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정세의 급격한 악화와 함께 부시행정부의 당황해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부시행정부는 13일(현지시간) 이제까지의 태도를 180도 바꿔 최대한 빨리 이라크인에게 통치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라크에서의 탈출을 겨냥한 부시의 ‘이라크화(化)정책’이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미미하다. 이미 미 의회와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언론은 부시행정부의 이라크정책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퍼붓고 있다. 한마디로 부시의 이라크전쟁은 ‘예고된, 실패한 전쟁’이었으며 이제 그 실패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부시행정부가 얼마나 당황해 하고 있는가는 이번 정책 전환이 이루어진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우선 이라크 통치를 책임지고 있는 폴 브레머 최고군정관의 돌연한 귀국부터가 그렇다. 브레머는 이번 방문에 앞서 1주일전 워싱턴을 방문한 바 있다. 그런 그가 지난 11일 돌연 바그다드를 떠났다. 게다가 그는 오래 전에 약속된 폴란드 총리 레스제크 밀러와의 회동을 전격 취소한 채 워싱턴으로 떠났다. 폴란드는 영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이라크에 파병한 나라다. 그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몸소 전쟁지역인 바그다드에 왔는데도 만나지도 않았다는 것은 대단한 외교적 결례다. 그만큼 부시행정부의 사정이 다급했다는 얘기다.
브레머는 워싱턴 백악관에서 11, 12일 이틀간 부시 대통령을 비롯해 체니 부통령, 파월 국무장관,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최고위관리들과 이라크정책을 논의했다. 회의가 길어져 럼스펠드 장관의 아시아 순방은 예정보다 늦춰져야 했다. 럼스펠드는 13일 새벽에야 워싱턴을 떠났다. 이들의 논의가 대단히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정책전환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미 중앙정보국(CIA) 현지 지국장의 정세보고서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보고서가 미 고위관리들에게 전달된 것은 지난 10일. 그런데 ‘극비’로 분류된 이 보고서의 주요 내용이 바로 다음날인 11일부터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CNN 등 미국의 주요 언론에 잇따라 보도되기 시작했다. 워싱턴의 정치분석가 짐 로브에 따르면 미 정부 내 고위관리들이 그 내용을 의도적으로 언론에 유출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이 보고서가 체니 부통령,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강경파들에 의해 차단돼 부시대통령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체니 등 강경파들은 그동안 이라크 상황에 관한 왜곡된 정보로 이라크전쟁을 밀어붙였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 보고서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그 성격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 보고서는 ‘특별현지보고(AARDWOLF)'로 워싱턴의 고위 관리들이 대외문제와 관련한 중대한 정책 결정을 위해 작성을 요구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CIA 바그다드 지국장의 지휘 아래 이라크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2백75명 이상의 현지 요원들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이라크 상황에 대한 가장 광범위하고도 정확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보고서에는 이례적으로 폴 브레머 최고군정관의 동의 의견까지 첨부돼 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분석에 따르면 자신의 직속 상관인 럼스펠드를 우회해 부시 대통령에게 직접 이라크 상황의 엄중함을 알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미 언론에 보도된 이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점점 더 많은 이라크인들이 미국의 점령 의도를 의심하고 있고, 미국에 의해 임명된 24인 과도통치위원회 위원(거의 대부분이 망명자 출신)은 이라크 국민들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시아파 회교도와 미 군정간의 관계도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아파는 인구로는 다수지만 수니파인 후세인의 집권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박해받았기 때문에 미군 점령을 환영하는 편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정부에서 미국의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었다. 그러나 최근 바그다드 시내 시아파 밀집지역인 사드르 시티의 시아파 시장을 미군이 오인 사살하는 등의 사건으로 미군과 시아파의 관계도 급속히 나빠지고 있다. 시아파와의 관계마저 나빠진다면 미군은 이라크 현지에서 협조세력을 모두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보고서는 또 미군이 저항세력을 분쇄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면서 점점 더 많은 이라크인들이 미군을 몰아내고 점령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면서 이에 따라 저항세력에 대한 지지도 높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미군이 저항세력 분쇄를 위해 보다 강력한 군사 수단을 동원할 경우 보다 많은 이라크인들이 저항세력에 가담케 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으로서는 진퇴양난의 상황인 셈이다.
