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바람 안 통하는 벽은 없다**
보아하니, 이런 상황에서는 부처별 소 금고를 정리하려던 일을 더 이상 밀고 나갈 수가 없을 것 같다. 부처간 물밑 접촉과 위생청 내에 암투가 있는데, 그렇다고 내가 군중을 직접 선동할 수도 없잖은가. 만약 그렇게 되면 그게 바로 문화대혁명이지! 정소괴 하나 내치고 다른 사람을 앉혀 본들 얼마 지나면 그 일이 그 일이고, 그 문제가 그 문제고, 별로 나아질 것도 없을 텐데…. 가끔 예리한 의견을 내놓는 그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면 좀 달라질까? 그러나 그 사람들의 그런 적극성도 사실은 남이 갖는 걸 자기가 못 가졌기 때문에 속이 쓰려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그 인간들을 정소괴의 자리에 대신 앉히면 어떨까? 무슨 특수 소재로 만들어지지 않은 이상, 그들도 어차피 인간이 아닌가!
나는 육검비를 재촉해서 정리된 의견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 안에서 영감이라도 찾고 싶었다. 기왕 꺼낸 말이니 적어도 몇 가지는 채택해야 할 것 아닌가? 육검비가 프린트해서 열 몇 페이지 되는 종이를 가져왔다. 그가 말했다.
“기본적으로 모두 원문에서 베낀 겁니다. 저희는 그저 분류만 하고 따로 건드리지는 않았습니다. 공 군과 젊은이들이 작업했습니다. 저는 거의 아무런 관여도 안 했습니다. 모두의 의견이 거기 담겨 있으니 한번 검토해보십시오.”
내가 말했다.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그 종이뭉치를 흔들면서 물었다.
그가 말했다.
“저야 뭐 별 생각 없습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모두의 의견이 꼭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하고 싶었던 말들이었을 겁니다.”
육검비가 가고 난 후 나는 그 재료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o.금고의 돈을 부처장들이 배분하는 데 있어서 자의성이 매우 크고, 배후조작 문제가 있어 심히 불공정하다.
o.국가의 돈을 갖고 음식 접대, 유흥 접대를 하고, 이로부터 개인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o.위생청 내의 간부 선발은 직원들의 평가를 거쳐야 한다. 평가를 거쳐 그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
o.긴급한 공무가 없는데도 비행기를 타다니…. 너무 사치스럽다.
o.주택 배분, 청약 순위 문제에서 직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높아 일반 근로자는 죽을 때까지 줄만 서 있고 기회가 안 주어진다.
o.무리지어 호텔까지 가서 문건을 작성한다고? 일한답시고 놀러 다니는 게 현실이다.
o.청장급 간부를 퇴직 후에도 이직, 휴직 대우하는 것은 명백한 국가정책 위반이다.
o.직권을 이용해서 친지, 친구 등 아는 사람을 자리에 앉히는 것은 직원들의 사기를 심각하게 저하시킨다.
o.일반 근로자에게 해외출장 기회는 영원히 안 주어진다.
o.각종 평가나 시상이 소수에 의해 독식되고 있다.
o.사적인 용도에 정부기관의 차를 사용하면서 기름값, 도로사용비 등을 다 받아 챙기다니…. 일가족 놀러가는 데 자기 차보다 더 편하게 쓰고 있다.
o.의료비도 사람 차별하나? 일반 근로자의 경우 좋은 약이나 비싼 약재는 의료비 지급이 안 된다.
o.보너스 배분이 직급에 따라 너무 불공평하게 주어진다.
....................
모두 서른 개 남짓 되는 조항에 대해 각각 상세한 분석과 사례가 열거되어 있었다.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이 정도일진데, 이런 혜택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사람들에게 직급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한들 그게 먹혀들겠어? 좋은 것은 모두 직급을 기준으로, 권력 있는 곳으로 모여든다. 이것이 바로 관 본위의 논리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의식 있고 수준 높은 이야기인들 설득력이 있겠나? 민중이 바보인가?
그러면서 크고 작은 회의며 신문, 텔레비전에는 모든 것이 원리 원칙대로인 양, 바르고 올곧은 척한다. 지도자나 민중이나 마음속으로는 다 알고 있다.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현실 역시 게임의 규칙 중 하나이다. 지도자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민중들 또한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민중들은 절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입을 여는 것은 반칙이다.
이런 상황은 바뀌어야 한다. 바꿔야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말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지도자를 따르게 해야 한다. 회색지대에서 종횡무진 주먹, 발 마구 휘두르고 다니는 그런 인간들이 있는 한 직원들이 어떻게 지도자를 마음으로부터 따르겠는가? 간부와 민중의 관계가 어떻게 조화로워지겠는가? 바뀌어야 한다. 바꿔야 한다.
