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75. 개구리밥풀 끝에서 큰 바람이 일어난다**
개구리밥풀 끝에서 큰바람이 일어난다.
설을 쇠고 며칠 안 되어 나는 의정처에 전화를 걸어 원진해에게 지난 연말에 준비한 새해 업무계획안을 제출해달라고 했다.
원진해가 말했다.
“내가 죽일 놈입니다. 죽일 놈입니다. 요 며칠 제 부친께서 병이 나셔서 그만 그 일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이틀 후에 제출하겠습니다.”
나는 누구든 다 깜빡할 때가 있다고 생각하고 특별히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이미 들어온 각 처(處), 실(室)의 계획을 살피고 마 청장을 대신하여 새해 업무계획의 초안을 잡았다.
사흘이 지나자 보고서에 윤곽이 잡혔는데, 그때까지도 의정처 란은 여전히 공란으로 남아 있었다. 원진해는 여전히 계획안을 보내오지 않아서 나는 약간 불쾌했다. 그러나 찾아가서 재촉하지는 않았다. 다시 하루가 지났으나 여전히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아서 나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원진해 너 나한테 불만이 있다는 건 나도 이해한다. 나를 난처하게 만들려는 것도 참을 수 있다. 나야 그저 마 청장 보좌역에 불과하니 아직 화를 낼 자격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고서는 마 청장님께서 쓰실 건데, 이 점은 너도 알고 있을 것 아냐!
나는 화가 나기 시작해서 그 부분만 공란으로 둔 채 그냥 올려버리고 원진해 그 녀석이 직접 마 청장님께 찾아가서 말씀드리도록 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시 내가 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보고서를 완벽하게 작성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유야 어찌 되었건 결국 나의 책임 아닌가. 내가 다시 전화를 걸자, 그가 말했다.
“내가 죽일 놈입니다. 요 이틀 정말로 시간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내일 반드시 제출하겠습니다.”
나는 화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이 보고서 마 청장님께서 내일 당장 필요로 해요. 청장님께서 보셔야 하고, 고쳐야 하고, 또 새로 인쇄해서 다음 주 위생청 전체회의에서 써야 하는 거라고요.”
그가 말했다.
“내일, 내일, 내일은 반드시….”
다음날도 오후 퇴근시간이 다 돼 가도록 기다리면서 전화까지 몇 번이나 걸어 재촉을 하고 나서야 원진해는 전(田)군을 시켜 계획서를 보내왔다. 나는 전 군에게 말했다.
“자네들 의정처 란은 그냥 이렇게 공란으로 남겨두고 위로 올려버리려고 했어.”
전 군이 가고 나서 생각해 보니 기분이 영 불쾌했다. 어제 내가 마 청장님의 이름까지 팔아가면서 그만큼 말했는데도 이렇게 태만하게 나온단 말인가? 저 인간이 나한테 원한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거야 상관없지만, 내가 마 청장님께 자기 이야기를 할까봐 걱정도 되지 않나? 분한 마음이 삭여지지 않아서, 아예 박자를 늦추어서 마 청장님이 재촉하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가서 마 청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려서 저 녀석 망신당하게 할까, 하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 방법도 역시 마땅치 않았다. 내가 마 청장님의 이름을 팔았는데도 말을 안 들어먹었다는 말을 마 청장님께서 들으시면 속이 편하실 리가 있나? 내가 참고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다. 밤샘 작업이라도 해서 자료를 만들어 내는 수밖에.
그때는 이미 시간이 열두 시가 다 되었는데도 나는 화가 나서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동류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동류가 말했다.
“바깥일에 무슨 화를 내고 그래요? 인생이란 게 한 편의 연극이잖아요. 화를 내서 몸을 상하게 되면 누가 당신을 대신해 준데요? 당신이 이렇게 잠 못 자는 동안 그 인간은 코까지 골면서 잘 텐데.”
