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중국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소설 - ‘창랑지수‘ <73>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중국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소설 - ‘창랑지수‘ <73>

익명의 투서

***73. 익명의 투서**

나는 홍수와의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박사논문 심사를 통과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전례 없이 빨리 연구원으로 승진까지 하였다. 이어서 마 청장님의 이름으로 신청한 위생청의 박사 양성과정 개설 허가를 받아내고, 나도 덩달아 박사 지도교수가 되었다. 뜻밖이었던 것은 나의 몇몇 동창들 역시 순조롭게 논문심사를 통과했다는 것이다. 비록 동창(同窓)이라고는 하지만, 그 서기와 주임 두 사람은 삼년 동안 코빼기도 한 번 보지 못했다. 그들이 언제 와서 수업을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때가 되자 두 사람 다 번듯한 박사 논문들을 들고 나타났다. 심지어 임지강까지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저 두 사람은 ‘세 번 박사’예요. 입학 수속 밟으러 한 번 오고, 선물 바치러 한 번 오고, 심사 받고 학위 받으러 한 번 오고 ….”

그들은 이미 마음이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그런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다. 세상은 그들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고, 심지어 원칙까지도 그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는, 그런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원칙까지 조작 과정에서 백지화되어 버리는 이런 일은 새삼스레 그럴듯하게 꾸며서 얘기할 필요조차 없어졌다. 바꾸어 말해서, 설계자에게 게임 규칙을 정할 때 본인의 필요를 고려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인성(人性)에 어긋나는 일인 것이다. 권력이 유일하게 도달하지 못하는 곳은 바로 더 높은 권력뿐이다. 나는 더 노력해서 더 높은 경지로 전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계산해 보면 한 걸음밖에 남지 않았다.

과연 기회가 왔다. 연말이 거의 다 되어 마 청장님이 위생청 업무회의에서 내가 청장 보좌역까지 겸임할 것을 제의하셨다. 들리는 소식으로는, 당시에 아무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나는 취임준비를 하고 문건이 내려올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나도 다음부터는 업무회의에 참가할 자격이 생기고, 위생청의 핵심 멤버에 들어간 셈이 되니, 작으나마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튿날 기율검사회의의 노(盧) 서기가 조용히 내게 알려 주었다. 내 사생활에 문제가 있다고 고발하는 익명의 편지가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치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맹효민의 일이 들통난 것인가?

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내 사생활에 문제가 있다고요? 제가요?”

나는 약재회사의 구(瞿) 사장이 혹시 누구한테 무슨 말이라도 흘렸나, 아니면 혹시 누가 나를 미행이라도 했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노 서기가 말했다.

“흥분하지 마십시오. 그저 소문에 불과합니다. 아직 조사도 안 했는걸요.”

조사하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켕겼다. 일단 조사를 하는 날엔 나는 끝장이다. 결국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놓치는구나!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놓쳐!

나는 얼굴에 철판을 딱 깔고 말했다.

“조직 차원에서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조사를 해주십시오.”

오후에 나는 밖으로 꽤 멀리 나가서 휴대폰으로 맹효민을 호출하여 그녀에게 무슨 이상(異常)한 상황이 일어난 게 없는지 물었다. 그녀는 없다고 하면서, 끈질기게 우리가 늘 만나는 그 장소에서 만나자고 졸라댔다.

“지금 위생청에서 누군가가 나를 음해하려고 우리 사이의 일을 폭로하려고 하는 것 같아. 당분간 절대로 나한테 연락하지 마!”

그녀는 그래도 만나자고 졸라댔다.

내가 말했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그녀는 매우 억울해했지만, 그래도 자기의 요구사항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말했다.