나는 생각했다. 친구며 친지를 자리에 앉혀서는 안 된다는 조항만 빼고 다른 것들은 모두 진지하게 고려해 보기로 했다. 그것은 내가 당장 자리에 앉혀야 할 사람이 몇 명 있는데, 조례 중에 이런 조항을 하나 박아 놓을 경우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기가 정한 규정을 자기가 어긴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 바람 안 통하는 벽 없고(沒有不透風的墻), 예외 없는 법 없다고 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부 기관의 차를 사적인 용도에 사용한다는 이 조항도 아예 빼버려야겠다. 나에게 드라이브의 자유는 줘야지. 기관의 차로 전 가족이 놀러 다닌다는 이 조항은, 사실 이름만 거론하지 않았지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잖아?
나는 자료를 풍기락에게 보였다. 그가 말했다.
“다른 것은 이견 없습니다만, 다만 제가 쉰이 넘었거든요, 지 청장님처럼 젊고 건강하지를 못합니다. 기력이 쇠하기 시작했죠. 좋은 약을 충분히 먹는 게 좋은데, 만약 의료비 지급상 차별이 없어진다면 저희 집 식구더러 밥을 굶으라는 소리가 되는데요….”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보너스를 직급에 따라 달리 주는 게 뭐 어떻다는 겁니까? 저희가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 얼마 안 되는 월급이며 수당으로 먹고 사는데, 이것은 과오를 저지르라고 몰아대는 것과 같아요.”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항을 두 개 더 지우고 나니 개혁의 강도가 약해져서, 이전의 선명한 색깔이 바래져버렸다.
저녁에 자료를 동류에게 보여주면서 그녀의 생각을 물었다. 그녀가 보고 나서 말했다.
“차 몰고 밖으로 놀러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그거 우리 얘기하는 거잖아요. 누가 쓴 건지 한번 조사해 봐요. 잘 좀 지켜보고 조심해요. 청장이 되어서 차 좀 몰고 다닌다고 이런 소리를 듣는단 말이에요? 이런 놈은 찾아내서 고생 좀 시켜야 해요. 차가운 의자에 앉아 있는 느낌을 한번 맛봐야지, 안 그러면 나중에 청장노릇 어떻게 해먹겠어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니 나도 따라서 화가 났다. 이건 어떤 놈이 꺼낸 말인지 내가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 테다. 하긴 말한 사람이 자기 손으로 쓰진 않았겠지? 만약 그 사람을 내가 찾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내 스타일만 구겨지고 말 것이다. 찾아내지는 않더라도, 일차 자료들을 가져다가 한 번 보고 관찰을 좀 해봐야지. 뭐 걸리는 게 있을 거야. 이러니까 사람들이 컴퓨터로 써서 프린트 한 걸 제출했었군. 그럴 필요 뭐 있나 했더니만, 왜 지도자들을 믿지 못하나 했더니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사람들이 옳았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니 나 역시 그 정도 은신법 하나는 준비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동류가 말했다.
“다른 것은 몰라요. 차 쓰는 문제도 상관없어요. 놀러 안 가면 그만이지 뭐. 택시 타고 가든가…. 그 정도 돈은 우리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집에 관련된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동의할 수 없어요. 직급대로 안 하면 그럼 우리더러 다른 사람 뒤에 줄을 서란 말이에요? 위생청에 당신보다 근무 연수 십년 이상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면 그 오십 평짜리 새 아파트도 지어서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잖아요.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생각해 보니 그것도 정말 문제였다. 그렇지만 그 조항마저 지워버리면 개혁의 색채가 너무 바래버릴 것이다. 내가 말했다.
“우리한테까지 안 돌아오면 할 수 없지 뭐. 재직한 지 그렇게 오래되었으면 그 정도 기회는 줘야지. 모두에게 보여주는 거야, 새 집행부의 새로운 사상, 새로운 스타일을!”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나는 집만 있으면 돼요. 여기선 하루도 더 못 견디겠다고요.”
나도 화가 나서 말했다.
“이젠 당신이 무슨 귀부인이라도 되는 줄 알아? 아래에서 받쳐주는 일반 서민이 없다면 당신이 무슨 수로 혼자 귀해져? 양심에 손을 대고 다른 사람들 생각 좀 해봐! 옛날 고생한 생각 좀 해보란 말이야!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 거야. 그런 통자루(筒子樓) 집에서도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방 세 개에 거실 딸린 이 집에는 더 이상 못 살겠다고?”
그녀가 말했다.
