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묘책(妙策)을 찾아서**
안 선생 댁에서 돌아온 후 한 잠도 이룰 수가 없었다. 안 선생님의 말이 옳았다. 과정과 상관없이 결과만 묻는다는 것, 나를 책임져주는 사람에게 책임을 다하라는 것, 이런 말들은 듣기에는 ‘젖이 곧 엄마’(奶就是娘)라는 식으로, 내가 살아온 원칙들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젖을 빠는 것도 인간의 생존본능이다. 세상에 자기는 젖 안 먹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생존이 우선이고 생명은 그 다음이다. 아직도 생존 문제에 묶여 있는 주제에 생명을 논한다는 것은 사치다. 성인들이나 하는 선택이다. 나는 한갓 필부에 불과하다. 내게는 욕망이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사욕이 없으면 의연해질 수 있다고? 내가 그 오랜 세월 의연하게 보낸 결과가 뭔가?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렀건만, 내 희생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자 나는 슬프다 못해 절망감을 느꼈다. 나는 어서 시동을 걸고 앞으로 내달려야 한다. 상승의 기회를 획득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이러한 기회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 자신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지, 누가 자신을 책임져 주고, 또 이런 기회가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알고 있다. 공과 사를 칼 같이 나누던 시대는 지나가고, 개인화의 시대 흐름이 권력의 존재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한테 감사해야 할지, 또 누구한테 보답해야 할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입으로야 자신을 키워준 조직, 기구에 감사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게 어느 어르신 덕인지, 어느 어르신께 감사드리고 보답해야 할지 불을 보듯 뻔하게 알고들 있다. 그 이익의 거대함으로 인해 임면권을 가진 사람은 신(神)으로 승격되었다. 그들의 신성함은 손에 쥐고 있는 권력에 의해 결정된 것이건만, 그들은 자기가 남들보다 지혜로워서 그렇게 되었다고 착각들 하고 있다. 주위의 사람들도 부단히 그런 오해를 부추긴다. 위생청 안만 보더라도 자원을 얻기 위해서는 마 청장을 찾는 길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마 청장이 곧 조직이고, 조직이 곧 마 청장인 것이다. 작년 하(賀) 서기가 퇴직한 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자 동류가 자리에서 일어나 출근할 준비를 했다. 그녀는 해 뜨기 전에 나가 해 지고서야 돌아오는 생활을 벌써 몇 년째 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저렇게 살 것이다. 그녀 인생의 몇 분의 몇이 길 위에서 소모될는지…. 이게 다 내가 정소괴만도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뜨고 침대에 누워 묘계(妙計)를, 기습 공격할 방도를 궁리했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은 누군가가 이미 다 했고, 할 수 있는 일도 이미 누군가가 다 해버렸다.
동류는 세수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서 찬 밥을 볶아주었다. 요강을 비우려고 수도실로 갔다. 그러나 이미 소변이 다 얼어 있어서 쏟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들고 와서 뜨거운 물을 좀 부었다. 지린내가 뜨거운 김과 함께 확 올라왔다. 동류가 머리를 빗다 말고 내 쪽을 흘겨보면서 말했다.
“이게 사람 사는 거예요?”
저쪽 건물에는 스팀이 있었지만 우리가 사는 건물에는 스팀이 없었다. 행정과 사람들은 이 건물에 사는 사람들도 추위를 탄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세상의 이익은 이런 식으로 분배되게 마련이다. 별 수 없다. 나는 다시 요강을 들고 수도실로 돌아갔다. 속으로는 생각했다. 사랑을 생각하면 결혼은 할 것이 못 된다고. 결혼 후엔 서로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신비감이나 상상의 공간이 사라지게 되니까 말이다. 한밤중에 화장실이라도 가면, 그 소리 들으면서 오줌발 굵기며 상태까지 상상하는데, 거기에 무슨 시적 감정이 개입할 틈이 있겠는가. 소변을 쏟아버리고 오자 동류가 나를 힐끗 쳐다봤다. 나는 순간 기가 죽어서 나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남자가 이 지경에 이르다니, 차라리 요강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리고 말지.
일파에게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집에서 동류와 자존심 문제로 싸울 수가 없었다. 자존심 싸움을 하려면 우선 밖에 나가서 용맹스럽게 싸워 이기기부터 해야 했다. 바깥의 문제들을 해결하면 집안의 문제는 자연히 평정되는 것이다. 자존심을 세우려면 우선 자존심부터 버렸어야 했다. 뼈도 없는 양 아주 유연한 태도로 그 왜곡된 공간을 파고들어야 했던 것이다. 몇 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이치를 알게 되었다. 인간은 바다 속의 연체동물과 같다. 소라껍질에 기생하다가 세월이 지나면 자기도 소라의 모습으로 크는 것이다.
오전 아홉시 쯤 내가 윤옥아에게 말했다.
“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그러고는 나와서 먼저 옆의 화공청으로 갔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위층 아래층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각종 공고란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래도 아무런 영감을 얻을 수 없었다. 나와서 또 농업청과 교육청을 돌아보았다. 누구라도 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딱히 아는 사람도 없었다. 길 건너편에 있는 공안청에도 들어가려고 했지만 입구에 두 명의 경찰이 서 있었다. 보아하니 평상복 차림의 사람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고, 또 아무도 그 사람들을 잡거나 무슨 일로 왔는지 묻지 않기에 나도 길을 건너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막상 입구 앞에 서자 마음이 소심해져서 경찰관을 곁눈질로 힐끗 보았다. 그러자 그 경찰관이 나를 막고 물었다.
