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은 10월 26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10.26’ 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1917~1979)을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24년 전 이날 밤 박정희는 여가수와 여대생을 불러다 놓고 궁정동 안가에서 부하들과 함께 시바스 리갈을 마시다가 자신의 둘도 없는 학교 친구이자 심복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저격 당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10.26’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날은 안중근 의사(1879~1910)가 94년 전 아침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조선 민족의 이름으로 저격한 날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 ‘박정희의 10.26’보다 ‘안중근의 10.26’을 더 먼저 기억해야 하고, 그날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다.
박정희의 ‘밤’과 안중근의 ‘아침’이 상징하듯 실제로 지난 일요일에는 상징적인 두 개의 대립적 행사가 있었다. 동작동 국립묘지 입구에서 ‘왜군 장교 출신’ 박정희의 무덤을 파내라는 시위와 명동성당에서 ‘평화주의자’로서의 안중근을 재조명하는 강연회가 잇따라 열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 두 행사가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필자 정지환 <시민의 신문> 취재부장의 글을 오늘부터 두 차례에 걸쳐 분재하려는 까닭은 그 메시지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 글은 <시민의신문> 10월 27일자에 발표한 기사를 확대, 보강한 것이다. 편집자
<사진1> 공판을 받기 전의 안중근 의사. 안 의사의 공판 투쟁은 독립주의와 평화주의라는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설파하는 자리가 됐다.
ⓒ윤병석 교수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박정희의 10.26’과 ‘안중근의 10.26’**
10월 26일.
안중근 의사(1879~1910)가 94년 전 하얼빈 역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다. 그러나 10.26을 ‘안중근 의거일’로 기억하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도리어 대다수 한국인은 10.26을 ‘박정희 서거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안중근의 10.26은 ‘자랑스럽고 의로운 날’이고 박정희의 10․26은 ‘부끄럽고 창피한 날’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의로운 죽임’이 ‘개 같은 죽음’보다 홀대받아온 이유는 뭘까. 안중근은 먼 옛날 인물이고 박정희는 최근의 인물이라서?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분석이 될 수 없다. 안 의사보다 무려 반세기나 먼저 태어난 ‘먼 옛날 인물’인 히로부미가 일본에서 여전히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는 것이 그 반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안중근은 ‘가해자’이고 박정희는 ‘피해자’라서? 그러나 그것 또한 정확한 분석이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일본군의 칼날과 작두로 목이 잘린 채 잔혹하게 죽어간 수많은 한말 의병들, 공작정치에 의한 수많은 민주투사의 실종과 죽음을 두고 그런 말을 꺼낸다는 것은 스스로 역사의 청맹과니임을 자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중근 의사가 여전히 ‘일반 국민 속의 안중근’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우익 보수 속의 안중근’으로 축소된 채 박제화 됐다는 것, 이 나라의 여론을 장악한 기득권 세력의 가슴에 안중근보다 박정희가 더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 등에서 보다 정확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 하면 히로부미를 저격한 인물로만 집중적으로 부각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일종의 ‘고독한 테러리스트’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그래서 일본의 일부 극우파들까지 존경을 표시해온 반면에 국내의 일반 국민이 정을 붙이기에는 다소 불편한 구석이 있었던 측면도 있다.
<사진2>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는 “우리는 안중근을 잘 모르고 있다”면서 “안중근 재발견을 위한 고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지환 기자.
그나마 일부 시민들이 차량 뒤에 붙이고 다닌 안 의사의 표식(약지가 잘린 손바닥 도장과 ‘대한국인’이란 글씨)도 국수주의적 기호(記號)로 해독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제대로 알고 보면, 안중근 의사는 철저한 평화주의자였다. 저격은 벼랑 끝에 몰린 당시 대한제국의 사정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독립투사인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상징적 수단에 불과했다.
