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政治部 記者의 양 巨頭, 趙世衡ㆍ趙庸中**
정치인으로서보다는 언론인으로서 나는 선배복이 있었던 것 같다. 선배로 모셨던 분을 연대순으로 들면 오종식(吳宗植), 조동건(趙東健), 천관우(千寬宇), 조세형(趙世衡), 김경환(金庚煥), 윤주영(尹冑榮), 조용중(趙庸中), 선우휘(鮮宇煇), 이병주(李炳注), 최석채(崔錫采), 신범식(申範植), 김종규(金鐘圭) 씨 등이 있는데 모두 언론계에선 뚜렷한 자취를 남긴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서 정치부 기자 때 모셨던 조세형ㆍ조용중 두 선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일보의 편집부에 있다가 4.19를 맞고, 정치부로 옮겨달라 해도 안 된다기에, 정치부로 옮겨준다는 조건부로 민국일보로 갔다. 세계일보라고 하던 것을 천관우씨를 중심한 각 사의 쟁쟁한 기자들 20여명이 집단적으로 옮기면서 민국일보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제2공화국시대에 새로이 떠오른 신문으로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때 정치부차장이 조세형씨였는데 곧 부장이 되었으며 나는 그 밑에서 국회와 정당, 정당 가운데서 혁신정당을 취재했었다. 4.19 1주년 때 조 부장의 특별배려로 <4월의 유산>이라는 기획시리즈를 1면에 9회에 걸쳐 연재한 것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때 <야당도시의 기질>이라고 하여 한 회는 사과뿐만 아니라 데모의 명산지이자 혁신세력의 총본산이 되다시피한 대구(大邱)를 다루었다. 4.19 1주년 특집에 왜 그런 항목을 내가 넣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엉뚱한 일이기도 하려니와, 곧 5.16이 나고 TK(대구ㆍ경북)가 주도 세력이 되고 보니 귀신에 씌여 예감한지도 모르겠다. 그때, 여하튼 제2공화국시대의 변화기미를 대구가 압축하여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으로 기사를 쓴 것이다. 당시의 민국일보가 예상외로 종로도서관에 잘 보관되어있는 것을 찾아내어 다시금 읽어보았다.
조 부장은 우선 키가 훤칠한 호남(好男)이다. 코도 우뚝하여 처음엔 「크라크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가 곧 「조 코」로 통했다. 정계에 입문하여 DJ당의 총재권한대행을 하고 있을 때, 어느 여성 국회의원이 코가 무척 큰 조홍래(趙洪來) YS정무수석을 보더니 “아이고, 우리 총재대행이 코가 크다고 생각했더니 조 수석은 더 크네요.” 하고 감탄하여 주변의원들의 묘한 연상작용을 일으키게 하였다고 한다.
조 부장은 명필에 속필이고 기사도 잘 쓸 뿐만 아니라 성품도 서글서글하다. 찬사가 절로 나올 지경이다. 일과가 끝나면 자주 부원들을 거느리고 명동의 판문점이라는 도라무통(드럼을 일본식으로 그렇게 발음했다) 양구이집으로 향한다. 민국일보는 남대문 바로 옆이라 슬슬 걸어가면 된다. 거기서 양ㆍ곱창에 소주로 1차를 한다. 그리고 같은 명동의, 당시에 유명했던 바 갈리레오로 가서 맥주를 마신다. 입가심이라 했다. 소주로 취했으니 맥주는 많이 안 마시기에 돈이 절약된다. 아마 조 부장의 주머니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거의 항상 그런 순서였으니 말이다.
요즘은 버버리 코트를 많이 입지만 그때는 스프링 코트라고 가벼운 코트를 봄 가을에 주로 입었었다. 조 부장도 큰 키에 스프링을 잘 걸쳤었는데 편집국의 난로에 너무 가까이 가서 눌어버린, 그래서 갈색으로 누른 표가 나는, 스프링을 그는 거리낌없이 입고 다닌 기억이 난다. 용모와는 달리 수더분하다.
5.16후 얼마 있어 민국일보가 자진폐간하여 나는 조선일보로 가서 정치부의 조용중 부장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조선의 조 부장도 민국의 조 부장과 비슷하다. 키가 크고, 명필에 속필이고, 기사도 잘 쓰고, 성품도 틔였고, 다만 한가지 다르다면 독설이 유명하다는 것이다. 그가 “이 자(者)가 …” “저 자가 …” 하고 퍼붓기 시작하면 신랄하다.