“누구를 찾아 오셨습니까?”
나는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무슨 나쁜 일이라도 저지르러 왔다가 걸린 것 같았다.
“저는…저는 그게….”
다른 경찰관도 다가왔다.
“어디서 일하십니까?”
“그냥 한번 보려고요.”
그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어디서 일하시냐고 물었습니다. 못 알아듣습니까?”
내가 신분증을 보여주자 그가 말했다.
“들어가지 말고 그냥 길가에 서서 보십시오.”
나는 몸을 돌려 나오면서 자신을 욕했다.
“도둑놈도 아니면서 뭣 때문에 그렇게 도둑놈 같이 굴었지? 하여튼 못났어. 단번에 속을 다 들여다보이면서 무슨 일을 하겠다고….”
길을 건너서 보니 경찰들이 교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맹세를 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간다. 또 괜히 떨거나 하면 나는 아주 형편없는 놈이라는 게 증명되는 거야. 그럼 그날로 내 인생 그냥 포기하고 집에 들어앉아 일파나 키워야지. 나중에 일파 덕이나 보게.”
누가 나에게 총을 겨누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보다 더한 어떤 긴장감을 느꼈다. 나는 다시 길을 건넜다.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옆으로 돌아서면서 나는 승리를 경축하기 위해 두 팔을 들어 브이 자를 만들고, 손가락으로도 브이 자를 그려보았다. 나는 이런 승리감이 다른 상징적 의미를 갖기를 바랐다. 혼자서 중얼거렸다.
“나, 지대위, 우습게 보지 말라고! 나도 가능성이 있어.”
추운 바람을 맞으면서 며칠이나 돌아다녔지만 아무런 영감도 얻지 못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요 몇 년 동안 위생청의 업적은 대단했다. 갑(甲)자 두 개짜리, 세 개짜리 병원들도 각각 그 급에 걸맞은 수준을 갖추었고, 진료소나 입원 병동도 많이 지었다. 마 청장도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건물들은 마치 무슨 기념비마냥 몇 십 년이 지난 후에도 이 모든 것들이 다 마 청장, 마수장(馬垂章) 동지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증명해줄 것이다.
속으로 올 설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새해 인사를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인사까지 가서도 제대로 된 말 한 마디 못한다면, 그것은 소중한 기회만 낭비하는 것 아닌가? 다음 기회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올 해도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 마음이 조급하다 못해 아팠다. 그리고 그나마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이미 다 써먹어 뒤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뚫고 들어갈 틈 하나 남겨놓지 않은 인간들이 이가 갈리도록 미웠다. 별 생각 없을 땐 몰랐는데, 이제 보니 상황이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안 선생님을 찾아갔다. 이층에 이르자 정소괴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른 몸을 돌려 계속 위로 올라갔다.
정소괴가 물었다.
“어이, 누구를 찾아왔나?”
“동류 자네 집에 있나?”
내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을 지어댈 줄이야. 나도 놀랐다. 그가 말했다.
“없는데?”
나는 그와 함께 내려오면서 말했다.
“저녁 먹고 일파랑 나갔는데, 나는 자네 집 강강이한테 놀러 간 줄 알았지. 일파는 그저 강강이랑 놀고 싶어서 안달이거든.”
내 임기응변 실력도 제법 괜찮은 걸. 나도 깜짝 놀랐다. 나한테도 이런 면이 있다니.
“아니, 안 왔어.”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어디 갔지? 날씨도 춥고 이제 곧 어두워지는데 어디 간 거지?”
집 쪽으로 가다가 정소괴가 밖으로 나가는 걸 보고는 몸을 돌려서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 문을 두 번 노크 하고 다시 두 번 노크를 하자 안 선생님께서 문을 열어주셨다. 나는 지난 며칠간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네요. 돋보기를 들여다 대고 봐도 뚫고 들어갈 틈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면 자네한테 이런 저런 대책에 묘책까지 세우라 하겠나? 다른 사람 목 위에 달린 건 호박인 줄 알았어?"
한참 동안 토론했지만 역시 적절한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윤옥아가 남편이 회계과 부처장 자리에 몇 년씩 앉아 있다면서 종종 은근슬쩍 이상한 이야기들을 하곤 하던 사실이 생각났다. 그녀한테 칼끝을 겨누면 어떨까? 생각을 말하려니 안 선생님이 나를 형편없다고 할 것 같아 겁이 났다. 기껏 생각한다는 것이 같은 사무실에 있는 사람부터 팔아넘기려고? 좀 너무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팔지 않으면 어딜 가서 기회를 잡으란 말인가? 급한데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지. 망설였지만 결국 그 생각은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내가 말했다.
“화공청은‘수익경영’, 석탄청은‘안전생산’, 공안청은‘범죄발생률 감소’, 그리고 다들 뭔가 구체적인 지표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역시 숫자 시대라 숫자로 말을 해야 하는데, 위생청의 또 그 많은 지표들을 생각하면 뭔가 새로운 수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정말 안 될 것 같으면 내가 몇 명 쓸어버리기엔 충분한 폭탄 몇 개를 제공할 테니.”
안 선생님까지 그런 생각을 하실 줄이야.
“정말 안 될 것 같으면, 그때 부탁하지요.”
문을 나설 때 그는 문을 살짝 열고 문틈으로 밖을 살펴본 후, 내게 입으로 나가라는 신호를 했다. 잽싸게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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