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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소설 - ‘창랑지수‘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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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소설 - ‘창랑지수‘ <65>

국가 프로젝트

***65. 국가 프로젝트**

허소만이 북경에서 전화로 국가 프로젝트를 빨리 신청하라고 재촉했다. 원래는 작년에 신청하려고 했었는데 이미 신청자가 너무 많으니 일년 뒤로 미루라고 해서 미루어 왔던 것이다.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여전히 그 주제로 해도 되는 거야?”

그녀는 주제의 선정은 좋다고 하면서, 그 과제를 논증할 때의 요점까지 알려주었다. 생각해 보니, 이미 내가 이루어 놓은 성과물이 십여 편의 논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체적인 틀은 이미 세워져 있으므로, 그것들을 다시 체계화하고 거기다가 박사학위 논문만 덧붙인다면 과제는 완성될 것이다. 나는 신청서 양식을 받아서 써넣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책상에 한참 앉아 있었으나 뭔가 기분이 찜찜해서 펜을 들고 쓸 수가 없었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논증은 역시 아주 치밀했다. 그래서 다시 펜을 들고 쓰려고 하는데 여전히 뭔가가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애써 서두(序頭)를 써 내려갔으나 글이 매끄럽지 못했다.

나는 속이 타서 동류에게 차를 좀 갖다 달라고 했다. 아내는 군산모첨(群山毛尖) 차를 내왔다. 나는 뜨거운 찻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한 입 마셨다. 조금 떨떠름하면서도 맑은 향기가 목구멍을 타고 죽 내려가니 한 줄기 따뜻한 기운이 전신에 퍼져서 신경 말초까지 전해지면서 팔다리까지 느슨해졌다. 다시 한 입 더 마시자 그 약간 떫은 감각이 나의 마음속의 어떤 잠재의식을 일깨우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도 몰래 힘껏 책상을 내리치자 찻잔의 물이 흘러 넘쳤다. 내가 어쩌다 마 청장님을 깜빡 잊고 있었지? 마 청장님의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까 하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 왔으나 그 기회를 찾지 못했던 숙제인데, 이야말로 그럴 좋은 기회가 아닌가? 은혜를 입고도 보답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지(知恩不報非君子也). 박사지도 교수가 되는 게 마 청장님의 오랜 숙원인데, 국가 프로젝트를 완성한다면 마 청장님의 연구업적 평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 청장님의 문제를 해결해 드리는 것은 바로 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나는 앞부분을 채워 넣었던 신청서를 구겨서 갈기갈기 찢은 다음 그걸 변기통에 던져 넣고 물을 쏟아 흘려보냈다. 일종의 죄지은 흔적을 없애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조금 서운했다. 내가 그처럼 오랫동안 연구해 왔던 일인데 나의 이름이 뒤쪽에 겨우 걸리다니…. 조금은 아깝기도 했으나 머뭇거린 것은 잠시, 곧바로 결심을 굳혔다.

결심은 굳혔으나 어떻게 얘기를 꺼내 성사시켜야 할지 한참 주저했다. 큰 인물들일수록 자존심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한 마디 말만 잘못해도, 그 말 속에 약간의 암시만 들어 있어도, 그것이 큰 실책으로 되어서 일이 틀어져버리고 말기도 한다.

문득 저번에 수박 살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종종 들리는 과일 노점상의 수박이 영 맘에 들지 않던 차에 옆 노점상에서 파는 ‘신농1호’(新農 1號)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 수박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수박을 사고 나니 이미 제법 익숙한 단골 과일장수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걷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면서 과일장수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주머니도 다음엔 꼭 이‘신농 1호’를 갖다 놓으세요. 이 수박이 품질이 훨씬 좋아서 더 빨리 팔리겠어요.”
막 말을 끝내자 그 아주머니의 남편이 차 뒤쪽에서 펄쩍 뛰어 오르면서 말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 수박이 뭐가 모자라오? 내 수박이 어디가 남의 수박보다 못하다고 말이야. 왜 이래! 내가 오늘 벌써 수백 근 어치를 팔았어. 당신이 수박 볼 줄이나 알아?”

