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궁여지책**
유약진이 전화를 해서 새 집으로 이사를 했으니 호일병과 같이 놀러 오라고 했다. 새 집에 가보고서야 그가 결혼했다는 것을 알았다.
“며칠 전만 해도 연애 중이라더니, 이제 결혼했구나!”
호일병이 물었다.
“사는 재미가 어때?”
새 신부 능약운(凌若雲)이 차를 들고 들어왔다. 수줍어서 붉어진 얼굴을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일병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밤에 이 녀석이 철학 얘기 꺼내면 이불 들고 손님방 가서 주무세요. 어떻게 나오는지 보게.”
유약진은 우리에게 결혼기념 사탕을 권했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사탕으로 때우려고?”
“학교에서는 다들 이렇게 해. 식도 안 올렸는걸.”
호일병이 말했다.
“이렇게 아리따운 신부랑 떨어져 지낼 수 있겠어?”
유약진이 말했다.
“학교에서는 이 사람을 우리 과 행정사무원으로 써주겠다는데 이 사람이 싫대. 외국 합자기업에 들어가고 싶어해. 그런데 전공도 그래서 갈 만한 데가 있을까?”
신부가 말했다.
“호 선생님 생각엔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호일병이 눈을 감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 문제는 누구의 입장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지요. 유약진의 입장에선 그냥 과 사무실에서 일하는 게 좋겠죠.”
유약진이 말했다.
“됐네, 됐어.”
신부도 입을 다물었다.
호일병은 자기 사업 얘기가 나오자 흥분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들어보니 대충 감이 잡혔다. 산미(汕尾) 쪽과 관계된 사업이라는데, 아무래도 필름이나 담배를 밀수하는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잡혀가지나 말아. 나는 아직 자네의 그 삼만 위안 약속에 희망을 걸고 있어.”
그가 말했다.
“그런 일 없을 거야. 내가 직접 바다 위에서 물건을 받아오는걸. 삼만 위안은 언제든지 말만 해. 자네가 흡혈충 예방 부서한테 연락해 놓으면 내가 당장 약 사 들고 기자들 끌고 가지. 그게 바로 이미지 광고 아닌가.”
유약진이 말했다.
“역시 사업하는 사람은 달라. 헛돈 쓰는 법이 없다니까.”
호일병이 말했다.
“아직은 사업가란 소리를 듣기엔 얼굴이 좀 화끈거리지만, 앞으로 한 삼년 내지 오년만 지나면 성장(省長)도 나를 기업가라고 부를 걸세. 자네들 안 믿어지나? 지금이야 원시축적 단계라서 어쩔 수 없고. 이 축적 기간이 지나면 말이야, 자네는 아무리 똑똑해도 다른 사람 아래에서 일하지? 난 그때 가선 떳떳치 못한 일은 안 할 거야. 떳떳이 벌어서 떳떳한 기업가가 될 거라고.”
나는 그가 시꺼먼 물건을 상 위에 올려놓는 것을 보고 말했다.
“이거 생긴 게 전화 같은데?”
“전화 맞아. 이동하면서 걸 수 있는 거지. 다꺼다(大哥大:휴대폰)라고 하는 거야.”
“다꺼다? 이렇게 좋은 물건이 이름은 왜 무슨 닭 울음소리 같고(휴대폰을 중국에서는 大哥大라고 하는데 그 발음이“다꺼다”여서 한 말임--역자), 생긴 건 꼭 벽돌 잘라놓은 것 같냐?”
“이 집에 전화가 없어서 참 안타깝네. 아니면 내가 한 번 걸어서 전화벨 소리 울리는 것 보여주는 건데.”
나는 그 벽돌 잘라놓은 것 같이 생긴 까만 물건을 만지면서 말했다.
“세상에 이렇게 신기한 물건도 다 있네.”
“새 모델도 나왔어. 크기가 이거 한 반 만한데 한 대에 만 위안이 넘어. 전화국 진열관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지.”
나는 호일병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다. 어차피 저 인간도 뭐 대단한 일 하는 것도 아닌데 말 못할 것 없지. 새 신부가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허구의 총이 생각났다. 검은 색 총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관자놀이에 갖다 대었다가 다시 스르르 내려놓았다. 얼굴에는 웃음을 띠었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아직도 체면 차리는 거냐? 차릴 체면이 아직도 있는 거야? 아들의 이름을 걸고 넌 죽어야 해!”
나는 호일병에게 담배를 한 대 권했다. 유약진도 따라 담배를 피웠다. 담배 연기 속에서 대충 분위기가 조성된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게 벌써 얼마나 오래된 우정인가! 거의 형제라고 할 수 있을 정도지. 그래서 오늘 한 번 터놓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 해보자.”