“어떻게 큰 문제 작은 문제도 못 가리나!”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저녁에 나는 아무래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나를 음해하려는 거지? 동류 옆에 누워서 엎치락뒤치락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동류에겐 문서를 작성할 일이 있다고 말하고 일어나서 거실 소파에 앉았다. 탁자 위에 종이를 펴고 손에는 펜을 잡고 몇 줄 적는 척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 편지는 마 청장님의 이번 제의에 대항하는 것이다. 우회전술을 통해 정치적 목표를 실현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오랫동안 누군가가 나를 주시하고 분석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뭐, 나는 다른 사람을 분석 안 하나? 언제나 위로 오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자리 수보다 많은 법. 너한테 자리가 떨어진다는 것은 곧 나한테 떨어질 자리가 없어진다는 뜻인지라, 조건이 비슷할수록 서로 원수지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지만 경쟁을 하려면 모두들 정정당당하게 할 것이지…. 너도 홍수와의 전쟁에 뛰어들고, 너도 논문을 발표하고, 너도 박사학위라도 따오란 말이다! 그러지 않고 이런 데서 발을 걸다니…. 에이, 소인배 놈! 이것이 남자의 취약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이런 데서 넘어질 줄이야…. 만전을 다해 계책을 세워야 한다. 이번에 지게 되면 날카롭던 기세가 둔해지고 평생에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인생에 ‘다음’이라는 것이 몇 번이나 있겠는가? 나는 또 일시적인 충동 때문에 맹효민과 사귀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녀를 도시로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만약 모든 것이 밝혀지면, 동류한테는 또 뭐라고 한단 말인가?

나는 속으로 가능성이 있는 인간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았다. 손지화? 원진해? 정소괴? 아니면 황 주임? 아니면 그 중의 누군가가 어떤 소인배한테 시켜서 한 짓인가? 본래 첫 번째 회합에선 대장군은 출마하지 않는 법이다. 이튿날 위생청에 가니 몇몇은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 “지 처장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도 조금 특별했다. 다년간에 걸친 훈련을 통해 나는 다른 사람의 표정에서부터 그들 자신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런 차이점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정소괴가 왔다. 나는 약간 변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정!”

그는 깜짝 놀라기라도 한 듯했다.

나는 내 검사방법이 효과가 있군, 하고 생각하면서 얼른 이어서 말했다.

“좋은 아침이야!”

그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말했다.

“지 처장님도 안녕하십니까?”

나는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두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약간 어지러운 눈빛을 하고 자기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편지는 정소괴가 쓴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그러나 내가 그 자리에 못 올라간다고 해도 어차피 자기한테까지 돌아가지 않을 텐데, 저 인간은 뭣 하러 나섰을까? 순전히 질투심에서? 그럴 리가 없었다. 이때 정소괴가 들어와서 나한테 의논할 일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가 분명히 방금 전의 그 실수를 감추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그가 말했다.

“누군가가 저희 약정처를 질투하고 있습니다. 저희 약정처가 업무도 매끈하게 잘 처리하고 일도 순조롭게 풀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물었다.

“그게 누군가?”

그가 말했다.

“어디서 불기 시작한 바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부서가 워낙 많으니까요.”

점심 때 집에 돌아왔을 때, 동류가 밥도 안 하고 소파에 기대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지금이 몇 시인데…."

동류가 말했다.

“밥은 먹어 뭣해?”

그녀의 말투를 듣는 순간 나는 당황하여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 밥을 짓기 시작했다. 동류가 뛰어 들어오더니 쌀을 이는 냄비를 빼앗아 땅바닥에 엎으면서 말했다.

“밖에서 아주 잘 하고 다니셔!”

말투가 매우 사나웠지만 소리는 절대 높이지 않았다. 나는 냄비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면서 생각했다. 시치미를 뗄까? 아니면 인정하고 치울까? 천천히 몸을 세우면서 냄비를 싱크대 위에 놓고, 다시 무릎을 꿇어 바닥에 흩어진 쌀을 치우기 시작했다. 동류는 나를 잡아 올리면서 말했다.

“밖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나 혼자만 몰랐더군! 이제 어떻게 외출을 해? 다른 사람들이 등 뒤에서 손가락질 해댈 텐데…. 어쩐지 요 며칠 밖에서 등이랑 뒤통수가 저릿저릿 하더라니!”

내가 말했다.

“왜,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야단이야?”

나는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그녀는 나를 거실까지 탁탁 떠밀면서 말했다.