이와 관련 최근 ‘안중근 재발견’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는 “우리는 안중근을 잘 모르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재발견해야 할 안중근 의사의 위대성은 무엇일까. 한 교수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안중근 의사는 남북한에서 동시에 칭송 받는 보기 드문 독립운동가이다. 그가 민족정기의 표상으로서 널리 존경받는 애국자임은, 순국 후 불과 3주만에 전기가 출간되어 널리 읽혀진 사실, 박은식 등 우리나라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물론이고 양계초, 손문, 원세개 등 중국의 지도자들까지 안 의사의 의열(義烈)을 칭송하는 저술을 남긴 점, 그리고 한국의 위인들 가운데 가장 많은 전기를 갖고 있다는 점 등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위인임을 알 수 있거니와, 우선 그는 시간을 뛰어넘는 위인이다. 사실 현대사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불문하고 존경받는 인물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순국한 직후부터 각종 전기가 출간되기 시작했다. 사형이 집행되고 채 3주가 흐르지 않은 시점인 4월 15일에 발간된 작자 미상의 <근세역사>를 비롯해 김택영의 <안중근전>(1910), 이건승의 <안중근전>(1910년대), 홍종표의 <대동위인 안중근전>(1911), 계봉우의 <만고의사 안중근전>(1914), 박은식의 <안중근>(1914), 옥사의 <만고의사 안중근전>(1917), 정원의 <안중근>(1920년경) 등이 바로 그것이다.
“작자 미상의 <근세역사>와 관련해서는 신화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 책은 제목과 달리 안중근 의사의 전기를 다루고 있다. 일제 관헌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제가 독립투사를 탄압하기 위해 만든 특고(特高)가 체포한 불령선인 중 거의 모두가 이 책을 간직하고 있었다. 특고가 두 눈에 불을 켜고 이 책을 발간한 사람을 추적했으나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고 한다.”
한상권 교수가 전하는 비사(秘史)의 한 대목이다. 실제로 일제시대 동아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안중근은 청년학생 사이에서 뇌리가 아플 정도로 심각하게 박혀 있다. 안중근의 사진을 담은 그림엽서와 복사지가 불령분자들의 가택수색을 할 때마다 나오지 않는 집이 없다.”
여기서 불령분자(不逞分子)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또 다른 표현인데, 요즘 용어로 치면 ‘빨갱이’ 혹은 ‘운동권’ 쯤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쉽게 말해 일제시대에 독립을 희구하던 웬만한 지식인들에게 안 의사는 절대적 존재였던 것이다. 실제로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를 그린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도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학교 기숙사에서 언제나 이야기의 화제는 많은 수행원을 동반하고 기차에서 내려오는 이토를 하얼빈 역두에서 안중근이 어떤 모습으로 살행(殺行)하였는가였다.”
<사진3> 남산공원 안중근 의사 기념관 옆에 서 있는 안 의사의 동상은 친일파 조각가로 알려진 김경승이 세운 것이다.
ⓒ윤치영 회고록 <윤치영의 20세기>.
가히 ‘안중근 신드롬’이라 이름 붙일 만한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일제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 26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안 의사 순국 36주년 추모식에는 무려 1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당시 남한 인구가 1천만을 조금 넘겼을 때임을 감안한다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안중근 의사가 일제시대부터 해방정국 때까지 지식인과 민중들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역사 인물 중에서 개인의 일생을 다룬 전기를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안중근 의사이다. 한상권 교수는 “안 의사와 관련된 아동용 위인전만 약 1백30권에 이른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안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대다수 영화나 드라마가 그랬듯이 위인전도 하얼빈에서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실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남산에 있는 안중근 기념관에서 상영하는 영상물도 이러한 범주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못하다.
안중근 의사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위인이라고 했거니와, 둘째로 그는 남북한이라는 이념의 공간을 뛰어넘은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현대사 속에서 남한과 북한을 불문하고 존경받는 인물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신상옥 감독이 만든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북한 영화에서 알 수 있듯이 안 의사는 남북한에서 동시에 존경받는다. 그런 점에서 안 의사는 오늘의 시대적 화두인 화해와 통일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대다수가 반공 성향의 개신교 신자이거나 관서지역(평안도) 출신인 안창호, 이승만, 조만식 등과 달리 안중근이 천주교 신자인 동시에 백범 김구처럼 해서지방(황해도) 출신이라는 점도 시사적이다.
남북한의 공간을 뛰어넘는 안 의사의 메시지와 관련해 한상권 교수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북한은 1937년 김일성이 주도해 국내로 진공했던 보천보 전투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도 의병장의 신분으로 이미 1908년 국내로 진공해 전투를 벌인 적이 있다. 1909년 3월의 단지동맹과 10월의 히로부미 저격이 그 연장선 위에 있었던 것임인 물론이다. 이렇듯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안 의사는 화해와 통일의 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정세를 잘못 판단해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이토의 진심을 오해하여 실수로 한 짓이라고 말하면 살려줄 수도 있다는 회유를 받았으나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 대신에 자신은 독립 의병군 중장으로서 10만의 의병을 죽인 적장을 전투에서 사살한 것일 뿐이니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로 대우하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일제 법원이 사형 선고를 내리자 곧바로 항소를 포기하기도 했다.