호일병이 말했다.
“그래!”
내가 말했다.
“속 시원하게 하려는 얘기가 뭐냐 하면 말이야. 사실은 내가 요즘 이 생각만 하면 눈도 못 감고, 잠도 못 자고, 도저히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이 풀리지를 않아서, 창칼로 심장을 계속 찔러 피가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 같아.”
호일병이 농담하던 표정을 거두고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자네? 자네 일인가?”
그 말투에서 나는 그가 진정한 친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말했다.
“우리 일파 화상 입었을 때에도 보러 온 사람은 너희 둘 밖에 없었어. 그 점만 보아도 나는 자네들은 터놓고 마음속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하네. 사람 한평생 그런 친구가 몇 명이나 있을까? 가끔은 집사람한테도 반쯤만 이야기하고 나머지 반은 숨겨야 하는데 말이야. 자네들은 꽃바구니도 보내주었지. 사실은 말이야. 자네들 왔을 때 벌써 놓여 있던 꽃바구니 두 개, 그거 다른 사람이 보낸 게 아니라 사실은 내가 체면 살리려고 사다 놓은 거야. 추하지? 옆방에 있던 꼬마 여자 애는 맹장수술 받는데도 사람들이 보내온 꽃바구니가 방안 가득, 그것도 모자라 침대 밑에까지 쌓아두었더군. 세상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사람을 보는지 뼈저리게 깨달았지. 별 수 없지 뭐. 그런데 말이야. 별 수 없으면 어떻게 하지? 내 인생 그냥 이렇게 끝내? 두 번 사는 인생도 아닌데? 그러니까, 세상이 그러니까, 나도 따르는 수밖에. 방송에서는 매일같이 착한 사람이 팔자 편한 거라고 노래를 해대지만, 내가 보기에는 착한 사람 팔자가 어떻게 편할 수가 있어? 무슨 근거로 편안할 수가 있겠느냐고? 자기 위, 아래, 왼쪽, 오른쪽, 앞, 뒤, 물 한 방울 안 새게 철저하게 계획하고 따지는 인간들만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거지! 원칙을 따르지 않는 세상에서 원리원칙 따지려 들었던 나만 병신이었던 거야.”
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돼지 같이 우둔한 놈.”
호일병이 말했다.
“세상이 원칙을 따르지 않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원칙이 있는 거지. 신문에선 볼 수 없는 그런 원칙 말이야.”
유약진이 말했다.
“야, 지 대위, 그깟 꽃바구니 몇 개에 그렇게 충격을 받았어?”
내가 말했다.
“그건 일종의 상징에 불과할 뿐, 그 뒤에는 또 줄줄이 사연이 담겨져 있는 거야.”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할 건 없잖아. 자넨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고 있어.”
호일병이 말했다.
“유약진, 자네는 지금 한참 신혼이라서 대위 기분을 몰라. 난 자네 이해하네. 이 세상은 말이야, 선전할 때는 원칙을 따지다가도 일단 실제 작업에 들어가면 이해(利害)만을 따지고, 회의석상에서는 원칙을 따지다가도 회의가 끝나면 역시 이해만을 따지지. 돈 없고 권력 없는 사람은 어딜 가도 입 다물고 있는 수밖에 없고, 원칙을 가장 신나게 떠드는 사람이 때로는 가장 이해를 많이 따지는 사람이야. 왜냐하면, 그야말로 다른 사람보다 현실을 더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이거든. 나도 벌써 그 사실을 알아버렸지. 안 그랬다면 나도 산미(汕尾) 그 동네까지 가진 않았을 거야. 만약 몇 년 전에 누가 나한테 이런 일을 하라고 했으면 나는 아마도 그 사람과 머리 터지게 싸웠을 걸. 지대위, 결국 너도 세상에 의해 개조되는구나. 무슨 노래지? <내가 세상을 바꿨을까, 세상이 나를 바꿨을까>, 뭐 그런 노래도 있잖아.”
그가 목소리를 높여 노래 몇 소절을 불렀다.
“누가 누구를 바꾼다고? 네가 세상을 바꿔? 네가 뭔데. 대위, 생각나나? 자넨 이전에는 돈에 관한 이야기는 입에도 안 담았었어. 그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저 친구 저렇게 정신 못 차려서야 정말 대책 없군.’그렇게 생각했었어. 그런데 결국은 정신 차렸군. 걱정거리가 사라지고 좋은 일만 생길 거야. 탕아의 개심은 금과도 바꿀 수 없다(浪子回頭金不換)고 했어.”
유약진이 말했다.
