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2002년'과 '2006년' 사이에서 길을 잃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2002년'과 '2006년' 사이에서 길을 잃다

[기자의 눈] 자발성의 신화를 생각한다

2002년, 세계인은 한국에 주목했다.

아시아 최초로 이룬 '월드컵 4강'이라는 성적에 한번 놀랐고, 유럽의 '훌리건'과는 다른 새로운 응원문화에 또 한번 놀랐다. "열렬한 응원과 경기 후 쓰레기를 줍는 한국인의 성숙한 시민의식"이라는 외신보도에 온 국민은 자랑스러워 했고 '붉은 악마'는 자연스레 '대한민국' 그 자체가 됐다.

4년이 지났다. 토고와의 본선 첫 경기를 응원하는 50만 명의 인파는 어김없이 서울 광화문과 시청 일대를 가득 매웠다. 열기는 뜨거웠다. 돌아온 '반지의 제왕' 안정환이 역전 골을 넣는 순간, 붉은 옷을 입은 '대한민국'들은 일제히 열광했다. 환희였고 축제였다.

하지만 경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시청 일대는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변해 있었다. 승리의 기쁨에 취해 "대~한민국"을 외치는 시민들은 경적을 울리며 오물로 가득한 도로를 내달렸다. 몇몇 사람들이 쓰레기를 치워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왜일까? 한때는 성숙했던 '시민의식'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했던 것일까?

여전히 배가 고픈 '그들'
▲ 13일 토고전이 끝난 후 시청 일대는 거대한 쓰레기장이 되어버렸다. ⓒ 프레시안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짭짤한 재미를 본 기업과 미디어는 누구보다 재빨리 움직였다. 이동 통신사를 중심으로 '시청 광장 사용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광장을 돈으로 사고팔 수 없다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울시는 시청 앞 광장을 SKT 컨소시엄에게 '팔았'다.

시민들은 자본과 미디어가 제공한 판에 모여들어 가수들의 콘서트를 즐기고 춤을 추고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이른바 월드컵 '관람객'으로 전락했다. 인파를 통제하려는 진행요원과 시민들이 곳곳에서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문화연대는 2002년의 거리응원을 "역사에 남을 경험이자 국가적 유산"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대전제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였다"고 덧붙였다. 이어 문화연대는 "서울시는 자본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시민들을 동원하여 가두려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일리있는 지적이다. 서울시-자본-미디어의 삼각편대는 히딩크 감독의 말대로 '여전히 배가 고팠던' 것 같다. 히딩크가 승리에 굶주렸다면 그들은 광고효과에 굶주렸다. 그들은 축구팬들에 앞서 '광장'을 점령하고 시민을 '통제'했으며 결국 거리응원을 '지배'했다. 광장은 쓰레기장으로 변했다. 그러자 '이윤에 배고픈 자들'의 한 축인 미디어는 일제히 '성숙한 시민의식 어디로 갔나'는 식의 보도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문화연대의 규정대로라면 2002년과 달리 쓰레기로 가득한 거리의 풍경 역시 '자발성'을 전제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일 뿐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2002년의 거리응원을 '자발성을 근간으로 한 역사적 경험이자 국가 유산'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은 시민들의 순수한 '자발성'에 의한 것이었던가? 그 '자발성'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자랑스러운 우리의 '자발성'…혹시 강요된 것은 아니었을까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주최국이었다. 전세계의 외신기자들이 속속 입국했다. 그들이 전하는 소식과 사진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얼굴이었다.

주최국으로서 자존심이 발동했던 것일까. 시민들은 누구보다 열광적이되 질서있는 응원문화를 보여주었다. 거리응원이 끝나도 거리는 깨끗했고 그 모습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감격했다.

오죽하면 '훌리건'과 '롤리건'(덴마크 응원단을 칭하는 말,'rolig'은 덴마크어로 '조용하다'는 뜻)의 장점만을 결합한 '콜리건'이라는 말로 한국의 축구팬을 일컬었을까. 시민들은 한마음으로 쓰레기를 줍고, 또 주웠다.

2002년 거리응원에 참가했다는 회사원 고 모 씨는 "아무래도 외신기자들도 많고, 또 전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신경 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라며 "수십만 명이 한 자리에 모이는데 쓰레기가 없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그토록 자랑스러워 했던 '자발성을 근간으로 한 광장의 경험'은 결국 '남의 시선을 의식한 오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 모두는 외국인의 시선이 두려워 그렇게 질서를 지켰으며, 쓰레기를 치웠던 것일까? 우리의 '자발성'은 강요된 것이었을까? 이러한 해석이 사실이든 아니든 '한국인의 성숙한 시민의식'에 찬사를 보내는 외신을 접하면서 4년 전 우리 모두 조금은 뿌듯해 하지 않았던가?

우리에게 '자발성'은 무엇인가?

토고전이 끝나고 광장을 메운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중구청에 근무한다는 청소부 박 모씨를 만났다.

거대한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도로변에 앉아 한숨을 돌리던 박 씨는 "프랑스전은 새벽 4시라는데 그때도 이러면 어째야 될지 모르겄소. 2002년에는 깨끗했는데…"라며 씁쓸해했다.

'시민의식'이란, '성숙'이란, '자발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끝없는 의문과는 상관없이 박 씨가 내뿜는 담배연기는 쓰레기더미와 함께 거리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 담배연기 속에, 우리가 제대로 간취해내지 못하는 2002년과 2006년의 사이의 시간적 거리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