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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소설 - ‘창랑지수‘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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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소설 - ‘창랑지수‘ <88>

배역의 대사와 진실은 무관하다

***88. 배역의 대사와 진실은 무관하다**

나는 육검비에게 전화를 걸어서 당분간 그 자료를 밖으로 돌리지 말라고 했다. 그는 의외라는 기색 하나 없이 이유도 묻지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 청장님. 그 자료는 모두 원래 투서에서 그대로 베낀 것입니다. 저는 정리에 참여하지도 않았고요. 언제 한 번 적당한 때를 보아서 모두에게 이런 사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직 물러선다고 말도 안 했는데 그가 먼저 물러섰다.

내가 말했다.

“내가 자네한테 부탁한 일인데 걱정할 게 뭐 있나?”

나는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처음에는 나를 지지하던 인간들이 왜 후퇴할 땐 나보다도 빨리 물러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심지어 정소괴 일당을 향해 일어나서 말 한 마디 할 용기조차 없었다. 그런 인간들을 믿고 일을 벌이려 했다니. 크게 낭패 볼 뻔했다. 이런 생각을 하자 더욱 고독해졌다. 육검비는 그래도 사령관쯤 되나 보다. 시작부터 후퇴 노선까지 모두 설계해 놓았으니 말이다.

나는 며칠 더 망설였다. 정말 여기서 그만두자니 입장이 영 난처했다. 시작부터 너무 자신만만하게 굴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이제 비로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의 자신감은 일종의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뇌물 한 번 거절한 걸로 청렴결백한 이미지가 구축되었다고, 그것으로 모두가 나를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범인(凡人)에 불과해서가 아니다. 상대가 옥황상제라도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건드리면 발끈해서 따지러 갈 인간들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그런 용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없다.

사람은 자리에 오르면 특수한 권리와 이익을 갈망하게 된다. 나도 이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충동을 억제하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사람이 바뀌어도 결과는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저 흑색지대로만 가지 않으면, 그 선만 넘지 않으면, 회색지대 안에서 무슨 짓을 하건 나는 그저 묵인할 수밖에 없다. 대세가 그러했다. 나는 여태껏 민중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서 나를 따르게 하겠다는, 그들을 만족시켜 주겠다는 환상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눈에 모래알 하나 들어간 것도 참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지.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끝도 없다. 정소괴뿐만 아니라 줄줄이 다 들고 일어날 텐데 내가 무슨 수로 견디겠는가. 또 위에서도 그렇게 까다롭게 요구하지 않고 다 묵인하는데,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나는 처음에는 기적을 이뤄내고 싶었다. 위생청에서, 그나마 평민의식이 남아 있는 나 지 청장의 지도 하에, 일반 서민들에게 대화의 통로를 열어 자기의 소망을 표현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도처에 존재하는 역량이 사람을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여기엔 일종의 흐름,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 있었다. 이것 자체가 하나의 국면(局面), 아무도 초월할 수 없는 국면이었다. 이전에 풀죽어 지낼 때 나는 나의 배역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했다. 고통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득의만만하여 얼굴 가득 윤기가 흐르는 지금 역시 나는 나의 배역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하면서 매우 무기력함을 느꼈다. 나는 천신만고(千辛萬苦), 천산만수(千山萬水), 천난만험(千難萬險)을 다 겪고 여기까지 왔다. 무슨 일이든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동류는 내가 답답해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여보, 다 잊어버려요. 당신 그렇게까지 안 해도 아무도 당신 청장 자격 없단 소리 안 해요. 오히려 그런 식으로 튀는 게 더 위험하다고요.”

내가 말했다.

“내가 이 자리에 앉을 때는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면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뭐 있어? 나는 평범한 서민 가정 출신이야.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아픔이 있는지 나는 다 알고 있다고. 그런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는 것인데, 막상 그들은 저렇게 소심하기 짝이 없으니 말이야….”

그녀가 말했다.

“그 사람들은 소심하게 구는 것이 잘하는 거예요. 어느 누가 이전의 조반파(造反派)마냥 앞으로 뛰어나오는 바보짓을 하겠어요? 어떻게 수습하려고요? 사람들은 당신이 자기들을 팔아 넘겼다고, 절반쯤 올라왔더니 아래에서 사다리를 치우더라고 원망할 거예요.”

생각해보면 자기 이름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나보다 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는 뒤통수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내가 말했다.