수레 뒤쪽에 주인아저씨가 앉아 있을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나는 깜짝 놀라서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지으며 자리를 피했다. 평소에는 나한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던 주인아저씨였는데, 어떻게 저렇게 순식간에 얼굴을 바꿀 수가 있는 것인지!

너는 호의였다고 하지만 꼭 그 호의에 상응하는 보답을 얻는다는 법은 없다. 수박 장수도 공연히 건드리면 안 되는데 하물며 저 어르신들이야! 물건만 좋으면 그냥 갖다 안기기만 하면 되는 줄 생각하지 말라. 선물을 보내는 데에도 다 기술이 필요하다. 어르신으로 하여금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 말을 어떻게 마 청장님께 꺼내야 하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아직까지 마누라 자식 문제로도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써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랫사람은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보다도, 아니 그 윗사람이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세심하게 윗사람을 배려해야 한다.

나와 동류는 일파를 데리고 마 청장님 댁으로 갔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나는 일파더러 묘묘랑 놀라느니 하는 소리를 싹 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마 청장님, 제가 지금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충고 좀 해주십시오.”

“업무상의 문제인가, 개인적인 문제인가? 개인적인 문제라면 동류가 해결해주면 되지.”

“업무상의 문제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마 청장님을 떠보듯 말을 시작했다.

“저희 성 중의학계에서 지난 삼사년간 국가 프로젝트를 신청했다가 모두 물먹지 않았습니까? 중의학원에 그 많은 교수님들도 해내지 못한 일이라 저는 꿈도 꿔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뭐라고 그걸 꿈꾸겠습니까. 그런데 위생부 과학기술사에서 처장으로 있는 동창이 며칠 전에 전화를 걸어와서는 주제를 하나 골라서 프로젝트를 신청하라는 겁니다. 자기가 좀 도와줄 수 있다면서요. 제 생각엔 제가 해놓은 성과라고는 논문 몇 편에 저서도 한 권 없는데, 이걸 들고 전국에서 온 사람들과 경쟁을 하려니 게임이 되겠습니까? 한 번 시도해볼까 생각하다가도 가망성이 너무 미약한 것 같고, 또 그렇다고 시도도 안 하자니 그건 괜히 아깝고 말입니다. 만약 운이 좋아서 대박이라도 터지면….”

그가 말했다.

“자네 그 동창이라는 사람은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

“그 친구 말로는 자기가 노 교수분 몇 명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허풍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요.”

“만약 신청한다면 어떤 주제로 신청할 건가?”

나는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아직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머리 속에 떠오른 주제들이 너무 약해서요.”

“만약 그 프로젝트를 따낸다면 우리 위생청의 연구 분야도 더불어 그 급이 올라가게 되네. 중의학원의 그 늙은이들도 우리를 다시 볼 테고…. 침만 꿀꺽 꿀꺽 삼키겠지.”

말을 돌리고 돌려도 도대체 화제가 핵심 포인트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먼저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너무 티가 날 테니까. 마 청장님이 먼저 입을 열도록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또 주제 선정으로 화제를 돌렸다. 동류가 사전에 준비한 대로 사모님과 이야기하던 중간에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끼어들었다.

“당신, 마 청장님께 주제 좀 골라 달라고 해요. 당신이 무슨 수로 그걸 혼자 골라?”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사모님과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나는 마 청장님의 표정을 살폈지만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 속에 돌덩어리가 하나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청장님, 청장님과 저야 연구방향도 비슷하고, 청장님께서 아무래도 경험이 있으시니까….”

우리는 다시 토론을 시작했다. 그의 아이디어가 내가 이미 정해놓은 방향에 가까워질 때면 나는“좋습니다, 좋아요.”를 연발했고, 그 결과 주제가 점점 더 명확해졌다. 내가 말했다.