“내가 지금 짓고 있는 아파트에 얼마나 눈독을 들이고 있는 줄이나 알아요? 3동 동쪽 그 집은 내가 하도 오래 동안 찍어두고 봐서 벌써 우리 집이라는 감정까지 생겼다고요. 실내장식을 어떻게 할 건지까지 다 설계해 놓았다니까. 아래엔 복합 자재로 바닥을 깔고, 홈 씨어터도 사고, 당신 서재 겸 컴퓨터실로 따로 한 칸 쓰고, 나와 일파는…. 하여튼 나는 갖고 싶어요. 그리로 이사 갈 거라고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위생청 일에 관여하지 마!”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대면서 말했다.
“여보, 생각 좀 해봐요.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렇게 오래 고생해서 함께 투쟁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잖아요. 그게 다 반은 우리 애를 위해서, 또 반은 좋은 집에 살아보기 위해서 그랬던 게 아니었어요? 사람이 평생 그 몇 가지면 됐지, 정말로 무슨 일을 꼭 해보겠다는 것은 아니었잖아요?”
내가 말했다.
“내가 무슨 고상한 노래를 부르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나도 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 어렵게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제 일을 좀 해보고 싶다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일한다는 데에는 나도 이견 없어요. 하지만 집 문제는 내가 참견해야겠어요. 참견해야 되겠다고요!”
내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당신 그럼 나더러 연단에 올라가서 모두에게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사람들의 마음은 눈처럼 훤히 비춰. 단지 말을 안 할 뿐이야. 일단 자리에 오른 이상 해야만 하는 이야기도 있는 거야. 위에 있는 이상 정책을 안 떠들 수도 없어. 물론 내가 말했다고 해서 반드시 현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무뢰한들처럼, 연단에 올라가서는 이런저런 큰 소리나 치고 실제로 하는 일은 완전히 딴판이고, 그럴 수는 없잖아? 나도 체면이 있지! 생각해보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심리적인 수용능력이 필요한 것 같아.”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무슨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 하는 대로만 하면 아무도 당신 트집 잡는 일 없을 거예요. 탐관오리 부정부패한 사람들도 매일같이 부패 척결, 부패 척결, 입으로만 떠들면서 자리보전만 잘 합디다. 당신은 부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재물을 탐낸 적도 없으면서 자리보전 못할까봐 걱정해요?”
그때 누가 문을 두드렸다. 구립원이었다. 그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말을 꺼냈다.
“듣자 하니 무슨 문건이 나왔다면서요?”
“여기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가져온 겁니다.”
“한 번 볼까요?”
그리고는 내 손에서 그것을 받아들었다. 한참 보더니 말을 꺼냈다.
“청장급 간부를 퇴직 후에도 이휴직(離休職) 처리한다는 것은 마 청장님 물러나시기 전에 정한 것입니다. 저희 모두 그분 손아래서 컸는데 그분께 이런 말을 어떻게 합니까? 이휴직 대우라고 해야 기껏 의료비 백 퍼센트 지원밖에 없는데, 나이 드신 분이라 이런 문제에 아주 예민하실 텐데….”
또 말했다.
“주택배분 문제도 예전대로 하죠. 안 그러면 지 청장님이나 저나 둘 다 문제 아닙니까? 그렇다면 저 아파트는 뭣 하러 짓는 겁니까? 지 청장님이나 저나 업무와 관련해서 집으로 상의하러 오는 사람도 많으니까 좀 큰 집에 사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업무상 필요합니다.”
동류가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업무상 필요!”
구립원이 말했다.
“그리고 해외출장이라면, 혹시 누가 얼마 있다가 제가 미국 출장가게 된 것을 알고 고의로 저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 아닙니까? 정말 악랄하군요.”
이어서 말했다.
“간부를 뽑을 때 민중의 평가를 거치게 하자고요? 웃기는 소리…. 그럴 거면 조직부는 뭣 하러 있답니까? 지 청장님, 이건 우리 들으라고 하는 소립니다.”
역시 나는 자리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티가 나는군…. 측근 몇 사람도 내 손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아니니, 마 청장님처럼 말도 잘 안 먹혀들고, 누가 무슨 이견을 제시해도 내가 마땅히 반박할 수도 없다. 보아하니 아무래도 집행부를 내 사람들로 다시 채워야겠다. 능력 볼 것 없이 충복들로 앉혀야지. 안 그럴 수 없잖아?
구립원이 말했다.