“여자가 이런 일로 화를 안 내면, 그럼 어떤 일로 화를 내란 말이야? 나는 차치하고라도, 당신 일파를 무슨 면목으로 보려고 그래? 내가 언제 당신한테 미안해할 일 한 적 있어? 당신 그렇게 형편없을 때에도 내가 당신한테 무슨 듣기 싫은 소리 한 마디 한 적 있어? 세상에 어떤 여자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변심? 변심하려면 해봐! 내가 당신 물건 베어버려 다른 여자한테 남자구실 못하게 할 테니!”

내가 말했다.

“내가 잘못했으면 당신 나를 떠나가서 새로운 남자 찾으라고….”

그녀가 얼른 말했다.

“무슨 소용 있어? 남자는 남자야! 사람이 바뀌어도 남자라고! 남자라는 족속들 내 다 알아봤어. 하여튼 그놈의
물건 하나 양 다리 사이에 가만히 못 끼워두고 꼭 끄집어내야 마음이 놓이지. 내가 다 알아봤다고!”

내가 말했다.

“조용히, 조용히 좀 해!”

창문을 닫으려고 보니, 이미 창문을 모두 닫아 놓았다.

“조용히!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그가 나한테 쏠 총알을 제공해서야 쓰겠어?”

나는 동류의 말에도 맞는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긴 세월 만약 맹효민이었으면 동류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먼저 그녀에게 이 사건의 이해(利害)관계를 상기시킴으로써 집안의 불부터 일단 먼저 끄고, 그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쉬운 일부터 먼저 끝내려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작년에….”

그녀가 마치 칼이라도 되는 듯이 손바닥으로 공중을 가르면서 내 말을 끊었다.

“웃기고 있네! 말하려면 솔직하게 이야기해.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말했다.

“나는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작년에….”

그 칼이 다시 한 번 공중을 가르면서 말했다.

“작년에? 당신 북경에 다녀온 그해에도 그 불여우 같은 년한테 돈 빌린 거 아냐? 재작년에 그년이 사촌동생인가를 데리고 우리 집에 왔었잖아! 시치미 뚝 떼고 내 앞에서 아주 그년 욕까지 해대더니…. 누구 앞에서 연기야? 그 불여우, 자기 연인한테 여자까지 소개시켜 주고 말이야. 당신 그 여자 좋아하는 건 자기 스스로 자기 무덤 파는 거야. 무덤 파는 것도 하기는 당신 재주라 치고, 도대체 나는 뭣 하러 만났던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꿈에서 깨어난 듯했다. 바깥에서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게 막(莫) 여사 얘기였단 말인가? 나는 한 번 떠보았다.

“누가 하는 소리를 들은 거야?”

그녀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무슨 상관이야! 내가 다 현장에서 목격했는데…. 오죽하면 다른 사람들이 벌써 당신을 고발했겠어?”

나는 탁자를 내리치면서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모함한다고 해서 당신도 그 뒤에서 따라 뛰는 거야? 내가 위생청에 온 지 십년이 되었는데, 나와 뭐? 막서금이? 도대체 누구 말을 들은 거야? 내가 대면하고 따져야겠어. 어떤 놈의 혀가 뭘 봤다고 말한 거야?”

동류가 말했다.

“당신 방금 다 시인해 놓고 나서 이제 또 시인 못하겠다는 거야?”

나는 그녀는 신경도 안 쓰고 전화를 들어 노 서기 집에 전화를 걸었다.

“노 서기님! 저희 집이 지금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부서진 물건도 한 두 개가 아니고요. 바깥의 루머가 집까지 전해져서, 동류가 제게 문제가 있음을 조직에서도 인정했다면서,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조직 차원에서 가능한 한 빨리 이 사건을 조사해 주십시오. 다른 때도 아니고 하필 이런 시점에서 이런 스캔들이 퍼지다니요. 이것은 분명히 정치적인 음해입니다. 동류가 저와 이혼하겠다면서 벌써 서류도 작성해 놓고 저더러 서명하라고, 오후에 가서 수속 밟겠다고 난리입니다. 식사요? 이 시간이 되도록 밥도 안 했습디다. 아들을 안고 강에 뛰어들겠다면서 아내가 아주 발광을 하는 중입니다. 만약 빠른 시일 내에 결론이 나지 않으면 정말 사고 칠 기세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노 서기가 얼른 동류를 바꾸라고 했다. 나는 전화를 동류에게 넘기면서 귀에 대고 말했다.