“청장님, 청장님의 이 주제라면 정말 가망이 충분히 있겠는데요. 청장님도 하나 신청하시지요. 저야 신청하든 안 하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저는 안 될 텐데요 뭐. 그저 우리 위생청 안에서 하나 따내서 중의학원의 그 노인네들 열이나 받게 하면 좋겠습니다. 중의학원의 방(方) 군과 이야기할 때마다 그 인간이 맨날 자기네 누구누구를 들먹이면서 저희를 깎아내리는데, 저는 화가 나서 도저히 못 참을 지경입니다.”

“나도 사실은 하나 신청하고 싶긴 했지. 우리 위생청도 매년 신청은 하는데 지난 몇 년간은 다 물먹지 않았나! 나도 조급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말이야. 그렇지만 위생청엔 내가 해결해야 할 일들이 언제나 산더미 같이 쌓여 있어서 도무지 쉴 수가 없어.”

동류가 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말했다.

“마 청장님께서 직접 신청하시면 희망이 있겠네요.”

내가 말했다.

“그럼 저는 신청 않겠습니다. 역량을 분산시켜서야 안 되지요. 모택동 주석도 말했잖습니까. 손가락 열 개를 상하게 하는 것보다는 그 중에 하나를 부러뜨리는 편이 낫다고요. 이게 다 전략상의 문제 아닙니까.”

동류가 말했다.

“여보, 당신도 이번 기회에 마 청장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 수 가르쳐달라고 부탁드려요.”

마 청장이 말했다.

“새끼줄 꼬듯이 우리도 힘을 합쳐야 희망도 생기고 일도 빨리 해결되지 않겠나?”

나는 연달아 허벅지를 치면서 말했다.

“만약 마 청장님만 받아주신다면 저야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지만요, 청장님께서 이 정도로 저를 높게 봐주시다니 정말이지 황송합니다. 그런데 프로젝트 하나를 두 사람이 함께 신청해도 되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 문제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내가 합동으로 신청하는 문제를 미리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암시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마 청장님이 말했다.

“괜찮을 걸세.”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우리는 또 주제의 논증에 대해 자세히 토론하고 내가 논증 보고서의 초안을 작성한 후 다시 토론과 수정을 거치기로 결정했다. 내가 말했다.

“프로젝트만 따내면 수만 위안이 떨어지겠지요?”

“그깟 수만 위안이야 어딘들 없겠나! 벌레만한 돈이지. 그보다 값진 것은 바로 국가급 프로젝트라는 그 간판이지. 연구결과만 나온다면 좋은 출판사를 구하는 것도 아무 문제 없네.”

“혹시 국가 프로젝트는 못 따더라도 반드시 결과물을 만들어서 성 과학기술출판사에 내달라고 부탁해 보지요.”
“안 썼으면 안 썼지, 이왕 쓰는 거면 중국 과학기술출판사나 최소한 인민위생출판사 쯤에선 내야지 지방 출판사는 너무 약하지. 만약 정말 일만 성사되면 자네도 내년에 파격적이겠지만 정교수를 신청할 수 있을 거고, 그러면 나중에 박사양성 자격 얻을 때도 유리해질 거야. 만약 우리가 박사양성 자격을 얻게 되면 그땐 자네도 지도교수가 되는 거지. 이게 자네의 장래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 줄 아나? 요즘같이 간부들도 지식화를 강조하는 시대엔 업무지식에서 내공이 딸리면 어떤 자리에 앉아 있어도 힘이 안 실리거든. 영 불안하지.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청급 간부들이 다들 박사학위를 따겠다고 나서는 것 아닌가?”

“제가 작년에 다른 사람보다 한 발자국 빨리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마 청장님이 저를 배려해주신 덕분입니다.”

사모님이 말했다.

“이 양반은 대위씨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생각한다니까.”