그 독설을 두고 근래에 조크가 하나 생겼다. 이억순(李億淳) 전 세계일보 주필이 박석무(朴錫武) 전 의원 등과 술을 하는 자리에서, 이형이 “이 자가 … 저 자가 …” 하다가 박형과 말다툼이 생겼다. 초면에 예의에 벗어났다. 그래서 내가 “이형, 요즘 조용중씨와 자주 술을 했지” 했더니 이형, 놀라며 어떻게 아느냔다. “이 자가 … 저 자가 …” 는 전염성이 있다. 이형이 명색이 세계일보 주필이니 그게 세계에 사스처럼 전염되어 부시 미국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 this man" 이라 하지 않았는가.
조 부장은 기자들을 점심에 잘 데리고 나갔다. 설렁탕의 미선옥, 선지국의 부민옥, 추어탕의 용금옥, 곰탕의 하동관 … 다동을 중심으로 한 유명한 집들로 지금도 많이는 남아 있다.
저녁에 술은 민국의 조 부장과 코스가 비슷하다. 불고기 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바에 가서 맥주로 이른바 입가심이다. 아마 정치부 기자들끼리 어울리다 보니 술마시는, 요즘 유행어로 로드 맵(road map)이 비슷해진 것 같다. 조선의 조 부장은 거기에 추가하여 가끔은 방석집에도 끌고 갔다. 제2공화국 때와 공화당정권 때와 수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외상도 많이 했다. 월급날이면 명동 바 갈리레오의 청년이 편집국에 나타나 정치부원들을 바라보고 미소지으며 눈만 껌벅껌벅하던 유머러스한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물론 사직동의 유명한 명월네 집의 아저씨는 수첩을 들고 광화문 일대의 편집국들을 누비며 수금을 했고 말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들은 술을 폭음은 하지 않고 적당히 마신 것 같다. 절제있는 생활. 그래서 모두 70을 훨씬 넘어선 지금까지 아주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 밑에서 술을 마셨으면서 나는 왜 폭음을 자주하게 되었을까? 성격탓인가? 미련했다 할 것이다.
두 조 부장은 모두 언론인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편집국장을 지냈다.
조세형씨는 나와 동시에 10대 국회에 서울에서 시작하여 국회의원을 여러 번 했고, DJ당의 총재권한대행으로 TV의 각광을 많이 받았으며 주일대사가 되었다. 또 60대 말에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집안에서 설립한 고향교회의 3대 장로가 된 것을 자랑하였다.
조용중씨는 경향신문 전무, 연합통신 사장, 고려대학 석좌교수를 지냈다. 모두가 화려하다.
둘 다 수난도 비슷하다. 조세형씨는 10대 국회에 진출한 후 전두환정권의 이른바 정치정화에 걸려 고생을 했으며, 조용중씨도 같은 전 정권의 해직기자로 수난을 당했다.
이 언론계, 특히 정치부기자사회의 양 거두를 말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둘이 모두 조선일보의 정치부기자로 있던 자유당정권시절에 조세형씨는 민주당의 신파(장면박사파)를 담당하고, 조용중씨는 민주당의 구파(조병옥박사파)를 맡은 것이 운명적이었던 것 같다는 이야기다. 당시 자유당 정권 때이지만 자유당출입기자는 맥을 못 추었고, 민주당출입기자들이 지면을 좌지우지했다. 각 사에 신파출입, 구파출입이 따로 있고, 말하자면 전문화되다시피 하였다.
출입을 하다 보면 출입처와 출입기자가 얼마간 닮아가는 것 같다. 조세형씨는 정치에 입문하면서 이철승ㆍ김대중씨라는 신파의 라인을 계속 걸었다. 조용중씨는 정치입문을 안 했지만 어느 쪽이냐 하면 신파의 계보 쪽에 비판적인 성향인 것 같다. 조세형씨는 전북출신이고, 조용중씨는 충남출신이라는 고향의 제1차 집단적 인연이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면 그들에 대한 실례가 될 것 같다. 그리고 보면 나는 제2공화국 때 혁신정당들을 맡았었는데 나도 혁신정당에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영향을 받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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