생각해보니 그 말도 맞는 듯해서 마음을 너그럽게 먹고 자려고 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무시당했다는 느낌은 아무래도 지울 수 없었다. 누구든 일단 이 바닥에 들어서면 자존심이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원진해는 나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나를 우롱하고 있는 것이다! 죽일 놈, 죽일 놈, 정말로 죽일 놈이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서 이 일을 이리저리 생각해 봤다. 생각해볼수록 이번 일에는 무슨 다른 뜻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진해 그 녀석은 어째서 내가 보고서의 한 칸을 공란으로 둔 채 위로 올릴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정말로 내가 위로 올린다면 그 인간은 또 어떻게 수습할까? 그렇다! 그 인간은 나만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니라 마 청장까지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놈이 감히, 그놈이 어찌 감히!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속에서 한 줄기 섬광이 번쩍 하더니 이어서 천둥소리가 났다. 맞아, 마 청장님 연세가 금년에 쉰여덟이야.“2-5-8”정책에 따르면, 쉰둘이면 처장(處長)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쉰다섯이면 청장(廳長)으로 올라가지 못하며, 쉰여덟이 되면 청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지난 십년간 위생청에서 마 청장 말이라면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의 말이라면 모두들 성지(聖旨) 받들 듯 했었다. 그렇다면 혹시 원진해가 무슨 소문이라도 들은 건 아닐까? 설마 그럴 리가…. 나는 어쨌든 원진해의 행위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러나 그 안에 숨겨진 뜻을 꿰뚫어볼 수가 없었다.
내가 보고서의 초안을 마 청장님께 드리자, 마 청장님은 언짢아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주말에 출근해서 처리하는 수밖에 없겠군….”
말은 가혹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나는 따귀를 한 대 얻어맞은 것보다 견디기 어려웠다. 내가 보좌역이 돼서 이게 뭔가? 원진해가 잘못한 걸 왜 내가 그 인간 대신 짊어져야 한단 말인가? 나는 어쩔 수 없이 원진해를 몇 번이나 재촉했던 일을 말씀드렸다. 그러나 마 청장님의 이름을 팔아가면서까지 그를 재촉했던 부분은 차마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일개 청장 보좌역에 불과한 나까지도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이처럼 쓰린데, 마 청장님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면 또 얼마나 괴로우시겠는가? 내가 그 일을 보고한다는 것은 곧 그의 절대권력이 더 이상 별로 절대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데, 그런 말을 듣기 좋아하시겠나? 마 청장님은 내 말을 듣고 말씀하셨다.
“알았네.”
나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마 청장님의 그 “알았네”라는 한 마디 말엔 상당한 의미가 들어 있다고는 느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 청장님은 혹시 나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들먹이는 소인배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말도 없이 저렇게 말씀하신 건 아닐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나는 돌로 내 발등을 찧은 셈이 된다. 그리고 또 다른 가능성은, 나는 모르고 있으나 이면에 다른 무슨 내용이 있는데, 그분은 알고 계시지만 그러나 굳이 들춰내서 나에게 설명해주기 싫은 그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게 뭘까?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잘 생각해봐야겠어!
마 청장님의 보고를 들은 후에 나는 매우 고무되었다. 내가 초안에서 언급한 것은 금년도 업무계획이었는데, 마 청장님께서 대폭 수정하시고 기간도 대폭 확대해서 금후 삼년, 오년의 계획까지, 새 오피스 빌딩을 지을 준비며 뒤쪽 가죽가방 공장의 부지를 매입할 계획, 전국 시장을 공략할 중약(中藥)을 몇 가지 연구개발하려는 계획 등까지 언급하신 것이다. 그 속에 담겨진 정보는 명백했다. 나 마수장이 절대로 금년에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마 청장님만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경력을 축적할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말하자면 완충 기회를 갖는 셈이다. 당연히 이 사실은 몇몇 사람에겐 환호작약(歡呼雀躍)할 일이고, 또 몇몇 사람에게는 근심걱정할 일이다. 분명히 누군가는 매우 기분이 나쁘겠지. 나는 손 부청장의 안색을 살펴보러 갔지만, 별다른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며칠 후에 위생청 업무회의에서 또 다시 나의 믿음을 뒤흔들어 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본래 마 청장님은 중의연구원 의정과의 좌(左) 과장을 위생청 의정처의 부처장으로 발탁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내게도 귀띔해주신 적이 있었다. 그런데 회의가 중간쯤에 이렀을 때, 인사문제를 토론하려고 할 때 손 부청장이 말했다.
“마 청장님께서 한 가지 의견을 갖고 계시는데, 저는 아주 좋은, 아주 정확한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생청에선 간부를 발탁할 때는 주로 내부에서 해결해 왔습니다. 이야말로 위생청의 수많은 간부들에 대한 관심의 표현입니다. 일을 잘하는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것, 비록 이러한 정책이 성문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위생청에서는 마 청장님의 지도하에 오랫동안 이렇게 해왔습니다. 위생청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고 하는 일도 순조롭게 전개되는 데에는 바로 이러한 용인(用人) 철학이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손지화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것이야말로 선제공격으로 상대를 제압함으로써 마 청장님의 입을 틀어막겠다는 것이 아닌가? 회의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긴장되었고, 이어서 발언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침묵이 족히 이분간은 지속되었다. 그 이분이 두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마 청장님이 말씀하셨다.