내가 말했다.

“저도 마음 속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이 초목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그걸 못 느끼고 못 알아차리겠습니까?”

동류도 말했다.

“이이도 맨날 집에서는 마 청장님, 마 청장님, 그러면서 여기만 오면 아무 소리도 안 하는 거 있지요. 하여튼 성격 하고는….”

집에 오는 길에 동류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오늘 마 청장님께서 알아차리시지 못했겠죠?”

“그분이 얼마나 예리하신데, 벌써 알아차리셨을 거야.”

“그럼 어떻게 해요?”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다들 연극인 줄 뻔히 알고 하는 거지. 그리고 마음으론 서로 다 알고 있지만, 이런 연기도 다 필요한 거야. 이런 말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다고 생각해봐, 그런 말을 어떻게 하겠어? 이게 다 그 어른을 위하는 게 된다면, 어떻게 연기를 하건 간에 그 어른도 별다른 의견 없을 거야. 사람들은 결과만 보거든.”

신청 자료를 보내고 나는 작업에 착수했다. 마 청장님이 말씀하셨다.

“시간을 다퉈 일하세. 나중에 정말로 프로젝트가 떨어졌을 때 우리 쪽엔 이미 작업이 다 끝나 있을 정도로 말이야.”

그러면서 마 청장님은 원진해에게 내가 다음날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내버려 두고 연구소의 모든 기구 설비를 다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라고 분부했다. 위생청에서도 삼만 위안의 경비가 지급되었고 마 청장이 데리고 계신 학생 두 명도 나를 돕도록 했다. 그리고 당신도 상당히 몰입되어 저녁이면 모든 업무를 팽개치고 나와 실험실에 틀어 박혀 있고 주말엔 특히 하루 종일 연구에 몰두했다. 위생청 사람들은 마 청장님과 내가 중대한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것을 보고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내 발 아래 땅이 세 자는 높아진 것 같았다.

국가 프로젝트로 승인이 떨어졌을 때엔 마 청장님조차 얼굴 가득 기쁜 표정을 감추시지 않고 나한테 일을 더 서두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박사양성기관 지정 평가 전에 프로젝트를 완성해서 책까지 나와야 한다고 독촉했다. 나는 글을 쓰는 대로 위생청의 인쇄실로 가서 입력을 하고 교정 작업은 학생들에게 맡겼다.

마 청장님이 말씀하셨다.

“중국 과학기술출판사와 이미 연락해 두었네. 국가급 프로젝트여서 당연히 아무 문제 없어. 위생청에서 돈만 좀 대주면 말이야.”

내가 말했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마 청장님께 여쭙고 싶은데, 업무에 방해가 되진 않을는지요.”

“이게 바로 업무 아닌가? 위생청이 발전을 해야지. 발전이야말로 무엇보다도 확고한 원칙이며 또 우리 업무의 가장 중요한 부분 아니겠나? 이젠 성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게 아니라 전국을 무대로 경쟁을 해야지. 나는 오래 전부터 내 업무의 기준을 전국 무대에 두고 있었다네.”

몇 달 동안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일을 했고, 한 단락 한 단락 쓰는 대로 마 청장님께 검토, 수정을 받았다. 모든 작업을 마치던 그날 나는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손 안에 쥐고 있던 펜을 창 밖으로, 마치 어렸을 적에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듯 아주 우아한 폼으로 휙 하고 던져버렸다. 컴퓨터로 편집한 원고는 금세 출력되었고, 두툼한 종이묶음을 손에 받아드는 순간 눈과 마음에 희열이 느껴졌다. 몇 번을 보고 또 보아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거기 쓰여 있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다 내 펜으로 쓴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 청장님은 퇴휴직 반의 채(蔡)군에게 원고와 시디(CD:光盤)를 들고 북경에 다녀오도록 출장을 보냈다. 그런데 채 군이 돌아오더니 말했다. 출판사 편집부의 고(高) 주임이란 사람이 빨라야 반 년 뒤에나 나올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내가 말했다.