“나를 지지해준 사람들에 대해선 나도 다 생각이 있어. 일이 년 후에 간부 대오를 정리하고 나면, 나도 권토중래(捲土重來)할 거야.”

그녀는 못 믿겠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말했다.

“똑 같은 장소에서 두 번 넘어지는 사람이라면 별로 똑똑한 사람은 아닐 것 같은데요? 이것은 몇 사람 정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요.”

또 말했다.

“여보, 우리 집 형편도 이제야 막 피기 시작했는데 다른 생각 좀 하지 말아요. 당신은 뭐 별수 있는 줄 알아요? 옛날에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굴었을 때는 결과적으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잖아요. 그런 생각을 버리고서야 겨우 오늘에 이르렀는데, 이제 또 그 병이 도지려는 거예요?”

내가 말했다.

“누가 뭐래도 나는 고생을 알고 자랐고, 누가 뭐래도 나는 지영창(池永昶)의 아들이야! 누가 뭐래도 나는 지식인이라고….”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뭐라고 권하지는 않을게요. 때가 되면 당신 생각도 자연히 달라질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막 자리에 올랐을 때는 가슴을 두드리면서 이런 저런 약속들을 하죠. 자리에 오르면 여기 저기 불을 지피겠노라고…. 하지만 결국엔 주어진 궤도를 따라 움직이게 마련이죠.”

생각해보니 그 말도 맞는 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평민적인 태도로 자리에 오르지만, 일이 년을 못 넘기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고 만다. 아주 허심탄회한 자세로 기정의 궤도를 따라 움직이게 된다. 이 바닥은 마치 블랙홀과 같아서, 마치 일종의 신비한 마력이 모든 것을 정해 놓은 듯, 일단 들어가면 자기 뜻대로 할 수가 없다. 내가 말했다.

“나는 결코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지 않을 거야. 관료화의 틀에 나를 처박아 넣지 않을 거라고…."

동류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류는 침대 위에 앉아 신문을 보다가, 갑자기 신문지를 휙 내던지면서 말했다.

“이것 좀 봐요! 당신 밖에서 조심해요! 괜히 남한테 미움 사지 말고…. 안 그랬다간 우리 식구의 안전도 보장 못해요.”

나도 이미 본 뉴스였다. 하남(河南)의 모 지방 정법(政法) 위원회 서기가 사람을 고용해서 살인을 저지른 사건이었다.

내가 말했다.

“그렇게까지? 쓸데없는 생각으로 괜히 지레 겁먹지 말라고.”

그녀가 말했다.

“만약에…, 나는 만약의 경우를 말하는 거예요.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만약 우리 일파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못 참아요. 그걸로 나는 끝장이라고요.”

내가 말했다.

“위생청의 그 인간들은 그럴 위인들도 못 돼. 내가 그 인간들 똥을 몇 번 나누어 싸는지까지 다 아는데…. 당신 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거야.”

그녀가 말했다.

“몇 년 전에 당신 사생활에 문제가 있다고 고발한 익명의 편지는 위생청 사람이 쓴 게 아니었던가요? 그런 사람들이 지금 당신 주위에 다 매복중이라고요. 사람도 아직 그 자리에 있고, 그 마음도 여전할 텐데, 그 사람들이 어떤 수단을 동원할지는 당신도 모르잖아요. 작년에 광동의 무슨 부(副) 현장이 사람을 사서 현장을 죽였다고 하더니, 이제는 하남에서 또 일이 터졌잖아요. 그것도 정법위원회의 서기랍니다. 나가서 살인범 잡아야 할 인간이 말이에요.”

그녀의 이런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세상을 이해하고 컨트롤하는 능력을 상실한 듯 느껴졌다. 평소에 내가 세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 이전에는 분명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 세계는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걸까? 잠시 후에 나는 동류가 조성한 공포 분위기에서 빠져나와 정상상태로 돌아와서 말했다.

“당신 자신을 빼고 아무도 당신을 겁먹게 할 수 없어. 하지만 당신 스스로 그렇게 자기를 들볶으면 마찬가지로 아무도 당신을 구할 수 없어.”

그녀가 말했다.

“어쨌든 조심해야지. 나는 앞으로 며칠간은 일파 학교 데려다 주고 조금 늦게 출근할래요.”

나는 최후의 결심을 내리고 풍기락에게 말했다.

“개혁의 강도가 너무 세서 다들 한꺼번에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겠어요. 역시 점진적으로 안정된 절차를 밟는 게 낫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말했다.

