고 있는 주요인이라고 생각된다.
나아가 기형적으로 대기업의 광고에 의존해야 하는 우리 신문업계의 현실에 비추어 이들 신문이 근본적 변화에 동참하기에는 너무도 제약이 많다.
따라서 현재 언론계 지형은 인터넷매체 등 소규모의 독립적 대항언론과 공영방송이 한 축을, 조중동 등 거대보수신문이 또다른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자가 개혁을 대변한다면 후자는 보수를 옹호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간의 논쟁이 아직은 소모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전자는 반‘조중동’이 조중동이 개혁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대안’언론이 아니라 ‘대항’언론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반면 조중동도 과거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안티조선의 한 활동가는 ‘안티조선운동의 목표는 조선일보를 죽이자는 것이 아니라 조선일보의 과도한 영향력을 축소시켜 진보와 보수의 균형을 맞추자는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맞는 말이다. 현재 언론계는 물론 사회 전체의 보혁대결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보수와 진보의 합리적이고 진지한 토론을 통해 보다 나은 공동의 해법을 모색해 나가자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공격이 전부일 수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
***1. 역사적 안목**
저널리즘은 그날 그날의 사건을 다룬다. 그러나 하루 단위로 생각하고 일한다 해도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지금처럼 50여년만에 분단구조가 해체되는 역사의 전환점에서는 저널리스트의 깊은 역사의식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남북간 대결과 적대의식이 극심했던 80년대 이전처럼 대북안보만을 외치는 케케묵은 역사의식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선취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미동맹’이라는 한마디만으로 모든 이견을 찍어누르려는 ‘에비’의 문화도 이젠 사라져야 한다. 수십년 앞을 내다보는 역사적 혜안이 요구된다.
***2. 당파성의 문제**
언론이 현실의 특정 정치세력과 일체화되는 것은 위험하다. 현실의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진리와 정의를 독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은 항상 옳다’는 공산당의 무오류 선언은 오류였음이 드러났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한 세력이 절대선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며 이에 동조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현실의 특정세력은 정당성의 일부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누가 더 정당성의 비율이 많은가이다. 언론의 역할은 공정한 심판자로서 현실세력의 시시비비를 냉정하게 가려내는 것이다.
최근 조선, 동아 등이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사설을 실은 데 대해 일부에서 놀라움을 표시하는 것을 보았다. ‘조중동은 언제나 한나라당 편’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리라. 이러한 고정관념이야말로 우리의 사회적 논의의 수준이 매우 저급한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3. 실사구시**
우리는 과연 현실을 얼마나 제대로, 깊이 알고 있는가? 노동자.농민의 현실을 깊이 알고 있는가? 탈북자들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있나? 급변하는 국제현실을 똑바로 파악하고 있는가?‘생산직 연봉 7천만원’이라는 한마디로 전체 노동자들의 현실을 오판하는 것은 아닌가? 나아가 노동자들의 분신자살 등에 대해 ‘목숨을 투쟁수단으로 삼지 말라’고 매도하는 것은 아닌가?
대부분의 언론들이 정치권의 말 한마디를 열심히 중계보도하고 있는 동안 저 넓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작 중요한 일들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정확한 진단이 올바른 처방을 낳듯이 사회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이에 대한 합의 없이 제대로 된 해법이 나올 수 없다. 사회현실에 대한 심층보도가 필요하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소리높이 외치는 것이야말로 가장 혁명적인 행동이다” 로자 룩셈부르그)
***4. 언론비평**
언론비평은 언론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그러나 비평이 특정 입장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고 반대 입장을 비판하는 무기로 사용돼서는 곤란하다. 문제에 대한 인식과 개선방법에 대한 합의를 이루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입장에 따른 비판보다는 보편적 기준(언론의 전문성)에 의한 비평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그들만의 비평’이 돼서도 안 된다. 다양한 입장의 모든 당사자들이 참여하고 토론하는 비평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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