“일병, 자네가 대위를 부추기고 있군.”
호일병이 입을 삐죽거리더니 손가락으로 유약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직도 수절하는 인간이 한 명 더 남았군. 조만간 너도 정신 차릴 거다. 역사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 있겠어? 그건 숙명이라고, 숙명!”
유약진이 말했다.
“그깟 숙명 난 믿지 않아. 무슨 놈의 저항할 수 없는 대세 운운하는 거야? 포기하는 거야 사람들 각자의 선택이지. 각자가 내리는 선택을 갖고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니까. 하지만 정말로 신념이 굳은 사람은 총알 떨어지고 식량 바닥난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말했다.
“나는 정말로 그 의연함을 지킬 능력이 없네. 더 심각한 것은 그런 의연함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거야. 나 스스로 타락하기를 원하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일병이 저 친구가 아무리 부추긴다 한들 내가 바뀌겠어? 사람이 말 몇 마디로 나빠지고 좋아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사실은 내가 변하지 않으면 내 인생 이대로 끝날 것 같아서 말이야. 요즘 같아선 새파란 젊은 놈들이 과장이 되는데 내가 도대체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나도 더 이상 이 낯짝 쳐들고 체면 차릴 생각 없네. 그렇게 오랜 세월 체면만 차린 결과가 이게 뭔가. 결국엔 더 이상 차릴 체면도 없어졌지 않은가. 이게 다 생활의 변증법이지. 사람들은 내가 과장이냐 처장이냐 하는 것만 보지, 내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보지 않거든. 그놈의 체면 차리면 차릴수록 체면 안 서게 마련이지.”
유약진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대위 자네마저 변하다니…. 이 세상이 정말 달리 보이네.”
나는 내 생각을 그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이 견문도 넓고 하니 어떻게 뚫고 들어갈 아이디어 있으면 내게 좀 알려주게. 어떻게 가까이서 만나 뵐 기회가 생기면 인상에 남을 만한 말 한 두 마디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 어르신 가까이서 만날 기회가 어디 그리 흔한가.”
호일병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텔레비전 출연을 주선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 정도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내가 말했다.
“그 사람이야 맨날 텔레비전에 나오는데 뭐. 중앙방송국이면 모를까. 시시하다고 생각할 거야. 성 방송국에서 하는 거면 집중취재 정도는 되어야….”
호일병이 말했다.
“개인에 대한 집중취재는 성 위원회 선전부의 결재를 받아야 하는데, 전 성에 청장만 수백 명이라 쉽지 않을 거야. 게다가 자네도 이제 시작인데 처음부터 너무 노골적으로 충심을 드러내는 것도 좀 그렇지. 자연스럽게 그 사람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는 말을 통해서, 그 어른으로 하여금 자신과 자네 사이에 암묵적 동의가 형성되었다고 느끼게 하는 것, 그 정도 수준이어야지.”
그때 테이블 위에 세워 놓았던 호일병의 휴대폰이 울렸다. 호일병이 전화를 받아들었다. 나는 속으로 마 청장님은 저런 휴대폰 갖고 계신지 모르겠네 하고 생각했다. 없다고 하면 내가 호일병더러 좋은 일 한 번 하라고, 새 모델로 하나 어떻게 해달라고 해볼까?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별로 탐탁치 않았다. 마 청장님은 결코 아무것이나 다 움켜잡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거절당하면 그 다음엔 영 난처해질 것이다. 그때 마음속에 갑자기 번쩍 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진열관! 전화국에도 있는데 우리 위생청에는 없으란 법 있나? 위생청의 풍부하고 위대한 공적을 그곳에 진열해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기는 거야! 나는 이 생각을 모두에게 말했다.
유약진이 말했다.
“괜찮을까? 성에 청급 기구가 수백 개가 있는데, 다들 진열관을 하나씩 만든다면 돈은 또 얼마나 들 것이며, 그걸 몇 명이나 가서 보겠어? 그 생각은 정말 블랙 유머일세.”
나는 김이 빠졌다.
그때 호일병이 말했다.
“암묵적 동의를 형성하는 계기로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네. 자네가 블랙 유머라고 하니까 뭐, 사실 좀 그런 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 전혀. 원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생각하는 게 틀려. 좋은 것이라면, 그 대가가 아무리 크더라도, 자기는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자기 생각 누구보다도 깊고 꼼꼼하게 하는 사람들인데다 무슨 일이든 자기 시각에서 생각하니까 불합리한 일들도 합리적으로 보이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전화국의 진열관은 어떻게 생겼겠어?”
내가 말했다.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블랙 유머의 최후의 소재거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어르신들에게도 그런 블랙 유머가 통할 수 있다는 거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야.”