“울어, 울어!”

동류는 들으면서 힘껏 코를 몇 번 들이마시고 또 들여 마시더니 손을 들어 눈물을 닦고 정말로 울기 시작했다.

나는 사건의 이해관계를 동류에게 설명했다. 그녀는 내 말투가 확신에 차 있는 것을 보고 반신반의하면서 말했다.

“당신 자신이 시인했잖아….”

“그거야 당신한테 뭐라고 해명하기 귀찮아서 그랬지. 어쨌든 이미 조직에서 알 정도로 법석을 떨었으니 결론은 그 인간들이 알아서 내리겠지. 당신 말이야, 만약에 한 번만 더 나를 음해하는 인간들의 뒤를 졸졸 따르면 가짜가 진짜 되는 수가 있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지대위의 처까지도 그 사람한테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다더라, 뭐 그럴 것 아냐? 그렇게 되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

동류를 간신히 설득했다. 그녀도 어쨌든 아직 그 정도로 머리가 흐릿하진 않았던 것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는 일층에 가서 배드민턴을 치자고 제의했다. 동류는 별로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아들을 데리고 내려갔다. 배드민턴을 치면서 동류는 매우 흥분해서 “대위, 대위!”하고 끊임없이 불러댔다. 어둑어둑해질 때쯤 우리 둘은 일파를 데리고 사택단지 입구까지 산보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사건은 급속하게 잠잠해졌다. 워낙 충분한 증거도 없는 익명의 편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편지의 주인공이 다음의 행동을 취해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나의 결백과 나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면 다음에 누가 또 나서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인간이 다음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이 내심으로 실망스러워서, 나는 노 서기에게 편지를 쓴 사람과 그 동기에 대해서 조사를 해보자고 건의했다.

노 서기가 말했다.

“이 정도에서 막았으면 됐지 무슨 좋은 일이라고…. 공안국에 신고라도 해서 수사시키게?”

내가 말했다.

“그런 음험한 인간은 오늘 용서하면 내일 또 권토중래(捲土重來)하게 마련입니다. 그 인간의 칼끝에 사람이 죽
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만 됐어요, 됐어!”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나 마 청장님과 손 부청장님을 만났을 때 이 문제를 다시 꺼냈다. 더 이상 조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결코 맘대로 주무를 수 있는 밀가루 반죽 덩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하루는 저녁에 누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동류가 받자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끊었다.

동류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말했다.

“뭘 보는 거야?”

잠시 후에 또 전화가 왔다. 역시 아무 말 않고 끊었다. 분명히 맹효민이었다. 이런 시기에 전화를 걸어서 사람을 난처하게 하다니! 나는 이튿날 출근 후에 기회를 살펴 그녀를 유풍(裕豊) 찻집으로 불렀다.

내가 만나자마자 말했다.

“왜 집으로 전화를 걸어?”

그녀가 입을 삐죽이면서 말했다.

“그럼 나더러 어디 가서 당신을 찾으란 말이에요? 호출도 안 해주고….”

나는 그녀에게 위생청에서 일어난 일은 말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내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알면 훗날 돌변해서 나를 난처하게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녀가 말했다.

“전에 당신이 전화로 한 말, 며칠을 두고 생각해봤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가 안 돼요. 분명하게 이야기해줘요.”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한 말 있잖아요!”

한참 이야기한 다음에야 나는 그녀가“큰 문제 작은 문제도 못 가린다”란 말을 두고 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말했다.

“똑바로 말해 봐요. 당신 도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예요? 뭐가 큰 문제고 뭐가 작은 문제에요?”

나는 이런 시점에서는 여자가 결코 사리(事理)를 따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야, 자기가 큰 문제이고 다른 일들은 모두 작은 문제이지.”

그녀가 얼른 말했다.

“틀렸어요. 우리의 관계가 큰 문제이고 다른 일들은 모두 작은 문제에요.”

“그럼, 그렇고 말고, 맞는 말이지. 그럼.”