“반년이면 늦을 텐데요.”

마 청장님이 말씀하셨다.

“그 인간이 우리한테 숙제를 내주는 거지.”

그리고는 재정처에 연락해서 북경의 출판사로 이만 위안의 초과수당을 부치도록 시켰고, 그 쪽에선 그제서야 두 달 안에 책을 출판해 주겠다고 응답했다.

위생청에서는 일찌감치 모든 계획이 다 짜여져 있었다. 중의연구원에서 앞장서서 전국의 지명도 높은 전문가들을 초대해서 격조 높은 학술토론회를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초대받은 전문가 중에는 박사 양성기관 지정 평가위원이 몇몇 섞여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워낙 청탁도 많이 받고 여기저기서 초대도 많이 들어오는지라, 그 사람들을 초대하기 위해선 비행기 표만 달랑 부치는 것으로는 어림없고 각 부문의 인간관계까지 다 동원해야만 했다. 심지어 그 중에는 비행기표 및 전체 비용, 게다가 부인 동반까지 약속해도 초대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 청장님이 말씀하셨다.

“끝까지 비싸게 굴면 나중에 한 명 한 명 직접 찾아가서 천천히 작업하는 수밖에….”

재작년에 박사 양성기관 지정을 신청하기 위해서 위생청에서 마련해 놓은 육만 위안이라는 특별기금이 마 청장님이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스무 날이 넘도록 전국 방방곡곡의 평가위원들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다 보니 절반으로 줄어버렸는데, 그래도 일이 성사되지 않자 올해엔 사십만 위안을 추가했다. 뜻이 있는 자에게 길이 있나니…. 이번 회의를 위해서만 이십일만 위안의 예산이 별도로 책정되었는데, 주로 기금에서 지출되었다.
동류가 말했다.

“당신들 돈 쓰는 것 보니 나는 이야기만 들어도 뒤로 나자빠질 것 같아요. 우리는 주사 한 방 놓을 때마다 일 위안, 이 위안씩 받는데, 평생 주사만 놓아도 당신네들 사흘 동안 쓰는 돈을 못 당하겠네요.”

내가 말했다.

“누구와 누구를 비교하는 거야? 당신들이 평생 일하는 것은 우리가 사흘간 회의를 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야. 사람이라고 어디 다 같은 사람인 줄 알아?"

말이 학술회의지 사실 학술적 교류보다 인간관계 정립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 마련이다. 이 정도 격조의 학술회의는 사실 큰 인물의 이해가 얽히지 않고서는 절대로 열릴 수가 없는 것이다.

동류가 말했다.

“정말이지 우리 같은 간호사들 생각하면 울화가 터지네. 간호사들이 돈을 어떻게 버는 줄 알아요? 그게 다 피땀 흘려가면서 바늘로 흙을 고르듯 해서 번 돈이라고요(血汗錢, 針挑土).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정말이지 물 쓰듯 돈을 쓰네요. 돈을 버는 방식과 돈을 쓰는 방식에 차이가 나도 너무 크게 나요.”

돈 생각을 하면, 정말이지 보는 사람이 가슴 떨릴 정도로 쓰고 있었다. 그렇지만 피라미드 저 꼭대기에 있는 사람과 저 밑바닥에 위치한 사람을 비교할 수는 없는 법! 바닥에 있는 사람 수십 수백 명이 모여도 저 꼭대기의 그 한 명을 당할 수는 없다.

내가 말했다.

“당신들의 근면한 작업태도가 혁명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물론 인정해야지. 그럼, 누가 뭐래도 봉사와 헌신의 정신은 긍정하고 제창할 가치가 있으니까. 평범한 자리에서 비범한 성과를 거둬내는 그런 성과에 대해 조직 차원에서도 다 생각하는 게 있어.”