유약진이 말했다.
“대위, 너 정말 그런 비뚤어진 생각대로 할 건가?”
내가 말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다시 한 번.”
점심을 먹고 나와 호일병은 돌아가기로 했다. 유약진이 호일병의 세단을 만지면서 말했다.
“우리 학교 총장도 이런 차를 못 타는데….”
새 신부도 차를 만지면서 관심이 있는 듯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호일병이 말했다.
“방송국에 있을 때 차를 끌고 다니던 게 습관이 돼서 그만두고 차가 없어지니까 사는 맛이 안 나더라고. 사업하는 사람한테는 차가 바로 얼굴인 걸. 얼굴이 없으면 누가 믿어 주겠어?”
차에 올라타고 내가 말했다.
“나, 지대위마저 이렇게 타락할 줄은 몰랐네.”
“너는 뭐 타락하지 말라는 법 있어? 자기가 무슨 역사적인 인물이라도 되는 줄 알아? 일단 시작했으면 망설이지 말고 확실히 해. 안 그러면 첫 발만 내딛고 두 번째 발부터는 못 내디디게 된다고.”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는 그래도 세상 사람들이 다 나 같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나야 어쩔 수 없지만.”
“네가 겪는 문제를 다른 사람들은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해? 요즘은 전국 산천이 다 똑 같은 걸. 붕어빵처럼 똑같아.”
“그렇게 말하니까 더 절망적이다.”
“어떤 희망을 희망이라고 하는 거야? 난 네가 또 그렇게 어정쩡하게 보낸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절망적인 거 같은데.”
나는 힘껏 머리를 치면서 말했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때린 머리가 아팠다. 나는 스스로를 깨우치려고 그랬던 걸까, 벌을 주려고 그랬던 걸까? 나도 모르겠다
반쯤 와서 나는 살 물건이 있다고 하고는 차에서 내려 다른 차를 갈아타고 전화국으로 갔다.
저녁에 안 선생님 댁에 가서 오늘 있었던 일을 다 말씀드렸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내 생각에 반대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그가 말했다.
“좋아, 좋아.”
“좀 황당하지 않아요?”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런데 윗사람들은 자기들만의 사고방식이 있지. 그 사람들은 자기의 공로가 정말 너무 대단하고, 자기의 업적도 정말 너무 탁월하다고 생각하지. 기념비 하나 못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억울한지 몰라.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이 생각할 거라고 생각하지. 누가 거기에 대고 솔직하게, 그게 얼마나 웃기는 생각이냐고 말할 수 있겠어? 역사상의 수많은 웃기는 일들도 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거야. 그런 역사는 현재도 끝나지 않았어”
“언제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요? 우연을 가장해서 의견을 자연스럽게 꺼낼 기회가 있을까요? 참을 수가 없어요.”
“아무래도 집에 찾아가서 하는 게 효과가 제일 좋지. 자연스럽고. 그런데 만약 뭘 진열할 거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건가?”
“거기까진 미처 생각 안 해 봤습니다만, 적어도 예닐곱 가지 파트로 생각해 놔야겠죠?”
“그렇게 많이 준비해서는 안 되네. 그랬다가는 마 청장이 자네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것을 눈치 챌 걸세. 오히려 경계하겠지. 그 아이디어만 전해주면 나머지는 자기가 알아서 설계할 걸세. 자네는 그 아이디어만 전달하게. 말할 때는 별 생각 없는 듯이, 마치 정말로 그럴 필요를 느껴서 말하는 것처럼 하게.”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말하고 보니 마음이 역시 불안하네요. 그 많은 환자들은 배를 움켜잡고 약을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엄청난 돈으로 다른 사람 얼굴에 금칠 할 생각이나 하고 말입니다. 내가 이게 뭡니까!”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했네. 고금을 통틀어 다 이런 식이었네. 그런 역사는 현재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고 말이야.”
저녁에 나는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이야말로 위로 올라가기 위한 첫 단계다. 어렵게 찾아낸 방법, 포기할 수 없다. 내 자존심의 저항을 격파하고 고상함, 긍지도 다 떨쳐버리고, 그 어르신의 생각이 바로 내 생각인 양 믿어야 한다. 이것이 첫 걸음, 첫 단계이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는 일파의 다리를 쓰다듬었다. 종아리의 상처가 만져졌다. 매끈매끈하고, 평평하고, 동그란 동전만한 상처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얼음과 같이 차가운 꼬챙이가 대뇌 아래쪽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 꼬챙이가 어둡고 조밀한 부위를 한 뜸 한 뜸 찔러댔다.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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