보고서는 이라크의 국경을 완전히 봉쇄할 방법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라크 인접국가인 시리아, 터키, 이란,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에서 이라크로 침투해 들어오는 이슬람 과격분자들을 막아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영국의 가디언은 13일 한 군사전문가의 말을 빌어 현재 이라크내 저항세력의 숫자는 최대 5만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이라크 토착 저항세력이 약 5천명, 외국인 과격분자는 수백명에 이를 것이라는 존 아비자이드 미 중부군 사령관의 13일 발언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신속하고도 과감한 정책 전환이 없을 경우 우리는 (이라크에서) 패배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부시행정부는 이틀간의 회의 끝에 이 보고서의 지적대로 ‘신속하고도 과감한’ 정책 전환을 결정했다. 그 핵심은 ‘이라크 인에의 조속한 권력 이양’과 ‘저항세력에 대한 군사대응 강화’ 이 두 가지다.
그러나 이번 정책 전황이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우선 군사대응 강화로 저항세력을 약화시킬 확률은 극히 낮다. 미군은 이미 지난 주말부터 티크리트, 팔루자 등에 대한 공습을 재개하고 12일에는 바그다드 중심부에서 아파치 헬기를 이용한 대규모 소탕작전을 벌였다. 하지만 ‘쇠망치(Iron Hammer) 작전’으로 명명된 이번 대규모 보복작전은 저항세력을 제거하기보다는 이라크 민심의 이반을 더욱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파괴력 높은 첨단무기를 동원한다 해도 어둠 속에 있는 저항세력에 타격을 주기보다는 애꿎은 민간인 희생자들만 늘어나고 그에 따라 이라크인의 미군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미 CIA 보고서가 그러한 위험성을 경고했다. 또 1980년대 아프간반군의 대소련 저항전을 지원했던 미 군사전문가 미트 베어든은 지난 주말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을 통해 대규모 보복작전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무자헤딘 1명이 소련군에게 사살당하거나 포로가 될 때마다 그 가족 중 최소한 5,6명이 보복을 다짐하며 총을 든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보복의 법칙은 이라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라크 인에의 조속한 통치권 이양’, 즉 ‘이라크화 정책’의 성공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에 앞서 우선 부시행정부의 위선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지난 12일 이틀간의 회의를 마친 후 브레머는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는 처음부터 가능한 한 빨리 이라크인에게 정권을 이양하려 했다”고 말했다. 또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도 13일 “최대한 빨리 권력 이양 방안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 10월 이라크 재건 등에 관한 안보리 결의안을 채택할 때만 해도 미국의 입장은 그렇지 않았다. 올해 안에 이라크인에게 통치권을 넘기라는 프랑스 등의 요구에 대해 미국은 아직 준비가 안 됐다면 12월 15일 이전 헌법 제정 및 총선 일정 확정 등을 고집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제 와서 사정이 어려워지니까 말을 바꾼 것이다. 부시행정부는 당초 1,2년 이상 걸릴 것이라던 권력 이양을 최대한 앞당겨 내년 상반기 이전에 총선을 치를 계획이라고 한다. 또 헌법 제정 이전에 과도정부를 구성할 것이라고 한다. 이른바 아프간 모델이다. 그러면서 미 고위관리들은 현재 이라크 과도통치위원들이 권력을 맡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추켜세웠다.
이것 또한 거짓말이다. 불과 며칠전 워싱턴포스트에 과도통치위원회에 대한 미국측의 불만이 자세히 보도됐기 때문이다. 헌법 제정은커녕 위원회 회의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으며 자신과 측근들의 이권챙기기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CIA 보고서도 현재 24인 과도통치위원들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지지는 실질적으로 제로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권력을 넘겨 과연 이라크를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단연코 ‘노(No)'이다.