“이것 육검비 작품이지요? 자기는 뭐 대단하다고…. 멀리 갈 것도 없이, 작년에 위생청에서 유자를 두 트럭 샀었지요. 그때 한 근에 얼마씩 주고 들여온 줄 아십니까? 그때 시장가격이 얼마였는지 아십니까? 위생청에서 한 번 조사해보자고 제안합니다!”
그의 말투는 나를 아주 불편하게 했다. 어찌 되었건 이번 일은 내가 육검비에게 시켜서 한 일인데 이런 식으로 말하다니…. 아주 나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내가 말했다.
“이 의견은 여러 사람들이 내놓은 겁니다. 육검비는 정리에도 참여 안 했고요. 위생청에서 이런 방안을 취한 것은 사람들의 숨통을 좀 터주자는 것이었어요. 구 부청장님이 제일 먼저 지지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의 의견이 좀 치우친 감이 없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요. 사람들이 말을 하게 한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진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말 좀 하게 내버려 두자고요? 그 인간들이 무슨 할 말이 있답디까? 만약 정말로 통쾌하게 말을 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구립원이 가고 나서 동류가 말했다.
“여보, 당신 이대로도 좋으니까 괜히 사서 고생하지 말아요. 위생청 사람들이 지지하지 않는 일을 각 부처 사람들이 지지할 리가 없고, 그걸 인민의원과 중의연구원으로까지 밀고 나가기는 어려울 거예요. 당신도 언제까지나 그 자리만 지키고 있을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말했다.
“민중들이 지지해줄 거야. 백 장도 넘는 이 투서들은 그럼 나 지대위가 쓴 거란 말이야?”
동류가 말했다.
“민중이 누구에요? 그 사람들 말이 먹혀들기나 해요? 자기 이름도 감히 못 밝히는데 당신이 그 사람들한테 의지하겠다고요? 당신이 의지하고 싶을 때에는 이미 텅 비고 아무 것도 없는 걸 보게 될 거예요. 수년간 옆에서 본
나도 그 정도는 알아요. 그런데 당신이 그걸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요?"
그녀의 이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민중이 누군가? 이렇게 많은 부처장들이 모두 용감하게 나서서 내게 반항할 때, 부드럽고 어리숭해도 반항은 반항이니까, 어쨌든 이럴 때, 그 민중이란 사람들은 누구 하나 나서서 나를 도와주고 있나? 그나마 그 중에서 용감하다는 사람들이 한 게 고작 무기명 투서이다. 우리 사회엔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건드려선 안 된다는 암묵적 동의가 형성되어 있다. 그들의 엄밀하게 짜여진 구조, 강철 같은 단결력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누구 하나 흔든다고 흔들리지도 않는다. 이제는 이 사실을 나도 받아들여야 한다. 위생청의 행정공개, 이 구호는 계속 외쳐댈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감내하기 힘든 굴욕감이 몰려왔다. 좋은 일 한 번 하기가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렵구나. 회의석상에서는 아주 거침없이 확신에 차서 말했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만회하지?
모두들 후다닥 수십 가지 의견을 내놓았건만, 나는 지금 소 금고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여기다가 이 수십 가지 의견까지 공포한다면 하늘이 뒤집혀지겠지? 나는 또 그걸 어떻게 수습하지? 그 몇 장의 종이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백색지대와 흑색지대 사이에 회색지대가 있다. 여기가 바로 권력자들의 이익 공간, 또한 그들의 운신 공간이다. 이 공간에 대한 암묵적 동의는 장기적인 준비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모두가 한 뜻으로 쌓아올린 견고한 성과 같은 공간. 구리(銅)로 만든 담에 쇠(鐵)로 만든 벽. 누구도 부술 수 없다. 이익은 생존 공간이다. 그 공간을 쟁취하고 싶은 충동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근본이며, 몇 개의 도덕률로 억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낱 이성으로 묶어둘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며, 몇몇 타의 모범들이 설득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중대한 이익 앞에서는 원리 원칙을 몇 트럭 실어다 놔도 소용이 없다. 이것은 도덕적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원칙을 배웠느냐 못 배웠느냐, 이해했느냐 못했느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흑색지대와는 달리 회색지대는 나름대로 할 말이 있다. 소 금고며 큰 집, 모두 업무상 필요하다는데 어쩌겠어? 물론 보통사람들도 다 나름대로 할 말은 있겠지. 이해관계가 다르면 하는 말도 달라지게 마련이니…. 결국 원칙도 게임의 규칙에 따라 달라진다. 안 선생님의 말이 맞다. 널빤지로 자기 몸을 치는 자가 하늘 아래 어디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매우 괴롭긴 했지만 그래도 정소괴를 용서할 수 있었다. 그도 인간이니까! 어느 누구도 하느님이 정해 주신 것 이상을 그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