앞에서 안중근 의사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위인이라고 했거니와, 그의 위대성은 역설적으로 ‘평화주의자’이자 ‘문명사상가’로서의 면모에서 곧바로 드러난다. 다시 한상권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안중근 의사는 단순한 행동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의 진면목은 도리어 평화의 사도라는 측면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그가 사형 선고를 받고도 곧바로 항소를 포기했다는 사실, 의병군 중장을 자임하며 히로부미를 사사로운 감정에서 죽인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는 사실, 옥중에서 <동양평화론>(미완성)을 집필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안 의사가 ‘법정투쟁’과 <동양평화론>을 통해 밝힌 주장과 정신은 1919년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 정신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유업은 후대에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관련해 윤치영, 이은상 등 박정희 쿠데타 정권을 지지하던 친일 경력을 가진 일부 수구ㆍ기득권 세력에 의해 1963년 설립된 ‘안중근 의사 숭모회’(이하 숭모회)가 비판의 도마에 오르곤 했다.
최근 숭모회가 한 방송사와 공동으로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열었던 ‘안중근X파일전’은 상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상권 교수는 이 해프닝과 관련해 이렇게 탄식했다.
“의병장 시절 일본군 포로를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로 대우해 석방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동양평화론>을 저술했던 안중근 의사를 재평가하자면서 ‘전쟁기념관’에서 행사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평화주의자인 안 의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안 의사의 정신을 잇겠다는 숭모회조차 이런 낮은 수준밖에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지경이니 일반 국민들의 안 의사에 대한 이해의 수준은 얼마나 더 심하겠는가.”
사실 우리 사회는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다 보니 제대로 대접도 하지 못하고 있다. 안 의사를 ‘숭모’하기보다 ‘모욕’하고 있는 우리의 벌거벗은 자화상은 수없이 많다. 첫 번째 장면은 다음과 같다.
남산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으면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이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청년'의 형상으로 묘사된 안 의사 동상이다.
그런데 그 동상을 제작한 김경승(1915~1992)은 친일파(정확한 표현은 민족반역자) 경력을 가진 대표적인 조각가로 손꼽힌다.
서양화가인 친형 김인승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본격적으로 재능있는 예술가로서의 관록과 명성을 쌓기 시작한 김경승은 실제로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목적으로 탄생한 조선미술가협회에서 간부로 활동한 전력이 있다. 이 미술단체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전람회 수익금을 자진해서 국방헌금으로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김경승은 해방된 나라에서 심판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조각계의 대부’로 군림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승만 정권 시대엔 이순신 동상과 안중근 동상을, 박정희 정권 시대엔 김구 동상과 안창호 동상을, 전두환 정권 시대엔 전봉준 동상을 발주 받아 세우는 등 조각가로서 최대의 영광도 독차지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수유리에 있는 4․19기념탑도 그가 만들었다. 전두환 정권 때는 10년 동안 평통자문위원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그렇다면 그는 과거의 죄과를 묻지 않고 영광만 안겨준 조국에 대해 일말의 죄송한 마음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다음의 일화가 그 순진한(?) 질문에 대한 김경승의 명쾌한(?) 답변이 될 것이다. 그는 1970년대 후반 부인과 함께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왜정 말기 주문을 받아 남편은 조각하고 아내는 흙을 다져주고 그럴 때 너무 보람찼고 기뻤다.”
속칭 예술가이자 지식인이 보여줄 수 있는 역사에 대한 백치미(白痴美)의 극단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동시에 그것은 말로는 항상 ‘순수’와 ‘탈정치’를 외치면서도 몸으로는 결코 순수하다 할 수 없는 ‘타락’과 ‘정치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대한민국 예술지상주의자들의 진면목이기도 할 것이다.
해방 직후 조선미술건설본부가 김은호, 이상범, 김기창, 심형구, 윤효중 등과 함께 김경승 형제를 대표적인 친일부역 예술인으로 지목한 것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청산하지 못한 역사―한국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에서 미술계의 대표적 인물로 김경승을 선정한 것도 이러한 그의 후안무치(厚顔無恥)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을 숭모하겠다는 사람들의 ‘안중근 모욕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필자 연락쳐 ssal@ngotimes.net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