“천천히 하세요, 천천히 해요! 그렇게 한꺼번에 일을 처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저부터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제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잡지 못하는 걸까요?”

그와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진 후 그 사실을 구립원에게도 전했다. 그가 말했다.

“지 청장님께서 날카로운 각오로 개혁을 결심하신 데에는 저 역시 두 손 들어 찬성합니다. 그저 몇 가지 개별 분야에서 조정이 좀 필요하다는 것이죠. 천천히 하십시오. 그럼 저희도 천천히 따르겠습니다. 언제든지 채찍을 가해 말을 빨리 달리자고 말씀만 주십시오. 저희도 반드시 따라잡겠습니다.”

나는 그의 은근히 웃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저 얼굴만 보고 그의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수십 년간 단련된 저 얼굴만 보고?

육검비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좀 난감했다. 너무 크고 급격하게 방향전환을 했기 때문에 그도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점진적으로 안정된 절차를 밟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가 말했다.

“저는 모든 것을 위생청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절대로 개별행동은 하지 않겠습니다. 위생청에서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불평들을 하지 않을까?”

그가 말했다.

“불평이야 하든 말든 뭐 그렇고 그런 거죠. 결국은 위생청에서 하자는 대로 따를 겁니다.”

내가 위로하듯이 말했다.

“이번 일에 도움이 컸어요. 위생청 차원에서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저희야 위생청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요. 무슨 업적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과실이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어서 또 말했다.

“그 자료는 밖으로 유출시키지 않았습니다. 컴퓨터 안에 있는 것도 곧 삭제할 겁니다. 구체적인 일은 공 군과 그 몇몇 사람들이 맡았기 때문에, 혹시 그것이 밖으로 유출되었다고 해도 제 쪽에서 흘러나간 것은 아닙니다. 적당한 시기에 지 청장님께서 모두에게 말씀 좀 해주십시오.”

그 후의 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난처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내가 방향을 바꾸자 각 부처는 여전히 내 업무를 지지했고, 내 말이 오히려 더 잘 먹혀들었다. 내가 그들의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건드리지 않으니 그들도 굳이 판을 뒤집어엎고 싶어 하지 않았다. 여전히 입만 열면 지 청장님, 지 청장님, 하면서 따끈따끈하게 불러대는 것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취경에 빠지게 했다. 그 사람들도 알고 보면 다 좋은 동지들이다. 이런저런 조그만 결점이나 이런저런 조그만 사심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저 경계선만 넘지 않는다면 내가 굳이 따지고 들 것까지야 없지 않을까? 흑색지대로만 안 빠지면 그것으로 족하다. 회색지대에서까지 그들을 옥죄고 맘대로 뛰지도 못하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노동자 대표회의에서 통과시킨 조례에는 그래도 몇 가지 의견을 반영시켰다. 예를 들어, 특수한 상황이 아닌 한 비행기로 출장을 가서는 안 된다거나, 문건 작성을 하러 호텔까지 가지 말고 위생청 내에서 완성하라는 정도가 포함되었다. 그리고 내가 끝까지 주장한 결과, 퇴직 후에 청장급 간부를 이휴직 처리한다는 조항도 취소했다. 덕분에 그나마 체면이 살았다.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민중들은 그러나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말하겠으면 하라지 뭐! 아플 것도 가려울 것도 없는데….

생각해 보니, 이번에 내가 취한 조처는 처음부터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각 부처의 반대는 말할 것도 없고, 위생청 사람들의 우유부단함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어떤 움직임에 떠밀리고 형세에 묶여서 나 역시 도도하던 머리를 팔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다면 위에서는 나를 지지해 줄까?

그 자료를 보고 사건을 전체적으로 돌이켜 본 다음에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일단 자리에 앉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말들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왜 말한 대로 실천하지 않느냐고 따져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그가 이중인격이니, 두 얼굴이니 하고 욕을 해서도 안 된다. 다들 자기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국면을 깨고 싶다고 해서 깰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연기하고 있다. 연단 위의 배역을 맡은 자는 엄숙하고 자신 있게, 그리고 격앙된 모습으로 이야기만 하면 그만이다. 배역의 대사와 진실은 무관하다(角色語言與眞實無關). 생각해 보면 이 역시 일종의 블랙 코미디가 아닌가! 생활 속에는 수많은 코미디의 고수들이 있는데, 나도 이제 그 중의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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