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딸들의 구속에 폭음도 잇따르고**
그렇지 않아도 애주가로 소문난 나는 딸들이 잇따라 구속되는 일을 당하자 애주가 폭주가 되는 횟수가 잦아졌다.
첫째 딸은 서울대 국사학과 4학년 때 광주항쟁 1주년을 맞아, 5~6명의 여학생과 함께 신군부를 규탄하고 학생들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다량으로 찍어 대학캠퍼스에 뿌렸다. 그 아지트가 나의 선거구인 신정 2동 판자촌에 있었는데 수상히 여긴 주민이 신고하여 강서경찰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다. 당시의 뚝방밑이라는 빈민촌은 소문이 사통팔달로 나는 곳인데 여학생들이 그것을 모르고 거기서 방을 얻고 일을 꾸몄다.
나는 그때 민정당 소속의 국회의원. 전두환정권 들어서고는 자녀 반정부운동의 첫 케이스였다. 나는 미련없이 모든 자리의 사퇴서를 내고, 또 미안하게 되었다는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는 달랐다. 박대통령 때는 그런 경우 부모는 공직에서 해직되고, 의원은 공천에서 배제되었었다. 나도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다. 모든 것 훨훨 털어 버리고 대포나 마시자고 하던 때에, 전 대통령이 “선거에 바빠서 자녀를 잘 챙겼겠느냐,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하겠으니 앞으로 더욱 열심히 노력하라.” 는 전갈과 함께 사표들을 반려해 왔다.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그렇게 결정되었는지 모른다. 전 대통령이 통이 크다는 이야기는 들어 왔지만 그래도 나는 어리둥절했다.
첫째 딸 일은 그렇게 흘러가 버렸는데, 1년 반 쯤 후에 고려대 경제학과 3학년인 둘째 딸이 학생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로 성북경찰서에 체포되었다. 모든 것을 체념했다. 사표고, 사과 인사고 모두 실없는 일이라고 단념했다. 그렇게 있을 때 백방으로 뛴 서울 법대 출신인 아내가 아무리 검토해 보아도 억울하다고 불만이다. 차근차근 알아보니 딸이 운동권은 운동권인데 언니사건을 생각하여 기술적으로 약게 처신해서 법적용의 경계지대에 있는 사건 같았다. 쉽게 말하여 구속하여 엄히 다스릴 수도 있고, 따귀를 때려 훈방하며 부모에게 경고할 수도 있는, 그런 법적용의 애매모호한 경계지대 말이다.
영장이 떨어져 딸이 정식 구속되던 날, 마침 미리 서울출신 민정당의원들의 술자리가 이종찬(李鍾贊) 원내총무에 의해 마련되어 있었다. 한남동의 사롱. 내가 어찌 경음(鯨飮)을 안하겠는가. 호걸스럽게 술을 퍼마신 다음 민정당정권의 실세인 이총무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애매한 경우라 따귀나 때려 훈방해도 될 것을 내가 미운가, 구속한 이유가 무어냐, 미우면 한 마디만 하면 나는 의원이고 나발이고 미련 없이 안할텐데 말이다. 나쁜 사람들이라고…… 뭐 그런 요지의 항의인데 매우 험하게 내뱉었다. (그래도 민정당에서는 가장 양질인 이총무에겐 미안하게 되었다.) 그렇게 폭음하고 폭언을 하니 눈물이 핑 돌기도 하였다. 그때 김정례(金正禮) 의원은 우리들 사이에 누님으로 통하고, 또 <통 큰 누님>이라고 불리며 존경을 받았었다. 그 누님이 나를 태우고 우리 집까지 와서 아내와 나를 위로해주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얽히고 조여들 때에는 우격다짐도 통할 수도 있듯이, 어떤 복잡한 사태의 현상돌파에는 술취한 파격적 행동이 유효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권고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거창하게 김구선생의 <백범일지>에 나오는 격언을 떠올리기도 한다. “가지를 잡고 오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되, 벼랑에서 잡은 가지마저 놓을 수 있는 사람이 가히 장부로다. (得樹攀枝無足奇, 懸崖撤手丈夫兒) " 상황이 같다는 것은 아니다. 내 심정은 그랬다는 것이다.
나는 다음 날 청와대, 민정당, 안기부, 검찰 등 모든 관계기관에 강한 항의문을 보냈다. 끝내는 법정투쟁이라도 하여 보자는 결의였다. 그러자 경찰의 정보책임자가 만나자더니 이리 이리하면 문제가 풀리기 쉽다고 훈수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 훈수를 무시했다. 싸워보자는데 무슨 요령인가. 그런데 다음에 이총무를 만나니 내가 이리 이리하였느냐고 묻는다. 놀랐다. 훈수를 그대로 들었다가는 함정에 빠져 정보기관에 놀아날 뻔했다.
이총무가 애를 썼다. 수사기록을 직접 챙겨보니 굳이 구속할 일도 아니라는 판단이 서서 그렇게 건의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10여일 후 딸은 검찰에 내가 가서 인계를 받아왔다.
당시 동료의원인 이춘구(李春九)씨는 내무차관으로 정권의 역시 실세였는데 딸이 풀려난 후 국회로비에서 마주치니 이 청렴결백하고 냉혈이라 할 정도로 원리원칙인 이차관은 나의 폭언을 전문해 들었다는 표정으로 “이제 화가 풀렸느냐.” 고 빙그레 웃는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얼마 후 둘째 딸이 김대중씨의 비서실장 운운하고 신문에 오르내리던 예춘호(芮春浩)씨의 아들과 결혼하겠단다. 그때가 어느 때인가. 김대중씨는 자의타의 반반으로 미국에 망명중이고 험하던 때가 아닌가. 딸이 둘씩이나 구속되고 이번에는 재야핵심과 사돈이 된다니…. 꼭 작심하고 그러는 것이라 오해를 받을 만하다. 오랜 술친구 김종인(金鐘仁)의원을 통하여 당시 정무수석이던 정순덕(鄭順德)씨에게 오해 없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랬더니 전 대통령 “정치와 결혼이 무슨 상관이 있나. 전혀 별개가 아닌가. 혼사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는 전갈과 함께 최창윤(崔昌潤)비서관을 통해 두둑한 축의금을 전해 왔다.
참 대단한 리더쉽이다. 국방위 회식사건의 처리 등 모든 것을 합쳐 판단할 때, 그는 나에게 큰 통을 보여주었다 할 것이다. 아무런 사적인 끈이 없었는데 말이다. 이 이야기는 광주의 일이나 그후의 부패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전남 광주 호남대학에서 같이 교수 일을 하게 된 하나회 출신의 독일통인 인텔리 군인 이상선(李相鮮)장군과 친하게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 당시 군에서는 내가 전대통령의 각별한 우대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것이다.
나와 동년배이고 60년 중반부터 사귀어온 고은 시인은 창비전작시 <만인보> 제 11권에 <남재희>편을 실었는데 그 전반은 다음과 같다.
“의식은 야에 있으나/ 현실은 여에 있었다./
꿈은 진보에 있으나/ 체질은 보수에 있었다.//
시대는 이런 사람에게 술을 주었다./
술취해 집에 돌아가면/ 3만권의 책이 있었다./
법과 대학 동기인/ 아내와/ 데모하는 딸의 빈방이 있었다.“
친구들은 내가 서울법대 때 이승만대통령 양아들 이강석군의 부정입학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한 것을 알고 있기에 ‘부전자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딸 때는 군사정부 때이며 딸들이 훨씬 용감했다 하겠다. ‘승어부(勝於父)’인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