“나의 원래 생각은 다름 아니라 좌문송(左文松) 동지를 의정처로 이동시켜서 원진해 동지의 일을 돕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적절한 생각인지 아닌지, 여러분 모두 한번 의논해 봅시다.”
또 다시 일분 가량 침묵이 흘렀다. 나는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마 청장님이 없으면 나 역시 없는 것이다. 내가 목숨을 걸고 썩 나서서 말했다.
“좌문송 동지는 저와 전공분야가 비교적 가까워서 제가 그를 잘 아는데, 전공분야 실력으로 보나 업무능력으로 보나 충분히 잘 해낼 것 같습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원진해가 곧바로 말을 받았다.
“저희 의정처로서는, 가능하면 양의(洋醫) 업무를 잘 아는 사람이 올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업무 발전이 보다 순조로워질 테니까요. 어쨌든 저희 업무는 그 대상이 대부분 양의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의와 양의 사의의 비례가 잘 안 맞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그는 위생청 간부 중에는 중의가 너무 많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보아하니 그 역시 목숨을 걸고 나선 것 같았다. 열 명 안팎의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각각 한 마디씩 다 했는데, 정말이지 둘로 나뉘어 줄을 서는 듯한 뉘앙스가 풍겼다. 마 청장님이 말씀하셨다.
“이 일에 대해서는 모두의 의견이 서로 다르니 잠시 미뤄둡시다. 모두들 먼저 약품검사 문제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소식은 재빨리 전 위생청에 퍼졌다. 마 청장이 6월에 그만두느냐 유임하느냐 하는 문제는 원래는 문제조차 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도리어 중대한 문제로 되어버렸다. 모두들 매일 출근해서는 등 뒤에서 은밀하게, 애매한 말들로, 그러나 그 의미만은 아주 분명한 토론을 벌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일요일에 일파를 소년궁전의 서예반에 데리고 가는데, 마찬가지로 딸을 무용반에 데리고 온 인사처의 가(賈) 처장과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더니 묘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혹시 알아차리셨습니까? 이번에 윗분들이 회의에서 안건을 결의하지 못하고 보류시켰다지요? 제가 인사처에 이렇게 오래 있었으나 이런 사건은 처음입니다. 이번 사건의 이면에 관해서 정말로 무슨 소문 못 들으셨습니까?”
내가 말했다.
“가 처장 생각엔 어떻습니까? 인사업무를 맡고 계시니 뭔가 조금은 알고 계실 것 아닙니까?”
그가 말했다.
“저도 지 처장께 물어보려던 참인걸요. 성(省) 쪽에 아는 사람 없습니까? 저는 방향도 모르고 중간에 끼어서, 이것 참 사람노릇 하기도 힘드네요.”
내가 말했다.
“원진해가 예상 외로 간이 아주 크네요. 감히 마 청장님한테 정면으로 맞서다니….”
그가 말했다.
“어떤 사람은 지 처장의 간이 크다고 하던데요 뭐….”
그는 몇 마디 더 하고는 총총히 떠나갔다.
가(賈) 처장의 얘기는 나의 위기감을 증폭시켰다. 정책에 따른다면 마 청장님은 분명히 물러나야 되고, 그분이 물러나면 나는 이제 끝장이다. 원진해는 바로 이 점을 꿰뚫어보고 야바위 노름 하듯이 손지화 쪽에다가 판돈을 건 것이다. 마 청장이 물러나기만 하면, 손지화가 청장이 되건 말건, 그는 이미 승자가 되는 것이다. 정말로 그날이 오면 나는 마치 바짝 달아오른 증권 장세가 연말에 납회(納會)를 맞는 것처럼, 또는 연속 몇 번이고 증권시장이 문을 닫는 상황을 맞는 것처럼 되어버릴 것이다.
이때 나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 약간의 변화가 있음을 느꼈다. 아무도 없을 때는 여전히 친하게 대하다가도 공공장소에서는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무표정한 얼굴과 말투를 드러냈다. 그들은 담 위에 걸터앉아서 풍향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소인배라고 욕하려니 그들로서도 억울한 점이 있겠다 싶었다. 수십 년을 굴러서 겨우 마련한 자리, 그 조그만 생존의 공간, 누군들 그 가련한 본전을 도박판에 걸려고 하겠는가! 모두들 처자식이 딸린 몸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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