‘이라크화’와 ‘대대적 반격’을 골자로 하는 부시행정부 정책 전환의 진정한 속내는 내년 대선 이전에 이라크에서 발을 빼겠다는 것이다. 이미 그러한 선례가 있다. 닉슨행정부의 베트남전 처리가 그것이다. 1968년 베트남전 종식을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은 차이나카드(중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앞세워 ‘베트남전의 베트남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미국의 치욕적 패배를 이른바 ‘영광스러운 퇴각(glorious retreat)'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허장성세로 베트남은 물론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 대해 대대적인 융단폭격을 수년간 계속했다. 미군 공습으로 수백만의 동남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느날 갑자기 발을 빼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의미 없는 힘의 과시를 하고 있을 뿐이다.
베트남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양심적 미국인들이 그 속내를 모를 리 없다. 민주당의 조셉 바이든 상원의원은 14일자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부시행정부의 정책이, 베트남전 당시의 베트남화와 같이, 보다 빨리 상황을 이라크화하는 것이라면 이는 ‘발을 빼 도망가자(cutting and running)’는 것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발을 빼고 도망가는 방법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솔직하게 ‘우리 후퇴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때 이르게 이라크인들에게 치안을 맡기고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이다. 이는 재앙을 부르는 지름길이다”(이라크화의 또 한 축은 치안유지를 이라크인에게 맡기는 것이다. 부시행정부는 현재 11만8천명인 이라크인 군.경 숫자를 내년까지 22만명으로 늘인다는 계획이다)
그는 이어 “부시행정부 자신이 제대로 된 정책을 갖고 있지 못함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존스홉킨스대 전략연구소의 토마스 만켄 소장은 “요즘 워싱턴에서 나오는 얘기들은 모두가 ‘발을 빼고 도망가자’는 것처럼 들린다”면서 “이것이야말로 절대로 내보내서는 안 될 메시지”라고 경고했다.
또 베트남전 참전 경력이 있는 공화당의 척 헤이글 상원의원은 “우리는 후세인 축출 이후의 이라크 상황에 대해 너무도 사태를 낙관했고, 너무도 계획을 못했으며, 너무도 생각을 못한 나머지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다”면서 그 결과 “지금 우리는 안보문제, 현실인식의 문제, 통치의 문제 등을 안고 있다. 게다가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심지어 한 공화당 상원의원의 보좌관은 부시행정부의 이라크정책이 ‘표류’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뉴욕타임스도 비판에 가세했다. 뉴욕타임스는 13일자 사설 ‘위기에 빠진 미국의 이라크정책’에서 부시행정부가 내년 대선을 의식, 이라크 주둔 미군을 빼내오는 데만 골몰한 나머지 “(이라크에) 안정적 민주주의의 기반을 닦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설은 이어 당초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던 부시행정부가 이제 와서는 민주주의 정착이라는 고상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면서 “자신의 재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졸속으로 이라크 선거를 준비하는 것이라면 부시는 기가 막힐 정도의 냉소적 인물로 비춰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뉴욕타임스는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훨씬 잘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은 유엔에게 이라크 통치권을 넘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헌법 제정과 총선 감독에 관한한 유엔이야말로 정통성을 지닌 국제기구이며 이 분야에 대한 실제 경험도 풍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시행정부가 이라크 민주화를 위해 유엔에 통치권을 넘겨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애초의 진정한 전쟁 목적이 테러와의 전쟁도, 이라크 민주화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석유자원을 장악하고 중동지역에서의 미국의 패권을 확대하기 위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이라크전쟁은 애초부터 잘못된 전쟁이었다. 정당하지 않은 목적을 위해, 조작된 정보를 바탕으로, 미 국민을 오도하고 세계의 반대를 무시한 채 강행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실패는 시작부터 예견됐었다. 예컨대 미국의 세계적 석학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전쟁 발발 직후 부시의 실패를 정확하게 예측했다.(프레시안 3월 23일자 “부시, ‘올인’했다”) 그는 이 글에서 부시는 이라크의 ‘체제전환(regime change)'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지만 정작 체제전환을 당할 사람은 부시라며 2004년 대선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8개월간의 과정은 예정된 실패가 현실로 드러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압도적 군사력만을 믿고 탐욕과 무지에 이끌려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일으킨 부시행정부, 그리하여 참혹한 실패를 자초한 그들, 그들의 실패까지도 좇을 이유는 우리에게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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