동류가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저런 밀짚모자나 씌워주면서 근면, 봉사, 헌신 같은 소리나 떠들고 실속은 자기네가 다 챙기고!”

“세상은 다 그런 거야. 불만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은 자기도 그 자리까지 올라가고, 불만과 성깔만 있는 사람은 하늘에다 대고 억울하다고 울부짖고, 불만은 있으나 능력도 없고 성깔도 없는 사람은 그저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거지 뭐. 제일 좋은 것은 아예 정신장애로 사리분별을 못하게 돼서 불만 자체가 없어지는 거야.”

“사람들이 원칙은 지켜야 할 것 아니에요!”

“이봐, 동류! 내 말 좀 들어봐. 원칙은 사람들이 정하는 것이고, 원칙을 어떻게 정하느냐도 다 어르신들이 당신들 필요한 대로 정하는 거라고. 이런 게임의 규칙도 다 그 어르신들이 설계한 것이지. 하지만 만약 당신 같은 사람들더러 원칙을 정하라고 한다면 되는 일이 없을 걸? 그래서 당신들한테는 말할 기회조차 안 주어지는 거야. 속으로 생각하는 것까지야 괜찮지만 말을 해선 안 되는 거야. 말을 꺼내는 사람이 있으면 다 그 사람 잘못이 되는 거야. 그런 식의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보면 알지. 그래서 당신도 너무 냉혹하다고 불평하지 마. 이게 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누군들 이렇게 되기를 원했겠어?”"

“누구는 금으로 된 모자를 이고 다니면서….”

“그까짓 금. 금 일 그램에 얼마나 되는데? 돈 주고 금으로 된 모자를 산들 그걸 어떻게 머리 위에 쓰나? 당신은 아직 생각하는 게 시골 할아버지들 수준이야. 황제가 땅을 판다고 생각해봐. 아마 그때도 금으로 된 삽을 사용할 걸?"

동류의 말은 나의 평민의식을 일깨웠다. 자원을 쥐고 있는 사람은 무릇 손 안의 그것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생각해봐야 하는 법인데…. 이게 다 주사 한 대 한 대 놓아서 번 돈 아닌가! 부조리한 세계, 아마 앞으로도 계속 부조리한 채로 가겠지. 그렇지만 부조리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부조리를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북경에서 출판되는 책을 이번 회의에 맞추기 위해 마 청장님은 회의일정을 열흘 후로 변경했고, 이렇게 일정이 늦춰지자 많은 사람들은 며칠 더 바빠지게 되었다. 회의 시작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책이 아직 북경 교외의 인쇄소에 묶여 있자 마 청장님은 매우 조급해지셨다.

내가 말했다.

“시간에 못 대면 할 수 없지요. 나중에 부쳐드리더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게다가 그분들이 꼭 본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그가 말했다.

“회의석상에서 꺼내 보이는 편이 그래도 효과가 낫지. 프로젝트도 사실 다 그분들 보여드리려고 한 것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야 보든 말든 그건 부차적인 문제지.”

나는 채(蔡) 군을 시켜 일만 위안의 특근수당을 들고 인쇄소로 가서 기다리도록 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회의가 열리기 전에 책 서른 권을 갖고 돌아오라고 했다. 회의 바로 전 날 채 군으로부터 책을 손에 넣었다고 전화가 왔다.

내가 말했다.

“비행기 타고 돌아오도록 해. 빠를수록 좋아.”

그는 내게 인쇄소에서 공항까지 택시비가 일백 위안도 넘게 나오는데, 그 돈을 부담해줄지 물었다.

내가 말했다.

“내가 빠를수록 좋다고 했지? 중국말 못 알아들어?”

