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조선일보 언론자유투쟁과 커튼論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조선일보 언론자유투쟁과 커튼論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그래도 잘 마셨다 <43>

***조선일보 언론자유투쟁과 커튼論**

1975년 3월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이 전언론계를 휩쓸고, 조선일보에서도 32명의 해고란 희생자가 날 때이다. (동아일보는 동아방송과 합하여 1백30여명의 희생자를 내어 가장 많았다.) 나는 조선일보 10년 근무 후 고교선배인 신범식(申範植) 서울신문사장의 간청으로, 그리고 방일영(方一榮), 방우영(方又榮)조선일보 사주형제의 권고도 있고 하여, 서울신문 편집국장으로 옮겨 앉아 있었지만 조선일보의 움직임에 관심이 없을 수 없었다. 또 공교롭게도 언론자유투쟁에 나선 기자들이 거의 모두 나와 가까웠던 사이이기도 했다.

정치부에서 같이 일했던, 해직당한 박범진(朴範珍)기자를 술집으로 불러냈다. 다동에 있는 <오륙도>란 숯불고기집으로 부산출신의 친한 국회의원이 경영하던 데다. 국회의원이 출마 전, 낙선 후 음식점을 운영하는 경우는 많다. 포장마차에서 라면장사를 한 것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의원도 있고, 장어집을 한 의원도 있다. 제일 널리 소문이 난 곳은 야당의 소장의원 몇몇이 낙선 후 <하로동선(夏爐冬扇)>이란 불고기집을 합동으로 운영한 것이다. 여름의 난로에 겨울의 부채라, 참 익살스럽고 멋도 있는 옥호다. 노무현대통령도 그때의 운영맴버이다.

유신정권의 언론통제에 항의하여 투쟁하여 기자들의 결의도 단호했고, 회사의 기강을 잡으려는 경영측의 의지도 확고하여 결국 많은 희생자가 나게 되었었다. 서울신문에서도 언론자유선언이 있었지만 나는 사장에게 젊은 혈기를 이해하여 불문에 부치자고 건의해서 그렇게 조용히 수습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때 언론자유선언의 선봉에 섰던 기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상철(李相哲)기자는 그 후 조선일보로 옮겨 정치부장을 거쳐 경영기획실장이 되었으며 지금 관훈클럽 총무로 있다. 얼마 전 광화문 근처 일식집에서 서울신문 사회부장이던, 임수경씨 아버지 임판호(林判鎬)씨 등 여럿과 술을 마시고 있자 이상철씨가 왔다가 술값을 내고 갔다. 거액인데 말이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박범진씨는 정치부기자 나름의 감각으로 사태를 분석하며, 수습의 길이 전혀 막힌 것은 아니라고 비쳤다. 혈기방장한 젊은 기자들이 투쟁에 나섰는데, 무조건 굽히고 들어오라는 회사측 주장은 말이 안되고 젊은이들이 다시 일에 복귀할 수 있는 어떤 명분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말하자면 중간의 어느 지점에서 타협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나는 이것이로구나 하고 크게 끄덕였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필요없는 상상이지만, 투쟁기자들을 어떤 기구로 묶어 기를 살려 줄 수도 있고, 또는 연구 기구 같은 것을 둘 수도 있고, 타협할 생각이라면 방안이 궁할 리가 없다. 나는 그것을 커튼론이라고 스스로 명명했다. 이 커튼을 어떻게 잘 치느냐가 협상의 기술이며 묘미이다. 요즘의 이른바 북핵문제 협상에도 해당된다 할 것이다.

박기자와 실컷 먹고 마시고 헤어진 뒤 나는 취중임을 무릅쓰고 사직동 방우영 사장댁을 방문하였다. 심야의 의외의 방문이다. 거기서는 회사측에 약간 유리하게 말하였다. 그래야 타협이 될 것이 아닌가. "사장님, 젊은 기자들이 굽히고 들어올 기미가 보입니다. 그러니 그 기자들에게 작은 명분이라도 세워주십시오. 명분이 얼마간이라도 없으면 그 기자들이 항복하려도 어떻게 항복하겠습니까. 젊은이 아닙니까. 또 그렇게 해서 항복하고 들어온다면 그런 기백도 없는 기자들을 조선일보는 어떻게 쓰겠습니까. 그들의 기도 살려주어야 합니다. 발가벗고 들어오게 하지 말고 커튼을 쳐주십시오. 커튼으로 가려달라는 이야깁니다. 그게 얼마간의 명분을 세워주는 일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나의 심정은 너무나 절박하고 간절한 것이어서 지금도 호소의 요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방사장에 대한 인간적 신뢰가 있어 심야에 무례를 저질렀을 것이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니 조선일보 편집담당 전무 류건호(柳建浩)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선일보를 떠났으면 지금 있는 신문사 일이나 신경쓸 것이지 왜 남의 회사 일에 참견이요." 그런 요지의 몹시 심기가 사나운 말투의 반격이다. 나는 모두 조선일보를 위한 일이 아니냐고 답변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나의 판단이 옳았던 것 같다. 다만 방사장에 대한 나의 설득력이 약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박범진씨는 나중에 민정당에서 그에게 공천을 준다기에 내가 나서서 내 선거구였던 양천 갑구에 끌어다놓았다. 거기서 그는 두 번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