“그렇지요, 맞죠? 그럼 앞으로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말 좀 해봐요. 이런 식으로 불확실하게 지낸 게 벌써 일년이 넘었어요. 이런 식으로 계속하긴 싫어요. 이혼하세요.”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내가 어떻게 감히….”

그녀가 말했다.

“부인을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럼 저는 안 무서우세요? 제가 사모님 만나서 이야기해 볼게요. 마음 가라앉히고 차분히 이야기하면, 그쪽도 사리분별 못하는 분 아니라고 생각해요. 감정 없이 계속 묶어두는 것은 두 사람에게 고통만 줄 뿐이에요.”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 같았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여자 아이에게 어쩌면 이런 용기가 다 있단 말인가? 그런 그녀가 무서워지기 시작하는 한편, 나를 위해 그런 용기를 내어준 그녀가 고맙기도 했다.

내가 말했다.

“뭐가 그렇게 급해? 아직 나이도 어리면서….”

그녀가 말했다.

“지난 한 해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기회를 포기하고 또 얼마나 많은 밤을 불면으로 고생했는지 알아요? 다른 사람들은 저녁이면 쌍쌍이 외출하는데, 위층에서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어떤 나날을 보냈는지 알아요? 제 생각도 좀 해주세요.”

나는 절대로 이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동류한테 미안하고, 아들에게 미안하고, 그리고 앞으로의 나의 전도에도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렇게 질질 끌다가는 그녀에게도 더 큰 폐만 끼칠 것 같았다. 여자의 청춘이 몇 년이나 지속되겠는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세요. 기약이 있어야 기다리는 것도 기다리지요.”

내가 말했다.

“이봐, 난 너를 좋아해. 하지만….”

내가 말을 멈췄다. 마음속으로 잔인한 용기를 쌓았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고 두려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이혼은 할 수 없어!”

순간 그녀가 테이블 위로 엎드리더니 머리를 테이블에 박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그녀의 머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말했다.

“지대위 씨, 이제 당신을 알겠어요. 남자란 모두 이기적인 인간들이에요.”

나는 그녀를 일으키면서 말했다.

“이러지 마! 말로 하라고….”

그녀는 힘을 주어 나를 뿌리치면서 말했다.

“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그러면서 내 품에 엎드리더니 미친 듯이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눈물이 내 입가로 스며들었다.

“이게 최후의 결론인가요? 말해 주세요. 오늘만은 솔직하게 말해 줘요. 당신이 진심을 이야기하면 저도 이대로
살아가겠지만, 진심을 말하지 않으면 저는 이제 죽는 길밖에 없어요.”

그녀가 이렇게 미친 듯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나마 내가 자제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맑은 정신을 유지해서, 최후의 그 선을 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말했다.

“똑바로 앉아 봐! 말로 하자고….”

그녀가 바로 앉았다. 나는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말을 풀어갔다.

그녀가 말했다.

“대위 씨, 다른 말 다 필요 없어요. 나는 오늘 진실을 밝혀야 해요.”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몰려서 입을 열었다.

“이혼은 할 수 없어.”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지 처장님! 당신의 성실함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더니 또 헤헤 웃었다.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녀가 말했다.

“저 먼저 갈게요.”

핸드백을 메더니 그녀는 고개도 한 번 뒤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불러오고 싶었지만, 룸의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불러온들 뭘 어쩌겠는가? 이마를 치고 이를 악물면서 문을 열지 않았다.

며칠 후에 집에서 전화를 거는데, 수화기의 느낌이 평소와 달랐다. 언뜻 보니 색깔은 이전의 그 남색 전화기인데, 자세히 보니 새로 바꾼, 발신자 번호가 확인되는 전화기였다. 동류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스캔들이 그녀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번 일이 있고 나서 나는 거리를 걸을 때에도 앞쪽의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오지나 않을까 하는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앞의 저 자동차나 오토바이 뒤쪽에 혹시 무슨 음모라도 숨겨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자주 신경질적으로 길가 쪽으로 튀어나가곤 했다. 몇 번이나 내가 도망치는 중에 자동차가 내 옆으로 스쳐 지나갔고, 그때마다 내 하반신의 은밀한 곳이 저릿하고 서늘한 것이 마치 감전이라도 당한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나는 이놈의 세계를 더욱 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