회의는 아예 수원호텔 한 층을 전세 내어 치렀고, 공항과 기차역까지 가서 손님들을 마중하도록 차도 두 대 준비했다. 그 몇 명 평가위원들의 숙식비를 안 받기로 했기 때문에, 아예 다른 대표들의 숙식비도 다 우리 측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기뻐서 환호성을 질렀다. 몇몇 지위 높은 어르신들은 어디를 가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는, 사진기를 든 젊은 참가자들과 왼쪽에서 한 장 오른쪽에서 한 장 기념사진들을 찍기에 바빴다. 이런 사진들은 다 나중에 남들과 관계를 트는 데 실마리로 쓰일 것이다. 회의를 주관하는 업무만 안 맡았다면 사실 나는 여기에 아예 끼어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마 청장님의 사려 깊은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 청장님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딜 감히 올라가서 연설할 기회가 주어지겠는가? 남한테 무슨 인상이라도 남길 기회가 주어지겠는가?

사흘째에는 이분들을 모시고 사주(沙州)로 놀러갔다. 한 어르신이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듯 신발을 벗고 물로 들어가셨다. 그런데 이를 본 광서(廣西)에서 온 한 참가자가 얼른 따라 들어가서는 어르신을 위해 길잡이에 나섰다. 허리를 굽혀서 두 손으로 물을 퍼 대면서 “이쪽, 이쪽이 평평합니다. 이쪽, 이쪽, 이쪽도 평평합니다.”고 했다. 그런데 호텔로 돌아와서 주머니를 살피다가 지갑을 물에 빠뜨린 것을 발견했다. 그 안에 있던 비행기표, 신분증까지 다 잃어버리고는 식탁에서 두 손으로 온 몸을 마구 더듬는 모습을 보며 모두들 배가 아플 정도로 웃어댔다.

회의는 삼일 간 계속됐다. 나흘째 되는 날에는 참가자들을 모아서 감산(鑒山)으로 놀러갔다. 네 시간 정도 되는 거리를 마 청장님도 함께 가셨다.

가는 길에 한 어르신이 말했다.

“마 청장! 보아하니 자네 그거 내년에는 희망이 있겠어.”

마 청장님이 말씀하셨다.

“그저 어르신만 믿겠습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않았다. 너무 사정을 빤하게 뒤집어 보이는 것도 좋을 게 뭐 있겠는가. 사흘 후 감산에서 돌아와서는 회의를 마감했다. 몇몇 평가위원들은 이틀 정도 더 남아서 중의학원과 연구원에서 강의를 하셨다. 매 번 강의를 마칠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편지봉투를 드렸다. 한두 명은 편지봉투를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되나?”

내가 말했다.

“요즘 같은 지식경제의 시대에는 지식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주어야 합니다. 지식의 가치를 어디 금전으로 환산할 수나 있겠습니까?”

나중에는 너무 많아서 받기 곤란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들 마음속으로 이해하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님들을 배웅하고 나서야 한 숨 쉴 수 있었다. 결산을 해보니 아직도 수천 위안이 남아 있었다. 회의 여는 데 대략 반 정도 썼고, 강연료로 반 정도 쓴 것 같았다. 마 청장님의 계획은 그 핵심인물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더 많은 신세를 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신세를 많이 질수록, 너무 많이 져서 어찌할 수가 없고 가책마저 느낄 정도가 되어야 그분들을 잡아둘 수가 있고, 나중에 다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세심한 절차를 통해 마 청장의 계획은 충분히 실현되었다. 회의는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다.

자세히 볼수록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음을 알았다. 한 종류는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다 얻는 인간들이다. 이런 인간들은 털 하나 까딱 않고도 크고 작은 온갖 보살핌을 다 받는다. 또 한 종류는 원하는 것을 하나도 못 얻는 인간들이다. 그런 인간들은 마땅히 손발 둘 곳도 없기 마련이다. 세계는 사실 설계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설계한 것이다. 열 받고 승복 못하겠다면 하늘을 향해 돌이라도 던져보라지!

(이상 제 2권)

***<‘창랑지수’ 전3권이 비봉출판사에서 출간돼 현재 서점에서 시판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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